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탁. 2015.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근세정치사상사연구와 서구중심주의의 굴레”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근세정치사상사연구와 서구중심주의의 굴레*
고희탁(서강대)

【목차】
Ⅰ. 머리말
Ⅱ. 사유양식론의 일본적 특수화와 그 함정
Ⅲ. 베일에 가려진 이토 진사이의 민주적 민본주의
Ⅳ. 역설적 정치이론의 애로와 활로
Ⅴ. 맺음말
【요약】
본 연구에서는 마루야마 마사오가 중시한 사유양식론과 그것의 일본적 특수화에 따
르는 함정, 유교관의 혼란 등에 대해 본격적으로 분석한다. 마루야마의 자기비판을 비
롯하여 많은 선행연구가 있었지만 이 문제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본격적 연구가 없었
기 때문이다. 그 여파로 마루야마의 일본근세정치사상사연구가 초래한 특정 사상가에
대한 과대평가 혹은 과소평가가 여전히 시정되지 않은 채로 남겨져 있으며, 거기서 비
롯된 뒤틀림의 후유증이 아직 완전히 시정되지 않은 채로 동아시아문명이나 유교 이해
를 둘러싼 양극단의 편견, 즉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의 생명연장 및 병존을 오늘
날까지도 허여하고 있다는 의구심 또한 없지 않다. 이런 문제의식 위에서 마루야마의
일본근세정치사상사연구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를 시도하는 것이다.
주제어: 마루야마 마사오, 일본근세정치사상사, 오규 소라이, 이토 진사이, 서구중심주

Ⅰ. 머리말
본 연구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이하 마루야마)가 중시한 사유양식론과 그것의 일
본적 특수화에 따르는 함정, 유교관의 혼란 등의 이론적 문제에 대한 본격적 접근을 통해
그의 일본근세정치사상사연구에 대한 근본적 재검토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마루야마의 자기비판을 비롯하여 다른 연구자들의 많은 선행연구에서
그의 이론적 틀이 역사적 사실과 괴리된다는 점이 다각도로 지적‧비판되어 그의 일본근세
정치사상사연구에서의 문제가 많은 부분 시정되었지만,(김석근 2001, 257-262) 위에서 언
급한 두 가지 문제는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거론‧비판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 문제
의 연장선상에서 특정 사상가가 과대평가되거나 혹은 과소평가당해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문제의식이 약하다. 더욱이 이와 같은 그의 일본근
세정치사상사연구가 남긴 뒤틀림의 후유증이 아직 완전히 시정되지 않은 채로 동아시아문
명이나 유교 이해를 둘러싼 양극단의 편견, 즉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의 생명연장
및 병존을 오늘날까지도 허여하고 있다는 의구심을 낳고 있기 때문이다.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교육부)의
(NRF-2014S1A3A2043763)

