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인·장원윤. 2014. “19세기 유럽 보수주의와 조선 위정척사파의 근대 서구문명
19세기 유럽의 보수주의와 조선
위정척사파의 근대 서구문명 비판:
프랑스·독일의 복고적·권위적 보수주의와
1) 화서학파의 위정척사사상을 중심으로*
강 정 인
서강대학교·장
원 윤
서강대학교
논/문/요/약
지구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형성 과정에 있는 전지구적 정치사상은 비서구 지역의 정치사
상을 서구 정치사상과 대등하게 포함(incorporation)하고 인정(recognition)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전망을 염두에 두고 이 글은 조선의 위정척사사상을 19세기 유럽의 보수주의와 비교
하면서 이를 통해 위정척사사상을 근대적 보수주의의 한 유형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목적으
로 한다. 이를 위해 19세기 프랑스·독일의 복고적·권위적 보수주의와 화서학파의 위정척사사
상을 집중적으로 비교했다. 그 이유는 근대 서구문명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위정척사사상이
유럽의 복고적·권위적 보수주의와 유사한 입장과 반응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먼저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와 위정척사파가 근대 서구문명을 구성하는 철학적 지주인 계몽주의와 자유
주의에 대해 제기한 비판을 분석하고 상호 비교했다. 이어서 19세기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
와 조선의 위정척사사상이 각각 자국의 보수주의 사상사 전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
펴보았다.
<주제어> 위정척사 사상, 화서학파, 복고적·권위적 보수주의,
계몽주의, 자유주의, 유인석, 메스트르
* 이 논문은 2011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사회과학연구지원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습니다(NRF-2011-330-B00010).
원고접수일 : 2014년 4월 17일, 심사일 : 2014년 4월 24일, 게재확정일 : 2014년 5월 23일
19세기 유럽의 보수주의와 조선 위정척사파의 근대 서구문명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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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며
지구화 시대의 도래와 함께 형성 과정에 있는 전지구적 정치사상은 비서구 지역의 정치사상을 서구 정치
사상과 대등하게 포함(incorporation)하고 인정(recognition)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전망을 염두에 두고
이 글은 조선의 위정척사사상을 19세기 유럽의 보수주의와 비교하면서 이를 통해 위정척사사상을 근대적 보
수주의의 한 유형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19세기 프랑스·독일의 복고적·권위적
보수주의와 화서학파의 위정척사사상을 집중적으로 비교할 것이다. 미국의 역사학자 비렉(Peter Viereck)은
19세기 유럽의 보수주의를 버크(E. Burke, 1729~1797)로 대표되는 발전적·입헌적 보수주의와 메스트르
(Joseph Marie de Maistre, 1753∼1821)로 대표되는 복고적·권위적 보수주의로 구분하여 이해한다.1)
영미를 중심으로 전개된 전자는 ʻʻ변화에 대해 전향적 자세를 보이며 의회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보수적 노선
을 추구ʼʼ한 반면,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된 후자는 ʻʻ전통적 권위를 지키기 위해 일체의 혁신을 반대ʼʼ
하고 프랑스 혁명 이전의 체제 또는 중세로의 복귀를 강력히 주장했다(비렉 1981, 14-15; 서병훈 1999,
61). 화서학파는 위정척사파 가운데 근대 서구문명과 그 영향을 받은 조선의 개화사상에 대해 가장 비타협
적으로 저항하면서 서구문명에 대한 일체의 전향적 접근을 거부한 세력이었다.2)
이처럼 프랑스·독일의 복고적·권위적 보수주의자(이하 ʻ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자]ʼ)들과 화서학파는
근대 서구문명을 전면적으로 거부했으며 기존 지배이념과 질서를 고수하면서 복고적 대안을 추구했다는 점
에서 어느 정도 공통분모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양자 간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들은
각각 기독교와 유교라는 상이한 지배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정치체제의 정당화 방식과 작동양식에서도
이미 근대 이전부터 많은 차이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념적·제도적 유산의 차이로 인해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자와 화서학파는 근대 서구문명을 비판함에 있어서도 상이한 개념과 표현, 논증방식을 구사
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이념사적 입지조건에서 근대문명의 원산지에서 발원한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와
달리, 수입지의 한계상 근대 서구문명을 간접적이고 단편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던 화서학파의 경우, 서구
문명에 대한 이해와 비판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자 간의 문제의식이 상통하며 내용적으로 수렴되고 있다면, 유럽 보
수주의와의 비교를 통해 조선 위정척사파의 보수주의에 대한 좀 더 깊이 있는 해석을 진행시킬 수 있을 것이
다. 서구문명에 대한 화서학파의 비판에는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계몽주의의 근대적
이성개념, 자유주의와 그것에 내포되어 있는 개인주의, 산업사회를 비판하는 논변, 나아가 기존 질서와 전통
을 신성시하며 가부장적 사회질서와 자급자족적 농업경제를 옹호하는 논변이 발견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화
서학파의 위정척사사상을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와 나란히 비교할 수 있는 이론적 지평을 확보하게 된다.
이런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이 글은 일단 제2장에서 위정척사사상을 보수주의 사상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
1) 이 글에서 필자는 비렉이 본래 ʻ반혁명적ʼ(counter-revolutionary)이란 용어로 표현한 것을 ʻ복고적ʼ이라는 용어로 옮겼다.
2) 위정척사운동은 이항로의 화서학파,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노사학파(蘆沙學派), 이진상(寒洲 李震相, 1818~1886)의 한주학파(寒洲學
派) 등 여러 학파에 의해 전개되었다. 이들 중 특별히 화서학파를 선택한 이유는 첫째 이들이 구한말 의병운동을 전개하면서 일반적으로 위정척
사파를 대표하는 학파로 인정되고 있는 점, 둘째 이들의 사상활동이 이항로, 김평묵(金平默, 1819~1891), 유중교(柳重敎, 1832~1893), 최익
현, 유인석으로 이어지며 일제 강점기 초반기까지 끈질기게 전개되었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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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는 그것이 한국 보수주의 사상사란 틀에서 연구될 수 있는지를 보수주의의 세계사적 흐름과 더불어 프랑
스와 독일의 보수주의 사상사를 개관하면서 검토하고자 한다. 제3장에서는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와 위정
척사파가 근대 서구문명을 구성하는 철학적 지주인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해 제기한 비판을 분석하고 상
호 비교할 것이다.3) 제4장에서는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와 조선의 위정척사사상이 각각 자국의 보수주의
사상사 전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Ⅱ. 보수주의의 세계사적 흐름에서 본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와 조선의
위정척사사상
19세기 서구 사회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측면에서 전대미문의 변화를 경험했다. 이와 같은 근대적
변화를 비판하면서 기존 질서와 지배이념을 옹호하고자 출현한 것이 근대 보수주의였다. 즉, 체계적 이념으
로서의 근대적 보수주의는 19세기 서구에서 ʻʻ근대화라는 역사적 사실과 근대화해야한다는 규범적 주장에 대
한 논리적 반대의 필요성과 함께 탄생ʼʼ했던 것이다(김병곤 2011, 20). 근대 서구문명이 세계적으로 확산되
면서 비서구 사회의 기존 지배세력 및 전통적 지식인들 역시 근대적 사회변화를 체계적·논리적·심층적으
로 분석·비판해야 하는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이후 근대 서구문명이 동아시아에 본격적으
로 침투함에 따라 동아시아에서도 체계적 이념으로서의 보수주의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우
리는 유럽에서든 동아시아에서든 보수주의가 발생론적 차원에서는 거의 유사하게 서구에서 발원한 근대문명
에 대한 반발과 비판으로부터 출발했다는 역사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한국 사상사에서 처음으로 출현한 보수주의는 위정척사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한국
현대정치사상을 연구할 때 위정척사사상을 보수주의 사상사에 체계적으로 포함시켜 다루지 않은 것이 지금
까지 국내학계의 일반적 연구경향이다.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을 19세기 말 개화사상까지 소급해서 연구하는
경향(이나미 2001)과 대조적으로 위정척사사상을 한국 보수주의의 기원으로 상정해서 연구하지 않는다는 점
은 일견 매우 당혹스러운 역설이다.4)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한국학계의 서양사상 연구에서 보수주의에 대한 연구가 근대적 사회변화에 대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3) 근대 보수주의는 계몽주의와 자유주의라는 근대 서구문명의 사상적 흐름은 물론 산업사회 및 자본주의라는 물질문명의 측면에 대해서도 신랄한
비판을 제기했다. 그리고 이 글에서 다루는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는 물론 화서학파 역시 산업사회 및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매우 선구적인 비
판을 제기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까지 활약한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자들은 산업문명과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농업사회를 옹호하긴 했지만,
아직 산업화와 자본주의화가 본격적으로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측면에 대한 비판이 계몽주의나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보다 단편적이고
피상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조선의 위정척사파 역시 자본주의나 산업사회에 대해 비판적 논점을 제기했지만,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본격적 폐해보
다는 서양 및 일본과의 통상에서 발견되는 불리한 교역조건이 초래하는 경제적 폐해 그리고 이득과 편리함 및 경쟁을 우선시하는 공리주의적이
고 쾌락주의적 경향에 대한 윤리적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에서 아직 본격화되지 않은 산업사회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그
들의 비판 역시 초보적이고 산발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조선과 유럽의 보수주의 사상의 근대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을 상세히 논하면서 비
교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지면의 제약도 있고 해서, 이에 대한 검토는 차후의 과제로 미루고자 한다.
