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인. 2016.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신아세아』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강 정 인(姜正仁)┃ 서강대학교**1)

<국문요약>
이 논문은 월러스틴이 제기한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라는 개념을 비판적으로 분석
함으로써 그 이론적 공과를 검토한다. 이 과정에서 우드의 유럽중심적 반유럽중심주의 역시
부차적으로 살펴본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월러스틴의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
판이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한편, 하나의 중요한 그러나 편협한 관점에
매달리기 때문에 월러스틴은 자신이 비판하는 이론들에 담겨 있는 반(탈)서구중심적 이론적
기여를 무시하고 있다는 점을 밝힌다. 편협한 관점이란 자본주의 혹은 근대성에 관해 그 불
가피성, 바람직함 및 진보성을 수용하는 가정에 기초한 이론들을 모두 바로 그 이유로 반유
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로 규정하여 기각하는 것을 지칭한다. 이어서 이 논문은 자본주의와
근대성의 ‘진보성’을 전반적으로 부정하는 월러스틴의 현실주의적 입장이 반(탈)서구중심주의
를 지향하는 학문적 이론이나 정치적 운동을 쉽게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로 매도함으로
써 이론과 현실에서 어떤 모순을 빚어낼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서구중심주의가
다층적이고 중층적인 층위로 구성된 복합적 구조물이기 때문에 서구중심주의를 타개·극복하
려는 노력이 불가피하게 모순을 수반하는 과정이며, 따라서 이른바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
의에 대해 이론적 인내심과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이 글을 마무리한다.

Key Words ┃ 유럽(/서구)중심주의, 반유럽(/서구)중심적 유럽(/서구)중심주의, 유럽중심적 반유럽중
심주의, 월러스틴(I. Wallerstein), 오리엔탈리즘, 옥시덴탈리즘, 자본주의, 세계체제,
근대성, 진보, 동아시아중심론, 중국.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4S1A3A2043763).
** 저자의 주요 연구 분야는 비교 정치사상, 한국 현대 정치사상, 문화와 정치 등이며, 주요 저서로는
넘나듦(通涉)의 정치사상 (2013), 한국 현대 정치사상과 박정희 (2014), Western-Centrism and
Contemporary Korean Political Thought (서구중심주의와 현대 한국 정치사상, 2015) 등이 있다.
112 ┃ ⓒNARI, 新亞細亞 , 23권 2호 (2016년, 여름)

I. 글머리에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anti-Eurocentric Eurocentrism)1)라는 용어는
1997년에 월러스틴(I. Wallerstein)이 출간한 “유럽중심주의와 그 화신들”이라는 논
문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다.2) 또한 월러스틴은 자신의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
가 아랍의 반서구주의자들이 서구에 대해 구성한 담론인 ‘옥시덴탈리즘’과 동의어라
고 언급하기도 한다.3) 우드(E. M. Wood) 역시 자본주의 개념에 대한 상업화 모델
을 적용하여 자본주의의 유럽적 기원을 부정하는 블로트와 같은 이론가들을 두고
“가장 유럽중심적 가정에 기초하여 전개된 자본주의에 대한 반유럽중심적 역사서술”
이라고 비판하면서 월러스틴과 비슷한 관점에서 “유럽중심적 반유럽중심주
의”(Eurocentric Anti-Eurocentrism)라는 개념을 사용한다.4) 두 개념은 표현이 다소
상이하긴 하지만 의미상의 차이는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월러스틴과 우드가 사용한 이 개념들은 서구는 물론 국내학계에서도 널리 수용
되어 서구중심주의 관련 문헌에서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먼저 국내학계를 보면 월
러스틴의 ‘anti-Eurocentric Eurocentrism’은 주로 ‘반유럽중심(주의)적 유럽중심주
의’로 번역되어 활용되고 있다.5) 이와 달리 이를 “반서구중심(주의)적인 서구중심주
1) 필자는 영어권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유러센트리즘’(Eurocentrism)에 대한 옮김말로, 의미상의
큰 차이는 없지만, ‘유럽중심주의’보다는 ‘서구중심주의’를 선호한다. 이에 대해서는 강정인, 서
구중심주의를 넘어서 (서울: 아카넷, 2004), pp. 39-44 참조. 따라서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
보다는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다만 이 글에서 월러스틴의 논의를 검
토할 때에는 한글 번역본이 ‘anti-Eurocentric Eurocentrism’을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로 번
역했기에 그것을 따르도록 하겠다. 의미상의 큰 차이가 없는 두 용어가 병존하는 혼란에 대해 미
리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2) 이 논문은 “Eurocentrism and Its Avatars: The Dilemmas of Social Science”라는 영문제목으로
1996년 서울에서 개최된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되었고. 창작과비평 (1997년 봄)에 번역 수록되
었다. 참고로 영문본은 신좌파평론(New Left Review) (1997)에 개재되었다. 다만 1997년 한글
번역본은 그 번역상태가 매끄럽지 않기 때문에 이 논문에서는 다음의 책에 재수록된 동일제목의
논문을 인용한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21세기를 위한 사회과학 (서울:
창작과비평사, 2001). 이 글에서는 월러스틴(2001)의 논문을 집중적으로 분석할 것인데, 편의상
앞으로 이 논문을 인용할 때 한글로 번역된 논문의 쪽수만을 괄호 속에 기재하도록 하겠다.
3) 이매뉴얼 월러스틴, 김재오 역, 유럽적 보편주의: 권력의 레토릭 (서울: 창비, 2008), p. 88.
4) Ellen Meiksins Wood, “Eurocentric Anti-Eurocentrism,” Against the Current, Vol. 92 (2001), p. 29.
5) 강정인, op. cit; 김용우, “로컬과 글로벌 사이에서 – 유럽중심주의와 지구사 서술,” 인문연구 , 제57
호 (2009); 고원, “브로델과 초두리: A. G. 프랑크의 유럽중심주의 비판에 대한 검토,” 프랑스사 연
구 , 제23호 (2010); 윤해동, 근대역사학의 황혼 (서울: 책과 함께, 2010); 김두진·이내영, “유럽산
업혁명과 동아시아 ‘대분기’(Great Divergence) 논쟁,” 아세아연구 , 제55권, 제2호 (2012); 김은중,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 113

의”로 번역하여 사용하는 학자들도 있다.6) 우드의 유럽중심적 반유럽중심주의 개념
은 그것을 국내에 소개한 유재건(2008)만이 사용하고 국내의 다른 학자들은 사용하
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서구학계에서도 월러스틴의 개념이 압도적으로 자주 사용되
고 있는 반면, 우드의 개념은 비교적 드물게 사용된다.
월러스틴의 논문이 검토하는 것과 달리, ‘서구중심주의’와 ‘반서구중심적 서구중
심주의’를 둘러싼 공방은 자본주의와 근대성의 기원을 놓고 전개되는 역사학자들 사
이의 논쟁으로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월러스틴의 “유럽중심주의와 그 화신들”에 관
한 논평문을 게재한 사회학자 맥레난(Gregory McLennan)은 월러스틴의 논문 역시
서구중심주의의 딜레마를 탈피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고 여러 가지 논점을 들어
비판한다.7) 심지어 사이드(E. Said)의 오리엔탈리즘 에 대해서도 서구중심주의
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일견 ‘서구중심주의를 타개·극복하려는 이론적 시도가
사실상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다름 아니다’라는 비판은 이러한 시도를
따라다니면서 집요하게 괴롭히는 악령인 것처럼도 보인다. 가령 딜릭(Arif
Dirlik)은 1990년대 후반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제기된 ‘아시아적 가치론’에 대
해 서구중심주의와 마찬가지로 문명(문화)의 본질주의적 구분에 근거하여 아시
아적 가치의 우월성(또는 보편성)을 주장하기 때문에 일종의 동아시아발(發) 옥
시덴탈리즘이라는 점에서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라고 비판한 바 있다.8)
이 논문은 월러스틴이 제기한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라는 개념을 비판적으
로 분석함으로써 그 이론적 공과를 검토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우드의 유럽중심
적 반유럽중심주의 역시 부차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이러한 검토를 통해 월러스틴의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
는 한편, 하나의 중요한 그러나 편협한 관점 — 곧 자본주의 혹은 근대성에 관해 그
불가피성, 바람직함 및 진보성을 수용하는 가정에 기초한 이론들을 모두 바로 그 이
“유럽의 비판이론과 라틴아메리카 해방철학,” 한국정치사상학회 월례학술회의, 2015. 11. 21 등.
6) 정용화, “한국인의 근대적 자아 형성과 오리엔탈리즘,” 정치사상연구 , 제9집 (2004); 유재건, “서
구중심주의와 근대성: 자본주의의 문제,” 한국민족문화 , 제32집 (2008) 등.
7) Gregory McLennan, “The Question of Eurocentrism: A Comment on Immanuel Wallerstein,” New
Left Review, Vol. 231(1998).
8) Arif Dirlik, “Culture against History?: The Politics of East Asian Identity,” Development and
Society, Vol. 28, No. 2(1999).
114 ┃ 강 정 인

유로 기각하는 관점 — 에 매달리기 때문에 월러스틴은 자신이 비판하는 이론들에
담겨 있는 반(탈)서구중심적 이론적 기여를 무시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이
어서 자본주의와 근대성의 ‘진보성’을 전반적으로 부정하는 월러스틴의 현실주의적
입장이 근대성의 보편적 이념이나 이상에 호소함으로써 반(탈)서구중심주의를 지향
하는 학문적 이론이나 정치적 운동을 쉽게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로 매도함으로
써 이론과 현실에서 어떤 모순을 빚어낼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서구중심주의가 다층적이고 중층적인 층위로 구성된 복합적 구조물이기 때문에 서구
중심주의를 타개·극복하려는 노력은 불가피하게 모순을 수반하는 과정이며, 따라서
이른바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해 이론적 인내심과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Ⅱ. 월러스틴의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 검토
월러스틴은 자신의 논문을 19세기에 출현한 서구의 사회과학이 태생적으로 유럽
중심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시작한다.