재원으로

– 1 –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잘 알다시피 마루야마의 사유양식론은 그의 일본근세정치사상사연구 주저 『일본정치사상
사연구(日本政治思想史硏究)』(이하 『연구』) 제1장과 제2장에서 주로 ‘중세’적 사유양식으로
부터 ‘근대’적 사유양식으로의 사상사적 ‘발전’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론이었다.1) 전자는 주
자학으로 대표되었고, 후자의 대표로서 주자학적 사유양식을 해체해 간 일본 근세(도쿠가
와시대) 주자학 비판자들의 선구적 흐름을 종합했을 뿐 아니라 그들보다 한 차원 높은 ‘근
대성’(마루야마 1995, 362)의 지평을 열어젖혔다고 평가받는 이가 바로 오규 소라이(荻生
徂徠)였다. 오규 소라이(이하 소라이)야말로 근대적 ‘정치의 발견자’이자 ‘작위적 질서관’의
개창자로서 마루야마 일본근세정치사상사논의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마루야마는 곧바로 『연구』 제1장 맺음말에서 그 사상사적 정점의 특징적 성격에
대해 변명과도 같은 일본적 특수성 설명을 장황하게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다. 왜냐
하면 그의 사상사적 발전도식에서 볼 때 정점 사상가인 소라이가 실제로는 근대적 요소의
성장을 저지‧제거하려 했던 ‘반동적’ 사상가였다는 모순적 상황을 논리적으로 일관되게 설
명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거기서 동원된 방법론이 ‘표면’적인 정치론보다는 그 ‘바탕
을 이루는 사유양식’의 변화를 강조한 사유양식론이었다. 하지만, 『연구』 제3장의 ‘국민주
의’ 형성에 대한 연구에 이르면, 결국 소라이의 작위관에 내포된 이론적 제약, 즉 작위하는
주체가 최고통치자에게만 한정되고 그 나머지는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는 문제를 언급하면
서 사상사적 ‘좌절’을 비탄의 투로 서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비록 제각각 별도로 저술
된 세 논문을 모아 만들어진 저서였다고 하더라도, 단일 저서 안의 제1장과 제3장 사이에
서 소라이에 대한 평가의 색조는 동전의 양면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너무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소라이에 대한 어딘가 부자연스런 과대평가에 대해, 그리고 그 과대평가
를 낳은 그의 독특한 사유양식론에 대한 의구심은 한번 재검토해볼 만한 것이다.
한편, 마루야마의 사상사적 도식에서는 ‘중세’적 사유양식으로부터 ‘근대’적 사유양식으
로의 발전과정에서 그 ‘중간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받는 이토 진사이(伊藤仁齋)에 대해
서도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보인다. 『연구』에서 마루야마는 이토 진사이(이하
진사이)가 이룩한 철학상의 ‘변혁’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정치=사회사상의 수면으로까지 떠
오르지 못했다”(마루야마 1995, 334)고 정치사상적 한계를 지우면서 “정치론 방면에서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마루야마 1995, 169)고 재단한다. 그러나 진사이가 그의 말년
주저에서 “거듭해서 ‘왕도’론이야말로 학문의 요체라고 주장하였고, 실제로 ‘왕도’, 즉 통치
자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논한다”는 사실과 그의 ‘왕도’론이 그때까지의 “흔해 빠진
유학적 민본주의론과는 다르다. 한 발 더 나아간, 민의 의향에 따라 통치하라는 주장”(渡辺
2010, 147-148)이었다는 점이 최근 연구에서 더 명확해지고 있다. 그런 만큼 진사이에 대
해서는 소라이와는 반대로 마루야마가 어떤 이유에서든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의구심 또한
없지 않다.
다른 한편, 마루야마의 유교 이해가 시기에 따라 크게 요동친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특
히 1940년대 초반에 집필된 『연구』 제1장과 제2장에서의 견해와 1960년에 발표된 “충성
과 반역”에서의 견해가 상반될 정도로 그 대조가 뚜렷하다. 전자에서는 앞서 언급했듯이
주자학적 사유양식이 근대적 사유양식으로의 이행을 위해 해체되어야 할 부정적 징표로 간
주되었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유교적 세계상의 침투’가 “단순히 ‘봉건적 충성’의 정태화,
1) 참고로 『연구』의 각장 제목을 일별해보면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집필년도. 제1장 “근세일본유교의
발전에서 있어서 소라이학의 특질 및 국학과의 관련성”(1940), 제2장 “근세일본 정치사상에 있어서의
「자연」과 「작위」”(1941), 제3장 “일본 국민주의의 「전기적」 형성”(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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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화의 역할만을 연출했던 것은 아니다”(마루야마 1998b, 30)라고 하듯이 유교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측면을 부각시킨다. 그 흐름은 1964년판 마루야마의 강의록에서
더 명확해진다.(丸山 1998, 123-138)
그런데 이처럼 초기 견해와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주장을 내세우려면 그것이
초기 견해와 어떻게 다른지, 달라졌다면 어떻게 달라졌는지에 대해 설명해야 하지 않을
까. 또는 초기 견해와 다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지, 어떻게 모
순되게 보이는 1940년대의 이해와 1960년의 이해가 병존 가능한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
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마루야마의 체계적 해명은 마지막까지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마루야마 연구에 심혈을 기울여온 어느 연구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진
한 아쉬움이 배어나는 문제제기가 독백처럼 던져졌던 것이다. “주자학적 사유양식이 [해
체]되어야 [근대적 사유]가 성립가능한지, 아니면 적어도 [근대의식의 성숙을 준비하는
전제조건]이 충족되는 것인지”라고 자문하면서, “<주자학과 근대적 사유의 관계를 과연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의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이월되고 있다”(김석
근 2001, 263)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위에서 언급된 문제군을 사유양식론의 일본적 특수화에 따르는 함정이나
유교관의 혼란 등의 이론적 문제로 위치 짓고, 동아시아문명이나 유교 이해를 둘러싼 양극
단의 편견, 즉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의 문제를 염두에 두면서 위 문제군에 대한 분
석과 고찰을 전개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유교 또는 주자학과 근대적 사유와의 관계’에 대
해 필자 나름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Ⅱ. 사유양식론의 일본적 특수화와 그 함정
우선 마루야마의 사유양식론과 그 일본적 특수화라는 문제부터 검토를 진행할 필요가 있
다. 왜냐하면 마루야마에게 사유양식론은 전근대 사상가들의 언설을 현대인들에게도 이해
될 수 있도록 가공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했던 이론적 장치였고, 『연구』의 한국어판 “해제”
를 쓴 김용옥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를 통해 마루야마는 전근대 사상가들의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의 자체구조만을 밝히”는데 머물던 그때까지의 동아시아문명권의 ‘철학사’와는
달리, 그들의 언어가 “그 시대의 삶에 있어서,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는 오늘 우리의 삶에
있어서 어떠한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그 상대적‧역사적 관계성을 밝히”는 ‘사상사’ 서
술에 성공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적절한 의미를 제시해주지 못함
으로써 “졸리고 또 졸릴 뿐”이던 종래의 “‘철학사’의 오류를 극복한 동아시아문명권의 최
초의 돌파구”(마루야마 1995, 31)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마루야마 스스로 “영어판 저자
서문”에서 자기비판하듯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류를 자타가 인정한 후인데도 불구하고
『연구』가 영어로 번역‧출판된 것은 그 사상사적 성과와 ‘근대성’을 둘러싼 보편적인 논의
가능성에 대해 어느 정도 평가하고 있었다는 징표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2)
거기서 그 보편적 논의 가능성을 견인한 것은 그의 사유양식론이었다. 잘 알다시피 중요
하게 부각된 논의구도는 도덕과 정치의 연속적 사유구성(주자학적 사유양식)의 분해와 그
에 따른 정치영역의 독자적 법칙성의 발견,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기, ‘자연’적 질서
2) 『연구』의 영어판은, Studies in the Intellectual History of Tokugawa Japan이라는 서명으로
1974년 도쿄대학출판회와 프린스턴대학출판부 공동으로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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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으로부터 ‘작위’적 질서관으로의 전환, 즉 현질서를 ‘자연’으로서 철학적으로 정당화하여
