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인. 2015. “아시아적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인가.” 『동양

http://dx.doi.org/10.16880/SEC.2015.58.11.329

아시아적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인가*
강 정 인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Ⅰ. 들어가는 말
Ⅱ. 서구 문명과 아시아적 가치
Ⅲ. 두 가지 근대화: ‘원초적’ 근대화와
‘2차적’ 근대화
Ⅳ. 원초적 근대화와 서구적 가치: 프로
테스탄트 윤리를 중심으로
Ⅴ. 2차적 근대화와 아시아적 가치
Ⅵ. 글을 마치며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
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4S1A3A2043763).
※ 본고는 “문화의 안과 밖” (네이버 열린 연단) 강연시리즈에서
2014년 10월 18일 “근대화와 아시아적 가치”라는 제목으로 행한
강연을 압축적으로 정리·보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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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硏究 第58輯
<논문 요약>

이 글의 목적은 동아시아와 유교에 초점을 맞추어 경제발전이라는
‘자본주의적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주장되는 ‘아시아적 가치’를 프로테
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로 이론화하는 일반적 경향이 과연 합당
한 이론구성인가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아시
아적 가치를 간략히 개념화한 후, 역사적으로 서구 문명에서 인식된
아시아적 가치와 현대에 들어와 동아시아인들이 근대 서구 문명에 대
항해 내세운 아시아적 가치를 간략히 개관한다. 3장에서는 동아시아의
아시아적 가치가 경제발전에 기여한 역사적 맥락과 인과적 지위가 서
구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다르다는 점을 논하기 위해 서구와 아시아
의 근대화를 ‘원초적 근대화’와 ‘2차적 근대화’로 구분한다. 4장에서는
원초적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적’ 가치의 역할을 검토하기 위해 베버가
자본주의의 문화적 심성의 원인으로 이론화한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검토한다. 5장에서는 2차적 근대화를 수행했던 동아시아에서 아시아적
가치의 역할을 유교를 중심으로 분석한다. 결론에서는 지금까지 제시
된 논의를 정리하면서 논문을 마무리한다.
주제어: 아시아적 가치, 유교, 프로테스탄트 윤리, 원초적 근대화, 2
차적 근대화.

아시아적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인가 331

Ⅰ. 들어가는 말
1990년대 중반 이래 국내외적으로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s)’
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된 바 있다. 나아가 아시아적 가치―특히
유교를 중심으로 한―를 서구의 자유 민주주의 및 개인주의의 한계와 더
불어, 근대성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인 탈근대 사상으로 제시
하는 입장이 제기되기도 했다.1)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2차 세계
대전 이후 아시아적(전통적) 가치에 대한 논의는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적 상황과 더불어 부침을 거듭해 왔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아시아적 가
치(전통문화)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박정희 정권 아래서 근대화 및 경
제 발전에 장애가 되는 부정적 요소로서 청산과 척결의 대상이었다. 그
런데 1960~1980년대에 걸쳐 일본을 필두로 한국, 타이완 등의 동아시아
국가들이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룩하면서, 아시아적 가치는 독일의 사
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서구에서 근대적 발전을 가능하게 한 정
신적 토대로 지목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준하는 가치로서 찬사를 받
기도 했다. 그러다 1997년 태국에서 점화된 외환위기를 시발로 말레이시
아, 필리핀, 인도네시아, 한국, 홍콩 등으로 금융 위기가 파급⋅확산되자,
동아시아 자본주의는 어느새 연고와 부패로 얼룩진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로 비난받고, 아시아적 가치는 그 ‘주범’으로 지목되었다.2) 그
후 아시아 국가들이 과거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는 달리 신속하게 경
제 위기를 타개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 역시 아시아적 가치 덕분이라
는 목소리가 제기되기도 했다.3) 이처럼 ‘아시아적 가치’라는 말은 학계
1) 함재봉, 탈근대와 유교(서울: 나남, 1998).
2) 전제국, 「‘아시아적 가치’ 관련 동서논쟁의 재조명」, 한국과국제정치 15권 1
호(1999년 봄/여름호), 208~209쪽.
3) Nathan Glazer, “Two Cheers for ‘Asian Values’,” The National Interest(Fall 1999),
pp. 2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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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硏究 第58輯

나 정계 및 언론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지만, 시대와 상황 및 국가에 따
라 또 논자에 따라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그 구체적 내
용은 상당히 모호한 개념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모호
성 때문에 아시아적 가치는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역동적 변화를 거
듭해 온 아시아 국가의 현실을 지극히 단순화하여 설명하는 도구로
활용⋅남용되어 왔다.4)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아시아적 가치는 “아시아 문화권이 간직하
고 있는 독특한 가치의 체계”5) 또는 “아시아 지역에 독특한 문화와 가치
체계”6)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장인성은 문화적 심성으로서 아시아적
가치를 “‘구미의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분개심과 구미의 선진 산업 문명
에 대한 열등감이 혼효된 감정을 안고 살아온 아시아인들의 심성’에 기
초한 역사적⋅정치적 형성물”이라고 규정한다.7) 그러나 우리는 아시아
적 가치의 기초를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종교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아시아 지역은 유교, 불교, 이슬람, 힌두교 등 주요 종
교를 포함해서 도교, 라마교 등 수많은 군소 종교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서구 문명이 전파되면서 이제는 기독교(천주교, 개신교 포함) 신
도 역시 상당한 수를 차지한다. 따라서 아시아적 가치의 핵심으로 여겨
졌던 유교는 아시아적 가치의 중요한 한 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지
만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국내 학계 및 세계 학계의 최근 논의가 주로
‘동아시아’와 ‘유교’를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이 글에서 필자 역시 동아시아와 유교에 초점을 맞추어 경제발전이라는
‘자본주의적 근대화’에 대한 기여를 둘러싼 논쟁을 중심으로 아시아적
4) 이승환, 「책머리에」, 이승환 외, 아시아적 가치(서울: 전통과현대, 1999), 4
쪽; 김명수, 「아시아적 가치의 문화적 기원: 싱가포르 중화민족의 정체성 위
기」, 전통과현대(2000년 봄호), 268쪽.
5) 이승환, 「아시아적 가치의 담론학적 분석」, 이승환 외, 앞의 책, 313쪽.
6) 김석근, 「IMF, 아시아적 가치 그리고 지식인: 세기말 한국과 철학의 빈곤」,
앞의 책, 272쪽.
7) 장인성, 「아시아적 가치와 일본적 정체성」, 신아세아 8권 1호(2001), 154쪽.

아시아적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인가 333

가치를 논하고자 한다.8)
1990년대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논의는 예의, 공손함, 근면⋅검약⋅성
실, 가족⋅기업⋅국가 등 공동체나 집단에 대한 충성과 헌신, 정치적 안
정과 사회적 번영을 위한 개인적 자유의 자발적 유보, 권위에 대한 존중
과 사회 질서와 기강의 중시, 경쟁이나 대결보다 합의와 조화를 존중하
는 문화적 풍토 등을 아시아의 고유한 가치로 평가하여 이러한 철학과
가치가 아시아의 경제 발전에 근간이 되었다는 논변을 중심으로 전개되
었다. 다시 말해 아시아적 가치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대응되
는 개념으로 20세기 중반 이후 관찰된 아시아의 급속한 경제 발전을 설
명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9) 20세기 초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가 서구에서 자본주의의 대두 원인으로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따른 청렴성, 근면함 및 검소함을 지목한 것처럼, 아시아의 경제
발전은 아시아적 가치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10)
그런데 아시아적 가치를 논할 때, 서구중심주의에 따라 우리는 암묵
적으로 근대 서구 문명이 내포⋅지향하는 가치가 범세계적인 ‘보편적 가
치’인 데 반해 유교를 포함한 아시아적 가치는 특정한 지역을 근거로 한
8) 동아시아에서 아시아적 가치가 인권탄압과 독재를 초래했는지, 아니면 아
시아적 가치가 자유주의나 민주주의와 양립가능한지는 무척 논란이 많은
주제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주어진 주제에 대한 논의의 효율적 전개를
위해 이 주제는 다루지 않겠다. 이 주제에 대한 최근의 가장 인상적인 논
의로는 김성문의 연구가 주목할 만하다. Kim, Sungmoon, Confucian Democrac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9) 국내학자로서는 조혜인 역시 다소 변형된 해석을 제기하지만, 조혜인은 기본
적으로 이러한 입장에서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에 대한 유교의 기여를 논한
바 있다. 조혜인, 「유교적 금욕주의와 한국의 경제발전」, 전통과현대(1997
년 가을호), 106쪽.
10) 물론 아시아의 경제발전을 단순히 가치의 차원에 대한 분석을 넘어 제도주
의적 시각에서 분석하는 시각도 있지만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겠다. 국내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김일권과 유석춘을 들 수 있다. 김일곤, 유교 문화권의
질서와 경제(서울: 한국경제신문사, 1975), 유석춘, 「동아시아 ‘유교자본주의’
재해석: 제도주의적 시각」, 전통과현대(1997년 가을호) 등을 참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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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硏究 第58輯

