강정인·김우영. 2014.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 그는 보편적 관용을 주장했는가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
1) 그는

보편적 관용을 주장했는가?*

강 정 인

서강대학교·김

우 영

서강대학교

논/문/요/약

이 글은 볼테르의 관용 사상을 ʻ보편적 관용 사상ʼ이라고 해석한 기존의 국내 연구에 반론
을 제기하고, 그의 사상이 무신론자를 관용하지 않는 ʻ협의ʼ의 보편적 관용 사상임을 밝히고
자 한다. 볼테르의 관용 사상은 당대의 정치·경제적 맥락을 고려한 담론으로서 ʻ세속 질서 준
수ʼ와 ʻ국가 이익ʼ이라는 세속적 가치가 우세하게 드러났는데, 이러한 태도는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며 ʻ광의ʼ의 보편적 관용을 주장한 피에르 베일보다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중시한 ʻ협의
ʼ의 보편적 관용을 주장한 로크의 태도에 가까운 것이었다. 볼테르가 광신의 오류를 꼬집으며

종교적 관용을 주장함과 동시에 무신론자에 대한 배제를 강조한 이유는 종교적 불관용을 불
러오는 ʻ광신ʼ은 죽음이라는 직접적인 사회적 손실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한 사고였지만, 무
신론은 초월적 존재를 부정하는 그 논리로 사회에 존재하는 미덕이라는 가치를 근본적으로
전복시킬 수 있는, 따라서 광신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사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주제어> 볼테르, 종교적 관용, 무신론자, 피에르 베일, 존 로크

* 이 논문은 2011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사회과학연구지원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습니다(NRF-2011-330-B00010).
또한 부분적으로 2012년도 서강대학교 교내연구비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습니다(201210033.01).

원고접수일 : 2014년 1월 12일, 심사일 : 2014년 1월 17일, 게재확정일 : 2014년 2월 11일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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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18세기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인 볼테르(Voltaire)는 프랑스의 팡테옹에 가장 오랫동안 안치되어 있는 인물
로서1) 프랑스의 정치 사상사 속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정치 전반에 관한 생각은
하나의 이론이나 주장으로 수렴되기에는 비체계적이고 광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2) 이에 따라 그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연구는 국내는 물론이고 국외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것이 실정이다. 다만 이성이라는
잣대에 부합하지 않는 현실의 부조리함을 고발하는 계몽사상가로서 볼테르는 당대 종교의 미신적 요소와 광
신(狂信)이 박해를 불러오는 현실을 고발하면서 그의 저술을 통해 일관되게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였고 이 주
제는 국내에서도 일련의 연구를 통해 비교적 상세하게 검토된 바 있다.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을 다룬 대부분의 국외연구는 지배 종교인 가톨릭이 남용하는 억압과 광신적
행태에 분개하여 지성인으로서 적극적 역할을 수행했던 볼테르의 생애를 조명함으로써 그의 종교적 관용 사
상을 그의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부각시키는 한편(Pomeau 1963; Lepape 1994; Vissière 1999; Knapp
2000; Trousson 2009), 일부 연구는 당대 프랑스의 정치·경제적 배경에 초점을 맞춰서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사상을 해석하고 있다(Renwick 2009). 예를 들어, 볼테르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포모(Pomeau)는 󰡔관
용론 (Traité sur la tolérance)󰡕 속에 드러난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의 공헌을 인정하며, 그로 인해 ʻ관
용ʼ이 ʻʻ당연하고, 인간적이고, 필연적이다ʼʼ라는 명제가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될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Pomeau 1963; 202). 그러나 포모를 포함한 대부분의 연구는 볼테르의 관용이 무신론을 수용하는 데에까
지는 이르지 못한 한계를 지적한다(Pomeau 1963; Vissière 1999; Lepape 1994; Trousson 2009).
반면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을 다룬 기존의 몇몇 국내 연구는 그것을 보편적 관용 사상(universal
tolerance)으로 해석해왔다(이경래 2007; 장세룡 2013; 황태연 2013). 특히 황태연(2013)은 홉스나 로크
와 같이 관용론을 펼쳤던 기존의 사상가들이 무신론자에 대한 불관용을 견지하였던 반면에, 볼테르는 ʻʻ무신
론자들을 동등하게 허용하는 무차별적·보편적 종교자유와 관용을 주창ʼʼ했다고 해석함으로써 볼테르가 주장
한 관용의 ʻ광의ʼ적 보편성을 명시적으로 강조한다(황태연 2013a, 14).
황태연의 연구는 또한 볼테르의 관용 사상을 보편적인 것으로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보편적 관용
사상이 ʻʻ동아시아의 ʻ무제한적ʼ 종교자유ʼʼ의 영향에 힘입어 나타났다고 주장함으로써 근대 서구의 관용사상과
동아시아의 종교적 관용 사상과의 접점을 보여주려는 시도의 일환이다(황태연 2013a, 15, 124-125). 황태
연은 서구에서 종교적 관용의 발전이 단순히 서구 역사만의 원동력에 의한 ʻ내재적 발전ʼ이 아니라, 동아시아
에 존재했던 유교 철학과 ʻ무제한적ʼ 종교자유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는 점을 체계적으로 밝힘으로써 비교사
상연구를 통해 우리가 근대 서구사상의 미덕으로 학습하고 수용해온 관용사상이 동아시아의 사상사적 전통
에 본래 내재한 것이었다는 탈서구중심적 통찰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즉 근대 서구민주주의에 있어서도

1) 원래는 미라보(Mirabeau)가 볼테르보다 먼저 팡테옹에 안치되어있었으나, 후일 반혁명음모에 연루되었다고 밝혀지면서 팡테옹에서 퇴거되었다.
2) 윌리엄(1994)은 볼테르가 하나의 ʻ체계 구축자(system-builder)ʼ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정치 사상가로서 볼테르는 형이상학적인 관념
보다 구체적 사건에 대응하는 일종의 ʻ행동하기 위하여 쓰는ʼ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볼테르는 매우 박식하였기 때문에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
루었고, 그의 글 속에서 풍자적 일화, 대중적인 용어, 생생한 대화체 등의 기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의 의중이 체계적으로 드러나기는 더욱 어
려웠다(Williams 1994,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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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가치인 ʻ정치적 관용ʼ의 기원을 구성한 서구의 ʻ종교적 관용ʼ은 이미 동아시아에 존재했고, 더 나아가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ʻ종교적 관용ʼ이 서구의 ʻ종교적 관용ʼ의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것이 황태연의 주
장이다. 실제로 볼테르는 󰡔관용론󰡕이나 󰡔철학사전 (Dictonnaire philosophique)󰡕과 같은 그의 저작들을 통
해 동아시아에 존재하는 종교적 관용을 긍정했으며, 특히 전통시대 중국정치와 유교에서 허용되었던 종교적
관용을 바람직한 것으로 제시하였다.3) 즉 그 자신이 주장한 종교적 관용이 동아시아에서 아무런 사회적·정
치적 혼란 없이 통용되고 있던 종교적 관용과 기본적으로 유사하다는 점에서 볼테르는 확신을 갖고 당대 유
럽의 이념적 지형에서 종교적 관용사상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이 보편적 관용 사상이라는 기존의 해석은 단순한 해석적 의
미뿐만 아니라, 그것이 동아시아의 관용 사상과의 접점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 논문은 동아시아의 유교적 관용 전통을 볼테르가 긍정적으로 수용했다는 황태연의 주장을 받아들
이고 또 이를 체계적으로 밝힌 황태연의 학문적 기여를 인정하지만, 그의 주장대로 볼테르가 전개한 관용사
상이 실제로 보편적 관용 사상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한다. 다시 말해서 이 연구는 볼테르의 주장
이 무신론자를 관용하지 않는 제한적 관용이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볼테르의 입장이 종교적 관용에 있
어서 국가와 사회의 이익이라는 세속적 가치를 우선시한 사실에서 기인한다고 해석한다.
이러한 주장을 전개하고 입증하기 위해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우선 이 글은 종교적 관용이 요
구되던 근대유럽의 시대적 배경을 간략히 살펴보고, 17세기 사상가인 피에르 베일(Pierre Bayle)과 존 로크
(John Locke)의 관용론을 비교함으로써, 무신론자가 당대의 관용론에서 어떻게 옹호 혹은 배제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두 사상가는 볼테르에 앞서서 종교적 관용을 주장한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이후 볼테르의 󰡔
관용론󰡕 등 여러 저작에 인용됨으로써 볼테르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친 사상가에 속한다. 다음으로 볼테르
의 종교적 관용 사상을 살펴볼 것이다. 그는 기독교적 가치뿐만 아니라 세속 질서 준수와 국가 이익이라는
가치를 종교적 관용의 근거로 주장함으로써, 종교적 관용을 당대의 정치적 현실과 결부시키는 모습을 보여준
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이교도를 비롯한 모든 종교를 관용해야한다는 입장에 있어서는 세 사상가들 사이에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무신론자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는 볼테르 역시 로크와 마찬가지로 배제
하는 입장을 취했다는 점을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체 내용을 정리함으로써 이 논문을 마무리
할 것이다.