사회과학은 유럽이 전 세계체제를 지배하던 역사적 시점에 유럽의 문제들에
대한 대응으로 출현했다. 사회과학이 그 주제 선택이나 이론작업, 방법론 그
리고 인식론 모두에 있어서 그것을 빚어낸 용광로의 구속요건들을 반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피하다(236).
이어서 20세기 후반부터 비서구 세계의 탈식민화와 함께 서구 사회과학의 유럽중심
주의가 심각한 공격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렇지
만 유럽중심주의를 퇴치하기는 쉽지 않다고 언명하면서, “유럽중심주의 비판에 유럽중
심적 가설들을 사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학자 공동체에 대한 유럽중심주의의 장악을
한층 강화”하는 현상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한다(236). 이처럼
월러스틴은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를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유럽중심주의 비판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 115

에 유럽중심적 가설들을 사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유럽중심주의의 지속과 강화에 기
여하는 현상으로 간략하게 정의한다. 이 개념은 반(탈)서구중심주의 연구에 매진하는
학자들이 부딪히는 이론적 딜레마의 정곡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
그는 서구 사회과학의 “유럽중심주의를 (1) 사회과학의 역사기술 (2) 사회과학
의 보편주의의 편협성 (3) (서구)문명에 대한 사회과학의 가정들 (4) 사회과학의 동
양학(Orientalism) (5) 진보이론을 강요하려는 사회과학의 시도”로 나누어 고찰한다
(236-37). 앞에서 언급된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 개념을 이 다섯 분야에 두루
적용하여 검토할 수 있었을 법한데, 특이하게도 월러스틴은 오직 사회과학의 역사
기술과 관련해서만 그 개념을 적용하여 상론하고 있다. 그는 “유럽의 근대세계지배
를 유럽의 특정한 역사적 성취 덕분인 것으로 설명하는 것”을 역사기술의 서구중심
주의로 지칭한다(237). 그리고 이러한 성취로 “산업혁명이나 지속적 성장, 혹은 근
대성, 혹은 자본주의, 혹은 관료화, 혹은 개인의 자유” 등이 거론된다고 지적한다
(237). 서구중심적 사회과학에 대한 월러스틴의 평가는 그것이 “유럽의 역사적 역
할, 특히 근대세계에서의 역사적 역할을 오독하고 크게 과장하고 혹은 왜곡함으로
써 사회적 실재에 대해 그릇된 상”을 만들어 왔다는 결론으로 압축된다(248). 그는
이러한 역사기술의 서구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대략 세 가지 전략을
제시한다. 첫째는 “16-19세기에 유럽 및 전세계에서 일어난 사태”에 대한 서술이
정확한 것인지 검토하는 것이다. 둘째는 “이 시기에 일어난 것에 문화적 선조[문화
적 선행변수]라고 추정된 것이 과연 그럴법한지”에 대해서 음미하는 것이다. 셋째
는 16∼19세기에 거둔 이른바 유럽의 “성취들”이 “정말 새롭다”고 인정하더라도,
과연 그것들이 “긍정적”인지를 심문하는 것이다(238-39).9) 월러스틴은 특히 세 번
째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바, 이는 그가 “16∼19세기에 유럽이 이룬 새로움이
무엇이든간에 그 새로움은 좋은 것이고, 유럽은 이에 자부심을 느껴 마땅하고 다른
사람들은 이를 부러워하거나 적어도 알아줘야 한다는 것”을 역사기술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당연히 받아들여진 가정으로 지적하고 이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는 점

9) 나중에 좀더 본격적으로 논의되겠지만, 월러스틴에게는 유럽의 성취들이 좋은 것이라는 “오랫동안
논의되지 않은 하나의 가정”(238)을 수용하느냐 여부가 바로 어떤 것을 유럽중심적인 것으로 판별
하는 결정적인 시금석인데, 우리가 볼 것처럼, 이는 ‘비판3’으로 재서술된다.
116 ┃ 강 정 인

에서 잘 드러난다(238). 월러스틴이 제안한 세 가지 전략은 역사기술의 서구중심주
의에 비판적으로 접근하기 위한 적절한 지침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월러스틴은 서구중심적 역사서술에 관한 서구중심주의의 비판자들이 “근
본적으로 서로 다른(그리고 다소 상호 모순되는) 세 주장을 펼치고 있다”고 언급하
면서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제기한다.
첫 번째는 다른 문명들도 유럽이 했[던] 것을 하는 중이었는데 어느 [시]점에선가
유럽이 지정학적 권력을 사용하여 다른 지역의 그 과정을 중지시켰다는 것이다[비판1].
두 번째는 유럽이 행한 것은 다른 곳에서 오랫동안 해온 것의 지속에 불과하며, 일시적
으로 유럽인들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다[비판2]. 세 번째는 유럽이 행
한 것들은 잘못 분석되고, 부당한 잣대가 되어버려서 과학과 정치세계 모두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비판3]. 광범위하게 제시된 처음 두 논의들은 내가 보기에
는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라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세
번째 논의는 분명 옳고, 충분히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248; 인용문에서 [비판1].
[비판2], [비판3]은 향후 논의의 편의를 위해 필자가 추가한 것임).
이하에서 필자는 ‘비판 1-3’에 대한 월러스틴의 설명과 논의를 비판적으로 살펴
봄으로써 월러스틴이 제시한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 개념의 적실성을 검토하
고자 한다.

1. ‘비판 1’ 검토
월러스틴은 자신이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라고 부르는 첫 번째 유형부터 비
판적으로 검토하는데, 그는 ‘비판1’의 논자들이 “예컨대 중국, 인도 혹은 아랍-이슬
람 ‘문명’의 틀 속에는 온전한 근대자본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문화적 기초와 사회
역사적 발전 패턴 모두가 존재했거나 사실 그런 방향으로 가는 중이었다고 논하는
사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일본에 대해서도 그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자들을 포함
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논자들의 기본적인 가정을 맑스주의나 그 변형에
해당하는 역사발전 단계론의 보편성에 입각한 “세계의 상이한 지역들이 모두 근대성
혹은 자본주의로 가는 평행선의 길들을 가고 있었다”는 것으로 요약한다(248-49).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 117

이러한 가정에 대한 월러스틴의 비판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그러한 논의가 갖
는 “논리적 한계”이고, 둘째는 그러한 주장에 담겨 있는 “일반적인 지적(知的) 결과”
이다(월러스틴 2001, 249; 원문대조 후 번역 일부 수정). 첫째는 “다양한 비서구 지역
들이 설사 근대성/자본주의로 향한 길에 들어섰고 어쩌면 꽤 멀리까지 간 것이 사실
이라 해도, 거기에 최초로 도착하고 결과적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서양
혹은 유럽이었다는 사실을 설명해 내야 한다는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는 것이다(비판
①). 더 중요한 두 번째 비판은 첫 번째 논자들이 다른 지역들도 근대성/자본주의로
향한 길에 들어섰다는 주장을 통해 “추정된 [유럽의] ‘성취’에 대한 유럽의 영예를 깎
아내리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그것이 하나의 성취였다는 주장을 한층 보강해 준다”는
역설적인 지적 결과다(비판②). 이 점에서 월러스틴은 ‘비판1’의 논점이 “유럽의 ‘업
적’의 의미(즉, 가치)를 유럽이 정한 그대로 받아들인 채, 단지 다른 곳도 그것을 이룰
수 있었고 혹은 이루는 중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반유럽중심주
의라고 하지만 오히려 더 유럽중심적”이라고 비판한다(250). 이어서 그는 “우리도 유
럽인처럼 될 수 있었다는 주장은 … 사회과학적 지식에 대한 유럽중심적인 사고가 가
져온 최악의 결과들을 사실상 강화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250).10)
함재봉 역시 월러스틴과 비슷한 시각에서 동아시아 학계에서 제시된 이른바 ‘자본
주의 맹아론’이나 ‘근대의 맹아론’을 서구중심적 사고의 소산으로 보면서 이에 대해
비판한다. 그는 동아시아의 일부 지식인들이 자국의 과거 역사를 연구할 때 “자국의
역사를 서양의 역사발전 과정과 비교하는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심지어 “‘자본주의
맹아론’ 또는 ‘근대의 맹아론’이라는 새로운 연구의 틀을 마련하면서 중국이나 일본,
조선 자체의 역사 속에서도 서양과 같은 역사 발전이 가능할 수 있었음을 증명”하거
나 아니면 진행되고 있는 자국의 서구적 근대화를 정당화하려 한 시도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작업은 비록 겉으로는 자국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서구 역사발전 과정의 절대적인 우월성과 보편타당성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동아시아
의 사상과 역사를 서구 역사의 기준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그야말로 식민사관의 발
로였다”고 힐난한다.11) 함재봉의 이러한 비난은 서구중심적 목적론에 입각한 동아시
10) 이 논점은 앞에서 역사기술의 유럽중심주의를 타개하기 위해 월러스틴이 제시한 세 가지 전략
중 세 번째 전략과 그 전략이 염두에 두고 있는 유럽중심적 가정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
118 ┃ 강 정 인