‘특수한 가치’라고 가정한다. 따라서 2장에서는 역사적으로 서구 문명에
서 인식된 아시아적 가치와 현대에 들어와 동아시아인들이 근대 서구
문명에 대항해 내세운 아시아적 가치를 간략히 개관하고자 한다. 이어
서 3장부터 이 논문의 핵심적인 논변을 제기하고자 한다. 그것은 서구가
원초적으로 수행한 근대화와 동아시아가 그 뒤를 이어 수행한 근대화의
역사적 맥락이 근본적으로 다르기에, 프로테스탄트 윤리로 대표되는 근
대의 서구적 가치와 아시아적 가치를 대등한 조건과 위상에서 비교하는
이론적 작업이 일종의 범주 착오에 해당한다는 논변이다. 16세기 이래
근대 서구 문명은 자생적으로 그리고 인과적 변화에 따라 (결과적으로)
근대화를 수행한 반면에, 20세기 후반은 물론 19세기 후반에도 동아시아
는 서구 문명의 충격을 흡수하면서 외생적으로 그리고 주로 목적론적
(목적 지향적) 변화에 따라 근대화를 수행해 왔다. 이러한 차이에 주목한
다면, 근대의 서구적 가치를 근대화(여기서는 자본주의)를 추동한 독립
변수로 이론화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동아시아에서 아시아적
가치는 근대화를 합리화하여 근대화에 적응하도록 동원되는 매개 변수
로 이론화하는 것이 합당하다. 아시아적 가치는 근대 서구 문명의 우월
성으로부터 유출된 ‘빌려온 정당성’에 지역적(아시아적) 정당성을 추가해
근대화에 대한 정당성을 보강해 준 중첩적 정당화(overlapping justification)
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11) 이러한 논변
을 전개하기 위해 3장에서는 서구와 아시아가 수행한 근대화를 ‘원초적’
근대화와 ‘2차적’ 근대화로 구분하여 양자의 차이를 규명할 것이다. 4장
에서는 원초적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적’ 가치의 역할을 검토하기 위해
베버가 자본주의의 문화적 심성의 원인으로 이론화한 프로테스탄트 윤
11) 이와 비슷한 발상에서 테일러(Charles Taylor)는 서구 인권 가치의 보편적 확산
을 위해 비서구 지역이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를 재해석하고, 이를 통한 “중
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의 형성을 제안한 바 있다. Charles Taylor,
“Conditions of an Unforced Consensus on Human Rights,” Joanne R. Bauer and
Daniel A. Bell (eds.), The East Asian Challenge for Human Rights(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pp. 124~144.

아시아적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인가 335

리를 검토한다. 5장에서는 2차적 근대화를 수행했던 동아시아에서 아시
아적 가치의 역할을 유교를 중심으로 분석하겠다.

Ⅱ. 서구 문명과 아시아적 가치
현대에 들어와 “아시아적 가치”라는 말은 서구화 정책의 급속한 성공
에 의해 오히려 정체성의 위협을 느끼게 된 싱가포르 정부가 1970년대
말부터 명시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12) 그렇지만 그전에도 서구 문명
에 대비된 아시아적 가치의 고유성은 19세기 말 서구 문명의 침투에 위

中體)’,

협을 느낀 중국⋅한국⋅일본의 정치인과 지식인 등에 의해 ‘중체(

東道)’, ‘화혼(和魂)’ 등의 명칭으로 제창된 바 있다. 이처럼 아시아

‘동도(

적 가치는 서구 문명의 침투에 위협을 느낀 아시아인들이 방어적 입장
에서 자기 정체성을 주장하려고 내세운 담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서
양의 입장에서 아시아적 가치는 역사적으로 ‘아시아의 타자화’라는 관점
에서 산발적이지만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온 주제였다. 잠재적으로 ‘아시
아적 가치’에 해당하는 요소를 포함해 아시아에 대한 서구의 담론은 서
구 문명이 세계를 장악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던 고대나 중세에는 주
로 ‘자문화(또는 자민족) 중심주의’(ethnocentrism)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렇지만 근대에 들어와 세계를 지배하고 장악하게 된 서구 문명은 이
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시아에 대한 서구 중심적 담론을 체계적으로 발
전시키고 아시아인들에게 이 담론을 주입하고 내면화시켰다. 종국적으
로 이 담론은 서구중심주의를 구성하는 하위 담론의 한 형식인 ‘오리엔
탈리즘’으로 정착했다. 그러나 그것이 자문화 중심주의의 산물이든 서구
중심주의의 산물이든, 그들이 구성한 ‘아시아적 가치’가 ‘서구적(또는 그
리스적)인 것’의 ‘부재’나 ‘일탈’로 개념화된 점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먼저 우리는 고대 그리스 문명의 그리스 중심적 사고에서 오늘날 우
12) 김명수, 앞의 글.

336

東洋古典硏究 第58輯

리가 이해하는 서구발( ) 아시아적 가치 담론의 연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BCE 492~448)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 군
대를 상대로 살라미스 해전(BCE 480)에서 승리한 후에 아테네의 비극 작
가 아이스킬로스는 자신의 비극 페르시아인들(BCE 472)에서 전쟁의
승패를 그리스의 ‘개인적 자유’와 페르시아의 ‘폭정(노예 상태)’의 대비를
통해 설명했다. 이런 식으로 그리스인 사이에서 통념화된 그리스와 페
르시아(아시아)의 대비는 그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그리스
인과 페르시아인을 ‘자유’와 ‘굴종’을 중심으로 대비함으로써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13)
유럽이 아시아에 대해 수세적 위치에 있던 중세에 유럽과 아시아의
대비는 기독교와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이분법에 기초한 유럽인의 선민
의식으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와 더불어 유럽이 세속화되고 ‘신
대륙’의 발견과 함께 힘을 비축하는 한편 17세기 후반 이후 오스만 튀르
크 제국이 세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자 유럽의 여행가와 사상가들
은 아시아 제국들의 특징을 정치적으로는 폭군적인 전제 정치, 경제적
으로는 (신민들에 대한) 사유 재산의 부정으로 규정하고, 이것을 유럽의
자유 및 번영과 대비된 아시아의 결함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지성사적
배경에서 18세기 초반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인 몽테스키외는 유럽
과 아시아를 ‘유럽의 자유’ 대 ‘아시아의 예속’으로 공식화했다. 나아가
아시아 제국에서는 군주가 토지를 독차지하고 신민들의 소유권을 부정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몽테스키외는 아시아 제국의 특징을 ‘동양적
전제정치’(Oriental Despotism)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유럽 정치 체제의 우
월성을 주장했다.14) 여기서 유럽과 아시아의 대비가 정치 제도와 경제
조직의 차이에 주목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은 현대에 들어와 아시아적 가
13) 이에 대한 상세한 논의로는 강정인,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서울: 아카넷,
2004), 157~162쪽과 거기 인용된 문헌을 참조할 것.
14) 페리 앤더슨, 함택영 외 옮김,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서울: 경남대학교극동
문제연구소, 1990), 442~443, 507~509쪽.

아시아적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인가 337

치를 둘러싼 논쟁의 사상사적 연원을 구성한다고 할 수 있다.15)
이후 19세기에 들어와 헤겔, 마르크스, 밀(J. S. Mill) 및 베버를 포함한
유럽의 근대 사상가들이 몽테스키외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체계적으
로 확대⋅심화한 이론을 전개한 사실은 이미 충분히 검토된 바 있다.16)
종국적으로 이런 사고는 아시아⋅아프리카를 비롯한 비서구 세계에 대
한 서구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정당화하는 명분을 제공했는데, ‘문명
대 야만’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문명화의 사명’이나 ‘백인의 책무’가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미국에서 생산되어 전 세계로 확
산된 근대화론 역시 그것이 정치 발전이든 경제 발전이든 (비서구 세계
의) ‘전통’과 (서구 문명의) ‘근대’라는 경직된 이분법에 기초해 근대화를
위해서는 그에 방해가 되는 전통문화를 폐기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아
시아를 비롯한 비서구 세계에 촉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한국, 타이완, 홍콩, 싱가포르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1960년대 이래 괄목할 만한 경제 발전을 이룩함에 따라 아시아적 전통
문화, 곧 아시아적 가치의 긍정적인 측면을 인정하는 이론들이 대두하
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들어와 전후 눈부신 경제 성장을 거듭한 일본
이 서구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상에 이르자, 그런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는 일본의 문화적 특성을 찾아내려는 연구가 진행되었다. 베버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의 정치사회학자 벤딕스(Reinhard Bendix)는 본래
1966년에 발표한 글에서 일본 경제 성장의 문화적 원인을 도쿠가와 시
대 말기 사무라이 계급의 문화적 심성─곧 종교적 관념에 함축된 자극
과 일련의 사람들로 하여금 베버가 ‘현세적 금욕주의’(inner worldly
asceticism)라고 규정한 방식에 따라 행동하게끔 몰고 간 내면화된 충동
사이의 간극─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일본에서 발견되는 “청교도주의
(Puritanism)의 ‘기능적 등가물’”이라고 명명했다.17) 당시 자본주의적 발전
15) 이 단락에 대한 상세한 논의로는 강정인, 앞의 책, 162~165쪽과 거기 인용된
문헌을 참조할 것.
16) 앞의 책, 165~1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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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硏究 第58輯