“질서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여온 인간”, 또는 “질서에 따라 행위했던 인간”을 당연시함과
동시에 자연시하는 중세적인 사회=국가제도관을 부정하고, 그 질서의 형성 및 변동이 어디
까지나 인간의 “사유와 의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여 “질서에 대해 행위하게
된”(마루야마 1995, 322‧356) 인간을 길러내는 근대적인 사회=국가제도관으로의 전환 등이
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마루야마의 사유양식론은 『연구』의 사상사적 발전도식을 성립시
킬 기본적 방법론이었지만, 그 자체 이론적 함정을 지닌 채 태어날 운명이었다. 마루야마
의 논법은 유럽과는 다른 일본적 특성을 이유로 ‘반동적’ 사상가 소라이를 그 사상사적 발
전의 정점에 위치 지우는 독특한 전개를 구상해냈지만, 그 독특한 전개 자체가 결국 유럽
과는 다른 독특한 사상사적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일종의 동어반복에 다름 아
니다.
물론 이런 동어반복은 일본형 오리엔탈리즘이라 할 만한 그의 이론적 구도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일본의 근대적인 것이 갖는 양면적인 성격, 즉 그 후진성과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 비정체성”(마루야마 1995, 309)이라는 일본 근대의 빛과 그림자라는
양면성을 ‘동시에’ 설명하고자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유럽과 대비되는 ‘후진
성’을 근거로 당대 ‘근대초극론’자들의 근대 부정의 논리를 부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시아’와 대비되는 ‘상대적 진보성’을 근거로 근대에 오염되기 이전의 ‘동양정신’의 전통
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당대 ‘일본정신주의’자들의 동양정신론을 동시에 부정할 수 있을 것
으로 본 것이다. 이런 양면전략이 그에게는 당대의 일본군국주의에 대한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정신적 차원의 ‘필사적 거점’(마루야마 1995, 84)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루야마는 『연구』를 구성하는 논문들을 집필하던 1940년대 초반과는 달리 이
논문들을 하나의 저서로 묶는 1950년대 초반에는 특히 ‘아시아’와 대비되는 일본의 ‘상대
적 진보성’이라는 테제를 철회한다. 그것은 마루야마 자신의 근대관이 1940년대 초반까지
와는 달리 1950년대 초반에는 변화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과 연동된 현상이었다.
『연구』 “저자후기”에 그 사정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는 거기서 일본의 근대와 중국의 근대를 새로이 비교하면서, 스스로 『연구』에서의 ‘중
국의 정체성에 대한 일본의 상대적 진보성’3)이라는 구도에 대해 자기비판하고, 중국에서
실패하고 일본에서 성공한 근대화는 어디까지나 ‘근대국가’의 형성에 한정된 것이었으며,
그것도 ‘괄호가 처진 근대’(마루야마 1995, 83)였음을, 그리고 그 시각 자체가 ‘8‧15 이전
의 각인’(마루야마 1995, 79)이라는 시대성의 제약에 따른 편견이었음을 인정한다. 그와 대
조적으로 중국의 근대사적 경험을 ‘대중적인 기반에서의 근대화’라고 명명하면서 “오늘날
은 실로 거꾸로의 대비”라고 표현할 정도로 1950년대 초반 중국의 활력을 높이 평가한
다.4)
3) 이 구도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구미)-반개(일본)-야만(중국 및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의
구도와 구조적으로 유사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구』의 중심을 이루는 소라이 연구가 후쿠자와에
대한 연구와 거의 동시기에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점은 시사적이다.(平石, 2004:6) 마루야마가 일본 최
고최대의 사상가로 평가하는 후쿠자와의 시각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마루야마에게 작지 않은 영
향을 끼쳤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4) 학문영역과 관점은 다르지만 마루야마 스스로 ‘외우(畏友)’로 칭할 정도로 심정적으로 가까웠던 중국
근대 연구자 다케우치 요시미(竹內好)의 영향이 작지 않을 것이다. 특히 다케우치가 근대화의 주체성
이라는 시각에서 중국 근대와 일본 근대의 차이를 해명하려 한 일련의 논고는 마루야마의 단선적 근
대관으로부터 복선적 근대관으로의 변화와 관계가 깊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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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급에 따르면, 『연구』를 구성하는 논문을 집필하던 194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근대에 대한 접근이 ‘근대국가’화를 위한 근대, ‘괄호가 처진 근대’에만 치우쳐 있었으나,
1950년대 초반 ‘저자후기’를 쓸 때에 이르러 비로소 마루야마는 ‘근대국가’화를 위한 근대
와 ‘대중적 기반’의 근대를 엄밀히 구분하여 근대에 대한 접근시각을 복수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중국을 정체성의 전형으로 취급했던 시각에서 벗어나 중국의 경험을
‘대중적인 기반에서의 근대화’로 명명하고, 가치평가의 축을 그때까지의 ‘근대국가’화를 위
한 근대보다 ‘대중적인 기반에서의 근대화’를 높이 평가하는 쪽으로 이동시키고 있는 것이
다. 1974년 출판의 “영어판 저자서문”에서는 전자를 ‘관료적 국가주의’, 후자를 ‘근대적 국
민주의’(마루야마 1995, 69-70)로 보다 더 명확히 재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특히 아쉬운 점은 마루야마에게 나타난 이런 변화, 즉 근대에 대한 접근
시각의 복수화와 ‘근대적 국민주의’에 대한 주목은 단지 ‘8‧15 이전의 각인’이 씻긴 패전
이후에나 가능한 사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떤 편견이 강하게 그를 짓누르지만 않았더
라도 그 자신이 ‘8‧15 이전의 각인’ 때문이라고 한계를 인정하던 『연구』의 논문에서도 그
변화의 가능성을 배양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변화는 이
미 『연구』 제2장 집필단계에서부터 예고된 것으로 보인다. 마루야마 스스로 “저자후기”에
서 제2장이 제1장의 ‘보론’과 같은 성격으로 집필된 것이라고 하여 마치 두 논문을 ‘일란
성 쌍생아’처럼 취급하고 있지만, 그 사상사적 전망에 대한 마루야마의 시선의 색조는 오
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제1장에서는 앞서 언급한 ‘중세’적 사유양식으로부터 ‘근대’적 사유양식으로의 사상사적
‘발전’, 즉 소라이 출현 이후는 “주자학의 연속적 사유에 의해 윤리에 완전히 얽매여 있던
정치‧역사‧문학 등의 제 영역이 각각 그 고리를 끊고 문화적인 시민권을 요구”(마루야마
1995, 314)하는 ‘근대의식’의 분출이 역사적으로 ‘불가역’적인 흐름일 수밖에 없는 것임을
강조하는 다소 낙관적이라 할 만한 색조가 눈에 띤다. 특히 제1장의 말미에서 ‘근대초극
론’자들의 ‘근대위기’론에 대해 마루야마가 일정 정도 공감하면서도, 그 문제의 해결을 위
해 ‘전근대’로의 회귀가 이미 불가능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을 정도만큼 색조가 밝다.
그러나 그에 반해, 제2장의 말미에서 눈에 두드러지는 색조는 대조적으로 매우 어둡다.
물론 제1장의 말미에서 묘사되던 사상사적 ‘발전’의 전망이 그나마 제2장의 중반부, 즉
“질서에 따라 행위했던 인간”(마루야마 1995, 356)을 당연시‧자연시하는 ‘자연’적 질서관을
부정하고 그 질서의 형성 및 변동이 어디까지나 인간의 “사유와 의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여 “질서에 대해 행위하게 된”(마루야마 1995, 356) 인간을 산출하게 된 ‘작
위’적 질서관을 서술하는 대목에 이르기까지는 유지된다. 그러나 그 전망이 제2장의 말미
에 이르러서는 사상사적 ‘좌절’로 돌변하여 제3장에서 그 어두운 색조를 더해간다.
그 이유는 소라이의 ‘작위’관에 내포된 이론적 제약, 즉 “작위하는 주체가 성인 혹은 도
쿠가와 쇼군이라는 식으로 특정한 인격에 한정되어 있는 점” 때문에, 그 ‘작위’적 질서관이
근대적인 “‘인작설’(人作說=사회계약설)로 진전할 수 있는 계기가 완전히 결여”되어, “대다
수 사람들에게는 질서에 대한 주체적 능동성이 부여되지 않게 되므로 그들에게 현실의 정
치적·사회적 질서는 실제로는 운명적으로 주어진 것일 수밖에 없”(마루야마 1995, 440)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 사상사적 좌절의 비탄을 마루야마는 다
음과 같이 쏟아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메이지유신의 신분적 구속을 배제함으로써 새로운 질서에 대한 주체적 자유를 확보하는 것처럼 보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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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인간은 바야흐로 다시 거대한 국가(리바이어던) 속에 매몰되어버리게 되었다. ‘작위’ 논리가 오랜
인고의 여행을 끝마치고 비로소 자신의 청춘을 노래하려 할 때, 너무나도 빨리 가시밭길이 다시금 그
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일본에서 전반적으로 ‘근대적인 것’들이 똑같이 걷지 않으면 안 되는 그
런 운명이었다.(마루야마 1995, 462)