아의 일부 지식인들의 잘못된 역사해석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러한 시도에 월
러스틴의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 개념이 적절하게 적용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윤해동 역시 국내 역사학계에서 한때 시도되었던 내재적 발전론이나 자본주의 맹아
론이 “오리엔탈리즘을 재생하고 있다”고 지적하는바, 자본주의 맹아론을 반유럽중심
적 유럽중심주의 개념을 적용하여 비판한다.12)
다시 월러스틴으로 돌아가 볼 때, ‘비판1’에 대한 월러스틴의 비판은 나름 수긍
할 만한 논점이 있긴 하지만, 몇 가지 비판적으로 음미하거나 검토할 대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는 ‘비판①’과 관련하여, 월러스틴도 인지하듯이, 그와 ‘비판1’의
논자들 사이에 자본주의의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다. ‘비판1’의 대표적인 논자인 블
로트(James M. Blaut)와 같은 학자는 애덤 스미스와 같은 근대 유럽의 경제학자들
이 주장한 것처럼 도시의 성장과 왕성한 교역에 의해 출현한 상업사회에서 상업화의
과정이 진전되어 부가 중대한 임계점(a critical mass)에 이를 정도로 축적되었을 때
성숙단계에 도달하는바,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다.13) 이러한 개념 정의를
수용한다면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있었다는 ‘비판1’ 논자들의
주장, 곧 자본주의의 다원발생설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월러스틴
이나 우드와 같은 학자는 자본주의 사회를 상업사회와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본다.
월러스틴은 “자본주의적 에토스 및 실천이 지배적인 역사적 체계” 또는 “끊임없는
자본 축적이 기본적인 경제활동을 지배 또는 통제”하는 원칙 또는 법칙으로 작용하
는 사회를 역사적 자본주의로 정의한다(254).14) 우드 역시 자본을 상업화 모델에 따
른 단순한 부의 축적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 보고 브레너(Robert Brenner)의 자
본주의 이행론을 수용하여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있어서 결정적 변수로 “사회적 소유
관계”의 전환 및 “영주와 농민간의 계급투쟁”을 지목한다. 따라서 그는 자본주의로
의 이행을 (역사적 보편성의 발현이 아닌) 중세말의 영국이라는 특정한 국면에서 예
외적으로 발생한 역사적 특수성의 관점에서 설명한다.15) 월러스틴 역시 끊임없는 자

11)
12)
13)
14)
15)

함재봉, “동양과 서양, 그리고 한국 지식인의 정체성,” 계간 사상 (1998 봄), p. 13.
윤해동, op. cit., p. 59.
Wood, op. cit., p. 29.
이매뉴얼 월러스틴,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서울: 창작과비평사, 1993), p, 19도 참조.
Wood, op. cit., pp, 32-33.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 119

본 축적이 자본주의 체제의 기본 동력이라는 점을 중시하긴 하지만, “여러 착취양식
이 결합된 세계적 생산관계에서 자본주의의 작동양상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일국사
적 맥락을 중시하는 우드와 구분되며 자본주의에 관해 사회적 생산관계 또는 소유관
계를 넘어 복합적인 해석을 시도한다.16) 월러스틴은 이러한 역사적 체제가 “15세기
말엽 유럽에서 탄생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간적으로 팽창하여 19세기 말엽”
에 이르러 지구 전체를 뒤덮게 되었다고 설명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유럽 내재적 기원
설을 강조한다.17)
자본주의의 형성에 관해서는 스미스, 블로트로 대표되는 상업화 모델과 우드, 월
러스틴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생산관계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데, 현재로서는 어
느 것이 이론적 구성에 있어서 더 뛰어나고 역사적 사실해석에 있어서 더 적절한가
에 대한 우열이 쉽게 판명되지 않는 듯싶다. 자본주의의 배타적인 유럽 기원설을 부
정하는 블로트는 “자본주의 형성 자체가 위계화”된 세계경제의 공간에서 이루어졌
다는 입장에서 유럽이 지리적 이점을 확보하여 아메리카를 정복·약탈함으로써 다른
지역이나 문명을 제치고 자본주의로의 이행에 필요한 자본축적의 중대한 임계점을
확보했다는 주장을 전개하지만,18) 중대한 임계점에 대한 구체적 서술이 모호하고 상
업사회가 어떻게 끊임없는 자본축적이 사회전체를 근본적으로 구조화하는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지에 대한 설명 역시 미흡한 편이다.19) 이와 달리 월러스틴이나 우
드가 제기한 자본주의의 일국적 기원 또는 유럽적 기원은 “세계체제 중심부”에서 일
어난 국지적 현상을 “국가 내부의 고유 현상으로 착각하는” 터널사관의 산물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20) 설사 자본주의 형성의 유럽적 기원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16) 유재건, “맑스와 월러스틴,” 창작과 비평 , 제24권, 제1호 (1996), p. 320. 이러한 이유로 월러스틴
의 세계체제론은 “사회의 내적 생산관계의 역동성과 차이를 무시하고 국제적인 외적 관계의 중요
성을 과장하는 유통주의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같은 글, p. 318). 유통주의를 둘러싼 논쟁에
대해서는 유재건(같은 글, pp. 318-321)을 참조할 것. 따라서 본문에서 설명한 것처럼, 우드와 월러
스틴의 자본주의 해석에 있어서 의미심장한 차이가 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두 학자 모두 자본주
의에 대한 고전적 상업화 모델을 강력하게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을 같이 한다. 이 글은 자본주
의에 대한 정교한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해석에 있어서 이처럼 대립하는 모델의
존재를 전제로 논변을 전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목적에 따라 잠정적으로 우드와 월러스틴의
입장을 사회적 생산관계론으로 동일시해도 커다란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고 본다.
17) 월러스틴, op. cit., p. 20.
18) 유재건, “서구중심주의와 근대성: 자본주의의 문제,” 한국민족문화 , 제32권 (2008), pp. 359-360.
19) Wood, op. cit.
20) 유재건, op. cit., p. 360.
120 ┃ 강 정 인

국내외의 식민화를 통해 끊임없는 자본축적의 동력을 확보해야 하는 자본주의의 구
조적 속성을 고려할 때, “끊임없는 자본축적”이 사회를 구조화하는 지배적 원리로
부상하는 데 있어서 유럽이 정복한 아메리카가 떠맡은 결정적 역할을 무시할 수 없
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김은중 역시 ‘인과론’과 ‘구성론’을 구분하면서 “구성론의
관점에서 보면 근대성[이] 유럽에서 출현하여 아메리카를 시작으로 ‘나머지 세계’로
퍼져나갔다는 유럽중심주의적 ‘터널 사관’과 ‘확산론’은 잘못된 것이다. 근대성, 근
대 세계체제,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아메리카의 정복/식민주의와 동시적이며 상호구
성적이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21) 자본주의의 기원과 형성에 관해 ‘유럽인에 의한
아메리카의 발견과 정복/약탈’이라는 세계체제의 맥락을 균형 있게 고려하지 않는
월러스틴이나 우드의 논변 역시 커다란 약점을 안고 있다.22) 이에 따라 사회적 생산
관계의 전환을 자본주의의 결정적 계기로 지목하고 상업화 모델을 비판하는 월러스
틴이나 우드의 논변 역시 상당 부분 설득력을 상실한다.
둘째, ‘비판①’에서 월러스틴은 ‘비판1’ 논자들의 다원발생설을 인정한다 할지라
도 그들은 근대성/자본주의에 “최초로 도착하고 결과적으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
었던 것은 서양 혹은 유럽이었다는 사실을 설명해 내야 한다”고 반박하는데, 살펴보
면 그들이 이 점을 설명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월러스틴의 비판은
설득력이 약하다. ‘비판1’의 논자들 역시 자본주의로의 진전에 있어서 유럽의 역사
적 우월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은 유럽 자본주의의 비약적 발전과 팽창의
원인을 설명함에 있어서 유럽에 독특한 내재적인 특징을 지목하기보다는 ‘신대륙’의
정복과 식민화를 통한 생산수단으로서의 광대한 토지와 천연자원(금은 등) 약탈, 신
대륙의 원주민은 물론 (노예무역 등을 통한) 흑인 노예의 노동력 수탈, 아시아로서부
터 주요 기술과 상품의 수입, 원거리 무역로의 효율적 지배, 쇠락에 접어든 아시아
경제 등 유럽외재적/국제적이고 우발적/국면적인(conjunctural) 변수들을 강조하고
21) 김은중, “라틴아메리카의 관점에서 본 근대성, 근대 세계체제, 자본주의 세계경제,” 강정인 편, 탈
서구중심주의는 가능한가: 비서구적 성찰과 대응 (파주: 아카넷, 2016), p. 438.
22) 비록 월러스틴이 ‘세계적’ 생산관계에서 자본주의의 작동양상을 분석하지만, 적어도 세계체제론
을 집필할 당시의 월러스틴 — 다시 말해 후일 라틴아메리카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입
장을 바꾸기 전의 월러스틴 — 은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에 대해서는 김은중,
“라틴아메리카의 관점에서 본 근대성, 근대 세계체제, 자본주의 세계경제,” 강정인 편, 탈서구중
심주의는 가능한가: 비서구적 성찰과 대응 (파주: 아카넷, 2016)을 참조할 것.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 121

있다.23) 이 점에서 그들은 19세기 이래 서구의 사회과학자들이 유럽에서 자본주의
의 흥기를 설명하기 위해 제시한 서구의 인본주의적 전통, 합리주의, 프로테스탄트
윤리, 과학혁명, 유럽인의 창의성, 기업가 정신, 효율적인 경제조직의 발전 등 유럽
예외주의를 구성하는 사회문화적 요소들의 설명력을 약화시키거나 부정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이 어디까지 설득력을 갖는지는 정확히 평가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그들
의 이론구성은 월러스틴이 서구중심적 역사서술에 대처하기 위해 제시한 세 가지 전
략, 곧 ‘역사적 서술의 정확성’, ‘추정된 문화적 선행 변수에 대한 설명의 합당성’ 및
‘유럽이 거둔 성취들의 참신성과 긍정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 가운데 유럽 자본주의
의 흥기와 관련하여 처음 두 가지 전략에 있어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월러스틴 역시 이들의 기여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비판1’을 지
지하는 학자들은 월러스틴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비판3’, 다시 말해 “유럽이 행한
것들은 잘못 분석되고, 부당한 잣대가 되어버려서 과학과 정치세계 모두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왔다”는 비판을 통해 오히려 월러스틴을 역공할 수도 있을 법하다. 월러
스틴이나 우드 등은 자본주의의 기원과 형성을 주로 유럽예외주의적인 시각에서 잘
못 분석함으로써 서구중심주의를 강화해 왔고, 이로써 과학과 정치세계 모두에 위험
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다른 지역들도 근대성/자본주의로 향한 길에 들어섰다는 주장을 통해
“추정된 [유럽의] ‘성취’에 대한 유럽의 영예를 깎아내리려는 시도를 함으로써 그것
이 하나의 성취였다는 주장을 한층 보강해 준다”는 ‘비판②’는 ‘유럽이 거둔 성취들
의 새로움과 긍정성’에 대한 비판적 검토의 결여를 달리 표현한 것으로 앞에서 월러
스틴이 요약하여 제시한 바 있는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3’과 연관된다. 따라서
이 문제는 ‘비판3’을 검토할 때 논하도록 하겠다.