Ⅱ. 볼테르 이전의 종교적 관용 사상과 무신론자에 대한 태도
프랑스에서 종교적 관용의 문제가 정치영역에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종교전쟁이 온 나라를 뒤
덮고 있던 16세기였다.4) 그리고 종교적 관용의 제도화가 시작된 것은 16세기 끔찍했던 종교 전쟁을 종결짓

3) 볼테르가 중국의 유교를 옹호했다는 사실은 황태연(2013)의 연구 외에도 다른 국내 연구들 역시 주목하고 있다(안종수 2009; 송태현 2012).
4) 당시의 종교적 관용에 관한 논의는 국가라는 공영 사회(commonwealth)의 안정을 위한다는 것에 머물렀다. 예를 들어 당대의 정치가였던 미셸
드 로피탈은 ʻʻ공영 사회의 기성 종교를 보호할 의무가 정부에게 있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ʻ인민을 평화롭고 평온한 상태로 유지하는ʼ 의무는 그
보다 훨씬 절실ʼʼ하기 때문에 종교적 관용을 제도화할 것을 주장했다. 자세한 내용은 스키너(Quentin Skinner)의 연구를 참조하기 바란다(스키너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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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앙리 4세의 낭트 칙령5)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6) 그러나 그의 손자인 루이 14세가 퐁텐블로 칙령(Edit
de Fontainebleau)7)을 공포함으로써 종교적 박해를 재개하자 이에 따른 사회적 부작용을 지적하는 종교적
관용의 목소리가 다시금 일부 정치가들에 의해 제기되었다.8) 이들의 주장은 종교적 측면보다는 국익이라고
하는 정치·경제적 측면에 주로 초점을 맞추어 제안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여러 사상가들 또한 종교적 관용의 필요성을 인지하였고, 종교적 박해의 정당성을 논했던 신학자
들의 논의9)를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종교적 관용 사상가가 바로 피에르 베일과 존
로크이다. 두 사상가는 󰡔누가복음 14장 23절의 ʻʻ사람들을 강제로 데려와 내 집을 채우라ʼʼ라는 말씀에 대한
철학적 주석(이하 철학적 주석)󰡕10)과 󰡔관용에 관한 편지 (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라는 저작을 통
해 종교적 박해를 옹호하는 기존의 주장, 즉 불관용이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논의를 반박하고 종교적 자유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두 사상가가 생각하는 관용의 범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무신론자를 관용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18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유럽에서 다른 종파나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주장하던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무신론자들을 사회에서 관용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당시에는 기독교의 ʻ유일신ʼ사상이 지배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ʻ이단자ʼ들을 처벌해야한다는 신학적 입장뿐만 아니라, 사회의 기본질서를 무너
뜨린다는 점에서 무신론자들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정치적 입장도 존재했다. 르네상스 이후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던 여러 사상가들이 무신론자를 사회에서 불관용해야한다고 주장한 주된 이유는 신이라는 ʻ초월적 존
재ʼ를 믿지 않는 무신론자들에 의해 사회에 존재하는 언약, 서약 등 약속의 신뢰성이 떨어질 수 있고 심지어
사회의 미덕 또한 손상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유토피아 (Utopia)󰡕에서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그리는 이상적 사회는 기본적으로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서로 관용하지만, ʻʻ영원하고 무한하며 말로는 설명할 수도 없고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도 없는 … 하나의 살아있는 힘으로서 이 우주에 편재(偏在)해있는 유일하고 신성한 존재ʼʼ인 지고

2012, 475-478).
5) 1598년 4월 13일 프랑스의 왕 앙리 4세가 낭트에서 공포한 칙령이다. 앙리 4세는 낭트칙령을 통해 프랑스의 칼뱅파 신도들인 위그노에게 조건
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약 30년간 지속된 프랑스의 종교전쟁(일명 위그노전쟁 1562∼98)을 종식시켰다.
6) 그러나 스키너는 종교적 관용의 제도화에 대한 논의가 이미 그 전인 카트린 드 메디치의 섭정 시기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고 지적한다(스키
너 2012, 460-466).
7) 1685년에 반포된 것으로 기존의 낭트 칙령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즉, 낭트 칙령이 보호해주던 위그노들의 모든 종교적 자유를 박탈함으로써, 위
그노는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8) 대표적으로 생시몽 공작(Louis de Rouvroy, duc de Saint-Simon)과 보방(Vauban)을 들 수 있다. 루이 14세와 이어진 루이 15세 시기의 대귀족
이었던 생시몽은 그의 저서인 󰡔회고록 (Mémoires)󰡕을 통해 이와 같은 상황을 초래한 퐁텐블로 칙령을 ʻʻ흉측한 음모의 결과ʼʼ라고 말하며 신랄하
게 비판하였고, 당대의 프랑스의 공성술과 방어요새 건축술을 혁신한 유명한 장군이었던 보방도 낭트 칙령이 폐지된 지 4년이 지난 1689년에
추방된 위그노교도들을 프랑스로 귀환시키는 것이 국가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담은 책을 써냈다.
9) 예를 들어, 당대 유명한 신학자이자 루이 14세의 조언자이기도 하였던 보쉬에(Jacques Bénigne Bossuet)는 크게 두 가지 점에서 종교적 불관용
을 옹호했다. 첫째로 참된 종교인 가톨릭의 본질인 불변성을 위협하는 프로테스탄트들을 관용하는 것은 교회의 가장 큰 위험이 된다는 것이고,
둘째로 특정한 종교적 진리에 대한 믿음은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점에서 ʻʻ가톨릭이 아닌 다른 교의를 믿는 사람들을 내버려두는 것은 비
겁하고 무관심한 행위ʼʼ가 되고, ʻʻ강압은 자비의 한 수단ʼʼ이 된다는 것이다(de Negroni 1997, 1047-1048).
10) 본문에 인용된 누가복음의 말은 기독교인들이 자신과 다른 교리를 가진 이교도 혹은 다른 종파의 사람을 박해하기 위하여 자주 인용하던 구절
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신 자신이 종교적 오류의 유포를 막기 위해 억압적인 수단의 사용을 명하였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생각에 기반하여
폭력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면 위험한 사상을 그것으로 억압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겼다. 당대의 자유주의 사상은 이에 반하여
폭력적인 방법이 대개 비효율적이며 그릇된 것일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이러한 자유주의의 기본 교의에 부합하여 논의를 편 것이 다음의 베
일의 저작인 󰡔철학적 주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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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신인 ʻʻ그ʼʼ의 실존에 대한 믿음을 공유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모어는 이상적인 사회인 유토피아에서조차
유물론자와 무신론자들은 ʻʻ법률과 관습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으로 치부할 것ʼʼ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그
러한 생각을 표출하는 것을 법률로써 금지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모어 2011, 185, 190).
그러나 17세기 후반의 프로테스탄트 사상가인 피에르 베일은 무신론자들을 옹호하는 보편적인 관용을 주
장했다. 우선 그는 그의 저작인 󰡔철학적 주석󰡕에서 ʻʻ그릇된 신앙의 신봉자라고 해도 그들 각 개인의 양심을
신중하게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ʼʼ함으로서 가톨릭에 의해 이단으로 취급받았던 프로테스탄트를 비롯한 모든
종교들을 관용할 것을 주장했다(라브로우쓰 1986, 54).

신은 규율이나 의무를 우리에게 부과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에 비례하는 만큼의 [짐을] 부과했다. 더 정확
히 말하자면,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 진실하고 충실한 성찰 속에서 진리로 나타나는 것을 붙잡는 것, 그 진
리를 사랑하는 것, 그리고 그 진리의 계율이 설혹 아무리 [지키기] 어려워 보일지라도 그 원칙에 따라 우리 스스
로를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심이라는 것은 진리와 지식과 사랑의 시금석으로서 준수하도록 우리에
게 주어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무엇이든 그 이상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요구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쉽게 증명될 수 있다(Bayle 2005, 261).

이처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는 베일의 논리에는 교의에 관하여 ʻʻ이단자들이 과오를 범하고 있음을 부정
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과오가 어쩔 수 없는, 따라서 무고한 것일 수도ʼʼ 있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다. 또한
그는 신은 ʻʻ각 개인이 양심의 명령에 대하여 진실했던 정도에만 관심을ʼʼ 갖기 때문에 본인의 양심에 따라 무
고한 과오를 저지른 이단자는 용서한다고 보았다(라브로우쓰 1986, 120-121). 베일은 이처럼 양심의 자유
를 적극적으로 옹호함으로써, 당대 프랑스에서 이단자로 몰려 박해를 받던 프로테스탄트들을 옹호했다.
그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마저도 옹호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훨씬 더 보편적인 관
용의 법칙을 내세웠다.