과 관련하여 일본의 문화에서 사후적으로 발견⋅구성된 아시아적(일본
적) 가치는 한동안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는 구별되는 일본에 독특한
속성(Japanese uniqueness)인 것으로 치부되었다.18) 그러나 그 후 한국, 타
이완, 홍콩, 상가포르 등이 일본의 뒤를 이어 급속한 경제 성장을 거두
자,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에 대한 아시아적(일본적) 가치는 일본만의 독
특한 속성에서 벗어나 아시아 일반의 가치가 여겨졌으며, 그 기여도 역
시 부정적인 평가에서 긍정적인 평가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7년 아시아의 금융 위기가 태국 등 동남아시아 국가와 한
국을 강타하자,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서구의 비판론자들은 아시아의
자본주의를 ‘정실 자본주의’로 규정하면서 아시아적 가치를 경제 위기의
주범으로 비난했다. 2000년대 초반 이후 아시아의 국가들이 경제 위기를
비교적 신속하게 극복함에 따라 경제 발전과 아시아적 가치를 둘러싼
논쟁은 일단 잠복 상태에 들어간 것으로 보였다. 나아가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에서 비롯되어 전 세계로 확산된 경제불황, 일본의 장기적인
경제침체, 그런 와중에서도 ‘G-2’로 비약할 정도로 지속된 중국의 급속한
성장 등 21세기 초의 경제상황은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에 대해 아시아적
가치는 물론이고 서구적 가치의 긍정적 기여나 부정적 과오를 논하는
학문적인 논의의 가치나 의미를 무력화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아시아적
가치의 긍정적 기여를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이 동아시아의 경제발전에
17) Reinhard Bendix, “Japan and the Protestant Ethic,” Reinhard Bendix and Guenther
Roth, Scholarship and Partisanship: Essays on Max Weber(Berkeley, Los Angeles, Londo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1), pp. 201, 194.
18) 영국의 “신교 자본주의”와 대비된 일본의 “유교 자본주의”라는 개념을 1978
년에 처음으로 고안한 일본의 모리시마 미츠오는 도쿠가와 시대 서양 과학
지식의 적극적 수용, 현대 일본 기업에서 발견되는 “연공서열제”, “종신 고용
제”, “기업별 노조” 등 “일본식 경영”에 주목하여 일본 자본주의의 성공을 설
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유교 자본주의론은 동아시아 유교 문화
권 전체를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유교”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김홍경, 「유교자본주의론의 형성과 전개」, 동아시아 문
화와 사상 2호(1999년 4월호), 15~16쪽을 참조할 것.

아시아적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인가 339

기여한 역사적 맥락과 인과적 위상이 따르기 때문에, 양자의 차이는 준
별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근대화의 상이한 유형을 구분할 필요
가 있다.

Ⅲ. 두 가지 근대화: ‘원초적’ 근대화와 ‘2차적’ 근대화

19)

근대화와 아시아적 가치를 논함에 있어서 중요한 오류 가운데 하나는
서구와 비서구의 근대화를 대체로 그 과정과 결과에 있어서 동일한(또
는 유사한) 역사적 변화로 상정하고 동일한 결과(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동일한 전제 조건 또는 기능적 등가물이 무엇인지를 논해 온 우리의 무
의식적 습성이다. 앞에서도 논한 것처럼, 동아시아에서 먼저 일본, 나중
에 다른 국가들의 성공적인 급속한 경제 발전을 설명하기 위해 종래 비
난의 대상이 되어 왔던 아시아적 가치를 베버가 서구에서 자본주의를
추동한 문화적 변수로 제시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로 상
정⋅규정했던 연구들이 그런 오류의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논변을 전개하기 위해 필자는 고대 국가의 형성에 관한 정치
인류학자 프리드(Morton Fried)의 이론에 의존해서 서구의 근대화와 (아시
아를 포함한) 비서구의 근대화가 일어난 역사적 맥락이 근본적으로 다
르며, 그에 따라 근대화는 (적어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될 수 있다는
점을 주장하고자 한다. 일찍이 프리드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국가가 어
떻게 출현했는가를 논구하면서 ‘원초적 국가(pristine state)’와 ‘2차적 국가
(secondary state)’를 구분하고 양자의 형성 조건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20) 전자의 경우에는 (우발적이지만) 일정한 필요조건을 갖추어
19) 이 장의 논의는 강정인, 앞의 책, 283~295쪽의 논의를 인용 부호 없이 끌어
오면서 이 글의 목적에 맞게 재구성한 것이다.
20) Morton H. Fried, The Evolution of Political Society(New York: Random House, 1967).
‘국가’에 대한 프리드의 정의는 간단히 말해 인구의 다과(
)와 영토의 크
기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팽창이 가능한 중앙 집권적 정치체를 지칭한다. 이

多寡

340

東洋古典硏究 第58輯

야 비로소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원초적 국가
에 존재하던 필요조건을 결여하더라도 (정복과 식민화를 포함한) 모방과
학습을 통한 확산에 의해 국가로 진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이다. 이에 따라 문명의 발상지인 세계 여러 곳에서 예외적 조건들
의 우발적 결합으로 형성된 최초의 고대 국가들이 모방과 확산에 의해
보편적인 정치체의 형태로 역사의 무대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구분에 착안하여 우리는 서구에서 진행된 ‘원초적 근대화’와 그
영향을 받아 사후적으로 다른 지역에서 전개된 ‘2차적 근대화’를 구분할
수 있다.21) 이 구분은 서구와 비서구의 근대화가 지향하는 바는 동일했
는지 모르지만 그 역사적 조건과 경험은 근본적으로 달랐다는 점을 가
정한다. 다시 말해 자율적⋅내생적⋅선발적으로 진척된 서유럽 일부 국
가에서의 근대화와 타율적(강압적)⋅외생적⋅후발적으로 추진된 한국을
포함한 비서구에서의 근대화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가정한다.
아울러 여기서 원초적 근대화와 2차적 근대화를 구분하는 결정적 기준
은 전자의 경우에는 (변화의 과정이 결과를 규정하는) ‘인과론적 변화’가
지배적인 데 반해, 후자의 경우에는 인과론적 변화와 함께 (목적이 변화
의 과정을 규정하는) ‘목적론적 변화’가 공존한다는 점이다. 또한 전자의
경우에는 사회 변화에 대한 원초적 정당화가 요구되는 데 반해, 후자의
경우에는 ‘빌려온 정당성’이 원초적 정당화를 대체할 수 있게 된다. 따라
러한 정의에 따르면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나 동아시아 고대의 성읍 국가
(또는 성곽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21) 그러나 최근에는 다원적인 근대에 이르기 위한 다양한 경로를 인정하는 방
향으로 이론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적지 않은 학자들은 유럽보다 동
아시아에서 먼저 자본주의를 포함한 근대문명이 형성되었다는 유력한 주장
을 제기한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학자들의 저작을 들 수 있다. 안드레
군더 프랑크 지음, 이희재 옮김, 리오리엔트(서울: 이산, 2003). 황태연, 공
자와 세계: 패치워크문명 시대의 공맹 정치철학 (1∼5)(파주: 청계, 2011). 김
상준, 맹자의 땀 성왕의 피: 중층근대와 동아시아 유교문명(서울: 아카넷,
2011). 물론 이런 학자들은 필자의 이러한 구분과 해석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
다.