4) 19세기 한국이란 시공간적 조건에서, 위정척사사상을 다루는 연구들은 개화사상을 진보사상으로, 위정척사사상을 보수주의 사상으로 규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강재언 1988; 이상익 1997). 그러나 한국 보수주의 사상사를 통시적으로 논할 때, 다시 말해 그것의 역사적 계보를 추적할
때 위정척사사상은 그 기원으로 검토되지 않고, 단지 고립된 전근대적 사상으로 이해되거나 아예 연구대상에서 배제되어버리는 것이 일반적 경
향이다.
19세기 유럽의 보수주의와 조선 위정척사파의 근대 서구문명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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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을 보이는 버크 등 영미 보수주의에 치우쳐 진행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에서 위정척사사상은 근
대 서구문명을 전면적으로 거부했기 때문에, 전통 사상의 완강한 저항일 수는 있어도 보수주의 사상으로는
간주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영미 보수주의가 근대 이전의 구질서를 이미 극복했거나 출발
부터 그것에 구애받지 않는 상황에서 출현한 것으로서, 보수주의의 세계사적 흐름에서 보면 지극히 예외적인
사례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강정인 2009; 볼·대거 2006, 175-231). 영미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
이나 국가들에서 근대 이전의 구질서는 영미와 달리 19세기까지도 공고하게 유지되고 있었고 근대적 사회변
화는 급진적 혁명이나 외부세력의 압력에 의해 추동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구질서는 그것이 급격히 전복되거
나 또는 그 위협에 직면한 것만큼이나 강렬한 반발로 대응했다. 가령 구질서를 일거에 전복시킨 프랑스에서
메스트르와 보날드 같은 보수주의자들은 근대적 철학(계몽주의, 합리주의), 정치제도(자유주의) 및 경제질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며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질서로 복귀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나폴레옹 전쟁과 같은
외부적 자극에 의해 근대화가 추진된 독일에서도 슐레겔(Friedrich von Schlegel, 1772∼1829)과 노발리
스 등 낭만적 보수주의자들은 중세사회를 독일적인 것, 근대사회를 비독일적인 것으로 구분한 후, 중세로의
복귀가 독일적인 것의 회복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면서 근대적 이념과 정치적 제도 및 문화를 전면적으로 거
부하였다. 마찬가지로 서세동점으로 근대 서구문명의 수용을 강요당한 한국과 중국에서도 ʻ전통에서 근대로
의 이행기ʼ에 기존 지배세력과 전통적 지식인들이 보여준 초기의 반응은 프랑스와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처럼
일체의 변화를 용납하지 않고 기존 질서의 수호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근대를 거부하고 혁명 이전의
구질서 또는 중세로의 복귀를 꿈꿨다고 해서 누구도 메스트르, 보날드, 슐레겔, 노발리스 등을 유럽 보수주
의자의 명단에서 삭제하려 하지 않듯이, 조선의 위정척사파의 사상 역시 보수주의 사상의 계보에 등재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둘째, 일제의 강점과 주권의 박탈로 비롯된 주체적인 민족사의 단절로 인해 위정척사파와 그들의 사상이
개화사상 등 다른 근대사상과의 지속적인 대결을 통한 자기쇄신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단절과 소멸의 운명
을 겪게 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결과 일제 강점기에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지닌 민족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각각 보수와 진보를 대변하게 되었고, 해방 후에도 한국의 보수와 진보는 이러한 전통을 계승한 세력
이 대변하게 되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위정척사사상이 이후에 출현한 한국의 보수주의 사상
에 의미심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거나 또는 양자 사이에 이념적 연속성이 상정될 수 없기 때문에 현대 한국
의 보수주의를 논할 때 위정척사사상을 논할 수 있는 이론적 공간이 사라졌다고도 풀이할 수 있다. 이런 이
유로 위정척사사상은 단지 전통사상의 끝자락으로, 곧 이후에 출현한 한국 보수주의와는 무관한 사상적 흐름
으로 자연스럽게 간주되었다. 이와 달리 근대로의 이행이 온건하게 진행된 영국과 미국의 경우, 보수주의 사
상은 급격한 단절을 겪지 않고 연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급진적 혁명이나 외세의 압력으로 추동된 프랑
스와 독일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급격하고 단절적으로 진행된 측면도 있지만, 주권을 상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통적인 보수세력이 근대적인 혁신세력과 투쟁하면서 자신의 이념적 입장을 쇄신하여 보수주의 사상을 ʻ근
대화ʼ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고, 그리하여 명맥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정척사사상은 조선왕조와 그
운명을 같이함으로써, 이후에 전개되는 보수주의 사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인해
현대 한국의 보수주의는 19세기 말 위정척사파의 보수주의 사상과는 단절된 것으로 인식되고 나아가 위정척
사사상을 한국 보수주의 연구에 포함시키지 않게 된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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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위정척사파의 비판에 내재해 있던 반감과 문제의식 그리고 수호하고자 했던 유교의 핵심 가치와
정서는 한국 현대 보수주의자에게 적지 않게 유전된 정황이 포착된다. 일례로 한국 현대 보수주의자들은 대
부분 민족적 생존과 번영의 명분하에 근대화를 열성적으로 추진했지만(근대화 보수주의), 동시에 문화적 측
면에서는 삼강오륜, 충효 등의 전통 가치를 민족의 전통이념과 정서로 간주하여 옹호·고수하고자 했고, 유
교적 가족질서를 보존하고자 노력했다(문화적 보수주의). 이 점에서 위정척사사상은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개인주의 등 서구 근대문명의 주요 이념 및 가치들에 대해 한국 보수주의자들이 일관되게 드러내는 반감과
문제의식, 수호하고자 하는 가치와 정서의 원형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펴기 위해서는 유럽
의 복고적 보수주의가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해 제기한 비판과 유사한 또는 그에 수렴하는 내용의 비판
이 위정척사파에게서도 발견되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III장에서는 근대 서구문명의 철학적
핵심인 계몽주의 그리고 정치적 핵심인 자유주의에 대한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와 화서학파의 비판을 비
교·검토하겠다.
Ⅲ.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와 화서학파의 근대 서구문명 비판;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1. 계몽주의 비판: 불완전한 다수와 완전한 소수의 구별 짓기
근대 이전의 인간은 기존 질서를 정당화하는 종교적 권위 등이 부과하는 외재적 규범에 맞춰 생각하고 행
동해야 하는 존재였다. 인간은 원죄 또는 인욕(人慾)을 태생적으로 내장하고 있기 때문에, 외재적 규범의 통
제가 없다면 타락하게 될 것이며 사회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질 터였다. 그러나 근대의 계몽주의는 이
성 중심의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함으로써 근대 이전의 인간관을 부정했다. 근대적 인간은 각자에게 본유(本
有)한 이성을 통해 세계의 인과성, 사태의 유·불리, 윤리적 가치의 타당성을 스스로 인식·판단하고, 이에
입각해 자기 행동의 준칙을 독자적으로 설정한다. 또한 인간은 이러한 이성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사회규범을 집단적으로 창출할 수 있다. 이성을 통해 인간은 그 자신과 세계에 대한 지식을 나날이 축
적해가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인간과 세계를 무한히 진보시켜간다. 인간은 무한한 완성가능성을 지닌 평등
한 존재로 규정된다(코젤렉·마이어 2010). 이제 이러한 계몽주의에 대한 조선과 유럽의 보수주의 사상의
비판을 비교·검토해 보기로 하자.