2. ‘비판2’ 검토
‘비판2’는 수천 년 동안 유라시아 대륙 전체가 원거리 무역로의 형성을 통해 단일
세계체제를 구성해 왔고 오랫동안 아랍-이슬람 지역, 인도, 중국 등이 그 체제의 중심
23)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논할 것이다.
122 ┃ 강 정 인

부를 구성하는 한편 유럽은 주변적인 지위를 차지했는데, 15세기 말 이래 유럽이 대
항해를 통해 원거리 무역망을 장악하고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을 통해 수취한 막대한
양의 금은을 활용해 세계무역에서 교역조건상의 압도적인 우위를 획득함으로써 19세
기에 이르러 세계체제에서 중심적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월러
스틴은 ‘비판2’를 “서유럽이 애초에 주변적이었다는 점과 수천년에 걸쳐 유라시아 단
일세계가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추론하여 서유럽에서 일어난 일은 특별한 것도 없고
단지 단일한 체계의 역사적 구성에 있어서의 또하나 변종에 불과했다는 주장”으로
요약한다(251). 월러스틴은 이런 주장이 “개념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크게 틀린 것”
이라고 지적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가 되는 것인지”에 대
해 “논리적으로 이 입장은 자본주의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포함하며”, 또
여러 문명이 “자본주의로 가는 도중”이었다고 주장하는 ‘비판1’과 달리 “어떤 의미에
서는 전세계(혹은 적어도 유라시아 단일세계 전체)가 이미 자본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자본주의로의 발전이란 실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251; 강
조는 원문). 그러나 월러스틴의 이러한 논변에 담긴 논리구성은 필자에게 설득력이
있게 다가오지 않는다. ‘비판2’에 담긴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새로운 경제체제가 아
니며 유라시아 단일세계가 늘 자본주의적이었다는 ‘영구적 자본주의’(eternal
capitalism) 주장은 그 자체로 논리구성이 취약하기 때문에 비판의 소지가 크다.24)
그렇다 하더라도 ‘비판2’가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새로운 현상이고 다른 곳이 아닌
오직 유럽에서만 기원했다는 유럽중심적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한다는 점에서 반유럽
중심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한 데 반해, 그 비판이 어떤 점에서 유럽중심주의를 반영하
고 있는 것인지는 일단 명확하지 않다. 이어지는 단락에서 월러스틴은 이들의 입장이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의 고전적 입장”, “[인간 본성에는] ‘물건을 서로 거래하고, 교
역하고 교환하려는 성향’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애덤 스미스의 입장과 다를 바가 없
다고 지적하는바, 이 점에서 ‘비판2’가 유럽중심적이라고 시사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논의는 우드(E. M. Wood)의 논문에서 찾을 수
있다. 앞에서도 간략히 언급한 것처럼 우드는 스미스나 블로트가 채택하는 자본주의
24) 월러스틴의 영문 논문에는 ‘비판2’에 “Eternal Capitalism”(영구적 자본주의)이라는 소제목이 붙여
져 있다. 그러나 한글 번역본에는 이것은 물론 다른 소제목들이 생략되어 있다.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 123

에 대한 상업화모델을 유럽중심적이라고 비판한다. 스미스 등 유럽의 자유주의 경제
학자들이 제시한 상업화 모델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물건을 서로 거래하고, 교역하
고 교환”하려는 인간본성에 기초한 “인간의 보편적인 실천의 자연적인 확장”(“자본
주의의 자연화”)의 결과 탄생한 것인데 유럽은 다른 문명들과 비교해서 이러한 자연
적 확장을 가로막는 역사적 장애물들을 성공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자본주의를 성취한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이 이론은 다른 문명의 인민들 역시 유럽인들처럼 합리적이
고 자유로웠더라면 자본주의에 도달했을 것이라고 해석함으로써 유럽중심적인 설명
을 고안해 낸다.25) 다시 말해, 우드는 상업화 모델이 유럽중심적인 이유를 첫째 “산
업자본주의에서 절정에 이르는 유럽의 발전 경로가 사물의 자연적 질서”라고 주장하
고, 둘째 “그 경로에 들어서지 못하거나 중간에 좌초당한 비유럽 문명들은 그들에게
무언가 결정적인 결함이 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데서 찾는다.26) 우
드의 설명에 따를 때, 상업화 모델은 유럽이 성취한 자본주의가 인류 역사의 보편적
인 흐름이고(서구보편주의), 자체적으로 자본주의에 도달하지 못한 비유럽 문명들의
역사를 실패로 규정하고, 그 실패의 원인을 그들의 내재적 결함에 돌린다(서구우월
주의 + 오리엔탈리즘)는 점에서 서구중심주의의 일반적 논리구조를 갖추고 있다.27)
마찬가지로 블로트 역시 자본주의의 상업화 모델과 ‘자본주의의 자연
화’(naturalization of capitalism) 명제를 수용하여 다른 지역의 인민들 역시 자본주
의로 전진하고 있었다고 가정한다. 다만 유럽은 아메리카에서 약탈한 부를 활용하여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추진력을 얻었지만, 다른 지역은 서구 제국주의가 이러한 진전
을 가로막아서 실패한 것으로 설명한다.28) 이러한 서술을 지목해서 우드는 블로트의
논변이 “가장 유럽중심적 가정에 기초하여 전개된 자본주의에 대한 반유럽중심적 역
사서술” 또는 “낡은 유럽중심적 모델과 그것의 반유럽중심적 전도”라고 비판한다.29)
25) Wood, op. cit., pp. 29-31.
26) Ibid., p. 31.
27) 필자는 서구중심주의를 구성하는 개념적 요소로 ‘서구우월주의’, ‘서구보편주의’, ‘서구화’ 명제
를 제시한 바 있다. 강정인,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 (서울: 아카넷, 2004) 참조.
28) Wood, op. cit., p. 31.
29) Ibid., pp, 29; p. 33. 이 글의 직접적인 논의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 자세히 논하지는 않겠
지만, 상업화 모델에 반대하여 우드는 마르크스, 톰슨(E. P. Thompson), 브레너(Robert Brenner)
등의 논의에 의존해서 사회적 소유관계에 기초한 자본주의 모델을 지지한다. 그는 자본주의를 다
른 유럽국가들이 아닌 오직 영국이 직면했던 “매우 특별한 역사적 조건”에서 이루어진 “매우 특
124 ┃ 강 정 인

다시 말해 우드의 이론적 입장에서 볼 때, 블로트가 상업화 모델과 자본주의의 자연
화 명제에 따라 자본주의의 역사적 보편성을 가정하는 것은 유럽중심적이지만, 유럽
의 내재적 우월성이나 비유럽 문명권의 내재적 결함을 부정하는 것은 반유럽중심주
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본성과 상업화 모델에 기초한 자본주의의 역사
적 보편성에 관한 가정이, 비록 유럽의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최초로 제기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자체로 유럽중심적인지에 대해서는 좀더 숙고할 여지가 있는 것 같다.
‘비판2’가 유럽중심적이라는 월러스틴의 추가적인, 더욱 중요한 논거는 이어지는
단락에서 제시된다. 월러스틴은 “…[‘비판2’의] 가장 나쁜 점은 근대 유럽의 행위를
유라시아 단일세계의 대차대조표”의 관점에서 해석함으로써, “유럽중심주의의 기본
적인 이데올로기적 논의, 즉 근대성(혹은 자본주의)은 놀랍고 멋진 것이라는 주장을
용인하는 셈이고, 단지 모두가 이미 이런저런 방식으로 늘 근대성을 행하고 있었음
을 거기에 덧붙일 뿐”이라고 비판한다(252). 결국 ‘비판1’은 물론 ‘비판2’에 대한 월
러스틴의 가장 강한 반격은 유럽이 성취한 자본주의 혹은 근대성을 유럽중심적인 평
가 기준에 따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잘못된 판단이고 유럽중심적이라는 논
변으로 압축되는바, 이 점에서 ‘비판3’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3. ‘비판3’ 검토
월러스틴은 “사회과학에서의 유럽중심주의에 반대할 좀더 탄탄한 기초들과 이
목표를 추구할 좀더 탄탄한 방식들을 찾아내야 한다”고 언급하면서 “유럽이 행한 것
들은 잘못 분석되고 부당한 잣대가 되어버려 과학과 정치세계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
왔다”(253)고 주장하는 ‘비판3’을 올바른 대안으로 긍정한다. 이어서 “유럽이 행한
것이 긍정적 업적이었다는 가정을 의문시하는 데서 우리가 출발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 자신이 자본주의 문명이 이룩해 놓은 것에 대한 이득과 손해를 대차대조표로 작
별한 사회적 소유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하고 그러한 사회적 구성이 유럽의 다른 국가들이
나 비서구 문명과 비교하여 영국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Ibid. p. 33. 따라
서 다른 국가들이나 문명권에서 풍요로운 상업사회가 자본주의를 출현시키지 못한 이유를
“사회적 소유관계에서의 일정한 변형의 부재”에서 찾는다. 다시 말해 “경쟁, 이윤 극대화, 생
산력의 무자비한 발전을 생존과 체제의 재생산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만드는 사회적 소유관
계의 변형”이 다른 곳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Ibid. p. 33.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 125