이에 따라 제3장의 서술이 그 주제인 ‘국민주의’ 형성과는 정반대되는 흐름만으로 채워지
게 된 것이다.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서민들은 오로지 정치적 통제의 객체로
서 주어진 질서에 수동적으로 ‘따르게’”(마루야마 1995, 473)만 취급되었고, ‘봉건 지배자
일반’은 외국세력의 위협적 접근에도 “우민관에 기초한 서민들에 대한 깊은 불신, 그리고
외국세력과의 결탁에 대한 의혹”(마루야마 1995, 482)에 더 신경을 곤두세우는 현상이 일
반적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연구』의 전체적 흐름은 제1장의 밝은 색조에서 시작하여 제
2장, 제3장으로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어두워지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전체적 색조 변화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괄호가 처진 근대’(‘근대국가’) 지향,
‘관료적 국가주의’ 시각에서 ‘대중적 기반의 근대화’, ‘근대적 국민주의’로 접근시각을 중심
이동시킨 것과 관계가 깊다. 요컨대 제1장의 소라이적 ‘근대’가 메이지 국가주의와 같은
것을 지향한 방향성을 갖는다고 한다면,(尾藤 1983) 『연구』 제1장의 ‘관료적 국가주의’ 근
대관으로부터 제3장의 ‘근대적 국민주의’ 근대관으로 그의 접근시각의 중점이 이동함에 따
라 일본사상사적 발전 전망은 어두워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1장과 제2장 중심으로 전개된 마루야마의 사상사적 발전 도식은 ‘관료적 국
가주의’ 혹은 ‘괄호가 처진 근대’의 시각에 규정당하고 있었으며, 그런 ‘연역적 전제’ 아래
일본근세정치사상사는 마루야마에 의해 ‘조작’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다. 그 전형이 마루야마의 사상사적 발전 도식의 정점에 위치하는 소라이를 대상으로 한
‘상식적’(마루야마 1995, 69) 혹은 ‘좁은 의미의 정치사상사’(마루야마 1995, 85)적 위상규
정과 마루야마의 ‘개인적 창의’(마루야마 1995, 69)가 발휘된 사상사적 그것과의 역설적 차
이에서 잘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따르면, “막부절대주의를 주장한 소라이”(마루야마 1995, 308)는 ‘좁은 의미의 정
치사상사’ 견지에서 본다면, 소라이가 “봉건사회의 태내에 그것을 해체하고 부식시키는 독
소”(마루야마 1995, 351)라 여길 만한 근대적 요소의 성장을 저지‧제거하려 했던 ‘반동적’
(마루야마 1995, 351) 사상가였다. 그러나 소라이의 ‘작위’론적 사유방법에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것은 역시 인간이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마루야마 1995, 375)에 대한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것이 “질서에 따라 행위했던 인간”(마루야마 1995, 356)을 당연시‧자
연시하는 ‘자연’적 질서관을 부정하고 그 질서의 형성 및 변동이 어디까지나 인간의 “사유
와 의사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여 “질서에 대해 행위하게 된”(마루야마 1995,
356) 인간을 산출하게 된 ‘작위’적 질서관으로의 전환을 이끌었다. 그 결과 소라이 자신이
의도했던 “봉건사회를 위한 변혁이 (결과적으로:인용자) 봉건사회에 대한 변혁”(마루야마
1995, 375)을 이론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의도하지 않았던 성과’(마루야마 1995, 309)를
남겼으며, 그것이 사상사적인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마루야마는 정치
적인 반동사상가상과 정치철학적인 혁신가상의 절묘한 역설적 결합을 소라이에게서 그려내
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루야마는 이러한 ‘반동적’ 사상가에게서 근대적 사유양식으로의 발전을 추출해
낼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시민적인 사회’의 성장 여부를 기준으로 유럽사상사와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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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근대의식을 내면적인 사유방식 속에서 찾고서, 반드시
정치사상에서의 반대자적인 요소 속에서 찾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라고 자문하고서는,
“그런 시각은 밑바닥에 깔려 있는 사유양식의 변혁이 그 위에 서 있는 정치사상의 변혁과
거의 나란히 진행된 유럽근대사상사를 관찰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시민적인 사회의 힘이
봉건사회의 태내에서 순조롭게 성장하는 것을 방해받은 도쿠가와시대”를 대상으로 하는
한, 오히려 “바탕을 이루는 사유와의 연관성을 결여한 정치론에 대해 근대의식을 엿본다는
것은 자의적인 결과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마루야마 1995, 308)고 자답한다. ‘표면’적인
정치론보다는 그 ‘바탕을 이루는 사유’에서의 근대의식의 성장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소라이에게서 보이는 사유양식의 변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 제1장에서의 마루야마의 이러한 발상은 제3장의 ‘근대적 국민주의’ 시각
에서는