1)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의 근대적 이성개념 비판
계몽주의에 의한 근대적 인간 이해가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이 사회계약론이다. 홉스·로크·루소 등이 제
시한 사회계약론은 그들 각자가 처한 정치적 환경과 독자적인 사상에 따라 의미심장한 차이를 보이기도 하
지만, 모두 동일한 가정 위에 서 있었다는 점에서 계몽주의의 산물이었다. 그것은 곧 모든 인간이 이성을 통
19세기 유럽의 보수주의와 조선 위정척사파의 근대 서구문명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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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자신의 정념 또는 욕망이 초래할 수 있는 파국을 인지할 수 있고, 이것을 합리적으로 통제하면서 자기보
존을 도모할 수 있는 최적의 사회상태를 집단적으로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메스트르는「정치적 헌정의
일반 원리에 관한 시론(Essay on the Generative Principle of Political Constitutions)」에서 사회계약론
이 공유하고 있는 이러한 가정을 예리하게 비판했다.
이 시대에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는 가장 큰 오류 중의 하나는 정치적 헌정(a political constitution)이 선험
적으로 씌어질 수 있고 창조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성과 경험은 헌정이 신의 역사(役事)라는 것, 한
나라의 법률들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으로 가장 구성적인(constitutional) 요소들이야말로 문서화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De Maistre 1971, 147; 151도 참조).
이처럼 메스트르에게 정치적 헌정은 소수의 몇몇 정치가들이 모여 숙의를 하고 그 결과를 문서화된 형태
로 남긴 물리적 형태의 법전이 아니다. ʻʻ인간의 이성은 세계의 인과성을 예측하는 데 한계를 가지며ʼʼ(De
Maistre 1971, 105), 그런 이유로 이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헌정의 기본 원칙을 총체
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 ʻʻ오히려 중요한 것은 편견이며, 역사를 통해 형성된 국가의 정신이다ʼʼ(De Maistre
1971, 108). 따라서 메스트르는 헌정체제가 신의 개입과 역사(役事) 및 초월적 권능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한다. 인간은 기존 질서를 ʻʻ수정(modify)할 수 있을지언정 창조ʼʼ할 수 없으며, 또 ʻʻ
헌정의 구성에 있어 인간의 역할은 지극히 부수적인 역할 또는 단순한 도구로서의 효용성만 가질 뿐이다ʼʼ
(De Maistre 1971, 77, 151).
계몽주의는 인간의 본성을 이성과 정념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낙관적인 인간관에 따르면
이성과 정념은 수평적 대립관계가 아니다. 자연상태의 귀결을 ʻ만인에 대한 만인의 전쟁ʼ 상태로 상정한 홉스
에게조차, 인간은 이성을 통해 그와 같은 전쟁상태가 자신에게 불리함을 타산하고 정념을 절제하면서, 자신
의 권리를 국가에 양도하는 합리적 판단력을 지닌 존재이다. 즉, 이성과 정념은 인간 본성의 실재적 요소로
서 병존하지만, 최종적으로 이성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다.
반면 메스트르에게 있어 한편으로 사회적 질서를 추구하는 인간의 지성·숭고함과, 다른 한편으로 사회를
붕괴시키고 더 나아가 인간 자신을 파괴할 수 있는 무한한 욕구와 절제되지 않는 권력욕은 명백히 대립적이
며, 전자보다도 후자가 훨씬 더 강력하다. 전자는 본질적으로 신의 속성이며, 독실한 신앙심과 높은 지성을
통해 지향해야 할 것이란 점에서 가능태라면, 후자는 인간의 육신에 속한 실체적 속성이며 자연적이란 점에
서 현실태이다(Lively 1971, 10-11; Maistre 1971, 98, 118). 메스트르에 따르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속성을 온전하게 구현할 수 있는 인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 군주, 고귀한 귀족 등 소
수가 ʻʻ구원적 진리의 저장소이자 수호자ʼʼ로서 ʻʻ무엇이 악하고 선한 것인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지ʼʼ를 어리
석은 다수 대중에게 가르치는 사명을 떠맡고 있다(De Maistre 1971, 269).
따라서 메스트르에게 인간 이성에 전적으로 의지해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실
천에 옮긴 프랑스 혁명과 같은 사건은 그야말로 지옥문을 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에게 가톨릭 교회와 군주
제는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조화로운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방향에서 긍정적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신에
의해 창조된 최적화된 사회 질서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질서를 인간을 구속하는 낡은 제도로 치부하고,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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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자명한 인간의 이성에만 의존해서 새로운 사회질서를 창조하겠다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정적 방향
에서 활용하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훔친 것처럼 신에게 도전하는 오만한 행동이며,
창조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이러한 행동은 ʻʻ부정적이며, 단지 파괴로 귀결ʼʼ될 뿐이었다(De Maistre 1971,
170).
독일 보수주의자들도 인간이 이성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독
일의 낭만주의자 아담 뮐러(Adam Heinrich von Müller, 1779∼1829)도 메스트르처럼 신의 섭리에 의해
서 창조된 그리스도교적 헌법이야말로 ʻʻ세상이 아는 최초의 유일한 정치적 헌법ʼʼ이며, 따라서 인간의 이성을
통한 사회 창조는 허상일 뿐이며, ʻʻ모든 가족생활, 작은 국가 및 큰 국가ʼʼ의 해체만 야기할 뿐이라고 경고했
다(Viereck 1956, 133-134에서 재인용). 뮐러와 동시대에 활동한 슐레겔 역시 순수한 공화주의는 갈등을
조장할 뿐이고, ʻʻ전반적인 혼란과 파괴를 초래ʼʼ하며, 그 결과 ʻʻ자유는 방종으로, 민주주의는 우민정치로 타락ʼʼ
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슐레겔 1990, 63). 그는 프랑스혁명의 결말에 대해 그것은 ʻʻ신과 모든 신적 토
대로부터 완전히 이탈된 신이 없는 자유의 시대ʼʼ라고 비난했다(슐레겔 1990, 65). 독일의 보수주의자들은
평등에 대해서도 적대적이었는바, 김천혜에 따르면 ʻʻ노발리스는 ʻ인간의 자연상태로서의 불평등ʼ을 들어 불만
을 표시했고 아이헨도르프는 그것을 ʻ야만적 등화ʼ(等化)라면서 욕설을 퍼부었다ʼʼ(김천혜 1980, 132). 뮐러와
슐레겔은 봉건적 신분질서에 기초한 위계적 국가가 인간의 자유를 가장 영구적으로 보장하며 인류의 교육에
효과적으로 기여한다고 생각했다(박종훈 1988, 84; 슐레겔 1990, 63-64).
프랑스 혁명과 그것이 제시한 자유·평등 같은 정치적 가치에 대한 이와 같은 부정적 인식은 독일의 낭만
적 보수주의자들의 반계몽주의 성향에서 비롯된 측면이 없지 않다. 그들이 볼 때, 계몽주의가 제시하는 이성
적 존재로서의 상호 동등한 인간이란 궁극적으로 인간 욕망의 무분별한 발산을 긍정하는 것이며, 동시에 그
것의 초극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었다. 따라서 본래의 의도와 달리 이런 인간관은 인간을 하
향 평준화시키는 것이며, 기존 사회를 마침내 ʻ저속한 속물들의 이익사회ʼ로 타락시킬 것이었다. 나아가 이들
은 계몽주의를 프랑스 혁명이라는 특정 사건 또는 프랑스라는 국적과 연결시켜 이해했다. 이들 다수는 초기
에 프랑스 혁명을 지지했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맞이하면서 원래의 입장을 철회하고 독일적 정체성의 수호를
역설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독일적 정체성이 희미했으며, 그것을 담을 수 있는 민족적·국가적 틀이
부재했다는 점이다. 이런 조건으로 인해 이들의 정서와 사고는 관념적 보수주의를 지향하게 되었다. 독일 보
수주의자들은 중세 독일을 낭만적으로 이상화하고 이처럼 추상화된 전통적 가치와 이념을 수호하고자 했다
(OʼSullivan 1976, 58-81).