무신론에 흠뻑 젖은 민족의 도덕과 관습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는 연대기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주제
를 개시하기 위해 하는 추정, 즉 무신론자들은 어떤 도덕적 덕성도 가질 수 없을 것이라는 짐작, 그리고 무신론
자들은 호랑이와 사자들 사이에 있을 때보다도 우리의 삶 때문에 두려워해야할 이유가 있는 맹수들이라는 짐작
을 경험에 의해 반박할 수 없다. … 결과적으로 이것으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동정심, 정심(正心), 선행 등에 대
한 성향은 우리가 신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로부터 …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육, 개인적 이익, 칭찬받고 싶
은 욕구, 이성본능, 또는 다른 인간들에게서나 마찬가지고 무신론자들 안에서 만나는 유사한 동기들에 의해 강
화된 체질의 일정한 배열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무신론자가 반드시 그 도덕에서 우상숭배
자보다 더 무절제하다고 주장할 권리가 없다(Bayle 2000, 180; 황태연 2013b, 33에서 재인용)

이처럼 베일은 무신론에 대한 비판이 그릇된 편견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설사 논리적으로 무신론
이 부적절한 것일지라도, 그러한 논리는 실제 현실에서 경험한 사례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보았던 것이다. 실
제로 경험상 무신론자라고 더욱 범죄를 많이 저지르고, 유신론자라고 반드시 청렴한 것은 아니었다. 이어서
그는 개인의 도덕에 관한 성향은 ʻʻ욕구ʼʼ나 ʻʻ교육ʼʼ 혹은 ʻʻ개인적 이익ʼʼ 등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무신론자들이
ʻʻ어떤 도덕적 덕성도 가질 수 없을 것ʼʼ이라는 비판을 철회할 것을 주장했다. 베일이 볼 때 ʻ초월적 존재ʼ를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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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냐 안 믿느냐의 여부는 개인의 도덕에 있어서 전혀 중요치 않으며, 따라서 그의 논지에서 무신론자는 그
자체만으로 사회에 해를 끼치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에 로크는 그의 저작인 󰡔관용에 관한 편지󰡕에서 무신론자에 대하여 베일과 다른 입장을 취했다. 우선
위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로크의 종교적 관용 사상은 개인의 내적 신앙뿐만 아니라 외적 신앙까지의 관용을
주장하는, 사실상 오늘날의 종교적 자유의 범위와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종교적 관용 사
상의 포용성은 우상숭배자 혹은 당대의 이교도인 이슬람교도나 유대교도까지도 관용해야한다는 주장에서 드
러나는데, 이러한 모습은 일면 모든 종교를 ʻ보편적ʼ으로 관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만약 어떤 교회가 우상을 숭배하는 교회라면, 그 교회도 통치자에 의해서 관용되어야 하는가? 저는 대답합니
다: … 정통 교회는 몰락시키지 않으면서 단지 우상을 숭배하는 교회만을 억압하도록 통치자에게 부여될 수 있
겠습니까? … 반란자들, 살인자들, 암살단들, 도둑들, 강도들, 간통하는 자들, 불법을 행하는 자들, 중상비방자
들 따위는 그들이 어느 교회에 속해 있든지 간에, 군주의 교회에 속해 있는지 그렇지 않든지 간에, 징계받아야
하며 억압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의 교리가 평화를 지향하고 그들의 행실이 주의 깊고 책망할 데 없
다면, 그들은 다른 시민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생겨난 종교에 관한 대부분
의 소송과 전쟁을 [실제로] 만들어낸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인 의견의 다양함이 아니라,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
는 것인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관용의 부정입니다(로크 2008, 86-88).

로크는 국가가 처벌하고 억압해야하는 존재는 교리와 상관없이 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범죄자들이라고 주
장했다. 따라서 그는 국교도가 아닌 다른 종파의 신도들, 우상숭배자 혹은 이교도 모두를 ʻʻ종교적인 이유ʼʼ로
배제하거나 억압하지 말고 관용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에는 ʻʻ종교적인 이유ʼʼ가 아닌 사
회의 질서를 해치는 ʻʻ국가·사회적인 이유ʼʼ로는 타종교가 불관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관용될 수 없습니다. 무신론자에게는 인간사회를 묶는 끈인
신뢰도, 약속도, 맹세도, 그 어떤 것도 안정적이고 신성할 수 없습니다. 생각만으로라도 하나님을 없앰으로써,
이 모든 것(신뢰, 약속, 맹세 등)이 무너집니다. 그 밖에도 무신론으로써 모든 종교를 송두리째 없애는 사람은
종교의 이름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어떠한 관용의 특권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로크 2008, 78-79).

사시에(Sassier)는 ʻʻ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관한 로크의 태도는 18세기까지 꾸준히 지속된 하나의 견해,
즉 종교가 없으면 공공질서도 없다는 견해와 일치했다ʼʼ고 본다. 즉 로크는 ʻʻ모든 복종과 민간 계약의 기초인
선의를 없애기 때문에 무종교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ʼʼ했던 것이다. 이런 로크의 주장에는 ʻʻ모든 것들이
사후 징벌에 대한 전망이 있어야만 보장된다ʼʼ는 논리가 자리잡고 있다(사시에 2010, 144-145). 즉 로크는
어떠한 ʻ초월적 존재ʼ도 믿지 않는 ʻ좁은 의미의ʼ 무신론자들에게는 아무런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에 존재하는 맹세와 서약을 준수할 동기도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처럼 무신론자에 대한 불관용이 정당하다고 본 로크는 ʻʻ사변적인 견해ʼʼ로서 ʻ종교적·무종교적 신념을
무제한으로 존중ʼ하는 것보다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더 중요시하였다. 즉 ʻʻ보편적 관용ʼʼ보다는 국가나 사회의
안정이 우선시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ʻʻ반사회적인 교리, 사회해체적인 교리ʼʼ와 ʻʻ국가 권력을 전복하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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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를 숨기고 있는 비교(秘敎)ʼʼ 그리고 ʻʻ어느 교회 사회에 들어가는 자체가 다른 군주의 보호 아래, 즉 다른
정치사회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ʼʼ하는 교회, 즉 당대의 가톨릭과 같은 종교는 관용될 수 없다고 한 로크의 주
장에서 다시 한 번 드러난다. 결국 로크는 당대의 무신론을 ʻʻ오늘날 그것을 우리가 일종의 종교적 선택이나
지적 취향의 문제인 것처럼 여기는 것과 달리, 국가와 교회, 정치와 종교 간의 경계를 허무는 정도가 아니라
종교 자체와 국가 자체를 아예 불가능하게 하는 반사회적 생각ʼ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관용할 수가 없었던 것
이다(공진성 2008, 136-137).

Ⅲ.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
렌윅(Renwick 2009)은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관련
된 논의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즉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은 ʻʻ자족적인 진공상태(a selfsufficient vacuum)ʼʼ에서 발전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관용에 관한 일련의 계몽적 운동이 진행된 1751
년에서 1762년에 이르는 정치경제적 맥락을 고려해야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1685년 낭트칙령의 폐기
로 프랑스는 ʻʻ세계에서 탁월함(pre-eminence)의 위치에서 급격한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고, 이것은 국가의
인구성장, 상업, 경제 분야에 침체ʼʼ를 가져왔다. 특히, 종교적 관용을 실천하고 있던 주변 국가인 영국과 네
덜란드의 부흥은 프랑스의 지식인들로 하여금 종교적 관용을 타당한 것으로 주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볼테르는 󰡔관용론󰡕을 통해 관용을 주장함으로써 7년 전쟁(1756-63) 이후 프랑스가 겪은 급격한
정치경제적 쇠퇴를 전환시킬 것을 조심스럽게 루이 15세와 그의 계몽된 장관들에게 제안했던 것이다. 이러
한 볼테르의 행보는 진보적인 사상가들과 권좌에 있는 자들 사이의 협력(compact)이 국가의 집단적 복리를
위해서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평소 그의 지론과도 적절히 부합하는 것이었다(Renwick 2009,
179, 188). 그리고 실제로 그의 저서인 󰡔관용론󰡕에도 이러한 불관용적인 박해가 가져온 정치경제적 피해에
대한 서술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물론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의 우선적인 문제의식은 이성적 사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광신11)과 그것
을 고취시키는 미신12)에 맞서는 것이었으며 광신과 미신의 극적인 예로 장 칼라스(Jean Calas) 사건을 제
시했다.