아시아적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인가 341

서 2차적 근대화는 서구 문명의 근대화가 일정 정도 진척되어 전 세계
적으로 헤게모니적 위상을 확보하고 나아가 서구 문명이 다른 후발 문
명에게 자신을 모방 대상, 즉 보편적 모델로 제시하게 된 상태에서 후발
문명이 ‘따라잡기식’인 목표 지향적 변화의 일환으로 근대화에 참여하게
되는 현상을 지칭한다.22)
거친 단순화이지만, 필자는 근대화가 추구하는 근대성을 그 사회⋅정
치적 측면에서 국민국가의 건설, 자본주의의 수립 및 민주주의의 실현
으로 규정하고자 한다. 서구에서 그러한 근대성이 모습을 드러내기 위
해서는 사회⋅정치⋅경제⋅문화적 변수들의 일정한 (우발적인) 합류
(conjuncture)가 필요했는바, 이러한 변수들은 르네상스, 기독교 개혁(이른
바 ‘종교 개혁’), 계몽주의(합리주의), 과학 혁명, 산업 혁명, 청교도 혁명,
미국 혁명, 프랑스 혁명 등은 물론 유럽 국가 간의 수많은 전쟁, 제국(식
민)주의적 정복과 약탈 등과 같은 역사적으로 우발적인 사건을 통해 결
합되고 형성되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국민국가, 자본주의, 민
주주의를 선진적으로 발전시킨 유럽의 일부 선발 국가들이 경제적⋅군
사적 위용뿐만 아니라 그 지적⋅도덕적 호소력 등을 앞세워 강력한 정
치 체제로 대두했을 때, 인접 유럽 국가들은 물론 비서구 국가들도 국제
적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또는 대내외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그
체제를 모방⋅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선발 국가의 성공적인
근대화 자체가 세계사적 조건을 변형시키고, 그처럼 변형된 조건에 후
발 국가가 적응해야 하는 현상을 ‘선두 주자에 의한 세계사적 조건의 변
화’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후발 국가 일반에 적용되는 변화의 목적론적
성격상 후발 국가에는 서구 선발국이 겪은 변화가 세계사의 ‘보편적’인
흐름으로 제시되면서 그 국가에 부과⋅강요되는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분과 상관없이 우리는 2차적 근대화 과정에서 서
구의 선발 국가와 유사한 점을 많이 공유한 국가가 그렇지 않은 국가보

22) 이 과정에서 근대화가 서구화와 동일시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342

東洋古典硏究 第58輯

다 선발 국가를 따라잡는 데 어려움을 덜 겪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
다. 그렇기에 선발 국가에서 근대성의 성립 조건을 탐색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을, 다양한 목적으로 자국의 토양에
근대성을 이식⋅수용하고자 하는 후발 국가들이 선발국이 거쳐 온 것과
동일한 역사적 과정을 반복하거나 동일한 선결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일단 근대성의 모델이 지배적 체제로서
정착⋅확립된 후에, 후발 국가들은 선발 국가들이 겪어 온 비슷한 역사
적 과정을 기계적으로 반복하거나 일정한 선결 조건을 충족하지 않고서

利點)을 활용하여 모방과 확산을 통한 근대성을 창출

도, 후발국의 이점(

할 수 있기 때문이다.23)

Ⅳ. 원초적 근대화와 서구적 가치

: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중심으로

앞에서 필자는 원초적 근대화와 2차적 근대화를 구분하고, 양자는 근
대화의 역사적 맥락과 과정이 다르고 근대화의 결과인 근대성 역시 상
이한 양상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고 논했다. 이 장에서는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를 추동한 문화적 심성의 핵심으로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지목
하고 이를 분석한 논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한다. 이어서 5장에서
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이룩한 급속한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을 아시아에
독특한 아시아적 가치에 귀착시키고, 나아가 아시아적 가치를 프로테스
탄트 윤리에 비유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한 수준에서, 범주 착

23) 이러한 구분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지적하고 싶은 논점은 2차적 근대화가
근대성을 선취한 서구 선발국을 모델로 지향하면서 추진되지만, 근대화의 역
사적 조건과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행위자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종국적으로
후발국에 출현한 근대성의 모습이 서구 선발국과 공유하는 요소 못지않게
상이한 요소를 종합한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상세
한 논의로는 강정인, 앞의 책, 201~203쪽을 참조할 것.

아시아적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인가 343

오이자 맥락 착오에 해당한다는 논변을 전개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베버가 자본주의의 원초적 발전─‘원초적 근대화’의
한 양상─을 염두에 두고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관심을 갖게 된 이론적
⋅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
주의 정신에서 베버의 문제의식은 상호 연관된 두 가지 질문으로 압축
된다. 첫째, 베버는 인간의 ‘무제한적 이익의 추구’를 탐욕으로 보고 이
를 금지해 온 전통 종교의 교리로부터 이익 추구의 동기가 어떻게 해서
해방되었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둘째, 그는 서구 사회에서 자본주의 초
기에 이러한 에토스를 강력하게 보유한 인간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왜
특정한 종파에 집중해서 출현하게 되었는가를 궁금하게 생각했다. 다시
말해 그는 (세속적인 이익 추구 자체보다는 종교적인 관심을 우선적 동
기로 해서 자신의 직업에 매진하는) 근면하고 검소한 금욕적인 자본가
와 노동자를 배출한 사회경제적 배경보다는 그들이 믿는 종교적 교리의
특성에 주목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답하는 과정에서 베버는 세속적인 이익 추구의 동
기가 독자적으로 이를 금지한 전통적인 종교적 교리를 압도했다고 설명
하는 대신, 프로테스탄트 사이에서 발견된 구원의 불확실성을 둘러싼
종교적 근심과 열정에 의해 추동된 영리 활동에 주목했다. 베버가 보기
에, 루터파와 칼뱅주의자 등 프로테스탄트들은 자신들이 속한 종파의
교리로 인해 품게 된 구원의 불확실성과 그 불확실성을 보상하려는 대

代償的) 행위로서 금욕적인 종교적 경건성과 의무감을 가지고 자신

상적(

의 직업에 몰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설을 베버는 “한편으로
내세 지향성(other-worldliness), 금욕주의, 종교적 경건성과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적 영리 활동에의 참여 사이의 갈등이, 실제로는 친근한 관계”
로 전도된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으로 표현하고 있다.24) 다시 말해 종교
의 전통적인 금기를 깨는 것으로 여겨진 ‘자본주의적 영리 활동’에 대해
24) Max Weber,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Talcott Parsons (trans.)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78), p.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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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硏究 第58輯

베버는 실로 프로테스탄트의 교리(와 그 해석)가 그것을 경건한 종교적
의무감에서 또는 현세적 금욕주의의 발현에 따라 행해진 것으로 전환함
으로써 그런 활동에 담긴 세속성과 탐욕성을 말소해 버린 효과에 주목
했던 것이다.25)
베버의 해석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 자본가나 노동자의 경우, 이제
탐욕의 추구라는 ‘사적인 악덕’이 바야흐로 경건하고 현세적인 금욕주의
의 수행이라는 ‘종교적인 미덕’의 발현으로 전환된 셈이었다. 필자는 베
버의 이러한 해석이 17~19세기 유럽에서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지닌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버의 이러한 분석은 개인의 이익 추구를 전통 종
교의 금기에서 해방시키는 도덕 혁명에 앞서 개인의 자유로운 이익과
부의 추구가 제도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신분사회의 해체와 계약사회
(개인주의)의 대두라는 사회적⋅정치적 변화를 이미 전제하고 있었다.
앞에서 논한 것처럼 다양한 변수들의 결합에 의해 중상주의로 무장한
절대주의 국가의 대두와 함께 봉건적 신분사회가 급속히 해체되고 있던
서유럽은 분명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제공했다. 다시 말해 이러한 역사
적 배경이 “기술적 생산 수단”은 물론 “법률과 행정의 합리적 조직”을
포함해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 조직화를 갖춘 착실한 부르주아 자본
주의”의 물질적⋅제도적 토대를 제공했던 것이다.26) 이러한 배경에서 베
버는 종교적 금기에 구애받지 않고 무제한적 이익 추구를 합리적으로
수행하는 종교적으로 경건하고 금욕주의적인 자본가와 자본주의적 노동
기율을 충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찬가지로 금욕적인 노동자들, 곧
“성실하고 양심적이고 대단한 노동능력을 가진 동시에 신이 원하는 삶
25) 조혜인에 따르면, 경제활동과 관련해서 “내세적 금욕주의”는 “돈을 벌지도 말
고 쓰지도 말라는 것”이며 중세에 “사제 계급에게만 적극적으로 요구”되던
덕목으로, “현세적 금욕주의”는 “일을 열심히 해 돈을 벌더라고 그것을 쓰면
서 향락하지 말라는 것”이며 종교개혁 이후 “평신도에게 그렇게 살도록 적극
적으로 장려”하던 덕목으로 요약된다. 조혜인, 앞의 글, 108쪽.
26) 막스 베버, 박성수 옮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서울: 문
예출판사, 1998), 15, 14쪽.