2) 화서학파의 이기론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계몽주의는 문명개화라는 단어에 응축되어 유입되었다. 유길준에 따르면 ʻʻ개화란
인간 세상의 천만가지 사물이 지극히 선하고도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는 것ʼʼ이다. ʻʻ사람의 지식은 세대를 거
듭할수록 신기한 것과 심묘(深妙)한 것들이 쌓여져 나온다.ʼʼ 그래서 ʻʻ개화한 자는 천만 가지 사물을 연구하고
경영하여 날마다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기약한다ʼʼ(유길준 1995, 325, 332, 326). 그런데 이처럼
개화사상이 급속히 확산되고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를 개조·변혁하려는 시도가 이뤄지던 시기에 화서학파는
19세기 유럽의 보수주의와 조선 위정척사파의 근대 서구문명 비판
239
이(理)와 기(氣)의 대립관계를 강조하는 방향에서 인성론을 전개하며 기존 질서를 보수하는 논리를 구축하고
자 했다.5)
화서학파의 창시자인 이항로는 ʻʻ理를 주로 하여 氣를 통솔한다면 어디에 가든 선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
나 氣를 주로 하여 理를 어기게 된다면 어디에 가든 흉하지 않음이 없다ʼʼ고 말하면서 理와 氣를 선과 악으로
분명하게 구별 짓고 있으며, 전자가 후자를 지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華西雅言 1권 「形而」).6) 이에 따라
이항로에게 形氣가 발현한 인간의 욕망은 악한 것, 오로지 부정적인 것으로서 당연히 덕성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이와 달리 理는 ʻʻ스스로 純善하고 악함이 없는 것ʼʼ으로서 신묘하게 작용하여 본체를 확립하고 만물의
동정(動靜)·유행(流行)을 주재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華西集 24권 「雜著」 妙字說).7) 그런데 理의 신
묘한 작용을 인식하고 체득할 수 있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유교의 이상적 인간형인 성인과 그의 가르침을 따
르는 소수의 현인으로 국한된다. 다수의 인간은 욕망에 갇혀 살 수밖에 없다.
화서학파는 무형무위의 理가 성인을 통해 육화되며, 이를 통해 정치사회 제도가 창조된다는 견해를 피력
한다.8) 성인은 천리의 담지자로서 하늘을 본받아 정치사회 제도를 창시했고, 이로써 문명을 창도한 최고의
인간, 신적 존재들이다. 유인석은 요임금, 순임금과 같은 고대 성왕들이 倫常禮制를 가르쳤고, 공자가 이를
집대성하여 후대의 철인들에게 전수해줬다고 말한다(毅庵集 51권 「宇宙問答」). 그런 이유로 이처럼 존귀
한 성인들이 만든 제도를, 사회계약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형기에 구속된 범인이 개조·변혁한다는 것은
화서학파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며, 무척이나 위험하고 파괴적인 결과가 예정된 일이었다. ʻʻ옛날의 성왕
과 현신은 신통하고 명철한 지혜와 식견이 천도에 달하고 사람의 이치를 꿰뚫고 헤아려서 법을 세웠으니 이
법은 지극히 좋고 치밀한ʼʼ 것이다.9) ʻʻ세태에는 고금(古今)이 있지만 인성(人性)에는 고금이 없다. 착한 본성
으로 옛날의 법도를 행하면 된다ʼʼ(毅庵集 51권 「宇宙問答」).10)
화서학파는 理와 氣의 가치상의 우열관계를 인간의 심성을 넘어 정치적·사회적·문명적 영역에까지 확
장하고 있다. 이런 대립은 중심과 주변의 위계질서 또는 가치의 우열관계를 가지는 것으로 발전된다. 화서학
파의 세계관을 이승환(2012)의 논의를 참조해 도식화해 보면 아래와 같다.11)
5) 이상익에 따르면 화서학파의 창시자인 이항로는 ʻʻ理와 氣의 관계를 상자(相資)와 상항(相抗)이라는 이중적 측면에서 규정한다ʼʼ, 여기서 상자는
理와 氣가 서로 돕고 이루어 주는 관계를 말하며, 상항은 서로 대립하고 해치는 관계임을 말하는 것이다(이상익 2005, 4). 이항로는 理와 氣의
관계를 本-具의 맥락에서는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설정하나, 天理-人欲의 맥락에서는 理를 ʻ善·眞ʼ으로, 氣를 ʻ惡·妄ʼ으로 규정하면서 상호 대
립적 관계로 설정한다(이상익 2005, 8-9). 이항로를 비롯한 화서학파의 위정척사논변에서 理와 氣는 천리-인욕의 맥락에서 상항(相抗)적으로
논의되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서세동점의 시대적 조건이 그들로 하여금 다른 어떤 성리학자들보다 강력한 어조로 理와 氣를 선악
의 측면에서 엄격히 구분하면서 양자의 상호 대립성과 더불어, 氣에 대한 理의 주재성을 더욱 당위적으로 역설케 했던 것이다.
6) 以理爲主而率其氣, 則無往而不善, 以氣爲主而反其理, 則無往而不凶.
7) 理者, 氣之根本也 …理者, 氣之準則也…理者純善無惡.
8) 유인석은 기독교 및 당대의 신흥종교(단군교, 천도교 등)를 비판하면서 ʻʻ크게 하늘에 화합하는 것을 일러 聖이라 하고 성스러우나 알지 못하는
것을 神ʼʼ이라 하니 ʻʻ따라서 비록 신으로서 말하더라도 성인이 곧 신ʼʼ이라고 주장한다(大而化之之謂聖, 聖而不可知之之謂神, 雖以神言, 聖人是
神者也.-毅庵集 51권 「宇宙問答」). 성인이 예악형정의 제정자라는 것은 유교 문명권의 전통적 관념이었다. 그런데 유인석은 서구의 사상 및
종교의 도전에 직면하여 종래의 성인 개념을 더욱 절대화·신격화하고 있다.
9) 古之聖王賢臣神明智見, 達天道曉人理, 裁量立法, 盡善盡密.
10) 世級雖有古今, 人性本無古今, 以性之善, 行古之善.
11) 이에 대해서는 이승환이 제시한 표 [화서의 대결적 ʻ횡설ʼ 프레임]를 참조할 것(이승환 2012, 330).
240 한국정치학회보 제48집 제2호
ʻ理ʼ
ʻ氣ʼ
천리(도리)
중심
성인
도학(道學)
선
정
귀
중국(華)
문명
유교문명
형기(인욕)
주변
범인
사학(邪學)
악
사
천
외국(夷)
야만
근대 서구문명
화서학파가 조선 성리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가운데, 理와 氣를 엄격히 구분하고 可惡한 氣에 대한 순선한
理의 통제를 강조하는 방향에서 그들의 이기론(理氣論)을 전개해 나갔던 것은 아무래도 조선 말기의 시대적
산물로 봐야 할 것이다. 조선왕조의 기존 질서와 지배이념에 대한 도전이 내외에서 동시에 제기되던 때에 화
서학파는 자신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이론적 개념틀인 이기론을 기존 질서를 개조·변혁하는 담론들을 최대
한 저지·봉쇄하는 방향에서 재구성했던 것이다(이승환 2012, 327-329).12) 그렇다면 화서학파의 이런 사
상은 어떤 점에서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자들과 일맥상통하는 것일까? 다음 절에서 이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3) 복고적 보수주의의 근대적 이성개념 비판과 화서학파의 이기론 비교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자들과 화서학파는 공통적으로 다수의 인간이 선보다는 악을 추구할 가능성이 높
다고 보았으며, 예외적 소수만이 이런 경향성에서 벗어나 인간의 욕망을 극복하고 도덕적 인격체로서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이와 같은 예외적 소수는 성직자와 귀족 또는 사대부 등 기존 지배세력일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당연히 기존 사회의 신분적 위계질서는 부와 권력이 아닌 도덕적 우열에 기반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처럼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자들과 화서학파는 공통적으로 평범한 인간들보다 우월한 존재,
신적 존재만이 사회를 창조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다수 인간의 도덕적 한계를 통제·관리하는 외재적 규범
을 부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재를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이 신 또는 성인이 만든 사회와 그것을 시비할
수 있는 권리는 없었다. 메스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기존 사회와 그것의 규범을 ʻ수정ʼ할 수는 있었다. 이것은
유인석이 말하는 변통개념과 맞닿아 있었다.13) 그러나 수정과 변통 모두 전체의 보존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것은 신 또는 성인이 창조한 질서의 원형을 회복하는 것 또는 원형을 유지하기 위한 주변적 개혁을 의미할
뿐이었다.
12) 이승환에 따르면 ʻʻ화서는 당시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악의 근원을 ʻ기ʼ의 탓으로 돌린다.…퇴계는 비록 ʻ기ʼ를 ʻ리ʼ와 갈등하는 관계로 보았지만
아예 멸절시켜야 할 ʻ악ʼ 덩어리로 여기지는 않았다ʼʼ(이승환 2012, 331). 서구의 압력과 국내 정치사회질서의 위기는 ʻʻ화서로 하여금 극단적인
이항대립적 사유형식을 취하게 만들었다. 화서는 확고한 위정척사의 문제의식 아래 ʻ기ʼ의 발동만을 인정하고 ʻ리ʼ를 죽은 물건[死物)]처럼 여기
는 율곡학파의 이기론은 주자학에서 어긋나는 삿된 견해라고 비판한다ʼʼ(이승환 2012, 332).