11) 볼테르는 󰡔철학사전󰡕에서 광신(fanatisme)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ʻʻ미신에게 광신은, 열정의 발현이 흥분이 되고, 집착이 분노가 되는 것과 같다. 도취된 상태에서 전망을 갖고 현실 세계를 위해 공상하는 사람
은 열광적인 사람(enthousiaste)이지만, 살인을 통해 그의 광기를 유지하는 광신도(fanatique)이다. … 한 번 광신이 뇌에 자리잡게 되면, 이 병
은 거의 치유불가능하다. 법률은 이 열정의 발작을 막는 데 매우 무력하다. 마치 그것은 당신이 광인 앞에서 심의회의 결정을 읽어주는 것과
같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침투한 ʻ성스러운 정신(lʼesprit saint)이 법률 위에 존재하고, 그들의 열정만이 그들이 따라야하는 단 하나
의 법이라는 것을 확신한다ʼʼ(Voltaire 1994, 263-265 요약).
12) 볼테르는 󰡔철학사전󰡕에서 미신(superstition)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ʻʻ초월적 존재에 대한 숭배와 그 영원한 질서에 대한 진심어린 복종을 넘어서는 거의 모든 것은 미신이라고 볼 수 있다. 일부 종교 의식에 결
합된 범죄들을 용인하는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 사기꾼에게 미신을 믿는 사람의 존재는 전제군주에게 노예인 사람의 존재와 같다. 여기에
는 한 가지 더 있다. 미신을 믿는 사람은 광신도에 의해 지배되고, 결국 광신도가 된다. 한 종파의 종교의 핵심이 다른 종파에서는 미신으로
인정받는 것은 명백하다. … 모든 미신적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 질문을 요구한다: 철학적 인간이 존재
할 수 있는가? … 한 마디로, 미신이 줄어들수록 광신이 줄어들고, 광신이 줄어들수록 불행이 줄어든다ʼʼ(Voltaire 1994, 485-489 요약).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

41

툴루즈의 판사들이 군중의 광신에 휩쓸려 죄 없는 한 가장을 수레바퀴에 매달아 처형했다는 것은 전례 없이
끔찍한 일이다. … … 어느 경우이든 분명한 점은 가장 거룩한 신앙심도 그것이 지나쳤기 때문에 무서운 범죄를
낳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신앙심이란 자비로운 것이어야 할지 아니면 가혹한 것이어야 할지를 검토하
는 일은 우리 인간을 위해 도움이 될 것이다(볼테르 2001, 39-40).

비시에(Vissière)는 교회의 권력을 등에 업은 미신에 기초한 가톨릭주의적인 광신이 ʻʻ행정관의 결정에도
강력하게 작용ʼʼ하여 결국 한 가장의 억울한 죽음을 이끈 사건인 장 칼라스 사건은 볼테르에게 중요한 상징성
을 갖는 문제였고, 그의 관용론은 ʻʻ툴루즈에서 공공연하게 범해진 한 인간의 희생ʼʼ을 고발함으로써 ʻʻ광신에
저항하는 유럽 전역의 계몽된 정신을 결집ʼʼ시키겠다는 문제의식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고 본다(Vissière
1999, 7).
이와 같이 미신적 요소와 광신에 근거한 종교적 불관용을 비판하고 종교적 관용의 가치를 역설한 볼테르
는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여러 논거를 제시했다. 드네그로니(de Negroni)는 그의 논거를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13) 첫 번째는 기독교는 우리에게 관용을 가르친다는 점, 두 번째는 세속적 불관용은 세속 질서
를 위협한다는 점, 세 번째는 세속적 관용은 세속 군주와 국가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점이다. 첫 번째 논
거는 일종의 신학적 관용론으로, 관용이 ʻ신ʼ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과 배치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볼테르는
ʻʻ모든 종교 가운데 기독교는 가장 큰 관용을 고양시키는 종교이고, 자비와 이웃에 대한 사랑은 박해와 모순
되는 것이라고 주장ʼʼ했다(de Negroni 1997, 1049).

그리스도 자신도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음을 옹호해주었고, 죄인을 용서했다.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다
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이르기만 했으며, … … 예수는 자신을 배신할 유다마저도 적대시하지 않았고, 예수
를 잡으러온 자들에게 칼을 빼든 베드로에게는 칼을 도로 칼집에 넣으라 일렀다. 세베대의 자식들(요한과 야고
보)는 어떤 마을에서 잠자리를 내어주지 않자 엘리야를 본따 하늘의 불을 내려오게 해서 그 마을을 불태우려 했
는데, 예수는 이들을 꾸짖었다(볼테르 2001, 162-163).

볼테르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예수가 남긴 거의 모든 말과 행동을 검토하면서, 그는 죄인이나 말을 따
르지 않은 자들을 잔인하게 징벌하기보다 단지 ʻʻ온유함과 인내와 용서를 가르치고 있다ʼʼ고 주장했다. 그렇기
에 그는 ʻʻ당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한다면 처형자가 아닌 순교자가 돼라ʼʼ고 말함으로써, 올바른 기독
교인의 모습으로서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을 주장했다(볼테르 2001, 166).
이어서 볼테르의 두 번째 논거는 세속적 불관용이 세속 질서를 위협한다는 논점이다.
그리스도교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일수록 인간이 이 종교를 좌우할 수 있는 몫은 줄어든다. 신께서 그리스도교
를 만드셨으니 당신이 개입하지 않아도 신이 이 종교를 지켜주실 것이다. 당신도 알다시피 신앙의 불관용이 낳
은 것이라고는 위선이거나 반역밖에는 없다. …

13) 드네그로니는 또한 그의 글에서 종교적 관용을 ʻ신학적 관용론(tolérance théologique)ʼ과 ʻ세속적 관용론(tolérance civile)ʼ의 범주로 설명하고 있
다. 신학적 관용은 ʻ특정한ʼ 종교적 진리에 대한 믿음만이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 타 종교를 관용하자는 주장이고, 세속적 관용은
국가 안에서 특정 종교의 관습이나 특정 교의에 대한 신앙을 금지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이와 반대되는 논리에 따라 종교적 불관용을 구성
하는 ʻ신학적 불관용론(intolérance théologique)ʼ과 ʻ세속적 불관용론(intolérance civile)ʼ이 구분된다(de Negroni 1997, 1048-1049).

42 한국정치학회보 제48집 제1호

즉 사람들이 앙리 4세에게 복종해야만 했던 이유는 그가 샤르트르 대성당에서 국왕 축성을 받았기 때문이 아
니라, 이 군주가 출생에 의해 부여받은 확고한 권리에 따라 왕좌에 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군주는 용기와 올바른
심성을 통해 자신이 그 자리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동일한 권리에 의거해서 시민 누구라도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에 반대하고 라트람누스에 동조했다고 해서, 스코투스에 반대하고 베렌가리우스의 주
장에 찬성했다고 해서 재산을 빼앗기거나 교수대로 끌려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볼테르 2001, 128,
131-132).

볼테르는 세속적 불관용이 세속 질서를 위협한다고 주장했다. ʻʻ세속적 불관용에는 어떠한 종교적 정당성
도 없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부당하고 정도에서 벗어난 것들만을 야기ʼʼ하기 때문이다(de Negroni
1997, 1049). 우선 신이라는 절대자에 속하는 그리스도교는 교회가 굳이 자신들의 절대적인 교리를 강요하
기 위해 사회에 개입하지 않더라도 그 존립이 보장된다. 또한 왕의 권리 혹은 시민의 재산권과 같은 권리는
세속에 속하는 것이지 결코 종교가 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종교의 교리에 반대된다고 그 사람의
세속적 지위를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테르는 세속 질서를 위협하는 종교적 불관용은
옹호될 필요도 없고, 옹호되어서도 안된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볼테르는 관용의 세 번째 논거로 세속적 관용은 세속 군주와 국가에게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강조했다.
성직록 취득 헌납금, 로마 교황청에서 진행되고 있는 소송, 그리고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는 ʻ관면ʼ(寬免)의
비용으로 우리가 치러야 할 금액이 1년에 단지 50만 프랑이라고 쳐도, 분명한 것은 프랑수아 1세 이후 250년
동안 [교황청에 무려] 1억 2천 5백만 프랑에 달하는 돈을 우리가 지불해왔다는 사실이다. … 후대 사람들도 놀
라워할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세금을 폐지하자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점
에서 그들이 프랑스 왕국에 큰 해악을 끼친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한 그들이 어리석은 신하들보다 뛰어난 회계
사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신성모독이라고는 할 수는 없다. 덧붙여 지적할 점은 종교개혁자들이야말로
유일하게 그리스어를 읽고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화에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어떤 잘
못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오랫동안 캄캄한 무지상태에 머물러 있던 인간정신이 깨어나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들 덕분임을 감추지 말자(볼테르 2001, 47).