아시아적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인가 345

의 목적으로서의 노동에 매진하는 노동자들”이 왜 특정 종교 집단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가에 주목했던 것이다.27)
그러나 유럽에서 자본주의 발흥 당시 오직 프로테스탄트 윤리만이 탐
욕의 추구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 금기에 도전한 것은 아니었다. 전통
종교의 금기는 다방면에서 공격을 받으며 종국적으로 해체되었기에 우
리는 이를 ‘중첩적 공격’(overlapping assaults)에 의한 해체라 명명할 수 있
다. 영국의 저술가인 맨더빌(Bernard Mandeville)은 1714년에 이미 ‘사적인
악덕, 공적인 이득(Private Vices, Publick Benefits)’이라는 부제가 붙은 꿀
벌의 우화 (The Fable of the Bees)를 출간하여 금욕과 절제를 강조하는
중세의 기독교적 도덕을 위선이라 비판하고 인간의 이기심과 사치에 대
한 욕구가 경제적 발전과 사회적 번영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28) 그러나
기독교의 거센 반발에 직면해 맨더빌은 재판에 회부되고 그의 사상은
법정에서 금지령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18세기 초 유럽에서 무제한적
이익 추구를 단순히 세속적으로 정당화하는 논리가 이를 금압한 종교적
금기를 아직 극복할 수 없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후일 베버가 관찰한 것
처럼 프로테스탄트 윤리에 수반된 금욕적이고 경건한 종교적 의무 수행
이라는 관점에서 비롯된 이익 추구 정신만이 그러한 종교적 금기를 타
개할 수 있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 아직 세속적 이익의 독립적인 자기주
장은 종교적 금기를 넘어설 수 없었고, 다른 방식으로 정향된 종교적 열
정만이 종교적 금기를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맨더빌의 저술이 출간된 때부터 60여 년이 지난 후 경제적 자유주의
를 정립한 애덤 스미스는 계량화된 경제학적 사유와 논리를 통해 맨더
빌의 주장을 체계적으로 부활시키고 완성시켰다. 그는 자유 경쟁 시장
에서 수요와 공급의 법칙─시장에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공급자(생산
자)와 소비자의 활동의 총화─에 의해 형성되는 시장 가격 이론을 정립
했다. 나아가 그 가격을 또한 자연법에 합치하는 ‘자연적 가격(natural
27) 베버, 앞의 책, 141쪽; 141-143쪽 참조.

28) Bernard Mandeville, The Fable of the Bees(Middlesex: Penguin,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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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硏究 第58輯

price)’이자 ‘정의로운 가격(just price)’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시장 가격을 도
덕 법칙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인간의 욕망 추구가 정의에 기여한다는
스미스의 논리는 인간 욕망의 해방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제 세속적
인 자기 이익 추구는 굳이 금욕적이고 경건한 종교적 열정(신앙)에 의탁
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다. 자유로운 시
장에서 자기 이익의 추구는 예전처럼 상공업자 계급에 국한된 활동이
아니라 소비자인 일반 시민 역시 몰입하는 행위로 여겨지면서 이익 추
구 행위는 합리적인 일반 시민의 경제적 덕목이 되었다.29)
그러나 경제 영역에서 사적 악덕인 이익의 추구가 정의로 귀결된다는
스미스의 논리는 그것이 정부의 간섭이 없는 자유로운 시장의 존재는
물론 화폐 경제의 융성과 산업 혁명의 출현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는 점
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자유로운 시장에서 수요 공급의 법칙에 의해 결
정된 시장 가격이 공적인 덕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재화의 희소성에
의해 규정되는 농업 사회가 그러한 희소성에서 해방된 산업 사회로 전
환되는 것을 필요로 했다. 정의로운 시장 가격의 형성을 위해 수요 곡선
과 공급 곡선이 충분한 가격 탄력성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
해 공급자는 가격에 올라감에 따라 공급량(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 능력
을 구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가격이 오르더라도 공급량을 이에 맞추
어 탄력적으로 증가시킬 수 없다면 스미스가 상정한 공급 곡선은 완성
되지 못한다. 또한 공급자는 인간의 욕망을 다양한 방면에서 충족할 수

29) 종국적으로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 행위는 벤담의 공리주의에 의해 전통적인
종교적⋅도덕적 규범의 구속으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얻게 되었다. 벤담은 인
간의 본성이 오직 고통과 쾌락에 의해 지배되며, 따라서 고통과 쾌락이 인간
행위에 기본적 동기를 부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관에 기초해
자신의 공리주의 사상을 정립했다. 나아가 인간의 행복을 고통과 쾌락의 총
화를 통해 파악하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사회적 도덕이자 입법의 목표
로 설정했다. 이제 자본주의적 이익 추구 정신은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같은
보호막이나 스미스가 제시한 ‘공공선에의 기여’와 같은 정당화를 더 이상 필
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아시아적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인가 347

있는 상품을 공급해야 한다. 소비자 역시 구매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유
효 수요를 가지고 시장에 참가하려면 나름대로 풍부한 화폐를 보유해야
한다. 나아가 가격 탄력적인 다양한 욕망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농업 사회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다. 주로 농업과 가
내 수공업의 생산에 의존하는 농업 사회는 생산 능력의 제한으로 인해
공급을 가격에 따라 탄력적으로 증대시킬 수 없다. 또한 농업사회의 대
다수 인간은 자신들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하는 생필품 구매를 제외하면
다양한 욕망을 발전시키지 못한 상태에 있고, 또 이를 충족할 수 있는
화폐를 보유하고 있지도 못하다. 따라서 산업 사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희소성의 원칙이 강하게 지배하는 농업 사회에서는 농업을 통해서든 상
업을 통해서든 무제한적인 이익 추구 행위와 그로 인한 부의 집중이 공
적인 미덕으로 전환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유교가 주장했던 것처럼, 이

( )의 추구가 의( )로 전환될 수 없다. 제한된 재화와 자원을 전제로 한
사회에서 인간의 이익 추구 행위는 그렇지 않은 산업 사회에서보다 영

零合, zero-sum) 게임이 될 개연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합(

그렇기에 본래 농업 문명에 기반을 둔 세계의 주요 종교는 부의 집중
이나 이익의 추구를 격렬하게 비판하고, 그러한 행위를 종교적 교리나
도덕적 원리를 통해 엄격하게 통제하고자 했다. 이 점을 우리에게 친숙
한 기독교와 유교를 통해 쉽게 예시할 수 있다. 먼저 성경에서는 “낙
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태복음 19장 24절)라는 자주 인용되는 구절을 통해 부의 형
성 과정 자체의 당부당을 묻지 않고 부의 축적 자체를 탐욕시하고 비판
한다. 중세 유럽에서 유태인이 경멸과 배척의 대상이 된 중요한 이유 가
운데 하나는 유태인이 돈을 빌려 주고 (교회법이 금하는) 이자를 받았기

論語)에서 공자 역시 ‘가난함’을 ‘고르지 못함’이라는

때문이다.30) 논어(

관점에서 파악하면서 고르면 가난함이 없다고 주장했다.31) 공자가 군자

30) 교회사에서 고리대금(usury)은 일곱 가지 중죄 중 하나에 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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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硏究 第58輯

와 대비하여 흔히 비판하는 소인의 전형적인 특징은 이익을 탐하는 것
이었으며. 공자는 “이익에 따라 행동하면 원망이 많다.”라고 경계했다.32)

孟子)의 모두를 장식하는 유명한 「양혜왕장구(梁惠王章

맹자도 맹자(

句) 상」에서 나라의 이로움을 구하는 양혜왕의 물음을 정면으로 반박하
면서 오직 인의를 추구해야 함을 강조했다.33)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의

에 반했고, 이익은 의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했다. 주자학 역시 천리(

理)의 공(公)과 인욕(人慾)의 사(私)를 대비시키면서 이익을 추구하는 것

을 철저히 경계하고 금압했다. 이처럼 유학은 이익 추구 정신을 예와 덕
(인의) 및 천리를 통해 통제하고자 했다.
농업 문명에 기반을 둔 주요 전통 종교들이 이익 추구 행위를 금압한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는 필자의 해석이 합당하다면, 베버가 프로테스탄
트 윤리에서 비롯된 합리적인 자본주의 정신의 맹아를 다른 종교에서
찾기 위해 인도의 불교와 힌두교, 중국의 유교와 도교를 검토한 이후에
동양의 종교에서는 그러한 정신을 찾을 수 없다고 해석한 것은 사실 지
극히 자명한 결론이지만 동시에 무익한 발견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연구
는 서구인의 입장에서 동양에서 ‘서구적인 것의 부재’를 논했다는 점에
서 오리엔탈리즘의 강화에 기여했는지 모르지만, 학문적으로 이미 맥락
적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동양에서는 근대 초
에 유럽 문명이 겪은 거대한 변환과 이에 수반한 사회적⋅정치적 변화
로서 신분 사회의 해체, 신앙의 개체화(개인주의의 발생)가 진행되지 않
았다. 따라서 종교적 교리(와 그 해석)에 그러한 변화가 반영될 수 없었
던 동양의 종교에서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 발견한 것과 같은
합리적인 자본주의 정신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너무나 당연

季氏)」 1장, 성백효 역주, 논어집주(서울: 전통문화연구회, 1991),
32) 논어, 「이인(里仁)」 11~12장, 성백효 역주, 논어집주, 76쪽; ‘견리사의’(見
利思義)라는 유명한 문구가 나오는 논어, 「헌문(憲問)」 13장, 281쪽도 참조.
33) 맹자(孟子), 「양혜왕장구 상」, 성백효 역주, 맹자집주(서울: 전통문화연구
31) 논어, 「계씨(
328~329쪽.