용이하게

수용되기

어렵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막부말기

외교관

알코크

(Rutherford Alcock)의 관찰기록을 인용하는 제3장의 시각은 소라이의 ‘표면’상의 정치론
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코크는 “지배자들은 인민 대중들이 지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계몽된다면, 불가피하게
여러 가지 근본적인 변혁이 초래될 것이라는 것, 게다가 그런 변혁의 첫머리에 오게 될 것
은 바로 자신들의 …구속적인 봉건권력”(마루야마 1995, 498)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고 회고하고 있다. 그런데 비해 소라이야말로 누구 못지않게 ‘민’의 지적 혹은 도덕적 계몽
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소라이는 알코크가 본 ‘지배자들’의 생각과 궤를 같
이 한다.
위가 어리석고 용렬한데 아래에 호걸이 나오면 세상은 반드시 어지러워지게 된다.(『太平策』)
민간의 아랫것들에게는 효제(孝悌)‧충신(忠信)을 알게 하는 것 이외에 달리 가르칠 필요가 없다. 『효
경』『열녀전』『삼강행실』의 수준을 넘겨서는 안 된다. 그 이외의 학문은 사특한 꾀(邪智)를 조장하게
되어 매우 위험하다. 민에게 사특한 꾀가 넘치게 되면 다스리기 힘들게 되는 법이다.(상동)

이와 같이 전체적으로 소라이의 사상은 “역사관으로서는 반진보‧반발전‧반성장이다. 그리고
반도시화‧반시장경제다. 개개인의 생활에 대해서는 반‘자유’이자 반평등이며 피치자에 대해
서는 반‘계몽’이다. 그리고 정치에 대해서는 철저한 반민주주의다. 그러한 사고로 철저히
일관된 것”(渡辺 2010, 197)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근대적 사유양식이라는 것이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억압적인 역할을
적극적으로 담당”(야스마루 2006, 176)할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해 고려하지 않은 ‘안이한
견해’라고 비판당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한편으로는 “야마노우치 야스시, 사카이 나오키,
나카노 도시오 등 총력전 체제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일파”로부터는 “마루야마의 ‘작위’
론을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국가총동원 체제의 형성에 기여했던 것이라 고발”(고바야시
2013, 150)당하는 ‘외재적 비판’을 받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硏究』 “해제”에서 “일
본의 지성들이 참으로 문제삼아야 했던 것은 …작위 자체에 대한 심오한 도덕적 반성이었
어야 했던 것 …마루야마가 고집하는 ‘근대의 긍정’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하게는 ‘폭력의 긍
정’으로까지 비약할 수 있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는 것… 바로 마루야마君이 증오하고 두려
워하던 국체론자들의 폭력이 그러한 작위의 결론이 아니었던가?”(마루야마 1995, 43)라고
비판당하거나 “작위적 사고에서 드러나는 파행적 성격은 이후 일본근대사의 비극적 전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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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티브를 이루게 된다”(강상규 2013, 278)고, 다소 오해 섞인 ‘작위’ 해석에 의해 ‘폭력’을
조장하는 사상으로 지탄받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소라이에게서 지적되어야 할 ‘표면’상의 ‘반동’성은 단순히 그가 봉건체
제의 지지자라거나 시장경제 및 거기서 유발되는 ‘게젤샤프트’적 사회관계‧사회의식에 대해
‘저주’하고 있었다는 점만이 아니다. 더 중요하게는 ‘내면적’으로 사유양식의 ‘작위’적 질서
관에 접근해가도록 해야 할 ‘민’을 그로부터 ‘배제’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찾아져야 하지 않
을까? “소라이에게 민은 계약의 당사자가 아니라 성인이 작위한 제도를 수용해야 하는 피
동적인 대상일 뿐”(강정인‧장원윤 2008, 21)이라면, 제1장과 제2장의 마루야마의 사유양식
론은 제3장의 ‘근대적 국민주의’ 형성의 예비적 주체라 할 만한 ‘민’에 대한 ‘경시’라는 심
각한 철학적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었다.