볼테르는 종교적 관용이 국가의 번영과 안정에 기여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볼 때 박해받는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은 절대로 국가의 손실을 가져오는 존재가 아니었고, 오히려 가톨릭의 교황청보다 국가에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즉, 신교도들은 프랑스 국가 경제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고 박해는 이익보다는 손해를 가져
온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볼테르로 하여금 종교적 관용이 국가적 안녕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볼테르의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주장은 불관용의 제도화에 반대하는 세속적 관용론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
다. 특히 세속적 관용론의 일환인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주장은 앞서 종교적 관용을 역설했던 생시몽 공작이
나 보방과 같은 17·8세기의 정치가들의 주장과 일면 유사한 점이 많다. 즉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에는
국가와 사회라는 정치적 고려가 강하게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종교적 관용 사상은 당시 ʻ종교적 관용ʼ
을 요구하는 정치·경제적 맥락 속에서 나타났으며, 실제로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근거로 ʻ세속 질서 준수ʼ와
ʻ국가 이익ʼ이라는 세속적 가치가 우세하게 드러난다. 여기에서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론은 당대의 정치적 현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

43

실을 고려한 담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에 살펴볼 볼테르의 무신론자에 대한 태도는 국가와 사회를 중시하는 이러한 그의 사상적 면모를 가
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는 불관용의 불합리성을 일관되게 강조했지만, 초월적 존재를 부정한 무신론자
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미덕의 기초를 파괴하기 때문에 배제해야한다고 주장했
다. 즉 볼테르에게 관용이란 그것을 지지하는 사회질서 유지의 가치와 관용의 대상이 충돌할 경우 유보되거
나 부정될 수 있는 가치였고, 볼테르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무신론자 배제론에서 명백히 드러났던 것이다.

Ⅳ. 볼테르는 무신론자를 관용했는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피에르 베일과 로크는 볼테르에 앞서 종교적 관용을 주장한 사상가로서 무신론자
를 관용하는 데에 있어서 분명한 입장 차이를 보인다. 즉 피에르 베일은 무신론자를 옹호할 것을 주장한 ʻ광
의ʼ의 보편적 관용 사상을 편 반면에, 로크는 국가와 사회의 질서라는 단서를 둠으로써 무신론자를 배제할
것을 주장한 ʻ협의ʼ의 보편적 관용 사상을 주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볼테르는 이 중 어떠한 입장을 취한 것일
까? 이 장에서는 기존의 국내해석론을 황태연의 연구를 중심으로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볼테르가 후자
인 로크의 ʻ협의ʼ의 보편적 관용 사상을 주장했다는 점을 논증하려고 한다.
우선 황태연(2013)은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이 무신론자를 옹호했던 베일의 ʻ무차별적 관용ʼ에 상응하
는 ʻ보편적 관용ʼ 이념이라고 주장하며, 󰡔관용론󰡕의 ʻ보편적 관용에 대해(De la tolérance universelle)ʼ라는
장을 인용한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데는 빼어난 논쟁의 기교나 화려한 웅
변이 필요하지 않다. 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즉 우리는 모든 사람을 우리의 형제
로 여겨야 한다고. 그렇다면 이렇게 되묻는 사림이 있을 것이다. ʻʻ뭐라고! 투르크인을 형제로 대하자고? 중국인,
유대인, 시암인을 우리의 형제로 대하자는 말인가?ʼʼ 물론이다. 우리는 모두 한 아버지의 자식들이며, 같은 신의
창조물이 아닌가?…
이 작은 지구는 단지 한 점에 불과한 것으로, 다른 수많은 천체와 더불어 우주 공간을 돌고 있습니다. 이 광
대한 우주 공간 속에서 우리는 떠돌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겨우 다섯 자 남짓한 몸집이니 창조물 가운데서도
아주 미미한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 ʻʻ… 이 지구상에는 작은 개미와도 같은 우리 인간 9억 명이 살고 있소.
그러나 오직 내가 있는 개미집만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다른 모든 개미집들은 영원히 미움을 받게 될 것
이오. 오직 내가 있는 개미집만이 행복을 누리고 다음 모든 개미집들은 영원토록 고달플 것이오ʼʼ(볼테르 2001,
205-206; 이경래 2007, 199 참조; 황태연 2013b, 96 참조).

위 인용문에서 볼테르는 일종의 다원주의적 주장14)을 편다. 즉, 특정 종교라는 하나의 ʻʻ개미집ʼʼ만이 하나

14) 그러나 인용문에서 보듯이, 볼테르의 서술에는 ʻʻ한 아버지의 자신들ʼʼ, ʻʻ같은 신의 창조물ʼʼ, 인격신으로서 ʻʻ하나님(Dieu)ʼʼ 등 기독교 중심적인 표
현이 엿보인다. 이것은 볼테르가 가진 이신론적 사고의 한계라 할 수 있다. 즉, 과학주의와 계몽주의의 사유에 기반하여 세계를 합리적인 ʻ법칙ʼ
으로 설명함으로써 기독교와 같은 계시 신앙을 비판하였지만, 동시에 ʻ유일신ʼ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기반으로 한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완전히 벗
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44 한국정치학회보 제48집 제1호

님으로부터 ʻʻ사랑ʼʼ을 받는 것은, 우주라는 전체 공간에서 볼 때 철저히 비합리적인 것이며, 결국 그것은 신
의 이성이 아닌 인간의 맹신에 불과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이가 창조자에게 사
랑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 나아나서, 자칫 무신론자들까지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 이경래(2007)와 황태연(2013)은 이 구절을 볼테르가 ʻ보편적 관용 사상ʼ을 주장한 결정적 근거로 인
용한다.
황태연의 연구는 볼테르의 무신론자에 대한 태도를 보다 직접적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
와 차별성을 갖는다. 우선 황태연은 볼테르가 ʻʻ우리는 모든 사람을 우리의 형제로 여겨야 한다ʼʼ고 말한 부분
을 인용하며 이것은 ʻʻ공자의 제자 자하의 사해동포주의를 재탕한 것ʼʼ이라고 언급하는 한편, 이전의 볼테르의
글에서도 종교적 자유를 말할 때 ʻ무차별성ʼ이 핵심 개념이었다고 말한다. 황태연은 볼테르가 ʻʻʻ교리에 대한
무차별성의 증가ʼ와 ʻ관용의 진전ʼ 간의 정비례관계를 명시적으로 강조ʼʼ하였다고 봄으로써 볼테르를 ʻ무차별적
관용론ʼ을 주장한 베일과 동일한 범주에 놓는다(황태연 2013a, 96-97). 그러나 무신론자 옹호는 오히려 다
음의 볼테르의 구절에서 부정되는데, 그는 위의 다원론적인 관점에 입각하여 무신론자를 관용하자는 주장을
펴기보다는, 그들이 사회적으로 초래할 수 있는 해악에 주목하며 무신론자들을 비판한다.
인간은 참으로 연약하고 뒤틀린 존재인지라, 차라리 온갖 종류의 미신15)에 붙잡혀 있는 편이 그 때문에 사람
을 죽이는 일만 없다면 신앙 없이 사는 것보다 인간을 위해서 더 나은 일임은 분명하다. 인간은 언제나 어떤 구
속력을 필요로 해왔다. 또한 반인반수신이나 숲의 수호신, 물의 요정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무리 우스꽝
스럽게 보일지라도 이러한 신성한 가공의 존재를 숭배하는 편이 무신론에 빠지는 편보다는 더욱 온당하고 유용
하다. 만약 어떤 무신론자가 무엇이든 따지기 좋아하고 난폭하고 강력하다면, 그는 믿음을 위해 주저 없이 사람
을 살육하는 맹신자보다 훨씬 불길한 재앙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이라는 신성한 관념을 상실하면 그런 관념을 대신해서 허상들이 들어선다. 그것은 마치 사회가 불황
에 쪼들려 화폐가 부족해지면 위조지폐가 돌아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교도일지라도 죄를 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거짓 신들에게 벌을 받을까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말라바르인들도 사원의 탑이
자신의 죄를 징벌한다고 믿고 두려워했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곳이면 어디든 종교는 꼭 필요하다. 법이
공개적으로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역할을 하는 반면 종교는 개인이 숨어서 행할지도 모르는 범죄
를 막는다(볼테르 2001, 195-196).

볼테르는 인간의 연약함을 언급하며, 신앙 없이 사는 것보다는 ʻʻ사람을 죽이는ʼʼ 극단적인 결과를 낳지 않
는 한 차라리 미신을 믿는 것이 낫다고 이야기한다. 즉 ʻʻ물의 요정ʼʼ과 같은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존재를
믿는 것이 무신론자보다도 낫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존재를 믿는 것은 결코 이성적이지도, 또한 기독교의
입장에서 신앙적이지도 않다. 단지 무신론보다 이러한 존재를 믿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근거에는 ʻ참된 신ʼ이
아닌 미신을 믿더라도 일종의 ʻʻ신성한 관념ʼʼ이 머리 속에 들어옴으로써 범죄를 막는 등의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처럼 미신을 옹호하는 그의 주장에는 종교 및 신의 가치를 세속적인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
하는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황태연은 볼테르가 ʻʻ공자와 중국의 ʻ일상적 무신론과 간헐적 유신론의 융화ʼ16) 상태나 성리학적·
15) 참고한 번역본에는 맹신으로 나와 있지만, 프랑스어 원문에는 superstitions으로 표기되어 있다. 문맥상 미신이 더 부합한 번역인 것으로
보인다.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