회, 1992), 15-18쪽.

아시아적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인가 349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유럽에서 카톨릭보다 프로테스탄
트 사이에서 자본주의의 합리적 정신이 더 많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그에 앞서 이미 자본주의의 합리적 정신이 시대정신으로서 무르익어 가
고 있었다는 역사적 배경을 전제로 한다. 다만 자본주의가 발흥하던 시
대에 유럽의 카톨릭은 당시 진행되던 거대한 사회적 변환의 수용을 전
면적으로 거부했기에 합리적인 자본주의 정신을 아직 발전시키지 않았
을(또는 못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종교적 교리의 역사 초월성을 가정하
고 이미 신분 제도가 해체와 함께 신앙의 개체화가 진행되던 프로테스
탄티즘, 그리고 신분제와 신앙의 집단주의화에 아직 얽매여 있던 동양
의 종교를 역사적 맥락상의 차이를 무시하고 평면적으로 대등한 차원에
서 비교해 일방적인 결론을 도출한 종교사회학 창시자의 입장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종교사회학의 본지에 반하는 것이다.

Ⅴ. 2차적 근대화와 아시아적 가치
마르크스가 제시한 사적 유물론의 기본 공식에 따른다면, 사회변화를
설명함에 있어서 토대에 속하는 사회적⋅경제적 변수가 결정적이고, 상
부 구조에 속하는 문화적 변수는 기껏해야 종속 변수에 불과하다. 그러
나 종교적⋅문화적 변수를 중시한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독립 변
수로 상정해서 서유럽에서 자본주의 발흥을 설명하고자 했다. 나아가
그는 여전히 반자본주의적으로 남아 있던 아시아의 사상적 자원을 근대
화의 걸림돌로 지적했다.
그러나 앞에서 필자가 구분한 것처럼 원초적 근대화와 2차적 근대화
를 구분하는 입장에 선다면, 애당초 아시아가 원초적 근대화를 수행하
는 것이라 가정하고 아시아적 가치를 독립 변수로 상정하여 근대화의
걸림돌이나 디딤돌로 논하는 것은 잘못된 발상이다. 다시 말해 적어도
19세기 후반부터 동아시아를 비롯한 비서구 세계가 추구한 것은 원초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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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硏究 第58輯

근대화가 아니라 2차적 근대화였다. 이 점에서 아시아적 가치는 그것이
걸림돌로 인식되든 디딤돌로 인식되든, 그 역할이 독립 변수가 아니라
기껏해야 매개 변수(또는 적응 변수)로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필자는 역사적으로 아시아적 가치가 근대화를 원초적으로 가져오지
못한 점─서구 문명이 근대화를 먼저 수행한 후 비서구 세계를 침투하
고 정복하여 근대화의 길이 중도에 차단되거나 봉쇄되었을 가능성(서구
문명의 선점과 침투에 의한 차단이나 봉쇄)까지 포함해서─을 인정하는
입장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시아적 가치가 2차적 근대화를 가져오는 데
기여할 수 없다는 입장에는 동조하지 않는다. 더욱이 근대 서구 문명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바야흐로 전 세계가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로 재편되
는 과정에서 서구 문명의 모방과 확산을 통한 수용 및 혁신을 통해 아
시아에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적응할 수 있는 문화적 에토스를 만들
어 내는 작업은, 그것을 아시아적 가치로 부르든 서구적 가치로 부르든,
문명의 존망과 국가의 사활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였다. 이와 관련하여
베버 역시 자본주의 정신의 태동적 조건으로 프로테스탄티즘에 내재해
있던 현세적 금욕주의에 주목했지만, 프로테스탄티즘의 종교적 열정이
식은 뒤에는 궁극적으로 “공리주의적 현세주의”가 자본주의적 정신으로
자리 잡게 된 점을 지적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34) 다시
말해 초기에는 전통 종교가 금기시하는 인간 이익의 무제한적 추구(자
본주의 정신)를 정당화하기 위해 금욕적인 종교적 논리와 열정이 동원
되었지만, 자본주의 정신이 사회적 대세로 확산되고 이익 추구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인 금기가 무력화된 상태에서는 공리주의 철학으로도
충분히 자본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35)

34) 막스 베버, 앞의 책, 34~38, 140~141, 144쪽.
35)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제시한 시장 가격 이론 역시 당시의 역사적 상황에
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충분한 대용물이 될 수 있었다. 초기에 자본주의
에 적대적이던 유럽의 카톨릭 역시 비슷한 과정을 통해 후일 ‘자본주의 정신’
에 편승했을 것이다.

아시아적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인가 351

이러한 통찰은 2차적 근대화에 직면했던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중요
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를 동아시아에 적용해 볼 경우, 우리는 동일한
2차적 근대화라 할지라도 19세기 후반에 근대 서구 문명이 본격적으로
침투해 왔지만 아직 그 헤게모니가 확립되지 않았을 때와 20세기 중반
이후 헤게모니가 전 세계적으로 확립되었을 때의 역사적 상황이 또한
다르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36)
이러한 구분을 염두에 두고 먼저 19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상황을 조
선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조선은 계몽주의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자
유주의 서구 문명의 적극 수용을 주장하던 개화파와 유교에 입각한 반
자유주의적 신분 제도와 반자본주의적 농업 문명(이익 추구에 대한 전
통 유교의 금기)의 고수를 주장하던 위정척사파로 분열되어 있었다. 개
화파의 주요 인물인 유길준은 서구 문명의 적극적인 수용과 모방인 개
화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서유견문에서 그는 “개화란 인간 세상의
천만 가지 사물이 지극히 선하고도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는 것”이며,
“사람의 지식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신기한 것과 심묘한 것들이 쌓여져”
나오기 때문에, “개화한 자는 천만 가지 사물을 연구하고 경영하여 날마
다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기약한다.”라고 주장했다.37)
개화파는 근대 서구 문명이 세계를 장악한 상황에서 서구 문명을 본
으로 하여 자유주의-자본주의에 기초한 부강한 국가와 문명을 건설하는
것이 조선을 보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으며 이에 따라 조선 왕조
의 기존 질서를 전면적이고 급진적으로 개조⋅변혁하고자 했다.38) 그들
36) 여기서 헤게모니(hegemony)는 근대 서구 문명의 지적⋅도덕적 리더십을 인정
한다는 뜻으로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이 담고 있는 ‘동의’를 지시한다.
37) 유길준, 허경진 옮김, 서유견문(서울: 서해문집, 2004), 393, 401, 394쪽.

嚴復

38) 중국의 계몽 사상가 엄복(
)을 사로잡은 근원적인 질문 역시 ‘서양이 그토
록 부강해진 비밀은 무엇인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엄복의 사상을 분석한 저
서에서 슈워츠(Benjamin Schwartz) 역시 책의 제목을 ‘부와 권력을 찾아서(In
Search of Wealth and Power)’라고 붙였다. 벤저민 슈워츠, 최효선 옮김, 부와
권력을 찾아서(파주: 한길사, 2006).

352

東洋古典硏究 第58輯

은 또한 서구 문명이 제시한 세계관을 받아들여 세계의 형세를 우승열
패와 약육강식의 시대로 규정하고 오직 부국강병만이 조선을 보전하는

半開)-미개’의 등급을 설정

방책이라고 주장했다.39) 유길준은 ‘개화-반개(

하고40) 서양을 ‘개화’된 문명으로, 조선을 포함한 동아시아 문명을 ‘반개’
로 규정한 후, 서양 문명을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방안만이 동아시아 문
명을 쇄신하고 부흥시키는 길이라 굳게 믿었다. 따라서 박영효나 유길
준 등 개화파에게 서구의 정치와 경제, 과학과 기술을 먼저 받아들여 급
속한 발전을 이룩한 일본은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1888년에 이미 박영효
는 「건백서」라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리면서 “이웃의 한 나라는 이미
개명의 도를 취하여 문화와 기예를 닦고 무장을 갖추어 다른 부강한 국
가들과 거의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는 아직도 세계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여 온 천하로부터 모욕을 자초하고 있다.”라고 개
탄하면서 일본을 치켜세우고 조선을 비판했다.41)
여기서 상세히 논할 수 없기 때문에 19세기 말 조선의 상황에서 근대
화(개화)와 아시아적 가치의 상호 관계에 대한 논의를 개화파를 중심으
로 간략히 검토하겠다. 개화파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정당성에 대한
주장을 한편으로는 서구 문명의 논리와 이상을 옹호하면서 전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적 원리와 가치를 선별적으로 취사선택하고 또 재
해석하면서 전개했다고 할 수 있다.42) 이들의 이러한 입장은 안외순이
19세기 말 개화파가 제시한 민주주의 수용론을 검토하면서 활용한 논리
에 기대어 요약될 수 있다. 곧 개화파는 서구 문명이 내세운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유교와 필연적으로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상호 보완
39) 김갑천, 「박영효의 건백서: 내정개혁에 대한 1888년의 상소문」, 한국정치연
구 2권(1990), 254쪽.
40) 유길준, 앞의 책, 394쪽.
41) 김갑천, 앞의 글, 252쪽.
42) 이 글의 목적에 비추어 이하에서는 서구 문명의 논리와 이상의 관점에서 개
화를 옹호한 구절이 아니라 유교의 원리와 가치의 관점에서 개화를 옹호한
개화파의 사상만 간단히 살펴보겠다.