Ⅲ. 베일에 가려진 이토 진사이의 민주적 민본주의
이러한 마루야마의 사상사적 발전 도식에서의 ‘민’의 경시는 그 도식의 중간단계에 위치
한 진사이 분석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그리고 그 분석시각에 사상사적 대항자였던 소라이
의 편견이 적지 않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진사이야말로 소라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그의 사상적 혁신의 동기를 부여한 가장 큰 사상적 대립축이
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高 1999)
마루야마의 도식에서 진사이는 ‘중세’적 사유양식인 “주자학의 연속적인 사유의 분해를
현저히 촉진”(마루야마 1995, 160)시켜 ‘근대’적 사유양식의 정점에 선 “소라이학의 성립
을 그 한걸음 전까지 준비한”(마루야마 1995, 160) 중요한 존재다. “윤리를 자연으로부터
해방”(마루야마 1995, 164)시키고 더 나아가 “유교 윤리의 이론 구성 내부에까지 들어가서
그것을 이상주의적으로 순화”(마루야마 1995, 164)함으로써, ‘천도’와 구별된 ‘인도’는 이
중의 ‘자연’, 즉 물리적 자연계와 인간적 본성의 자연으로부터 동시에 분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진사이는 인간의 자연적 욕망에 대한 관용, 주자학적 합리주의에 결여되어 있던 역
사의식의 대두 촉진, 정치적 계기의 개인윤리로부터 독립의 개시 등을 선취하여, ‘주자학의
연속적인 사유 분해과정’의 완성자 소라이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진사이는 마루야마의 도식에서 어디까지나 중간단계의 위치에 지나지 않
는다. 마루야마가 그를 ‘도학자’(마루야마 1995, 171)라고 호칭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
위치는 소라이보다는 주자학에 더 가까운 지점에 배치되어 있으며, 소라이와의 사이에는
질적으로 동일화할 수 없는 ‘결정적인 비약’(마루야마 1995, 179)의 차이의 존재가 강조된
다. 진사이의 도=규범이 “그것 자체 속에 타당한 근거를 가지며 …인간 존재에 대해서는
선천적 타당성을 보유”(마루야마 1995, 334)한다는 의미에서 그의 사고의 핵심에 존재하는
질서관이 “자연적 질서라는 점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마루야마 1995, 334)이라
하여, 여전히 ‘중세’적 사유양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더욱이 그
의 논의가 오로지 ‘순수철학’에 한정되어 있다고 간주하여, 그의 철학상의 “변혁이 정치=사
회사상의 수면으로까지 떠오르지 못했다”(마루야마 1995, 334)고 정치사상적 한계를 지우
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마루야마의 진사이 분석에는 소라이에 대한 분석에서 빛나던 그의
주도면밀함이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그의 분석시각은 소라이의 진사이 해석에 적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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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존하여 그 객관성에 동요를 보인다. 그 전형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진사이에 대한 정치
사상적 한계지움에 잘 드러난다.
물론 마루야마는 진사이에게 보이는 정치학적 계기를 예로 들면서, “군주의 임무가 개인
도덕이 아니라 ‘민과 호오(好惡)를 같이 한다’는 공적 행위에 있다는 것”(마루야마 1995,
170), 관중(管仲)의 인(仁)을 성인의 그것과 동일시하면서 “개인적 동기보다도 민중들이 복
지 혜택을 받는다는 사회적 성과를 더 중시하고 있는 것” 등에 대해 주자학의 한계를 뛰어
넘은 것으로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사이는 오로지 유교 윤리의 이론적 분석에
힘을 쏟았으므로 정치론 방면에서는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다”(마루야마 1995, 169)고 일
찍부터 체념해버린다.
그러나 마루야마가 언급한 관중의 ‘인’에 대한 평가에 한정해서 보더라도, 그것을 인정하
려고 하지 않는 주자학의 시각과 선명한 대조를 나타내는 진사이의 해석에 대해 가볍게 지
나치는 바는 납득하기 어렵다. 진사이가 관중론을 통해 “현실정치가에게 요구한 것은 어떠
한 시대라 하더라도 정치가로서 완수해야 할 협의의 책임윤리의 수행… ‘요순의 인’과 ‘관
중의 인’이 똑 같다는 어투는 주자학의 틀에서 정치를 사고해온 사람들에게는 역시 충격적
인 언명”(田尻 2012a, 54)으로 받아들여졌을 법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마루야마가 소라이에게서 발견하는 정치와 도덕의 영역 구별에 대해서도 실제로는
진사이에게 그 공을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다. “이 두 영역의 구별은 소라이학의 특징으로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두 영역의 원리적인 구별 자체를 이룬 것은 진사이였다.”
(平石 1997, 63) 물론 마루야마는 그 ‘분해의 징후’(마루야마 1995, 170)를 인정하고 있지
만, “애초부터 이런 방면의 풍요로운 전개도 소라이학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마루
야마 1995, 170)고 하여, 진사이의 ‘중간단계’적 성격을 재차 부각시키는데 머문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진사이가 그의 말년 주저에서 “거듭해서 ‘왕도’론이야말로 학문
의 요체라고 주장하였고, 실제로 ‘왕도’, 즉 통치자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논한다”는
사실과 그의 ‘왕도’론이 종전의 “흔해 빠진 유학적 민본주의론과는 다르다. 한 발 더 나아
간, 민의 의향에 따라 통치하라는 주장”(渡辺 2010, 147-148)인 바를 마루야마는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진사이가 ‘도’를 ‘천하공공’의 차원에서 위치지우면서 그 이론적 연장선상에서
다룬 맹자의 ‘방벌’론에 대한 급진적 해석에도 눈을 감아버린다.
탕(湯)·무(武)의 방벌과 같은 사례는 도(道)라 해야 한다. …천하공공의 도(天下公共之道)에 의한 것이
지, 어느 한 개인의 사적 감정에 의한 행위가 아니다. 천하를 위해 잔학한 자를 제거하였기에 인(仁)
이라 하고, 천하를 위해 도적을 물리쳤기에 의(義)라 하는 것이다. 당시에 만일 탕·무가 걸(桀)·주(紂)
를 방벌하지 못하여 그 악정이 여전히 고쳐지지 않았다면, 반드시 탕·무와 같은 인물이 나타나 반드
시 이들을 없애지 않았으랴. 그런 인물이 위(上)에 있지 않았다면 아래(下)로부터 출현했을 것이며,
한 사람이 이를 잘 실행할 수 없었다면 천하의 만민이 들고 일어나 이를 실행하지 않았으랴.(『語孟字
義』)