성하여 검토한 바에 따르면 그 성과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것”이었다고 선언한다.
다시 말해 “나는 자본주의 체계를 인간 진보의 증거로는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253). 그는 유럽에서 기원한 자본주의 체계가 “끊임없는 자본축적의 우위성”에 기
초해서 세계를 정복하고 지배하면서 전지구적으로 팽창했다는 점을 인정하긴 하지
만, 이러한 “사실은 결코 이것이 불가피했다거나 바람직했다거나 또는 어떤 의미
[로든] 진보적이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반유럽중심적 관점은 이 주장에서 출
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254-55). 이제 여기서 드러났듯이, 월러스틴이 보기에 ‘비
판1’이나 ‘비판2’가 반유럽중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반유럽중심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유럽중심적인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이 자본주의(혹은 근대성)를 “불가피했다
거나 바람직했다거나 또는 어떤 의미[로든] 진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
다.30) 이렇게 볼 때 월러스틴이 ‘비판1’과 ‘비판2’에 대해 부정적인 이유는 부분적
으로 그것들이 자본주의의 다원발생설 또는 영구적 자본주의에 기초해서 그 역사적
불가피성을 가정하거나 주장했기 때문인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이러한 월러스틴 주장의 타당성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그가 자본주의 문명이 이룬
성과를 구체적으로 검토한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을 살펴볼 필요가 있
다.31) 월러스틴은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은 물론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포함한
사회주의자들이 열렬하게 신봉해 온 역사의 진보에 관해 매우 회의적이다. 월러스틴
은 “역사적 체제로서의 자본주의가 [그것이] 직접 파괴했거나 변형시킨 그 이전의 여
러 역사적 체제들에 비해 진보를 나타냈다는 것은 한 마디로 진실이 아니다”라고 주
장한다.32) 그는 진보를 검토하면서 “과학과 기술의 진보는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
라고 어느 정도 단서를 달아 받아들이지만, 전체적으로 진보(자본주의의 진보성)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는 사람들이 오늘날 이전의 역사적 체제들과 비교하여 내세우는
“안락한 물질생활”, “폭넓고 다양한 생활경험”, “생활의 질”은 물론 “아노미
30) 국내학자로서는 유재건이 자본주의의 진보성과 필연성에 대한 월러스틴의 부정적 또는 유보적 입장
을 잘 소개하고 있다. 유재건, “맑스와 월러스틴,” 창작과비평 , 제24권, 제1호 (1996), pp. 322-330.
31) 월러스틴의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은 “역사적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문명”이라는 두
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논문의 결론부분에서 개략적으로 제시한 역사적 자본주
의의 진보성에 대한 검토를 두 번째 논문에서 더욱 본격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32) 이매뉴얼 월러스틴, 나종일·백영경 역,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서울: 창작과비평사,
1993), p. 103.
126 ┃ 강 정 인

(anomie), 소외, 정신질환” 등을 검토하면서 역사적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
있어서 유보적이다.33) 나아가 그는 “이전의 세계들을 목가적 전원으로 그릴 생각”은
없지만, “적어도 오늘날 세계가 천년 전의 세계보다 더 많은 자유, 평등, 우애를 누리
고 있다는 것이 결코 자명한 사실”은 아니며 “사실은 그 반대라고 하는 편이 차라리
옳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 이른바 ‘근대성’ — 계몽주의, 합리주의, 자유주의 등 — 의
성과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34) 또한 그는 “오늘날 산업노동자들은 1800년의 그들에
비해 잘 살고 있지 않은가?”라고 자문하고 나서 “적어도 많은 산업노동자들에 대해
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시인하지만 “산업노동자들은 아직도 세계인구 중 비교적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데 불과하고 “세계노동력의 압도적 부분을 차지하고 있
는 사람들은 … 500년 전 그들의 조상들보다 못살고 있다”고 답변한다.35) 심지어
그는 “역사적 자본주의는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는 규모로 억압적이며 모욕적인 …
이데올로기 구조”, 곧 “성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를 발전시켰다고 맹공한다.36)
전체적으로 앞에서 검토한 요소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진보에 대한 월러스틴의
부정적 평가는 전세계 잉여가치의 분배에 참여한 전세계 인구의 10∼15%를 차지한
중간계층과 그렇지 못한 나머지의 구분에 근거하고 있다. 중간계층은 물질적 측면이
나 정신적 측면에서 역사적 자본주의 체제가 제공한 긍정적인 성취를 향유할 수 있
었지만, 나머지 인구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37) 여기서 역사적 자본주의 체제
로부터 이득을 향유한 중간계층과 그러한 이득의 분배를 거부당한 나머지 계층의 구
분은 전세계 잉여가치의 분배에의 참여 여부로 나뉘는 것이기 때문에 양자의 관계는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구성적’(constitutive)이거나 ‘인과적’
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자본주의 또는 근대성이 대체로 서구나 일본과 같이 발전
한 일부 국가의 일정 계층에게만 그 성취를 분배하고 나머지에게는 이를 거부한다
면, 자본주의 또는 근대성은 그 소수에게는 진보적일 수 있지만, 다수에게는 그렇지
못하다는 결론이 나온다.38)
33)
34)
35)
36)
37)
38)

Ibid., p. 104.
Ibid., p. 105.
Ibid., p. 106.
Ibid., p. 108.
Ibid., pp. 110-11.
이처럼 “자본주의 체계를 인간 진보의 증거로 보지 않는” 월러스틴이지만, 그는 1990년대 초에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 127

자본주의와 근대성이 구가해온 진보성을 부정하는 월러스틴의 논변은 스스로도
많은 ‘주저함’을 수반하는 수사학적 문체와 함께 전개되고 있는데,39) 지난 반세기
동안 ‘서구문명 따라잡기’에 몰입하여 추격적인 산업화와 근대화에 매진해 온 한국
(과 같은 비서구 세계)의 지식인인 필자에게도 실로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온다. 일반
지식인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자본주의 체제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더라도) 적어도
생산력의 발전을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진보성’을 인정한 토대 위에서 사회주의 등
‘진보적’ 대안을 고민해 온 대부분의 국내외 좌파나 ‘진보’적 학자들 역시 실로 당혹
스럽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생산력의 발전 = 진
보’라는 프레임에 갇혀 진보의 비용에 대해서는 이를 단순히 부작용 정도로 치부하
면서 역사의 진보에 대한 믿음 그 자체를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은 것이 일반적 관행
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근대성에 대한 티베부(Teshale Tibebu)의 논의 역시 경청할 가치
가 있다. 그는 “긍정적 근대성”(positive modernity)과 “부정적 근대성”(negative
modernity)을 명시적으로 구분한다. 긍정적 근대성은 “일부 사람들을 위해 놀라울
정도로 물질적이고 문화적인 진보를 산출”했지만, 부정적 근대성은 “제3세계의 많은
인민들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후자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그는 “아
메리카 대륙에서 저질러진 원주민에 대한 대학살과 수탈, 아메리카 대륙의 노예제도
및 식민주의”를 지목한다.40) 이어서 “부정적 근대성은 서구 근대성의 근본적 이념
— 마르크스주의자들을 포함하여 자본주의의 비판자들과 지지자들이 공유했던 진보
의 이념 — 이 허위임을 보여준다”고 강조하면서 진보의 이념은 근대성의 피해자와
발표한 “미국 그리고 세계”라는 논문에서 “신은 세 차례에 걸쳐 … 미국을 축복하는 것 같다”고
언명하면서 “현재의 번영, 과거의 자유, 그리고 미래의 평등”을 거론했다. 월러스틴, 자유주의
이후 (서울: 당대, 1996), p. 246. 이어서 그는 21세기에 미국이 “어떤 다른 나라가 알고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평등의 실현을 목도할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을 피력하면서 “우리가 다음 30년 동
안 삶의 기회와 삶에 대한 보상의 평등이라는 영역에서 뚜렷하게 전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Ibid., p. 281). 그 논문이 출간된 지 25년 정도 흐른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월러스틴의 이런 언
명은 두 가지 점에서 당혹스럽다. 하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진보성을 부정하는 월러스틴이 미국
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그 진보성을 허여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미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빈부의 양극화가 심화되어가는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월러스틴의 낙관적인 예상이 고스란히 빗
나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39) 이매뉴얼 월러스틴, 나종일·백영경 역,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서울: 창작과비평사,
1993), p. 103; p. 106 참조..
40) Teshale Tibebu, Hegel and the Third World (Syracuse, NY: Syracuse University Press, 2011). p. xvi.
128 ┃ 강 정 인

희생자에게 단지 “모욕적”이라고 주장한다.41) 계속해서 “누구를 위한 진보이고, 그
대가는 무엇이고, 누구의 비용으로 [달성한] 진보인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언급하면
서 진보 이념에 관해 예외적으로 비판적 입장을 제기한 월러스틴의 주장이 매우 드
문 사례라고 하면서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42)
월러스틴과 마찬가지로 그러나 더욱 급진적 시각에서, 라틴 아메리카의 근대성/식
민성 연구 그룹 — 두셀(Enrique Dussel), 미뇰로(Walter Mignolo), 키하노(Anibal
Quijano) 등 — 역시 근대성과 식민성을 상호 구성적으로 형성된 동전의 앞뒷면과 같
은 불가분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뇰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식민성은 근대성의 서사에서는 부재로 존재하기 때문에 식민성을 발굴하
는 것은 근대성 프로젝트를 언급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나는
500년 전 아메리카의 발견으로 만들어진 근대 세계를 근대/식민 세계로 규