45

불교적 무신론까지도 ʻ유신론ʼ으로 간주하는 광의의 유신론, 즉 ʻ약한 유신론ʼ 개념ʼʼ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
며, 위에서 비판받는 무신론자들은 ʻ공산주의자ʼ와 같은 예외적인 경우만 해당한다고 주장한다(황태연
2013b, 97-98). 이어서 황태연은 무신론자를 옹호하는 듯한 볼테르의 다음 구절을 인용한다.
어떠한 종교도 가지지 않는 에피쿠로스주의17)자들은 공적 업무, 연구, [사회적] 화합에서 멀리 떨어질 것을
충고한다. 이 학파는 친교의 사회였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주요 교의가 우의(amitié)였기 때문이다. 아티쿠스,
루크레티우스, 멤미우스, 그리고 이런 기질의 몇몇 사람들은 매우 정직하게 함께 살았고, 모든 나라들에서 이러
한 광경은 목격된다. 그것이(에피쿠로스주의가) 너희들을 즐겁게 하는 만큼 너희들끼리 철학적 사유를 하라
(philosopher). 난 [에피쿠로스주의를] 아마추어들이 지적이고 세련된 음악연주회를 공연하는 것을 듣는 것이라
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공연을 무지하고 잔인한 대중 앞에서 공연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들은 당신들의 머리
위에 당신들의 악기들을 내려칠지 모른다. 만약 당신이 다스릴 한 촌락이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의 종교
가 있다. 난 여기서 우리의 종교를 말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ʻʻArticle ReligionⅠʼʼ 󰡔Dictionnaire
philosophique󰡕 1771; Pomeau 1963, 200에서 재인용18); 황태연 2013b, 98 참조).

황태연은 위의 인용문에 주목하면서 볼테르가 ʻʻ주체가 무식한 평민들을 포함한 마을이나 사회가 아니고,
그리스의 에피쿠리언들(에피쿠로스주의자들), 중국의 유학자들과 같은 철학자들이라면, 철학적 무신론과 무
종교 상태는 충분히 가능ʼʼ하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을 용인했다고 주장한다. 황태연에 따르면 볼테르는 종교는
비(非)철학자적 무식대중 때문에 국가의 존립과 유지에 ʻ본질적인ʼ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황태연
2013b, 97-98).
그러나 좀 더 주의깊게 살펴보면, 황태연의 해석과 달리 위의 인용문에는 볼테르가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을
명시적으로 옹호하고 있는 내용은 없다. 오히려 그들의 사상이 공적인 사회에서 떨어져서 그들만의 ʻʻ연주ʼʼ가
되기를 바라며, 그것을 ʻʻ대중ʼʼ 앞에서 연주하지 말 것을 경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인용문에서 바로
이어진 글에서 볼테르는 그의 신학적 종교, 즉 그리스도교를 ʻʻ자비롭고, 수수께끼와 미신이 벗겨진ʼʼ 등 긍정
적인 형용사를 통해 묘사하면서 그 장점을 옹호하였다. 또한 위의 인용문을 제시한 포모(Pomeau) 또한 볼
테르가 무신론을 반박하면서 ʻʻ신에 대한 믿음은 ʻ사회의 성스러운 고리ʼ이기에, 그것을 파괴하는 것은 사회
구조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는 것ʼʼ이라고 주장했으며, 무신론자의 선전(宣傳)을 걱정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Pomeau 1963, 200).
결국 황태연이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을 무신론자도 옹호한 ʻ보편적 관용론ʼ으로 본 근거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볼테르가 무신론자를 비판할 때에 그것은 유물론자 등 ʻ예외적 무신론자들에만 해
당된다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황태연의 주장은 당대 서양 사상가들이 ʻ무신론자ʼ로 취급했던 중국 유학자
16) 황태연은 볼테르가 중국의 유교를 ʻʻ전지전능한 신을 가정하지 않는 무신론과 ʻ특별한 경배와 제천(祭天)의식ʼ에서 간헐적으로 ʻ참된 신ʼ이 드러
나는 유신론의 융합ʼʼ이라고 보았고, 이를 결론적으로 ʻ유신론ʼ으로 해석한 볼테르의 논거를 토대로 그가 주장한 유신론 개념을 ʻ약한 유신론ʼ이
라고 보았다.
17) 에피쿠로스(Epicouros, BC 341~270)가 가르친 철학 또는 이 철학의 원리에서 유래한 인생관과 삶의 양식을 포괄하는 윤리체계이다. 에피쿠
로스주의(epicureanism)의 윤리학은 선을 쾌락으로 보고, 최고선과 궁극목적을 고통이 없는 몸과 마음의 상태와 동일시하며, 모든 인간관계를
효용의 원리로 환원하고, 모든 욕망의 제한과 덕의 실천, 은둔생활을 역설한다. 그들이 볼 때, 인간의 불행은 헛된 욕망과 세속적 위험에서 유
래한다. 그러나 불행의 원천으로는 그밖에 두 가지 큰 두려움,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신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러나 과학이 욕망의 한도
를 파헤치고 신에 대한 두려움을 가라앉히는 데 유효하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달랠 수 있다고 에피쿠로스는 생각했다(브리태니커 세계 대
백과사전. 1992. ʻʻ에피쿠로스주의.ʼʼ 󰡔브리태니커 세계 대백과사전 vol.15󰡕. 서울: 한국브리태니커. 394-395 요약).
18) 필자가 참고한 󰡔철학사전 (Dictionnaire philosophique)󰡕판(1994, Paris: Gallimard)에는 존재하지 않는 글이기에, 부득이하게 재인용하였다.

46 한국정치학회보 제48집 제1호

들을 ʻ유신론자ʼ로 덮어준 볼테르의 태도에 근거할 뿐이다. 중국의 유학은 제천의식을 통해 ʻ하늘ʼ이라는 초월
적 존재를 숭배했기 때문에, 그것이 인격적 신이 아닐 뿐이지 볼테르가 중요시하는 종교의 초월적 존재를 인
정하는 ʻ약한 유신론ʼ의 종교였다. 그렇기 때문에 볼테르에게 중국의 유학은 ʻ인격적 신ʼ이 가정되는 기독교에
비해 관용적이고 더욱 세속적이면서 동시에 ʻ하늘ʼ이라는 초월적 존재를 가정하기 때문에 사회를 유지시키는
중요한 종교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가 보기에 당대 서양 사회에서 ʻ무신론ʼ의 취급을
받았던 중국의 유학이 이상적인 종교였기 때문에 그가 유학을 관용하고 옹호했던 것은 맞지만, 서양 사회에
존재했던 유물론적 무신론자들을 볼테르가 옹호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황태연은 볼테르가 배제를 주장한 무
신론자들은 오늘날의 공산주의자들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고 말함으로써 사회를 위협하는 무신론
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을 수용했다고 주장하지만(황태연 2013b, 97-98), 당대의 디드로,
돌바크와 같은 대부분의 지적 무신론자들은 볼테르에게 있어서 그 ʻ공산주의자ʼ와 같은 존재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이 ʻ초월적 존재ʼ의 관념을 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9)
둘째 황태연은 볼테르가 종교가 국가의 존립과 유지에 ʻ본질적인ʼ 것으로 본 이유는 ʻʻ단지 비(非)철학자적
무식대중 때문ʼʼ이었다고 주장한다. 즉 볼테르에게 종교는 무식대중을 교화하기 위해서 필요했을 뿐이지 모두
에게 본질적인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ʻ철학적ʼ 혹은 ʻ지적ʼ 무신론자의 존재를 긍정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다르게 말하면, 무식한 다수의 대중을 교화하기 위해서 ʻ본질적ʼ이지 않은 종교를 강
제한다는 논리는 결국 ʻ철학적ʼ 무신론자들을 관용한다는 논리이기보다 무신론의 위험이 일반 대중에게 확산
되는 것을 막기 위해 ʻ철학적ʼ 무신론자들의 생각을 억압하거나 혹은 그들에게도 국가 종교 등을 강요시켜야
한다는 논리로 해석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것은 사회의 안전과 질서를 위해 무신론자에 대한 일종의 세속적
불관용을 주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볼테르는 당대의 유물론적 무신론자인 돌바크 등의 저작이
나올 때마다, 앞서 포모가 인용한 것처럼 오히려 종교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ʻʻ사회 구조를 위험에 빠뜨리게ʼʼ
한다는 논리로 그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무신론자에 대한 볼테르의 입장은 그의 저작인 󰡔철학사전 (Dictonnaire philosophique)󰡕의
ʻ무신론자(athée), 무신론(athéisme)ʼ장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무신론자를 포함한 ʻ광의ʼ의 보편적 관용
을 주장한 베일의 논점을 제시하며, 이에 반박하는 형태로 자신의 주장을 분명히 한다.
베일은 우상숭배가 무신론보다 더 위험한지 아닌지 그리고 악독한 사상을 내포한 신을 갖는 것이 ʻ신ʼ을 전혀
믿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범죄인지를 검토하였다. 그는 플루타르크와 의견을 같이 하였는데, 플루타르크는 안 좋
은 의견을 갖는 것보다 아예 의견을 갖지 않는 편이 좋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에게 케레스와 넵튠과 쥬
피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보다 대단히 낫다는 것은 명백하다. 맹세의 성스러움은
필수적이고, 우리가 잘못된 맹세가 처벌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잘못된 맹세를 하더라도 처벌 받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더욱 신뢰해야하는 것은 명백하다. 개화된 도시에서 심지어 나쁠지라도 하나의 종
교를 갖는 것이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보다 훨씬 유용할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Voltaire 1994,
85).
19) 그렇지만 분명 유교를 유신론의 범주로 끌어들이는 등 볼테르가 무신론의 범주를 축소시킴으로써 보다 보편적인 관용의 범주를 제시했다는 황
태연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볼테르에게 그리스도교의 인격신이 아니더라도 초월적 존재가 가정된 모든 종교는 유신론인 것
이다. 그러나 볼테르가 그의 많은 저작에서 ʻ신ʼ(Dieu)을 그리스도교의 신과 같은 인격신의 형태로 묘사한다는 점을 볼 때 그에게 여전히 그리
스도교가 ʻ가장 일반적인ʼ 종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가 인격신이 존재하지 않는 종교들을 그리스도교와 동등한 수준의 종
교로 인정했는지는 추가적인 고민이 필요한 주제다.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