이른바 역성혁명론은 고대 중국의 왕조국가였던 하(夏)·은(殷)·주(周) 삼대(三代)의 왕조교체
에 대해 ‘민심(民心)’의 향배와 ‘천명(天命)’을 결부시켜 그 정당성을 주장한 일종의 정치변
동론으로서 맹자의 민본주의적 ‘왕도’론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정치현실에서 그
이론은 신중히 다루어야만 할 위험한 도구였음에 틀림없다. 특히 사대부층의 주체적 실천
을 강조하는 주자학에서는 그것은 ‘도’를 의미하는 ‘경(經)’이 아니라 ‘권(權)’으로 정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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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거의 실현불가능한 전제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절대로 시도되어서는 안 되는 금기
였다.(안병주 1987, 104)
물론 그런 사상적 상황을 진사이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맹자』를 실은 배는 반
드시 침몰한다”는 속설조차 나돌 정도로 맹자의 논의는 일반적으로 에도시대에 가장 금기
시된 유학적 이론이었다.(野口 1986, 6) 이런 진사이의 논의가, 그런 유학적 논의를 알지조
차 못하거나 설혹 알고 있다 해도 그것을 쉽게 내면화하기 어려웠을 사무라이시대 한가운
데에서의 사자후(獅子吼)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에 대한 마루야마의 무시는 오히려 이
상하리만치 부자연스럽다. 그런데 그는 1970년대 중반에 작성된 “영어판 저자서문”에서도
“에도시대의 표면에 나타나고 있는 정치적 교의는 너무나도 매력이 없었다. 거기에는 2세
기 반 동안의 역사를 통해서 사회계약설이나 인민주권론은 말할 것도 없고 서구 중세에 발
달한 저항권 이론조차 발생해 있던 흔적이 없었다”(마루야마 1995, 65)고 여전히 단순화하
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위와 같은 방벌론에 보이는 진사이만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말
이다.
이러한 마루야마의 태도에는 소라이의 맹자관이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는 것으로 보
인다. 소라이는 “『맹자』 이하의 경전들에 대해서는 상대적인 가치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마루야마 1995, 191) 또한 한때 진사이에 열광했다가 그 정반대로 돌아선 소라이는 오히
려 진사이에게서 배어나는 사상적 급진성에 대해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던 듯하다.(片岡
1997) 물론 마루야마의 그런 시각은 소라이의 ‘성인’관, 즉 ‘작위’ 주체인 중국고대 이상적
군주로서의 ‘성인’을 ‘거의 종교적인 절대자’(마루야마 1995, 213) 수준으로 끌어올려, 그
‘작위’의 절대적 보편타당성의 근거를 확보하려고 한 소라이의 전략이 유럽 절대주의 출현
과 구조적으로 동일한 것이라고 해석하려는 마루야마 자신의 구상과 맞물려 있다.
이처럼 소라이의 『맹자』 격하 전략과 마루야마의 절대주의 구상이 겹쳐짐에 따라, 그
『맹자』를 실마리로 하여 정치권력의 존재이유를 묻는 진사이의 고투를 외면하기 쉬웠던 것
이다. 그 연장선상에서 “근세 일본의 사상가들은 자신이 처해 있는 정치적 사회적 환경에
대한 경험적 관찰에 기초하여 그 질서의 타당한 근거를 논한다거나 하는 일은 거의 하지
않았다”(마루야마 1995, 322)는 사상사적 단순화를 마루야마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진사이의 왕도론, 방벌론 등에 드러나는 ‘종전의 흔해 빠진 민본
주의론과는 다른’ 그의 민본주의는 사상사적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전환을 내포한다. 국가‧
통치의 본래적 목적에 대한 철저한 ‘민’ 중심의 재정의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앞의
‘방벌’론에서 보이는 것처럼 ‘민’도 ‘악정‧폭정’에 대한 정치적 저항의 주체의 일원으로서
그 존재를 인정받게 되었다는 점에서도 특히 그렇다.(高 1998)
물론 그 ‘민’은 당대의 “도쿠가와막부나 지방영주를 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천하의 인심이 떠나게 되면, 무장반란이 속속 일어나서 결
국에는 정부를 타도할 수도 있다. 그것은 그것대로 좋은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조용한, 그러나 단호한 경고였다.”(渡辺 2010, 152) 그런 만큼 ‘단호한 경고’의 시선으로
현질서를 응시하는 ‘민’이, 비록 당장에 적극적으로 ‘근대적’ 정치변혁을 추동하고 있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천하의 인심’을 떠나게 할 자의적 통치나 폭력을 거듭 목도하게 된다면,
‘민의 의향’에 반한 통치에 대한 ‘경고’의 수준을 높여가거나 더 나아가서는 그 반민적(反
民的) 통치에 대한 저항을 지지하거나 그 저항을 조장할 주체로 변모해가지 않겠는가.
그런데 되돌아보면, 에도시대는 물론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아랫사람(下)’이던 ‘민’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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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까지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통치대상이자 동원대상으로만 간주되어온 수동적‧소극
적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만큼 국가‧정치의 본래적 목적에 대해 ‘민’의 입장에서 주
장‧요구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 동아시아 전근대의 역사적 경험을 감
안한다면, 진사이의 ‘천하공공의 도’는 종래의 이미지를 뛰어넘는 국가‧정치와 ‘민’에 대한
정치철학적 전환이 혁명적으로 표명된 것이었다. 그것도 일개 도시민에 지나지 않는 진사
이(‘民’) 자신의 자기인식과 주장으로서 제기되었고, 그만큼 동일한 정치사회적 지위에 속
한 ‘다른’ ‘민’들에게도 사상적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점에서 그 명제에 함축된 정치사상사
적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이러한 혁신성을 담은 민본주의를 ‘민주적 민본주의’라는 이름으로
가설적으로 붙여두고자 한다. 그 점이 앞서 인용한 ‘천하공공의 도’라는 명제에도, ‘천하의
천하’(『古学先生文集』)라는 명제에도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 진사이에
의해 ‘천하’는 특정 가문의 것도 특정 지배계층의 것도 아닌, ‘천하’ 만민의 ‘공유물’임이
‘민’의 입장에서 선언되었고, 그 위상에 걸맞게 취급되어야 할 것임이 강조되었다. 그만큼
국가‧정치의 존재이유에 대한 발상의 근원적 전환으로서 ‘근대’적 국가관 및 정치관에 대한
에도시대 ‘민’의 정치적 자각과 국가 및 통치세력에 대한 그 실현요구의 정당성을 이해하
기 시작했을 가능성 또한 내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마루야마가 제시한 ‘중간단계’적 진사이에서 ‘완성단계’ 소라이로의 ‘발전’이라
는 도식은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소라이에게 보이는 그 나름의 ‘안민(安民)’(마루야마
1995, 197)에 대한 관심을 민본주의적 측면이라 인정하여, 민본주의 성격에 있어서 진사이
에서 소라이로의 추이를 표현한다면, 그것은 진사이에게서 보이던 ‘민주성’의 명백한 ‘퇴
조’라 부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물어야 할 것은 소라이의 ‘작위’가 초래한 ‘의도하지 않았던 성과’(마루야마
1995, 309)만이 아니라, 그 “‘작위’의 논리에 의해 ‘자연’을 만들어내려고 한” ‘반동적’(마
루야마 1995, 352) 의도가 초래한 사상사적 의미와 정치사회적 의미에 대해서였다. 그 ‘반
동’성에 대해 단적으로 말하면, 진사이의 민본주의의 ‘민주성’ 주창에 대한 소라이의 반감
이 오히려 ‘대중적인 기반에서의 근대화’(마루야마 1995, 83)와 “시민적인 사회의 힘이 봉
건사회의 태내에서 순조롭게 성장하는 것을 방해”(마루야마 1995, 308)하는 것, 즉 ‘국민
주의’의 자연적 성장을 저해하는 커다란 정치사상적 장애로 이어졌다는 것, 적어도 민본주
의 측면에서 볼 때는 그러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마루야마의 사유양식론에 입각한 사상사적 발전 도식이 ‘지나칠 정도로’ 후
쿠자와의 유교 비판에 보이는 ‘탈아론’적 구도에 규정당하고 말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
다. 우연일지 모르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방향전환과 후쿠자와에 대한 경도가 시기적
으로 대개 일치한다.(平石 2004, 6) 그러한 후쿠자와와의 해후가 ‘일본정신주의’를 소리 높
이 외치던 파시즘의 폭주를 배경으로 전통적 사상자원에 대한 ‘편견’과 그것을 활용한 다
양한 전개에 대한 ‘무시’를 더 강하게 부추겼을지 모르겠다.
이를 뒤집어 보면, 마루야마가 그런 탈아론적 구도, 즉 ‘국민주의’ 형성의 불가능성과 유
교의 정비례 관계라는 편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만 있었다면, 그의 근대적 사유양식
의 출현에 대한 구상은 좀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좀 더 ‘대중적인 기반에서의 근
대화’(마루야마 1995, 83)에 주의를 기울이고, 더 나아가 동아시아 차원에서 일본의 ‘상대
적 진보성(비정체성)’(마루야마 1995, 83), 즉 ‘괄호가 처진 근대’(마루야마 1995, 83)의 우
위라는 목전의 현실을 좀 더 상대화할 수만 있었다면,5) ‘근대적 국민주의’ 형성으로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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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수 있는 진사이의 ‘민주적 민본주의’와 해후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크다.