아시아적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인가 353

적이라는 점을 밝히고자 사상적 작업에 매진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한편으로 서구 문명의 적극적 수용과 다른 한편으로 유가에 의한 서구

馴致)를 동시에 주장했던 것이다.

문명의 순치(

43)

곧 그들은 유교의 고전

을 선별적으로 취사선택하여 서구 문명(근대화)을 뒷받침할 수 있는 “유
가의

潛在的 원리를 顯在化”시키는 한편,

44)

서구 문명(근대화)에 반하는

유가의 원리는 새롭게 재해석하거나 최소화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박
영효는 「건백서」에서 인민 주권론과 사회 계약론을 염두에 두고 “백성
이 오직 나라의 근본”이라는 서경의 구절이나 강태공의 말을 인용하
면서 “나라는 제왕의 것이 아니라 인민의 나라”이며 “제왕은 나라를 다
스리는 직분일 뿐”이라고 하면서 정부의 목적을 “백성을 보호하고 국가
를 지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45) 또한 “나라에 도가 있으면 거기에서는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부유하고 존
귀한 것이 부끄러운 것”46)이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익과 부의
추구를 정당화했다.47) 다른 한편 그들은 서구 문명을 수용하더라도 유가
의 보편적인 가치를 보존하고 관철하기 위해 서구 문명을 유가에 의해
순치하고자 했다. 안외순이 지적한 것처럼, 그들은 법치를 덕치, 자유와

通義)에 의해 보완하거나 통제함으로써 “쌍무 호혜론과 도

권리를 통의(

덕 정치론의 우월성”을 보존하기 위해 고심했다.48) 이 점에서 그들은 안
외순이 말한 대로, “전통과 근대의 융합적 대안” 또는 “동서 사상(의) 융
합”을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에서 논한 것처럼 개화파가 근대화(문명개화)와 아시아적 가

相容性) 또는 양립 가능성을 주장하고 나아가 동서 문명의

치의 상용성(

43) 안외순, 「19세기 말 조선에 있어서 민주주의 수용론의 재검토: 동서사상 융
합의 관점에서」, 정치사상연구 4권(2001), 27-53쪽.
44) 앞의 글, 49쪽.
45) 김갑천, 앞의 글, 249~251쪽.
46) 논어, 「태백(
)」 13장.

泰伯

47) 김갑천, 앞의 글, 249~262쪽.
48) 안외순, 앞의 글, 49쪽.

354

東洋古典硏究 第58輯

융합을 주장했다 해도, 원초적 근대화와 2차적 근대화를 구분하는 입장
에서 보면 그들이 내세운 아시아적 가치는 근대성을 원초적으로 개척하
기 위한 인과적인 독립 변수로, 곧 근대화에 대한 원초적인 동기 부여의
차원에서 제기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근대 서구 문명을 목표로
삼은 목표 지향적 변화를 설정한 후 일종의 매개적 변수로, 곧 근대화에
대한 (사후적인) 합리화의 차원에서 제시된 해석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
하다. 그들은 약육강식과 우승열패가 지배하는 세계 질서에서 막강한
위용을 자랑하는 서구 근대 문명에 압도된 나머지 유가 문명과 조선의
생존을 위해 부국강병을 추구하기로 이미 목표를 설정했다. 단지 이를
사후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근대 서구 문명과 상용 가능한, 곧 기본적
으로 서구 문명에 적응 가능한 아시아적 가치를 선별적으로 동원했다고
할 수 있다.49)
이 점에서 프로테스탄트의 현세적 금욕주의가 이익 추구에 대한 기독
교의 전통적 금기를 깨고 자본주의 정신을 개척한 것이 사상적으로 (의
도하지 않은) 원초적 근대화에 해당한다면, 근대 서구 문명이 자본주의
적 발전을 통해 부강해진 것을 목격하고 이에 따라 부국강병이라는 목
표를 효과적으로 추구하기 위해, 곧 상공업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여 이
익 추구를 진작시키기 위해, 그러한 목표를 뒷받침하는 유교의 경전을
선별적으로 재해석하거나 인용한 것은 사상적으로 2차적 근대화에 해당
하는 작업이었다. 그런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개화파는 자신들이
이미 세운 목표에 부합하는 문화적 자원을 유교로부터 그리 어렵지 않
게 추출하거나 동원할 수 있었다.
이런 작업은 근대 문명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문화적 심성이나 가치
를 서구 문명에서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던 문화적 심성이나 가치에 해
당하는 기능적 등가물을 발견해서 확충하는 노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49) 이 점에서 유교의 원칙과 가치를 선별적으로 동원하여 근대 서구 문명(의 수
용)을 정당화한 것과 달리 유교의 원칙과 가치를 통해 서구 문명을 순치하려
고 노력한 이론적 시도는 별도의 고찰을 필요로 한다.

아시아적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인가 355

예를 들어 석탄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먼저 종이를 태워 석탄을 가열
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석탄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그보다 인화가 쉬
운 물질에 불을 붙여 가열해야 한다는 원리를 이미 배워서 안다면 마른
나뭇가지에 불을 태우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뭇가
지가 젖어 있다면 그것을 말리거나 또는 솔방울이나 낙엽을 구해서 불
을 지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19세기 말 조선의 개화파들이
근대 서구 문명을 모방하여 부국강병을 추진하기 위해 그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유가적 가치나 원리를 동원하는 것은 한편으로 그들 자신의 내
적 확신을 키우기 위해 필요한 작업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신분 질서를
옹호하고 이익 추구를 금하는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에 입각해 개화를
반대하던 위정척사파 등 다수의 양반 계급의 반론과 반발에 대응하기
위해 요청된 작업이었다. 곧 그들은 ‘프로테스탄트 윤리’라는 ‘종이’ 대신
에 (재해석된 또는 가공된) ‘유교’라는 ‘나뭇가지’를 태워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라는 종이의 기능적 등가물로 나뭇가지를 찾
아서 대용하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근대 서구 문명이 먼
저 발견하고 아시아가 학습을 통해 배운 원리─석탄을 태우면 종래 사
용하던 연료보다 더 많은 열량을 얻을 수 있고 또 석탄에 불을 붙이기
위해서는 인화성 있는 물질을 태워 석탄을 가열해야 한다는 원리─였다
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논점을 아시아적 가치를 긍정적으로 논하기 시작한 20세기 후
반의 상황에 확대 적용해 보면, 우리는 19세기 말과 또 다른 역사적 상
황을 발견하게 된다. 19세기 말을 상기해 보면, 그 당시는 비록 불리한
입장에서 수세에 처하긴 했지만 동아시아의 유교 문명이 근대 서구 문
명과 맞서고 있는 형국이었고 전통 유교 문명에 대한 자긍심도 여전히
강하게 존속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이 서구와 일본의 자
본주의 문명에 직면하여 스스로의 전통을 쇄신하면서 근대화에 적응하
지 못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을 때, 유교 문명은 그 문명적
정당성을 상실하고 전통문화의 공식적인 영향력 역시 무장 해제를 당했

356

東洋古典硏究 第58輯

다. 조선의 경우 식민지 노예 또는 망국노의 상태로 전락한 주된 원인이
전통 시대 위정자들의 잘못된 정책에서도 기인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권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했던 종교를 포함한 전통
문화의 자기 쇄신이 실패하면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확산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식과 함께, 남북한
은 각각 미국과 소련에 의해 점령⋅해방되었고, 남한은 미국을 추종하
거나 모방하는 자유주의적 근대화 과정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서 유교적 가치나 원리에 입각해서 자본주의-자유주의를 기축으로 하는
근대화에 공개적으로 반발하거나 저항하는 담론은 이제 19세기 말과 달
리 그 설득력의 태반을 상실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 결과 20세기 후반에 2차적 근대화를 추진함에 있어서 이제 남한의
지배 세력은 19세기 말의 개화파와는 달리 유교의 도덕적 원리나 가치
를 무시해도 좋은 상황을 맞이했다. 해방 이후 한국에서 유교의 문화적
영향력이 ‘마음의 습관’으로 일상생활의 영역에서 여전히 존속했다는 점
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50) 이러한 상황에서 이익 추구에 대한 유
교의 금기 역시 과거처럼 공적인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이익 추구 정신을 과거의 개화파가 그랬던 것처럼 유교 경전이나 성인
의 말씀을 인용해 가면서까지 정당화할 필요가 없었다. 따라서 해방과
분단 이후 남한이 산업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인
서구의 근대화 이론이 유교의 윤리와 논리가 사라진 빈 공간을 채웠다.
1960년대 전 세계를 풍미한 근대화 이론은 전통과 근대를 적대적으로
대립시키고 근대화를 위해서는 뼈를 깎아 내는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전
통문화를 청산할 것을 촉구했다. 박정희는 1969년 제정한 「국민교육헌
장」에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
고 선언했는데 5⋅16 쿠데타 직후 발간한 우리 민족의 나갈 길이라는
책자에서 이미 “우리 민족은 근대화의 역사적 과제를 앞에 놓고 있다.”
50) 앞에서 인용한 조혜인의 연구는 이 점에 주목하고 있다(조혜인, 앞의 글).