13) 유인석은 여름에는 갈옷을 입고 겨울에는 가죽옷을 입는 것은 때에 따라 옷을 변통하는 것이니 그처럼 서양의 전쟁기술과 병기 등 그 밖의 장
점을 취할 수 있고 이는 실로 부득이한 일이라고 주장한다(毅庵集 51권 「宇宙問答」).
19세기 유럽의 보수주의와 조선 위정척사파의 근대 서구문명 비판
241
2. 자유주의 비판: 권위 안의 자유, 권위 밖의 방종
근대적 이성개념, 즉 계몽주의의 확산은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 운동을 낳았다. 이성적 인간은 정치영역
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으로 호명되고, 정치공동체는 합리적 개인들의 총의에 따라 건설·운영되는 것으
로 사고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는 기존 사회의 신분적 위계, 관습, 제도 등을 개인의 권리를 억압하는 것으
로 간주하고, 이로부터 개인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ʻ개인의 자유ʼ, 이것이 자유주의의 핵심구호였
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ʻ자기 멋대로의 자유ʼ를 주장했던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보수
주의 또한 자유를 부정하지 않았다. 자유라는 개념을 외래문명에서 유입된 이단사상으로 바라봤던 위정척사
파에게서도 그들의 논의를 깊이 있게 살펴보면 개념화되지 않은 자유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간의 자유에 관한 이견은 자유와 방종을 경계 짓는 방식의 차이, 더 나아가 개인의
자유를 규제하는 권위에 대한 입장의 차이에서 발생한다. 자유주의의 창시자 중 하나인 로크의 자유 개념은
자연법이든 실정법이든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이성에 따라 스스로를 규율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결국 자유와 방종의 경계는 ʻ인간이 이성을 통해 자기를 규율하느냐 하지 않느냐ʼ에서 갈리는 것이며, 법이
자기 규율의 준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사회에서 개인의 자유는 법적 권위를 통해 규제되는 바, 여기
서 법은 그 권위를 이성적 개인들의 동의로부터 부여받게 된다(로크 1996, 29).
반면, 근대 이전 기독교에서 자유는 신 안에서만 추구될 수 있는 것이었다. 기독교적 시각에서 신을 벗어
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사악한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이었다. 자유와 방종의 경계는 신이 부여한 율법과
정치사회적 질서에 따르느냐 여부에서 그어진다. 피조물의 자유는 신적 권위에 의해서 규제되는 것이고, 이
때 신적 권위는 인간을 초월하여 선재하는 것이며, 인간의 동의 여부와 상관없이 바깥에서 부과되는 외재적
인 것이다. 신적 권위에 순응함으로서 인간은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얻고 선한 삶을 살게 된다(문지영
2009, 33). 이와 같은 기독교적 자유개념은 서구 보수주의에서 거의 그대로 재현된다. 그리고 유교에서도
유사한 관념이 포착되며, 이러한 내용은 화서학파의 자유 비판에서도 뚜렷하게 발견되고 있다. 즉, 그것이
신의 권위이건 국가의 권위이건 또는 성인의 권위이건, 인간의 자유는 그 권위 속에서 성립되는 것이며, 권
위를 이탈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방종일 뿐이다. 이제 이들 각각이 어떤 논의를 펼치고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의 근대적 자유개념 비판
「프랑스에 관한 성찰(Considerations on France)」에서 메스트르는 프랑스 혁명에 관한 비판의 서두를
기독교적 자유개념으로 시작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규제하면서도 노예화시키지는 않는 유연한 사슬에 의해 최고의 존재의 권좌에 묶여 있다.
만물에 관한 보편적 기획에서 가장 경이로운 측면은 신의 지도하에 있는 자유로운 존재들의 활동이다(De
Maistre 1971, 47).
여기서 ʻʻ유연한 사슬ʼʼ은 인간을 방종으로 흐르지 않게 보호해 주는 것, 그리하여 진정한 자유를 가능케 해
242 한국정치학회보 제48집 제2호
주는 근거로 이해할 수 있다. 메스트르에게 있어 이것은 곧 사회이며, 사회를 구성하는 법과 정부, 다시 말
해 정치적 권위였다. 이 점에서 프랑스 혁명과 그것을 촉발시킨 사회계약론은 인간 자유의 근거를 파괴하고,
인간을 방종으로 치닫게 하여 마침내 무지와 악덕의 사슬에 얽매인 노예로 전락시킬 수 있는 인류사의 대사
변이었다. 메스트르는 「주권에 관한 연구(Study on Sovereignty)」에서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비판하면서 ʻʻ인
간에게 있어 사회 이전의 시간은 있을 수 없다ʼʼ면서 ʻʻ사회는 인간의 작품이 아니며, 창조주의 의지가 작용한
직접적인 결과ʼʼ라고 말한다. 자연상태는 상상의 산물로서 이를 근거로 인간의 자유를 논할 수는 없다. 한마
디로 말해, ʻʻ사회계약에 관한 모든 이론은 몽상이다ʼʼ(De Maistre 1971, 126). 당연한 말이지만, 메스트르에
게 ʻʻ모든 주권은 신으로부터 유래했다… 그것은 본성상 하나이며 절대적이고 신성불가침하다ʼʼ(De Maistre
1971, 114). 결론적으로 인간은 신이 창조한 사회에서 신의 의지로 구성된 법과 정부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
다. 그랬을 때, 인간은 비로소 무지와 방종, 악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된다.
메스트르의 뒤를 잇는 프랑스 보수주의자 보날드(Bonald)도 자유주의적 자유 개념에 대해 그의 선배 사
상가와 유사한 비판을 전개하고 있다. 니스벳은 개인과 사회, 자유와 권위에 대한 보날드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개인이 아니라 사회가 보날드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그 사회는 신에 의해 직접적으로 창조된 것이었다. 개
인이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개인을 형성한다. 사회의 지배적인 목적은 개인의 자유가 아닌 권위
이다. 인간은 오직 가족, 교회, 지역공동체, 길드 아래에서만 번성할 수 있다. 위계질서(hierarchy)는 사회적 결
속의 본질적 요소이다. 평등에 관한 모든 이야기들은 헛되고 부정한 것들이다. … 국가의 권위가 자연상태의 개
인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계약으로부터 발생한다는 말은 역사적 기록에 근거하지 않은 것으로서 논리적으로 터무
니없는 소리이다. … 자연권 사상은 거짓이며 비상식적인 것이다. 개인은 가족과 교회, 공동체(community), 그
리고 다른 사회집단들로부터 의무를 부여받고 있다(Nisbet 1979, 90).
그런데 자유주의를 비판하면서 주로 주권자의 절대적 권위와 신성성에 관한 논의에 초점을 두었던 메스트
르와 달리, 보날드는 개인과 국가를 매개하는 중간 조직체들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그것의 권위를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ʻʻ모든 사회에 있어, 권위란 것은 가족과 국가, 종교와 정부 사이에서 분배되게 되어 있으며, 어
느 한 쪽으로의 과도한 집중은 다른 쪽의 불이익을 초래한다ʼʼ(Nisbet 1979, 92에서 재인용). 보날드에게 자
유란 1차적으로 사회를 구성하는 가족, 종교, 길드 등 개인과 국가를 매개하는 다양한 중간 조직체들의 자유
였던 것이며, 개인의 자유란 것은 이런 조직체들의 권위 속에서 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확보되
는 것이었다.14)
보날드가 프랑스 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출현한 중앙집권적 국가에 대해 반대한 것과 달리, 독일의 낭만적
보수주의자들은 유기체적 국가의 자유와 국가의 권위 내에서 개인의 자유를 추구했다. 오설리번(OʼSullivan)
에 따르면 뮐러도 보날드나 메스트르처럼 ʻʻ사회계약론과 프랑스 혁명에 영감을 제공한 관념ʼʼ, 곧 ʻʻ개인이 사
회 이전에 존재하는 내면적 핵심을 가지고 있다ʼʼ는 관념을 거부했다(OʼSullivan 1976, 67). 그 대신 뮐러는
14) 메스트르와 보날드가 사회계약론자들을 비판하면서 주장한 사회에 대한 관념, 인간이 사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 사회가 인간을 만들었다는 생
각은 콩트(Auguste Comte, 1798~1857)와 뒤르켕(Emile Durkheim, 1858~1917) 등으로 이어지면서 근대 사회학의 이론적 전제로 자리잡게
된다. 근대의 기계론적 세계관을 유기체적 세계관에 입각해 비판하면서 사회의 우선성을 강조해온 서구 근대 보수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반대와
비판을 통해 역설적으로 근대 문명의 이해에 풍성한 사상적 자원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Nisbet 1979, 107-113).