47

베일은 무신론을 옹호하기 위해서 ʻ우상숭배ʼ와 ʻ광신론ʼ이라는 사회적으로 관용받지 못하는 두 신념을 비
교하고, 무신론이 두 신념에 비해 사회적으로 훨씬 긍정적인 신념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볼테르는 우선
적으로 우상숭배자가 무신론자보다 낫다고 논박했다. 그는 단순히 우상숭배자와 무신론자를 ʻ어떠한 ʻ초월적
존재ʼ를 믿는냐 안 믿느냐ʼ로 구분하였다. 그가 볼 때 전자와 후자 간에 다른 차이가 없다면, ʻ초월적 존재ʼ를
믿는 우상숭배자가 당연하게도 더욱 신뢰할만한 맹세를 한다는 점에서 더욱 사회적으로 유용하고 바람직한
존재였다.
베일은 무엇보다 광신과 무신론 중 어떤 것이 더 위험한지 검토해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신은 확실히 천
배는 더 재난(죽음)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무신론은 유혈을 불러일으키는 열정을 조금도 고양시키지 않지만, 광
신은 그것을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무신론은 범죄들에 반대하지 않지만, 광신은 범죄들을 저지르게 한다
(Voltaire 1994, 85).

볼테르는 이어서 광신과 무신론을 비교한 베일의 논의를 언급했다. 볼테르도 광신이 무신론에 비해 실질
적으로 갈등과 박해를 불러온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베일의 논의대로 무신론자가 광신도들처럼 사회에
피를 불러오지 않는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볼테르는 그렇다 하더라도 무신론자가 더 위험하다는 점을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무신론자들은 사물의 불멸성 그리고 필연성에 대한 가정에 의존하는 창조, 악의 근원 그리고 다른 난관들을
그릇되게 추론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무모하고 정신나간 학자들의 대부분이다. 야심가들, 향락주의자들에게는 그
릇된 학설을 추론하거나 이해할 시간이 거의 없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와 루크레티우스20)를 비교하기보다는 다른
것을 한다. … [앞선 무지한 자들과] 신의 섭리도 미래의 삶도 믿지 않는 이론적 실천적 무신론자들로 거의 대부
분 구성된 로마의 원로원은 달랐다. 이 원로원은 향락적이고 야심에 찬 모두 매우 위험한 철학자들의 집회였고,
이들은 공화국을 파멸시켰다. 이러한 에피쿠로스주의는 황제들 치하에서 살아남았다. 원로원의 무신론자들은 술
라와 카이사르의 시절동안 반란분자들이었고,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 밑에서 노예 상태의 무신론자들이 될
것이었다. … 만약 내가 군주였다면, 무신론자인 궁정인과 관계를 맺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날 독살하려는 데
에 흥미를 가질 것이다. … 따라서, 군주들과 신민들에게는 지고의 존재, 창조자, 지배자, 보답하는 사람, 징벌
자라는 개념이 그들의 정신에 깊이 새겨져야 한다(Voltaire 1994, 86).

볼테르는 무신론자들의 사상이 기본적으로 ʻ신ʼ이 가정하는 ʻʻ불멸성ʼʼ 혹은 ʻʻ필연성ʼʼ 등에 대한 이해가 수반
되지 않은 이들의 생각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그가 생각하는 대부분의 역사 속의 무신론자들은 국가 혹은 군
주에게 충성을 바치기보다는 자신들의 현세의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테르에
게 무신론자들은 체계가 잡히지 않은 ʻ위험한ʼ 주장을 하는 ʻʻ학자들ʼʼ 혹은 현세적 가치만을 추구하는 ʻʻ야심가ʼʼ
나 ʻʻ향락주의자ʼʼ에 불과했다. 이처럼 볼테르는 정치적 공동체 안에 존재하는 무신론자들을 단순히 ʻ신의 부재
ʼ라는 관념을 지닌 개인으로 보기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했다.
20) 기원전 1세기의 유물론 철학자로서 에피쿠로스주의자였다. 그의 저작인 󰡔만물의 본성에 대하여󰡕는 에피쿠로스의 원자론 및 쾌락설을 상세히
논하였다. 이처럼 실제로 유물론적 무신론자였던 루크레티우스에 비해 앞서 인용된 소크라테스는 무신론이라는 죄목으로 사형에 처해질 뿐,
실제로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제자인 플라톤의 사상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볼테르가 무신론자들이 두 철학자에 대한 비교를 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까닭은 무지한 무신론자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48 한국정치학회보 제48집 제1호

이어서 볼테르는 베일이 말한 바람직한 무신론자로 구성된 사회의 존재를 비판했다. 볼테르가 볼 때 베일
이 언급한 역사상의 무신론자들은 매우 작은 소국들, 즉 신을 ʻ전혀ʼ 갖지 못한 국가의 사람들이었다. 즉 무
신론자인 그들은 ʻ신을 믿지 않은 것ʼ이 아니라 신이라는 존재를 알지도 못하기에 ʻ신을 부정도 확신도 하지
못한 것ʼ이었다. 따라서 볼테르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ʻʻ무신론자도 유신론자도 아무 것도 아닌ʼʼ 일종의
ʻʻ아이들ʼʼ이었다(Voltaire 1994, 86-87). 따라서 그들을 바람직한 무신론자의 사회를 보여주는 사례로 제시
한 베일의 논의는 설득력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들에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끌어낼 것인가? 무신론은 통치자들에게도 통치를 받는 이들에게도 가
장 유해한 괴물이다. … 그것은 광신만큼 죽음을 초래하지 않지만, 그것은 거의 항상 미덕에 치명적이다. 덧붙여
서 오늘날에는 과거 어느 때보다 무신론자가 특히 적다. 그것은 철학자들이 생식세포 없이는 생육하는 어떠한
존재도 있을 수 없고, [일종의] 구상(dessein)이 없이는 어떠한 생식세포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또
한 밀은 먼지에서 결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내고 난 뒤부터이다(Voltaire 1994, 85-86).

이처럼 볼테르는 무신론이 국가의 통치를 위해 ʻ해악ʼ의 사상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강조했다. 그에게 광신
은 죽음이라는 직접적인 사회적 손실을 가져올 수 있지만, ʻʻ초월적 존재ʼʼ를 부정하는 무신론은 사회의 ʻʻ미덕ʼʼ
을 근본적으로 전복할 수 있는 더욱 위험한 사상이었다. 즉 ʻʻ초월적 존재ʼʼ 혹은 ʻʻ근원적 존재ʼʼ에 기반하지 않
는 ʻʻ미덕ʼʼ 혹은 ʻʻ맹세ʼʼ는 상호 간의 불신만 가중시킬 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볼테르의 이러한 ʻ신ʼ 혹은 ʻ초월적 존재ʼ에 대한 강조는 그가 이신론21)적 사고를 주장한 사실에 연유한다.
이러한 그의 이신론적 사고는 무엇보다 그의 종교적 관용 사상과 주장과 매우 잘 부합한다. 가톨릭과 같은
계시 종교가 갖는 비관용적인 맹신적 혹은 미신적 요소를 합리주의적인 ʻ신ʼ 혹은 이성적인 ʻ종교관ʼ을 가져옴
으로써 비판함과 동시에, 무신론자와 같이 사회를 붕괴시킬 위험이 있는 자들에게는 창조자로서 ʻ신ʼ 혹은 만
물을 다스리는 ʻ자연법ʼ을 선포하는 ʻ신ʼ을 제시함으로써 반박했던 것이다.
독특하게 인식되고 어떤 종교적 의식도 갖고 있지 않은 이신론이 실제로 하나의 종교인지에 대해 많은 사람
들이 의문을 제기한다. 대답은 간단하다. 창조주 하나님만을 인정하는 사람, 하나님 속에서 무한한 힘을 가진 존
재만을 인정하는 사람 및 피조물들 속에서 경탄할 만한 기계만을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종교적이지 못하
며, 이것을 중국의 황제를 유럽 사람이 동경한다고 해서 이 사람이 황제의 신하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
모든 종파들은 거짓이며 자연법은 진실하다. 모든 종파들이 서로 다른 것은 이것들이 인간으로부터 유래하기 때
문이며, 도덕이 어디서나 같은 것은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이다(ʻʻArticle Déismeʼʼ 󰡔Dictionnaire
philosophique󰡕; 세 2000, 74에서 재인용22)).