아시아적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인가 357

라고 언명한 적이 있었다.51) 한국인을 사로잡았던 박정희의 민족주의 이
념에 의해 정당화된 근대화의 핵심적 과제는 물론 ‘경제 발전’이었다. 근
대화, 곧 경제 발전이 바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달성하기 위한 필
수 과제였다. 따라서 박정희 대통령이 조국 근대화의 모토로서 “증산,
수출, 건설”을 강조했을 때, 이러한 근대화가 단순히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 과연 의( )와 부합하는 것인지를 물을 수 있는 전통 유교
의 자정 능력은 이미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잘 살아 보세!’라
는 구호에 장단을 맞춘 공리주의 정신이었다. 이 공리주의적 열정이 물

질주의와 결합하여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환치(

置)된 유교의 금욕적 미덕―절개, 청빈, 근면 등―이 효율적으로 동원⋅활
용된 것은 물론이다. 유교의 전통적인 덕목인 효와 충은 가족⋅민족⋅국
가를 위한 희생과 헌신이라는 미덕으로 환치되어 한국인이 직면한 정신

세계의 황폐화를 보상하거나 위장해 주는 적절한 가림막의 구실을 했다.
여공들은 가족을 위한 희생과 헌신으로 가혹한 노동 조건에 순응했다.
또한 대부분의 노동자들에게는 ‘수출 전사’, ‘산업 역군’이라는 이름으로
국가와 민족에 충성을 바칠 기회가 제공되었다. 기업가들 역시 민족중
흥과 조국 근대화를 위해 헌신한다는 열정으로 정부의 특혜적 지원하에
국내는 물론 전 세계를 누비면서 “증산, 수출, 건설”을 통해 자신들의 무
제한적인 이윤 추구 동기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이처럼 환치된 유교의
충효 정신이 이익과 이윤을 추구해야 하는 세속적 공리주의 정신으로
피폐해진 한국인의 정신세계에 위안을 제공한 긍정적인 기능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에 충과 효로 무장한 기업가와 노
동자들이 헌신적으로 경제 발전에 진력했기 때문에 한국에 경제 발전이
있었고, 거기서 발견되는 문화적 에토스를 ‘아시아적 가치’로 명명한다
면, 아시아적 가치와 근대화의 긍정적 상관관계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51) 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갈 길, 개정 5판(서울: 동아출판사, 1962), 128쪽.

358

東洋古典硏究 第58輯

그렇지만 필자의 기본적 입장은 이익 추구에 대한 유교의 금기가 해체
된 이후에 한국인의 정신세계를 사로잡은 물질주의와 공리주의가 경제
발전을 이끈 문화적 원동력이고, 거기에 환치되어 동원된 유교는 단지
그것을 합리화한 매개 변수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서구와 한국 등 동아시아의 근대화의 맥락과 조건이
현저히 달랐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초적 근대화
(자본주의화)를 수행하던 서구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무제한적 이익
추구를 금하는 기독교의 전통적 금기에 맞서 이를 무너뜨렸다면, 한국
의 경우에는 근대화(자본주의화)가 이미 시대적 사명으로 설정된 상태에
서 아시아적 가치가 변용되고 동원되었다. 다시 말해 이른바 우리가 말
하는 아시아적 가치가 이익 추구를 금하던 유교의 종교적 금기를 내재
적으로 무너뜨린 바는 없다. 이익 추구에 대한 유교의 금기는 일제 강점
기를 거치며 유교가 문명적 정당성을 상실하자 사실상 오래전에 무장
해제되었다. 종교적 금기가 없는 상태에서 이익 추구의 정신은 공리주
의적 열정에 의해 형성되고 확산될 수 있었다. 이러한 공리주의적 열정
에 공적 정당성이나 사적인 위안을 제공해 준 것은 가족과 민족과 국가
에 대한 유교의 충효 정신이었다. 유교 문화는 내세 지향적(other-worldly)
초월성이 강한 불교나 힌두교 등과는 달리 현세 지향적 합리주의가 강
했기 때문에 비교적 손쉽게 공리주의와 결합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Ⅵ. 글을 마치며
지금까지 자본주의 발전과 관련하여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아
시아적 가치를 비교 검토하면서 제시된 필자의 주장은 다소 반복적이지
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논점으로 요약된다. 첫째,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이익 추구에 대한 기독교의 전통적 금기를 내파 하여 무력화하
고 자본주의 정신을 (비의도적이지만 결과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성공했

아시아적 가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인가 359

다. 반면, 20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주장되
는 아시아적 가치는 이익 추구에 대한 전통 유교의 금기를 스스로 변용
하거나 무너뜨린 적이 없다. 거친 표현이 허용된다면, 유교의 금기는 한
편으로는 계몽주의에 기초한 자본주의-자유주의를 내장한 근대 서구 문
명의 압도적 우월성(및 그에 대한 믿음), 다른 한편으로 그에 성공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유교의 문명적 정당성의 붕괴에 의해 해체되었다. 둘째,
베버의 주장에 따라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서구에서 자본주의 정신을 추
동한 독립 변수였다고 해도, 20세기 후반 아시아에서는 서구 문명의 우
월성을 전제로 한 2차적 근대화에 대한 열망─서구 문명에 대한 열렬한
학습─그리고 유교가 붕괴된 후 남은 빈 공간을 채운 “공리주의적 현세
주의”가 급속한 경제 발전을 추동했다. 셋째, 위의 두 논점을 충족하면
서 서구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개인적으로 내면화된 종교적 금욕
주의와 기율을 통해 합리적인 자본가와 노동자를 탄생시키는 데 기여했
다면, 아시아적 가치는 위의 두 가지 사태의 전개와 함께 이제 ‘마음의
습관’으로 남은 충과 효를 매개로 한 공동체─가족, 기업, 국가 등─에
대한 헌신 및 유교적 기율을 통해 (개인주의적이 아니라 공동체주의적
인) 자본가와 노동자를 양성하는 데 이바지했다.52) 따라서 아시아적 가
치를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기능적 등가물로 논한다면 오직 이 마지막
논점에 관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베버가 앞에서 먼저 논한 두
가지 논점과 관련해서도 프로테스탄트 윤리의 의의를 높이 평가하고 있
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논문접수일: 15.03.09 / 심사개시일: 15.03.10 / 게재확정일: 15.03.25

52) 이 점에서 아시아적 가치는 벤담의 개인주의적 공리주의를 집단주의적 공리
주의로 변형하는 데 기여했다고 해석된다.

360

東洋古典硏究 第58輯
<참고 문헌>

강정인,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서울: 아카넷, 2004).
김갑천, 「박영효의 건백서: 내정개혁에 대한 1888년의 상소문」, 한국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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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古典硏究 第58輯
Abstract
Are “Asian Values” the Functional Equivalent to the Protesttant Ethic? /
Jung In Kang

The purpose of this essay is to critically review whether it is theoretically
proper to interpret the so-called “Asian values” which have contributed to the
rapid economic development in East Asia, as the functional equivalent to the
Protestant ethic. To do this, the essay first presents a brief survey of Asian
values which have been perceived in the Western civilization since ancient times
and also asserted by the contemporary East Asians in reaction to the modern
Western civilization, Then, the distinction between the “pristine modernization”
and the “secondary modernization” is made to show that the historical context
in which Asian values made contribution to the capitalist economic development
is different from that in which the Protestant Ethic had done in the West. On
the basis of this distinction the roles which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Asian
values played in capitalist industrialization in the West and East Asia
respectively are compared and contrasted.
Key words: Asian values, Confucianism, Protestant Ethic, pristine modernization,
secondary moderniz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