19세기 유럽의 보수주의와 조선 위정척사파의 근대 서구문명 비판
243
ʻʻ인간은 … 전체를 위해, 곧 국가와 인류를 위해 살아야 한다ʼ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ʻʻ마음과 정
신, 그리고 육체의 모든 필요를 구현ʼʼ하고 있는 것이었다(OʼSullivan 1976, 67에서 재인용). 오설리번(Oʼ
Sullivan)은 독일의 낭만적 보수주의자들에게 유기체적 국가는 인간 본성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의 실현을 기
약할 수 있는 국가형태로서 ʻʻ개개의 구성원보다 훨씬 더 실재적ʼʼ이며, ʻʻ인간 본성을 전방위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하나의 실체ʼʼ였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국가관은 국가를 개인보다 우위에 놓고 국가의 이익을 위해
무제한한 희생을 구성원들에게 요구할 잠재성을 보지(保持)하고 있었고, 그 결과 그들의 의도를 넘어 후일
마르크스주의나 파시즘에 의해 남용당하는 운명을 겪었다(OʼSullivan 1976, 60-61).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자들은 공통적으로 군주제를 선호했고, 민주제, 곧 자유주의 정치체제에 부정적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민주제는 구성원 간의 이익 갈등이 발생하여 무정부 상태로 귀결되기 십상이었다. 메
스트르에 따르면 모든 권력은 필연적으로 소수의 손에 놓일 수밖에 없다. 순수한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며 현
실에 존재하는 공화국들은 기껏해야 선거 귀족제의 한 유형일 뿐이다(OʼSullivan 1976, 33; Lively 1971
28). 슐레겔 역시 ʻʻ군주제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는 순수한 형태의 공화정체는 원천적으로 이미 그 내부에 갈
등의 싹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런 정부형태에서 자유는 방종으로, 민주주의는 우민 정치로 타락한다ʼʼ고 비판
했다(슐레겔 1990, 64). 따라서 메스트르는 ʻʻ일반적으로 모든 인간은 군주제를 위해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
다. 이 정부형태야말로 가장 유서 깊고, 가장 보편적ʼʼ이라고 결론을 내렸다(De Maistre 1971, 113).
또한 유럽의 보수주의자들은 대부분 공통적으로 중세시대의 가톨릭 보편질서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고 있
었다. 이들은 모두 교황권의 확립을 통한 유럽의 정신적 통합을 주장했다. 특히 독일의 낭만적 보수주의자들
은 유럽 통합이 독일 민족의 사명이며, 이에 필요한 정신적 힘을 중세의 지혜에서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펼
쳤다(지명렬 2000, 491-492). 19세기 초반 유럽 보수주의자들의 이러한 국제주의적 취향은 결국 국내 정
치질서의 위계적 서열구조를 옹호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자들의 자유주의 비판
역시 본질적으로는 신분에 근거한 위계적 서열구조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근대 이전의 전통적 자유 개
념, 즉 권위 내에서의 자유란 것은 기존의 정치적 권위가 각 개인에게 부여한 신분적 한계 내에서의 자유를
의미했던 것이며, 이런 사고구조는 전체 세계가 위계적 서열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중세적 세계관에 의해 뒷
받침되고 있었다. 유럽 전체를 교황을 중심으로 대주교, 주교, 평신부로 서열화하고 있던 가톨릭의 위계는
유럽의 봉건체제가 국내적으로 해체되어 가던 시점에서 국내적 신분질서를 지탱할 수 있는 최후의 이념적
보루였을 것이다. 모든 유럽인은 교황의 권위 아래에서 자유를 구가하는 것이며, 이런 구조가 국내로 투사되
어 국왕 또는 귀족의 권위 아래에서 자유를 구가해야 한다는 논리를 성립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위정척사파를 떠올리게 된다.
2) 화서학파의 서구적 자유개념 비판
19세기 조선의 개화파 박영효는 고종에게 올린 「개화에 대한 상소」에서 ʻʻ자유를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것으로서, 다만 천지의 이치를 따르는 것이요 속박과 굴요(屈橈)가 없는 것ʼʼ이라고 정의했다. 이
어서 박영효는 문명으로 나아가기 위한 최선의 방책은 ʻʻ군권을 조금 제한하여 백성들이 응분의 자유를 누리
고 각각 보국(保國)의 책임ʼʼ을 다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이상익 1997, 210에서 재인용). 또한 1898년
244 한국정치학회보 제48집 제2호
독립신문의 한 논자는 동양이 전제정치를 행하므로 백성에게 권리가 없어 나라에 위기가 닥쳐와도 백성들
이 수수방관하였는데, 이제라도 백성들에게 정부와 대등한 권리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독립신문
강독회 2004, 241-243). 이처럼 19세기 후반 조선에서 자유주의는 사회 내부의 요구가 아닌 국가적 위기
극복을 위한 정치적 대안으로서 주장되었다. 하지만 반대편의 위정척사파에게 자유주의는 망국의 첩경이었
다. 유인석은 「宇宙問答」에서 자유주의적 자유 개념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평등과 자유란 어지러운 싸움을 발생시키는 심각한 원인이 되니, 마치 싸움을 일으키는 칼자루 같은 것이다.
… 평등이라 하면 질서가 없고 질서가 없으면 어지러워지고, 자유라 하면 사양하지 않고, 사양하지 않으면 다투
게 된다. 오늘날 세상의 어지러운 다툼은 다름 아닌 평등과 자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 평등과 자유가 만고천하
(萬古天下)에 가장 나쁜 말이란 것은 다름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거리낌이 없게 되고, 사람들을 모두 소인이 되
게 하기 때문이다(毅庵集 51권 「宇宙問答」).15)
여기서 자유에 대한 유인석의 비판은 메스트르나 보날드의 비판과 매우 흡사하다. 메스트르와 마찬가지로
유인석에게 자유는 어디까지나 방종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인석은 위의 인용문에서 자
유롭고 평등한 개인, 즉 자유주의적 개인을 소인(小人)으로 호명한 것이다. 이는 곧 뮐러가 말한 ʻʻ소득과 이
득에 대한 무의미한 계산ʼʼ에 결박되어 운명을 흥정하는 가련한 개인이다(OʼSullivan 1976, 67에서 재인용).
그리하여 유인석은 평등과 자유에 대항하는 가치로서 예(禮)와 악(樂)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ʻʻ예는 질서요
악은 조화ʼʼ이다(毅庵集 51권 「宇宙問答」).16) 예악(禮樂)이 구현하고 있는 질서와 조화의 가치를 잘 체득
하고 준수한 인간은 개별적 차원에서는 인격을 완성하고, 나아가 집안의 화목과 국가의 번영을 달성하여 진
정한 자유인의 반열에 오른다. 그러나 예악 질서에서 이탈한 인간은 무지와 방종으로 치달아 인욕의 노예가
될 것이다. 즉, 진정한 자유는 예악 질서 안에서만 담보될 수 있는 것이다. 예악 질서를 사회관계의 측면에
서 개념화한 것이 곧 오륜(五倫)이다. 이는 보날드의 가족·교회·정부로 분권화된 권위체계처럼, 부자·군
신·부부·장유·붕우라는 다섯 가지 사회적 관계에 권위를 배분한다. 여기서 모든 사람은 각자의 몫을 가
지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부자간의 친함이다. ʻʻ천하에 오륜이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륜 밖에
있는 사람 또한 하나도 없다ʼʼ(毅庵集 51권 「宇宙問答」).17) 사람은 오륜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며, 여기서
이탈한 사람, 즉 패륜을 저지른 자는 인간이 아닌 금수이다.
유인석은 「宇宙問答」에서 신해혁명 이후 중국이 공화정체를 채택한 것에 대해, 총통과 관료의 권력이 사
사화(私事化)될 것이며, 이를 차지하기 위해 ʻʻ일시에 모든 지역의 호걸들이 일어나 파당을 지어 분열할 것ʼʼ이
라고 경고하고 있다. 또한 ʻʻ국민의 대표가 되어 국민을 보위ʼʼ한다는 ʻʻ의원ʼʼ이란 자들은 실제로는 ʻʻ국민의 노
력으로 후한 봉록을 받고 지극히 호의호식하며 혼자만 멋대로 자유를 누리는 한편, 국민은 다만 어리석고 동
요되어 억압을 받게 되니 자유를 얻지 못하고 모두가 지극히 곤궁해질 뿐ʼʼ이라고 주장했다(毅庵集 51권 「
宇宙問答」).18)
15) 平等自由, 亂爭所起之甚機括極欛柄也.…平等則無序, 無序則亂, 自由則不讓, 不讓則爭, 今世界亂爭之爲起無他, 平等自由也.…平等自由, 萬古
天下, 無等最惡說也, 無他, 是欲使人皆無忌憚也, 是欲使人皆小人也.