18세기 대다수의 계몽사상가들은 이성적인 ʻ신ʼ을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적 세계관의 붕괴를 막음과 동시에

21) 이신론은 인간의 공과에 대해서 상벌을 가해서 널리 만물의 섭리를 지배한다는 인격신에 대한 신앙에 대해서, 천지창조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창조행위 후에는 인간세계에 대한 자의적 개입을 중지하고, 자연에 내재하는 합리적 법에 의해서만 우주를 통치하는 것으로서의 신에 대한 신
앙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것은 유럽사상 중에서 17세기 후반의 영국 명예혁명으로 시작되는 시민사회의 발전과 자연과학의 흥기에 따라서 합
리적인 사변의 침투에 의해서 종래의 전통적 국교의 교의를 부인하고, 삼위일체나 계시ㆍ기적을 부정하고 성서의 상징적ㆍ비유적 해석을 채용
하는 이단으로서의 신학을 가리킨다(종교학사전 편찬위원회. 1998. ʻʻ이신론.ʼʼ 󰡔종교학대사전󰡕. 서울: 한국사전연구사. 1057-1058 요약.).
22) 필자가 참고한 󰡔철학사전 (Dictionnaire philosophique)󰡕판(1994, Paris: Gallimard)에는 존재하지 않는 장(章)이기에, 부득이하게 재인용하였다.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

49

그 세계관이 가진 계시적 속성을 지우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신론자들은 이성에 어긋나지 않는 ʻʻ긍
정적인 종교들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편적인 종교의 형태처럼 해석된다면 그러한 긍정
적인 종교들은 그들의 시각에서 모두 적절한 것ʼʼ이었다. 따라서 ʻʻ그들은 그들 국가의 종교를 받아들였고, 그
것의 법들에 복종할 것을 천명ʼʼ하는 보수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그들이 국가의 종교로 받아들였
던 ʻʻ기독교는 미신적인 종교ʼʼ가 아니라, ʻʻ이성을 지닌 것ʼʼ이었다. 즉 ʻʻʻ영원한 이성ʼ에 부합하는ʼʼ 기독교는 그
들의 이신론적 종교관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조할 수 있었던 것이다(Adam 1972, 16).

Ⅴ. 맺는 말
지금까지 필자는 볼테르의 관용 사상을 ʻ보편적 관용 사상ʼ이라고 해석한 기존의 연구에 반론을 제기하고,
그의 사상이 무신론자를 관용하지 않는 ʻ협의ʼ의 보편적 관용 사상임을 밝혔다. 그의 관용 사상은 당대의 정
치·경제적 맥락을 고려한 담론으로서 ʻ세속 질서 준수ʼ와 ʻ국가 이익ʼ이라는 세속적 가치가 우세하게 드러났
는데, 이러한 태도는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며 ʻ광의ʼ의 보편적 관용을 주장한 피에르 베일보다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중시한 ʻ협의ʼ의 보편적 관용을 주장한 로크의 태도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처럼 그가 종교적 관용을
주장함과 동시에 무신론자에 대한 배제를 강조한 이유는 종교적 불관용을 불러오는 ʻ광신ʼ은 죽음이라는 직접
적인 사회적 손실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한 사고였지만, 그보다도 무신론은 사회에 존재하는 미덕이라는 가
치를 초월적 존재를 부정하는 그 논리로 부식시킬 수 있는 더욱 위험한 사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볼테르는 그의 종교적 관용 사상을 통해 국가와 사회라는 세속적 이익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그런 맥락에서 볼테르는 로크의 관용론보다 더욱 ʻ세속적ʼ인 면모를 보였는데, 그것은 그가 일종의 세속적 국
가 종교를 주장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23) 로크는 볼테르와 마찬가지로 무신론자들을 배제함에 있어서는
국가와 사회의 안정이라는 가치를 강조하지만 동시에 영혼의 구원이 통치자의 ʻ참된ʼ 종교로의 강제적인 개종
을 통해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논변을 통해 신학적 종교의 본질을 보존하고자 했다. 반면 볼테르는 로크와
달리 종교의 속성인 ʻ영혼의 구원ʼ과 ʻ종교적 관용ʼ의 관계를 연결하지 않고, 신학적 종교가 아닌 세속적 국가
종교로의 지향을 주장했다. 이런 면에서 볼테르는 ʻ영혼의 구원ʼ이라는 종교의 본질적 문제의식을 배제한 채
로, 종교를 단지 국가와 사회를 위해 ʻ이용ʼ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볼테르의 주장은 이후 프랑스 대혁명의 과정에서도 일시적으로 실현되었다. 혁명 초기 국민의회
(Assemblée nationale)에서 채택된 ʻ인권선언ʼ(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 de
1789)에 의해 종교적 자유는 세속 질서에 부합한다는 조건에서만 보장된다고 명시되었고, 24) 이어서 ʻ성직자

23) ʻ세속적 국가 종교ʼ라는 개념은 볼테르의 저작인 󰡔철학사전󰡕의 ʻ종교ʼ장의 설명을 바탕으로 한다. 볼테르의 세속적 국가 종교론은 크게 두 가지
로 설명가능한데, 첫째는 그가 종교의 기원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는 신학적 관점을 배제하고 인류학적 관점으로 종교의 기원을 설명했다.
특히 그리스도교의 기원, 체계 등 모든 ʻ성스러운 것ʼ들을 인간 사회의 진보에서 나타난 하나의 과정 혹은 현상으로 치부함으로써 종교의 계시
적 속성을 부정했다. 둘째로 그가 성직자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그는 기존 신학적 종교의 성직자의 행태들을 비판하며, 궁극적으로 성직자를
국가의 ʻ가정교사ʼ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로 규정했다(Voltaire 1994, 445-457).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사상의 전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속적 국가 종교에 대한 그의 사상을 깊이 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지만, 이 논문에서는 지면의 제약 등을 이유로 상세히 다룰 수 없음을 아쉽게
생각한다.

50 한국정치학회보 제48집 제1호

에 관한 민사기본법ʼ(Constitution civile du clergé)에 의해 교회를 개편함으로써 ʻʻ프랑스 교회는 하나의
국민적 교회가 되었으며 동일한 정신적 분위기가 교회와 국가를 지배ʼʼ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ʻʻ주임사제들은
일요 설교 때마다 의회의 법령을 읽고 그것에 대한 주석을 달아ʼʼ 주어야했던 것이다(소부울 1984a, 192).
또한 이후 시민의 덕성을 고취시키기 위해 ʻ최고 존재ʼ(Être suprême)를 숭배하는 시민 종교를 제도화한 로
베스 피에르 그리고 황제로 집권한 이후 교회를 통치의 도구로 사용함으로써 교회를 긴밀하게 국가에 종속
시킨 나폴레옹도 볼테르의 주장을 일정부분 현실화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4) 제10조 누구도 자신의 발언이 법에 의해 확립된 공공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한, 종교적 입장을 포함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행위가 방해
받아서는 안 된다.

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

51

1차 문헌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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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르의 종교적 관용 사상

53

Voltaire’s Thought on Religious Tolerance:
Did He Advocate Universal Tolerance?
KANG Jung In · KIM Woo Young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ritique recent Korean scholars’ interpretation that
Voltaire advanced a theory of universal tolerance and suggest that his theory of
tolerance was a kind of universal tolerance in a narrow sense which did exclude
atheists from tolerance. His thought on tolerance was a discourse which placed great
importance on politico-economic context. Thus it stressed the secular values such as
the maintenance of secular order and national interests which would be brought about
by tolerance. Such attitude of Voltaire was closer to Locke’s theory of universal
tolerance in a narrow sense than to Pierre Boyle’s theory of universal tolerance in a
wide sense which included atheists for tolerance, advocating the freedom of
conscience. The primary reason why Voltaire excluded atheists from tolerance, while
being generous enough to include superstition, Confucianism, and the like into a kind
of theism was that he thought that atheism was more dangerous than fanaticism by
denying a superior being and thus incapacitating fundamental social values such as
keeping promises and oaths and building trust which were thought indispensable to
the maintenance of social order, although he acknowledged that fanaticism which
brought about religious persecution might incur serious social damages such as
massacre and banishment

Key words : Voltaire, religious tolerance, atheist, Pierre Bayle, John Locke

영문 목차·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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