정하며, 식민성은 근대성을 구성하고 식민성 없이는 근대성도 존재할 수 없
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 아메리카의 발견, 그리고 원주민과 아프리카 노
예에 대한 학살은 프랑스혁명이나 산업혁명기보다 더 확실한 근대성의 토대
를 이룬다. 다시 말하자면, 식민성은 근대성의 숨겨진 어두운 이면이다. 따
라서 라틴아메리카라는 개념을 발굴하는 것은 서구가 어떻게 탄생했으며,
근대 세계질서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이해하는 것이다(강조는 원문).43)
따라서 미뇰로와 같은 학자에게는 “근대성이 식민성을 만든 것이 아니라 식민성
이 근대성을 만들었기 때문에 식민성 없이는 근대성도 없다.”44) 그리고 “근대 세계
체제는 근대/식민세계체제로 개명(改名)되어야 한다”(강조는 원문).45) 이 점에서 라
틴아메리카의 근대성/식민성 연구 그룹이 근대성 개념의 토대를 이루는 진보의 개념
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당연하다.46)
41) Ibid., pp. xxii-xxiii.
42) Ibid., pp. xxiv-xxv.
43) 김은중, “라틴아메리카의 관점에서 본 근대성, 근대 세계체제, 자본주의 세계경제,” 강정인 편, 탈
서구중심주의는 가능한가: 비서구적 성찰과 대응 (파주: 아카넷, 2016), pp. 448-449에서 재인용
44) Ibid., p. 449.
45) Ibid., p. 448.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 129

월러스틴, 라틴아메리카의 급진주의적 학자들, 네그리와 하트 등이 자본주의는
물론 근대성의 진보적 성격에 대해 총체적이고 근원적인 차원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논변에 대해 필자 역시 깊이 공감하고 반성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현재까지 주변부
는 물론 중심부, 자유주의자는 물론 좌파 지식인들의 압도적 다수가 자본주의와 근
대성에 근본적으로 비판적일지언정 그래도 진보성마저 부정하지는 않는 것이 대세적
인 지적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고려한다면, 단지 자본주의와 근대성을 불가피한 것
이나 또는 바람직하거나 진보적인 것으로 가정했다는 이유만으로 앞에서 검토한 서
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1’과 ‘비판2’를 월러스틴처럼 송두리째 기각하는 것은 두
가지 논거에서 합당하지 않다. 첫째는 그 비판들이 근대 세계경제의 전개양상 또는
경제 발전과 관련하여 서구와 아시아의 균형 잡힌 비교를 통해 서구중심주의를 동전
의 양면처럼 구성하는 서구예외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을 심각한 수준에서 전복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논거①). 따라서 그들의 이론이 자본주의에 대한 개념화나 이
론구성 또는 사실해석에 있어서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 점을 부정하지 않더라도 역사
적 사실의 새로운 발견 또는 재해석을 통해 탈서구중심적 전망을 확보하는 데 의미
심장한 기여를 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둘째, 뛰어난 일부 급진주의적 학자들을
제외하고 자본주의와 근대성을 긍정적이고 진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대세적
인 지적 현실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오직 그러한 가정을 공유했다는 이유만으로 월
러스틴처럼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라는 꼬리표를 붙여 그들의 이론적 기여를
송두리째 무시하는 것은 최소한 매우 과도한 ‘단죄’이며, 심지어 그러한 태도는 일종
의 지적 오만(intellectual hubris)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논거②).47)
먼저 ‘논거①’을 좀더 구체적으로 부연해 보면, 우리는 ‘비판1’과 ‘비판2’가 이른
바 ‘유럽의 기적’ 또는 ‘서구의 흥기’에 대한 전통적인 서구중심적 해석 — 서구예외
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 결합된 해석 — 이 잘못된 것임을 반박하는 데 상당히 기여
46) Ibid., pp. 469-470.
47) 앙(Ien Ang)은 모든 세계, 특히 비서구 지역이 서구중심주의를 열렬히 수용하여 서구화에 무비판
적으로 매진하고 있는데, 근대 서구문명의 성취와 공과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하면서 서구중심
주의로부터 해방된 자신들만이 그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고 자임하는 서구의 지식인들을 “마
지못해 떠안은 서구중심주의(reluctant Eurocentrism)”라는 개념을 통해 묘사한다. Ien Ang,
“Eurocentric Reluctance: Notes for a cultural studies of ‘the new Europe’.” in Chen Kuan-Hsing,
ed., Trajectories: Inter-Asia Cultural Studies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1998).
130 ┃ 강 정 인

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새천년의 전환기에 일단의 캘리포니아 학파의 학자들 -앞에서 월러스틴이 비판한 바 있는 프랑크(A. G. Frank)도 포함된다 — 은 근대 세
계경제를 이해함에 있어 동아시아 중심론 내지 중국중심론을 옹호하는 논저를 잇달
아 출간했다.48) 그들은 이러한 논저를 통해 적어도 180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동아
시아의 경제수준이 유럽에 비해 우월하거나 또는 뒤지지 않았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논증함으로써 (서구중심주의의 기반이 되어 온) 근대 세계경제의 이해에 있어 유럽
을 부각시키는 종래의 유럽중심론에 도전했고, 21세기 초 중국 경제의 급부상과 맞
물려, 이제는 두 이론이 (아직 대등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수준에서 맞서고 있는 형
국이다. 그들의 이론은 먼저 서구와 비견되는 아시아의 높은 경제수준을 입증함으로
써 (역사적 자본주의의 형성/현존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서구의 흥기
대 아시아의 정체’로 요약되는 서구예외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중요한 축을 무너뜨
리고(논점①), 나아가 ‘유럽의 기적’ 또는 ‘서구의 흥기’를 서구문명에 내재하는 독
특하고 자생적이며 항구적인 ‘상수’보다는 외재적이고 우발적이며 국면적인
(conjunctural) ‘변수’를 통해 설명함으로써 서구예외주의의 이론적 구성요소를 근본
적으로 전복시킨다(논점②).49) 이 두 논점을 차례대로 부연해 보도록 하자.
먼저 ‘논점①’을 부연해 보면, 아시아가 유럽과 마찬가지로 산업화와 자본주의로
동일하게 이행한 것은 아니었다는 유럽중심론의 입장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아시아
가 생산력과 소비수준을 포함한 발전 수준에 있어서 적어도 1800년 이전까지는 유
럽에 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제 비교적 광범위하게 인정되고 있다. 먼저 포머란
츠는 대분기 에서 “1800년까지 중국 양쯔강 하류지역, 일본과 인도의 선진지역을
영국과 비교해 보면, 인구, 임금, 기술, 법적 제도, 신용 등 모든 면에서 유럽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을 밝혔다.50) 프랑크는 리오리엔트 에서 1750년에 “세계
인구의 3분의 2였던 아시아인이 세계 GNP의 5분의 4를 생산한 반면, 세계인구의 5
48) 대표적으로 웡(R. Bin Wong)의 China Transformed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97), 프랑
크(A. G. Frank)의 Reorient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8), 포머란츠(K.
Pomeranz)의 The Great Divergence: China,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Econom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0) 등이 거론된다.
49) 서구중심주의를 구성하는 서구예외주의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상세한 논의로는 강정인, op. cit.,
pp. 66-73을 참조할 것.
50) 포머란츠의 대분기 에 대한 김두진·이내영의 요약을 옮긴 것이다, 김두진·이내영, op. cit., p. 41.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 131

분의 1이었던 유럽인은 아프리카·아메리카 대륙과 함께 나머지 5분의 1을 생산했다”
고 지적하면서 한 마디로 1750년에서 1800년에 걸쳐 “아시아는 생산력에서 유럽을
압도했다”고 주장한다.51) 13세기 중반에서 17세기 중반까지 인도양 중심의 세계-경
제를 연구한 팔랏(Rabit Palat) 역시 아시아권은 기술혁신에 근거한 유럽의 “산업혁
명”(industrial revolution) 대신 토지의 높은 생산성과 저비용의 풍부한 노동력에 기
초한 “근면혁명”(industrious revolution)을 통해 북서유럽보다 더 높은 생활수준을
누렸다고 주장한다.52) 다시 말해 토지의 높은 생산성과 저임의 풍부한 노동력은 증
기기관과 같은 기술혁신이나 석탄과 같은 새로운 에너지 자원의 발굴과 활용을 불필
요하게 했다는 것이다.53) 그러한 경제적 번영의 중요한 증거로 그는 기껏해야 1억에
서 1억 5천 정도를 상한선으로 하여 정체되어 있던 중국의 인구가 18세기 말에는
무려 4억으로 증가했다는 사실, 산업혁명 이후인 1820년에 영국의 국내총생산
(GDP)이 전 세계의 6%에 불과했는데 반해, 중국은 29%, 인도는 16%를 차지했다
는 사실을 든다.54)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19세기 이래 마르크스를 포함하여
유럽의 사회이론가들이 구축한 (유럽의 번영에 대비된) 아시아의 정체성론 — 대표적
으로 마르크스의 아시아적 생산양식 등 — 은 기껏해야 19세기 중반 이후의 세계경
제의 현실을 19세기 이전까지 소급해서 적용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왜곡의 산
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논점①’이 제시한 역사해석은 헤겔의 역사철학 이래
아시아(오리엔트)의 정체성을 영구적인 속성으로 받아들여온 서구인이나 이를 당연
시 해온 비서구인들에게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으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것처럼 서구중심적 사회과학이 근대세계에서 유럽의 “역사적 역할을 오독하
고 크게 과장하고 혹은 왜곡함으로써 사회적 실재에 대해 그릇된 상”(248)을 만들어
왔다고 시인한 자신의 언급을 상기한다면, 월러스틴은 이들의 기여를 좀더 적극적으
로 인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51) 안드레 군더 프랑크, 리오리엔트 (서울: 이산, 2003), pp. 287-289. 아시아의 인구가 유럽 인구보다
훨씬 많았기 때문에 아시아의 생산력이 높게 나타났을 것이라는 반론을 염두에 두고., 프랑크는
1960년의 환율로 계산했을 때 “1800년 중국의 1인당 GNP”가 “228달러”인데 반해, “18세기 여러 시
기에 산정한 영국과 프랑스의 GNP는 150∼200달러 정도였다”는 추정적 통계수치를 인용한다.
52) Ravi Palat, The Making of an Indian Ocean World-Economy, 1250-1650: Princes, Paddy fields,
and Bazaars (London and New York: Palgrave Macmillan, 2015). pp. 216-219.
53) Ibid., p. 219.
54) Ibid., pp. 219-20.
132 ┃ 강 정 인