16) 禮序也, 樂和也.
17) 夫天下無一無五倫之人, 無一外五倫之人也.
18) 不爲帝而爲總統, 公於爲治而不私爲貴乎.…非特總統, 衆多任員, 無非可爲私者, 一時諸省之傑豪者, 咸起而裂黨且多 … 其中如議員. 曰爲代表
19세기 유럽의 보수주의와 조선 위정척사파의 근대 서구문명 비판
245
메스트르 역시 ʻʻ공화국에도 … 군주국만큼의 구분(distinction)이 존재하지만, 이러한 구분은 더욱 가혹하
고 더욱 모욕적으로 다가온다ʼʼ고 지적했다(De Maistre 1971, 116).19) 중국의 공화정 채택에 대한 유인석
의 비판도 이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기실 자유주의적 정부형태란 것은 약자에 대한 강자의 무법적
차별을 묵인하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것이 유인석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메스트르처럼 유인석 또한 정치적 권
위가 군주 1인에게 집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만 비로소 상하, 대소, 귀천, 현우(賢愚) 간의 이익갈
등을 예방하고 조화를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ʻʻ군주가 있으면 하나에 근본 하여 설 수 있으므로 나라가
매우 안정되게 되고, 군주가 없으면 하나에 근본을 두고 서지 못하므로 그 혼란이 극도에 달하게 되니 이는
자연의 이치이다ʼʼ(毅庵集 51권 「宇宙問答」).20) 하지만 동시에 유인석은 군주가 도덕적으로 우월한 귀족세
력의 도움과 견제를 받으며 통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ʻʻ귀족이 귀족 되는 것도 천리(天理)ʼʼ이다. ʻʻ그런 까닭
에 먼 옛날 정치가 잘 되던 시대에 희화(羲和), 후직(后稷), 사악(四岳) 등은 그 직무와 관직을 승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ʼʼ(毅庵集 51권 「宇宙問答」).21) 메스트르도 이와 유사한 입장을 견지했다. 메스트르는 성직자
계급의 권능과 역할을 강조했다. 비렉에 따르면 메스트르는 세속적 권위보다는 종교적 권위를 옹호하는데 진
력했다(Viereck 1956, 51). 유인석에게서 귀족 또는 사대부들, 그리고 이들을 이끌었던 성현들이 유교적 진
리의 저장소였던 것처럼, 메스트르에게서도 성직자들과 로마 교황은 기독교적 진리의 저장소로서 세속적 권
력을 지도할 권한과 책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위정척사파 또한 유럽의 보수주의자들처럼 국제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후자에게 국제주의란 곧
로마 가톨릭 중심의 중세 유럽질서를 회고적으로 추억하고 긍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면, 전자에게 국제주의
는 춘추대일통(春秋大一統), 즉 중화주의적 세계질서에 대한 적극적 옹호로 나타났다. 유인석은 ʻʻ중국은 세
계의 대종(大宗)이며 천지의 유일한 중심ʼʼ으로 ʻʻ중국이 엎어지면 세계가 어지러워져서 천지가 허물어진다ʼʼ고
주장했다(毅庵集 「宇宙問答」).22) 최익현도 ʻʻ의복이란 것은 선왕들께서 오랑캐와 중화를 분별하고 귀천을
나타내도록 한 것ʼʼ이라면서 중화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의복제도의 개혁을 비판하고 있다(勉菴集 「疎」
請討逆復衣制疏).23) 19세기 초반 유럽의 보수주의자들처럼 화서학파도 중화주의적 세계관에 따라 세계가 그
자체로서 위계적으로 서열화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유인석과 최익현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사
회가 무한한 이익갈등을 불러오듯, 자주 독립한 국가들의 평등한 국제관계 역시 영구적인 전쟁상태로 귀결된
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자들처럼 유인석 등 위정척사파 역시 중국 중심의 보
편적 위계질서를 통해 확보된 권위를 국내 사회질서에 투사하여 정당화하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國民, 保衛國民, 而以國民之力, 飽厚俸極豪樂, 獨恣自由, 國民只見愚以擾之, 慢以壓之, 不得自由, 實皆至困.
19) 명목상이나마 공화국의 헌정원리는 평등에 기초하고 있고, 이에 따라 차별을 법적으로 제도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별의 심화를 규제
할 수도 없게 된다는 것이다(De Maistre 1971, 116).
20) 有君則本一而立致其治, 無君則本不一而立致其亂, 此理之自然也.
21) 且貴族之爲貴族, 亦天理也.… 故上古之治世, 如羲和后稷四岳之類, 未嘗不世其業世其官也.
22) 盖中國世界之一大, 天地之一中心也 …中國跌則世界亂而天地毁.
23) 夫衣服者, 先王所以辨別夷夏, 表章貴賤者也.
246 한국정치학회보 제48집 제2호
3)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와 화서학파의 자유개념 비판 비교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자들과 화서학파는 첫째, 자유주의적 자유개념이 인간 자유의 진정한 근거인 사회
또는 국가의 권위를 파괴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자유개념은 전통적 자유개념으로서 인간이 사회 또는 국가
의 권위를 수용하고, 그것이 부과한 외재적 규범을 준수함으로써 획득되는 악덕과 무질서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했다. 이런 자유관을 가진 보수주의자들에게 자유주의적 자유 개념은 전통적 자유의 기반이 되는 전통적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고, 마침내 사회 자체를 붕괴시킬 수 있는 불온하고 위험한 사고였다. 둘째, 유럽의 복
고적 보수주의자들과 화서학파는 군주제야말로 사회를 가장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정치체제로 간주했
다. 민주제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서, 막상 실천에 옮기면 사회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뜨릴 수밖에 없
는 정치체제로 규정되었다.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자들과 화서학파는 정치체제의 명분이나 명칭과 상관없
이 궁극적으로 정치권력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군주에게 정치적 권위를
집중시켜 사회 내의 이익갈등을 통제하는 강제력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독일의 낭만적 보수주의자들은 국왕을 ʻʻ개인과 국민 전체, 국민과 신 사이에의 중계자로서 초연한 존재ʼʼ
로 인식하면서 국왕에게 숭고한 인격을 요구했다(지명렬 2000, 488). 화서학파도 현실의 군주가 요·순 임
금과 같이 하늘을 본받고 하늘과 짝하는 성인 또는 이상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Ⅳ. 근대화 이후의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와 화서학파의 위정척사사상
유럽의 경우, 19세기 후반에 이르면서 자유주의 및 산업혁명의 급속한 확산과 진전으로 인해 근대 이전으
로의 복귀는 더 이상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된다. 조선도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화서학파를 포함한 위정척사
파의 유학적 세계관은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어 갔고, 그 영향력 역시 급속도로 쇠퇴했으며,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사실상 역사에서 그 모습을 감추게 된다. 근대사회의 등장은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사
실이 되었고, 프랑스와 독일 및 한국의 보수주의도 전환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프랑스 제3공화국 시대의 바레스(Auguste Maurice Barreʼs, 1862~1923)와 모라스(Charles Maurras,
1868~1952)는 가톨릭 보편질서에 대한 지향을 철회하고 메스트르와 보날드의 사상을 민족주의적 보수주의
라는 틀로 재구성했다. 바레스와 모라스의 보수주의는 공통적으로 자유주의적 자유관념이 프랑스 민족의 통
합을 저해한다고 비판하였다(Viereck 1956; 김용우 2007). 바레스와 모라스의 민족주의적 보수주의에서는
메스트르와 보날드에게 물려받은 전통적 권위와 자유 개념, 교회·마을·가족 등 중간적 조직체에 대한 강
조, 군주제 선호 등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것은 명확히 국가와 민족의 통일성을 확
보하는 하나의 부품으로 활용되고 있다. 메스트르, 보날드의 신이 바레스, 모라스에게서는 민족과 국가로 대
체된 것이었다.24)
국가와 민족의 통일성을 강조하는 경향은 독일 보수주의에서 더욱 현저하게 강화되었다.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는 ʻʻ한 국가가 ʻ민족ʼ 전체의 이해를 대표ʼʼ하는 ʻʻ총체적 국가ʼʼ와 ʻʻ그것의 이상적 형태ʼʼ
24) 바레스와 모라스에 대해서는 Viereck(1956) 그리고 모라스의 사상에 대해서는 김용우(2007)를 참조하라.
19세기 유럽의 보수주의와 조선 위정척사파의 근대 서구문명 비판
247
로서 영도자가 결단을 통해 국법질서의 통일성을 담보하는 영도자 국가론을 제기했다(전진성 2001, 83). 25)
영도자는 이전에 낭만적 보수주의자들이 꿈꾸던 이상적 군주상을 근대 국민국가적 버전으로 재전유한 것이
라 평가할 수 있다. 이처럼 19세기 초반 복고적 보수주의를 계승한 20세기 초의 반자유주의적 보수주의는 2
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강력한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전쟁 당시 나치즘에 협력했고,
이로 인해 전후 독일과 프랑스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공고화되면서 급격히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다.
그렇다면 위정척사파의 퇴장 이후 한국 보수주의는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이와 관련해 두 가지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첫째, 한국정치사상사에서 최초의 보수주의라 할 수 있는 위정척사사상은 조선 망국이란 정치
사적 사건에 의해 급격히 소멸되었다. 프랑스·독일의 복고적 보수주의자들의 사상은 그들을 계승한 후배
사상가들에 의해 근대적으로 재구성되어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 사상계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자유주의, 사회주의 같은 경쟁 사상들과 치열한 논쟁을 펼쳤다. 중국의 경우에도, 강유위(康有
爲, 1858∼1927)와 양계초(梁啓超, 1873~1929) 등이 전통 유교를 근대적으로 개신하는 가운데, 이를 토
대로 군주제를 옹호하며 공화파와 지속적으로 대치했다. 특히 양계초는 1920년대에 들어와 과학-현학 논쟁
에 참여하여 서양문명 비판론을 제기함으로써, 전반서화론에 제동을 걸기도 했다(이용주 2012, 295-301).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중국에서 전개된 이와 같은 보수주의 변천사는 기존의 복고적 보수주의가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같은 근대 사상의 압력에 직면하여 그 후계자들에 의해 근대적으로 개신되어 가는 과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조선의 위정척사사상은 근대적 개신의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조선왕조 붕괴와
더불어, 그 정치사회적 기반을 상실하고 급격히 소멸되었다. 이들의 문제의식을 계승하는 사상가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26)
둘째, 하지만 화서학파의 위정척사사상은 역사의 무대에서 그냥 퇴장한 것이 아니라, 애당초 그들의 의도
를 넘어 ʻ민족주의적 정통성ʼ이란 빛나는 훈장을 유교에 선사하고 사라졌다. 실상 이들 대다수는 민족주의자
가 아니라 귀족적 국제주의자, 곧 중화주의자였다. 이들은 춘추대일통에 대한 신념을 끝까지 굽히지 않고 있
었고, 하루 빨리 중국에서 의로운 군주[義主]가 나타나 중화질서가 회복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
이러니하게도 한국 역사는 중화주의자 최익현, 유인석 등을 한국 민족주의의 시원을 연 영웅들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조선왕조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최익현과 유인석이 항일투쟁과 의병운동의 지도자로 전면에
부상하면서 위정척사사상은 중화주의에 바탕을 둔 배외적 국수주의에서 자각된 민족주의로 승화되었다. 이
제 이들에게 보존 대상은 ʻ도통ʼ 그 자체에서 도통을 보지하고 계승할 ʻ민족ʼ으로 전환되었다. 더 정확히 말한
다면, 도통의 수호와 민족의 보존이 동의어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에 대한 의병항쟁과 독립운동의 공을 인정받아, 최익현과 유인석은 1962년 각각 건국훈장 대한민국
장과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이처럼 화서학파가 항일운동에 앞장서서 명예롭게 산화한 덕분에 후일 유교는
유교적 가치와 관습을 민족의 전통과 문화로 소환할 수 있는 명분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현대 한국의 권위
주의적 통치자들은 서구지향적 근대화를 적극 추진하는 한편, 유교적 전통 미덕을 선양하는 국가적 캠페인을
벌였다. 이승만·박정희 등은 자신을 국부로 형상화했고, 적대세력을 공격할 때도 유교적 수사학을 구사하
곤 했다. 또한 반공이데올로기의 선양에도 유교가 동원되었는바, 북한은 김일성만이 어버이이며 아이들이 친
25) 칼 슈미트의 사상에 대해서는 이동수(2013)와 전진성(2001, 83)을 참조하라.
26) 조선의 강유위 또는 양계초라 할 수 있는 박은식 등이 유교개신운동을 펼치기도 했지만, 별 다른 반향을 불러오진 못했다.
248 한국정치학회보 제48집 제2호
모의 품이 아닌 탁아소에서 양육되며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이 친부모를 고발하는 체제, 가정이 파괴되고 인
륜질서가 무너진 체제로 선전되었다. 또한 민주화 이후에도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에 대한 충성, 부모에 대한
효가 더 무게감 있는 외재적 규범으로서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규제하는 경향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위정
척사파는 사라졌으나 유교는 남았다. 그들은 생전에는 유교의 근대적 쇄신이나 개화에 반대함으로써 ʻ유교망
국론ʼ 의 주범으로 비난받기도 했겠지만, 민족을 수호하기 위한 필사적 투쟁에 참여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
함으로써 해방 후 한국에서 유교적 전통이 지속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겨 놓았다. 그리하여 한국 보수세력이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그 전통을 활용하는 길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Ⅴ. 나오며
지금까지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와 조선의 위정척사사상을 비교했다. 근대적 사회변화가 급진적으로 전
개된 곳 또는 외부적 압력에 의해 추동된 국가에서 보수주의 사상사는 불연속적으로 전개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보수주의 사상사가 불연속적으로 전개된 곳에서 ʻ전통에서 근대로의 이행기ʼ에 출현한 보수주의는 계
몽주의, 자유주의, 산업사회에 대한 강경한 비판을 전개하는데, 근대로의 이행이 완료된 이후 이와 같은 비
판을 전개한 보수주의 사상은 재구성되거나 사라졌다.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와 화서학파의 위정척사사상
모두 이런 경로를 밟아왔다. 그럼에도 이들의 사상이 중요한 것은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자들과 화서학파가
기존 지배이념이나 종교를 묵수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 세계관의 틀 내에서 기존 지배이념 및 종교를
재전유하면서 근대 진보이념을 상대로 논전을 펼쳤으며, 이런 논의들 속에서 프랑스와 독일 및 한국의 보수
주의 사상사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근대 서구문명의 핵심 요소들에 대한 문제의식과 반감, 수호하고자 하는
가치와 정서 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은 유럽의 복고적 보수주의와 조선의 위정척사파의 서구 근대문명 비판 내용이 일맥상통함을
확인해보고, 근대화 이후 양자가 어떤 궤적을 그리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전자의 흐름은 후대 사상가들에
의해 근대 국민국가의 틀에서 재구성되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이들의 국가주의적 사상은 정치적 변화와
맞물려 청산되었다. 그러나 화서학파의 위정척사사상은 조선의 패망 등을 이유로 자기 쇄신의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대신 유교에 민족주의적 정통성을 선사한 채 사라졌다. 그리고 이것이 역설적으로 유교를 한국 사
상사의 저층으로 스며들어가게 하여 더 오래 지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9세기 유럽의 보수주의와 조선 위정척사파의 근대 서구문명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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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勉庵集. 毅庵集. 華西集. 華西雅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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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 한국정치학회보 제48집 제2호
Critique of Modern Western Civilization by
European Conservatism and the Joseon
Wijeongcheoksapa in the Nineteenth Century:
Focusing on Counter-Revolutionary Authoritarian Conservatism in
France and Germany and the Wijeongcheoksa Thought of
the Hwaseo School
KANG Jung In · JANG Won Yun
Abstract
The purpose of this essay is to present the Wijeongcheoksa thought in Joseon as a
type of modern conservatism by comparing it with European conservatism in the
nineteenth century. To do this, it focuses on the comparison of the Wijeongcheoksa
thought of the Hwaseo School and the counter-revolutionary authoritarian conservatism
in France and Germany, for the former showed ideological reactions very similar to
latter’s in their critique of modern Western civilization. Firstly, it will be examined
whether the Wijeongcheoksa thought can properly be defined as modern conservatism
and whether it can be located in the history of Korean conservatism. Secondly, the
critiques European counter-revolutionary authoritarian conservatism and the Wijeongcheoksa
thought levelled against modern Western civilization will be analyzed and compared.
Thirdly, the influence the European conservatism and the Wijeongcheoksa thought
respectively exerted upon the history of conservative thought in their own countries
will be traced.
Key words : the thought of Wijeongcheoksa, the Hwaseo School, counter-revolutionary
authoritarian conservatism, Englightenment, Liberalism, Yoo Inseok, Joseph de Maistre
영문 목차·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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