이제 ‘논점②’를 구체화해 보면, 대부분의 아시아 중심론자들은 ‘유럽의 기적’이
나 ‘서구의 흥기’를 서구문명에 내재한 독특한 항구적인 상수를 통해 설명하기보다
는 외재적이고 우발적이며 국면적인 변수에 귀착시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포머란츠는 비슷한 경제수준에 있던 중국과 영국에서 19세기 이후
경제적 격차가 크게 벌어진 이유를 산업혁명에서 찾지만, 그는 산업화를 가능케 한
변수로 영국이 제국주의적 팽창을 통해 해외의 막대한 자원을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 사실, 환경적 위기에 직면하여 석탄과 같은 새로운 에너지원을 개발하게 된
사실을 지적한다.55) 프랑크 역시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의 정복과 약탈,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식민화를 통해 힘을 비축하는 동안, 유라시아 세계경제의 주기적 변동에
따라 아시아의 경제와 정치가 18세기를 고비로 약화되었기 때문에 대략 1815년을
전후로 하여 유럽과 아시아의 판세가 역전되었다고 본다.56) 이 점에서 포머란츠, 프
랑크 등은 우드와 달리 유럽의 산업혁명에서 자본주의나 기술혁신의 요소 등을 저평
가하면서 유럽의 경제발전을 유럽의 내재적 발전에 따른 산물이라기보다는 외부적이
고 우발적인 변수들이 합류하여 형성된 결과로 본다. 필자는 유럽이 근대문명을 창
출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으로 활용한 유럽문명에 독특하게 내재해 있던 사회문화적
요소들의 기여를 (일부 반서구중심적 학자들이 그런 것처럼)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내생적·외생적 요소의 조합 또는 유럽과 비유럽 지역의 상
호작용을 통해 자본주의 경제발전에 있어서 유럽이 중국, 인도, 아랍 등 경쟁지역에
비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캘리포니아 학파 등이 제기한 주장
을 온전히 다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지금까지 근대 서구문명에서 자본주의와 근대성
의 부상을 ‘터널사관’57)에 따라 유럽예외주의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앞에서
‘비판1’을 검토할 때 제시한 바 있는) 사회문화적 요인들의 배타적 설명력이 크게
감소하고, 이로 인해 서구예외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위력 역시 심각하게 약화된다
고 생각한다. 유재건이 언급한 것처럼, “역사학에서 서구중심적 세계사의 극복”을
55) Kenneth Pomeranz, The Great Divergence: China, Europe, and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Econom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0).
56) 프랑크, op. cit., p. 443.
57) 터널사관이란 유럽문명의 흥기를 설명함에 있어서 유럽 외적인 모든 기여를 통째로 무시하고 오
직 “예외적인” 유럽 내적인 원인과 결과만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태도를 지칭한다. J. M.
Blaut, The Colonizer’s Model of the World (New York: The Guilford Press, 1993), pp. 5-6.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 133

위한 시도 가운데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월러스틴이 주장한 것처럼 자본주의(와
근대성)의 불가피성, 진보성 및 바람직함에 대한 서구중심적 가정을 기각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근대 유럽이 이룩한 성취가 유럽 내부에서 출현한 고유한 특성”
에 기인한 것이라는 “가정을 전복시키는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인다면,58) ‘비판1’과
‘비판2’가 비록 월러스틴이 지적한 바와 같이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라는 모
순을 범했다 할지라도, 이 점에서 거둔 성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59)
이제 자본주의와 근대성을 바람직하거나 진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가정이 서
구중심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가정에 입각한 이론이 모든 반서구중심적 이론으로 기
각되어야 한다는 월러스틴의 논변(‘논거②’)을 검토해 보자.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문
명의 진보성을 논하는 과정에서 보편적 인권, 민주주의 등에 대해 전자는 일부 특정
지역의 소수 계층이 누리는 특권에 불과하고, 후자는 그것에 대해 지불한 대가가 더
크다는 비판을 통해 근대 서구문명이 프랑스혁명 이래 자랑스럽게 내세워 온 자유·
평등·우애·민주주의 등의 긍정적 성과를 신중한 비교 형량(衡量)을 통해 결론적으로
부정한다.60) 그는 마키아벨리와 같은 매우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논의를 전개한다.
“나는 기왕에 알려진 모든 역사적 체제가 특권의 계서제를 구현한 체제였다는 가정
에서 출발한다. 황금시대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문제는 선하고 악한 역
사적 체제들 사이의 선택이 아니라, 좀더 낫고 좀더 못한 체제들 사이의 선택의 문
제인 것이다.”61) 월러스틴의 이런 서술이 월러스틴 자신의 일관된 입장인지는 확실
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 대목에서의 서술은 근대 이전 문명과 근대 문명 사이의 질
적 차별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62) 그렇다면 월러스틴에게 자본주의와 근대성

58) 유재건, “서구중심주의와 근대성: 자본주의의 문제,” 한국민족문화 , 제32집 (2008), p. 346.
59) 물론 유재건이 지적하듯이 광의의 유럽예외주의는 “유럽이 그리스, 로마에서 르네상스와 계몽주
의로 이어지는 자기 완결적 발전을 통해 독자적으로 근대 문명을 창출한 것으로 그리는 역사상”
을 제시한다. 그러나 여기서 검토한 근대 세계경제에서 유럽중심론과 아시아중심론의 이론적 대
립, 그리고 월러스틴과 (그가 비판하는) 이론들 사이의 대립은 고대를 포함한 과거로까지 소급되
어 전개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다루지는 않는다.
60) 이매뉴얼 월러스틴, 나종일·백영경 역,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 (서울: 창작과비평사,
1993), pp. 139-140; pp. 142-143.
61) Ibid., p. 145.
62) 월러스틴의 이런 입장은 필자에게 다소 모순적으로 다가온다. 상업사회를 포함한 이전의 역사적
체제에 비해 자본주의의 질적 차별성(단절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월러스틴이 정치영역에서
는 그러한 질적 차별성을 부정하고 단지 양적 차이만 인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34 ┃ 강 정 인

을 바람직하고 진보적인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 서구중심적이듯이, 자유·평등·우애·민
주주의 등 근대 서구문명이 내세운 가치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역시 “사람들
을 현혹하는”, “심지어 희생자들과 반대자들까지도 매혹시켜온” 자본주의 문명에 농
락당한 것에 불과하고,63) 따라서 이러한 가치들에 근거하여 서구문명에 도전하는
것은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라는 중대한 오류를 범하는 셈이 될 것이다.
이러한 논리를 따른다면 가령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 대통령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주의 원칙─명분이나 외양과 달리 실질적으로는 문명과 야만의 구분, 인종
차별주의에 근거하여 오직 ‘자치능력’을 가진 피압박 유럽 민족들에게만 적용될 것
으로 의도된 서구중심적인 원칙─을 믿고 1919년 거족적으로 3·1 운동을 전개한 한
민족과 같은 피압박민족들은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라는 오류를 저지른 셈이 된
다.64) 이런 맥락에서 근대 서구문명이 내세운 가치들─자유민주주의, 입헌주의, 인
권, 평등, 자유 등─가운데 “서구 열강이 식민지에서 부정하지 않은 것이 어디 하나
라도 있는지 의심스러우며 게다가 그 이상들 가운데 서구에 저항한 식민지 해방운동
이 지지하지 않은 것이 어디 하나라도 있을지 의심스럽다”는 아리기(Giovanni
Arrighi)와 동료 연구자들의 지적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65) 여기서 월러스틴의 논변
에 따라 “모든 역사적 체제가 특권의 계서제를 구현한 체제”였고 서구문명이 보편적
인 것인 양 내세운 가치들이 “심지어 희생자들과 반대자들까지도” 현혹시켜온 허상
에 불과하다면, 그 가치들을 바람직하고 진보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에 의거하여
서구 제국주의에 저항한 식민지 해방운동 등은 모두 특별한 가치나 의미를 지니지
않는 자기기만에 불과하고,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라는 모순을 범한 셈이 된
다. 정말로 그렇게 평가해야 하는가? 월러스틴의 논변을 받아들여 그것을 반서구중
63) Ibid., p. 147.
64) 투쟁의 상대가 일본이기 때문에 ‘반서구중심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러나 궁극적
으로 서구가 지배하던 국제질서에 대한 저항운동이라는 점에서 이렇게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윌슨은 미국의 식민지배하에 있는 필리핀인들에 대해 그들이 자치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즉각적으로 민족자결을 허용하는 것을 무책임한 행태라고 비판했다. 권진영, “민족자결주의의 활
용 방식과 갈등 양상의 변천 과정: 1910년대 후반부터 해방 전후까지,”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4), pp. 31-32. 이 점에서 만일 그 당시에 필리핀인들이 그 실상을 모르고 윌
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면, 월러스틴의 논리에 따라 이는 정확히 ‘반
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해당할 것이다.
65) 이 인용은 유재건, “근대 서구의 타자인식과 서구중심주의,” 역사와 경계 , 제46권 (2003), p. 43
의 요약을 재인용한 것이다.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 135

심적 서구중심주의로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런 현상이 지닌 긍정성과 진보
성을 부정하기란 곤란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에 입각한
오류 등으로 인해 “유럽이 행한 것들은 잘못 분석되고, 부당한 잣대가 되어버려서
과학과 정치세계 모두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왔다”(248)는 월러스틴의 언명은 학문
과 정치세계의 복잡성을 고려할 때 대폭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서
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월러스틴의 개념을 수용하되 그것이 부정적이면서도
긍정적인 두 측면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든지, 아니면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
라는 개념을 부분적으로 폐기해야 할 것이다.66)

III. 글을 마치며
유럽중심주의에 관한 월러스틴의 논문에서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 개념은
두 가지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67) 가장 광의의 의미에서 그 개념은 “유럽중심주의
비판에 유럽중심적 가설들을 사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유럽중심주의의 지속과 강
화에 기여하는 역설적 현상을 지칭한다. 이 개념은 그 뛰어난 발상으로 인해 많은
학자들에 의해 주목을 받았고, 또 널리 인용되어 왔다. 또한 그는 그 개념을 구체적
으로 역사기술에 적용하여 유럽중심적 역사기술을 비판하는 학자들 역시 유럽중심적
가정을 받아들인 채 반유럽중심적 주장을 제기한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가 비판
하는 유럽중심적 가정은 무엇보다도 ‘유럽이 성취한 자본주의 혹은 근대성이 역사적
으로 불가피했고 바람직하며 또 진보적이다’라는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진 ‘보편적’
가정이기도 했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다루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가정은 자본
주의의 역사적 보편성에 대한 가정이었다. 따라서 그가 비판하는 학자들은 두 가지
가정 위에서 다양한 이론구성과 사실해석을 시도하면서 16∼19세기에 걸쳐 유럽이
66) 왜냐하면 월러스틴의 ‘비판3’에 따르면 “유럽이 행한 것들은 잘못 분석되고, 부당한 잣대가 되어
버려서 과학과 정치세계 모두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필자가 보기에 그러한 대표적 사례
로서 반유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에 해당하는 ‘비판1’이나 ‘비판2’ 모두 지금까지 검토한 것처럼
일정 정도 학문과 정치세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67) 월러스틴의 유럽중심주의 개념 역시 두 가지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맥레난은 이를 ‘세기적 세계
관’과 ‘지배적이지만 선택적인 이데올로기’로 구분한다. McLennan, op. cit., pp. 153-154.
136 ┃ 강 정 인

성취한 자본주의 혹은 근대성의 ‘특별함’(specialness)을 부정함으로써 근대 역사에
서 서구중심적 역사기술을 전복시키고자 했다. 이 점에서 그 학자들의 이론을 ‘반유
럽중심적 유럽중심주의’라고 비판하는 월러스틴의 논리구성은 합당하다. 그런데 월
러스틴의 비판이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그들의 이론이 서구중심적 가정을 따르고
있고 또 자본주의에 대한 이론구성이나 근대 세계사에 대한 사실해석에서 심각한 문
제점을 안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이 글에서 논한 것처럼, 그들의 연구가
근대 세계경제를 설명함에 있어서 통념으로 굳어져왔던 역사기술의 서구중심주의(서
구예외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조합) — ‘서구의 흥기’ 대 ‘아시아의 정체’라는 이분
법적 구도, ‘서구의 흥기’를 설명함에 있어서 외부의 기여나 상황적 변수를 무시하고
오로지 서구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내재적 요소에만 의존하는 서구예외주의 — 를 상
당한 수준에서 무너뜨렸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점에서 그 연구들이 서구중
심주의의 타개·극복에 기여한 공로는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월러스틴의 논문 역시, 앞에서도 간
략히 시사한 것처럼, 반유럽적 유럽중심주의라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월러스틴 자신이 “사회과학은 근대 세계체제의 산물이며
유럽중심주의는 근대세계 지구문화의 구성요소”라고 언급하면서 그 논문을 시작한
것처럼(235), 부정할 수 없는 서구문명의 세계지배와 함께 서구중심주의는 근현대
세계를 지배하는 메타이데올로기로서, 거의 모든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세
계관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서구중심주의는 지구문화의 구성요소로서 현실의 삶은
물론 학문적 영역에도 깊숙이 침투하여 한데 엮어져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인
본주의, 문명, 세속주의, 근대주의 등은 물론 과학기술, 자본주의, 민주주의, 자유주
의/사회주의, 국민국가, 국제관계, 다문화주의/문화다양성 등과 관련된 수많은 개념
과 용어들까지, 나아가 대학에 자리 잡고 있는 대부분의 학문분야 역시 서구중심적
세계관, 가치 및 가정 등을 핵심적 요소로 포함하고 있다.
이 점에서 맥레난(McLennan)은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월러스틴의 논문뿐만 아니
라 그의 세계체제론 역시 “그 논리와 우선순위들이 완고하게 서구중심적으로 남아
있다”고 비판하면서, 그 이유로 거기에 사용된 “지배적인 개념들이 노골적으로 ‘합리
주의적’이고 그 광범한 열망이 지우기 어려울 정도로 ‘진보주의적’이고 ‘보편주의적’”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 137

이라는 점을 지적한다.68) 조금 다른 관점에서 김은중 역시 “『근대 세계체제』의 지
정학적 상상계에는 근대성이 저지른 폭력과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언급한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세계체제론[이] 근대성과 진보를 동일시
하며 세계가 순차적 단계들을 거쳐 발전한다는 관념에 의존”하기 때문에 “식민성[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69) 이러한 비판이 합당하다면, 자본주의의 역사적 진보
성을 부정하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이 자본주의의 진보성에 기초하고 있는 셈이
되는바, 이는 명백한 논리적 모순이 되고, 나아가 자신이 신랄하게 비판한 ‘반유럽중
심적 유럽중심주의’로부터 스스로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을 법하다.70)
마지막으로, 여기서 자세히 논할 수 없지만, 이런 논의는 서구중심주의가 다층적이
고 중층적인 층위(multiple and overlapping layers)로 구성된 복합적 구조물이기 때
문에 서구중심주의를 타개하는 것이 녹록치 않은 작업이라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준
다.71) 다층적이고 중층적인 층위로 구성된 서구중심주의에서 하나의 층위를 걷어내면
다른 층위가 나타나고 어떤 층위들은 가로질러 서로 맞물려 있기도 하는바, 어느 한
층위를 딛고 서서 다른 층위를 걷어내는 과정에서 이전에 딛고 선 층위 역시 서구중
심적 층위라는 비판을 면하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탈서구중심주의를
모색하는 학문적 노력은 보다 완벽한 대안 패러다임의 창출에 이르기까지 또는 그러
한 패러다임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다층적이고 중층적인 노력 — 각 층위의 안과 밖에
서 그리고 여러 층위를 가로 질러 서구중심주의를 탈피하려는 복합적 노력– 을 시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은 당연히 다양한 학문분야에 걸쳐 탈서구중심주의를 지
향하는 학자들의 지속적인 협력(상호 간 이론투쟁을 포함한)을 필요로 할 것이다.

68) Ibid., pp. 156-157.
69) 김은중, “라틴아메리카의 관점에서 본 근대성, 근대 세계체제, 자본주의 세계경제,” 강정인 편,
탈서구중심주의는 가능한가: 비서구적 성찰과 대응 (파주: 아카넷, 2016), p. 446.
70) 심사단계에서 이 논문의 초고를 검토하면서 예리하고 유익한 논평을 해준 한 심사자는 이러한
해석이 설득력이 있는 비판인지 의심스럽다고 지적했다. 심사자의 논평을 고려하여 필자 역시
이러한 해석의 타당성이 논쟁의 소지가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겠지만, 월러스틴의 서술 역시 모
호하고 모순될 때가 있기 때문에 일단은 현재의 서술을 유지하되 그 표현을 완화했다.
71) 이에 대해서는 집필을 계획하고 있는 추가적인 논문에서 상세하게 다룰 것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138 ┃ 강 정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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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 강 정 인

[English Abstract]

Reexamining Anti-Eurocentric Eurocentrism
KANG, Jung In Sogang University

This paper critically reviews anti-Eurocentric Eurocentrism formulated by
Immanuel Wallerstein and assesses its theoretical merits and demerits. The
paper shows that Wallerstein’s critique of anti-Eurocentric Eurocentrism
contains significant insights but it also fails to recognize the theoretical
contributions of the anti-Eurocentric work of many scholars he criticizes. He
condemns as anti-Eurocentric all theories that assume that capitalism or
modernity is historically inevitable, desirable and/or progressive. In addition,
this paper suggests that his realist position, which negates the progressiveness
of capitalism and modernity, is likely to produce uncomfortable contradictions
in theory and practice by decrying ‘anti-Eurocentric’ academic theories and
political movements as anti-Eurocentric Eurocentrism even though they appeal
to apparently universal Western ideas and ideals. Finally, considering that
Eurocentrism is an overlapping multi-layered construct of an all-embracing
epochal Weltanschauung — which means that efforts to overcome or cope with
it are susceptible to contradictions — it argues that phenomena accompanied by
anti-Eurocentric Eurocentrism should be given theoretical patience and practical
tolerance.

Key Words ┃ Eurocentrism, anti-Eurocentric Eurocentrism, Eurocentric anti-Eurocentrism, I.
Wallerstein, Orientalism, Occidentalism, capitalism, modernity, world-system,
progress, East Asia-centrism, China

논문투고일: 2016.5.10 / 심사의뢰일: 2016.5.26 / 게재확정일: 2016.6.15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 ┃ 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