Ⅳ. ‘역설적 정치이론’의 애로(隘路)와 활로(活路)
그런데 마루야마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특히 『연구』 제2장 말미에서, 소라이적 ‘작위’관
에 의거한 ‘근대적 사유양식’이 개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리나가의 그 발전적 계승을 제외
하고는 그 흐름이 그 이후의 역사에서 ‘근대적 국민주의’ 형성으로 순조롭게 이어지지 못
했음을 안타까운 어조로 확인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제3장에서는 문제관심이 ‘상식적인
의미’의 정치사상사적 궤도로 돌아가 아예 ‘근대적 국민주의’ 형성의 불가능성‧좌절에 시선
의 초점을 맞춰간 것으로 보인다.
제1장과 제2장이 주로 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상대적 진보성’에 초점이 두어졌다고 한다
면, 그에 비해 제3장에서는 유럽에 대한 일본의 ‘후진성’이 주된 논조였다. 이 점을 고려하
면, 그의 방향전환에서는 그 ‘후진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이른바 마루야마의 ‘중기’
이후에는, 사상사적 발전의 ‘또 다른’ 가능성을 그대로 둔 채, 새로운 사상사적 ‘발전’ 도식
의 구상보다는 오히려 역사적 ‘좌절’을 낳은 ‘병리’의 원인을 찾는 방향으로 경도되어간 것
은 그 때문이었다. 이는 “사상의 모티브가 완전히 역전”(大澤 1997, 85)된, 그 이후의 마
루야마에게 보이는 관심사 이행의 변곡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전환이 그리 순탄한 도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적어도 마루야마의 유교 이해
라는 측면에서 볼 때, ‘중기’ 이후의 그는 어쩌면 해석학적 동요를 경험하고 있었을지 모른
다. ‘중기’ 이후의 그의 주요 저술에는 그 흔적이라 할 만한 것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인
다.
무엇보다 눈에 띠는 것은 ‘중기’의 마루야마가 아시아의 전통적 사상자원에 대한 ‘편견’
과 그것을 활용한 다양한 전개에 대한 ‘무시’를 일단 비판적으로 의식하기 시작했다는 점
이다. 잘 알다시피 1960년에 발표된 논문 “충성과 반역”은 그 반대의 전형이다. 거기서 그
는 ‘초기’ 저술 『연구』에서 ‘분해‧해체’를 갈구했던 “주로 봉건적이고 전근대적인 요소를
근대적인 것으로 전용시키는 길”(大澤 1997, 89)을 모색하고 있다. 그 요소들의 정치사회
적 기능에 대해 이전과는 정반대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중기’는 『연
구』를 중심으로 한 “초기 근대주의와는 명확히 다르다.”(고바야시 2013, 327)
이러한 발상의 전환을 방법론적으로 승화시킨 것이 ‘역설적 정치이론’(고바야시 2013,
334)이라 부르는 접근시각일 것이다. “가능성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완결된 사상으로서,
혹은 사상의 실천적 결과로서는 ‘반동적’인 것 속에서도 ‘혁명적’인 계기를, 복종의 교설
속에서도 반역의 계기를, 체관(諦觀) 속에서도 능동적 계기를, 혹은 각각의 거꾸로를 찾아
가는 그런 사상사적 방법”(마루야마 1998a, 43) 말이다. 물론 “사상의 실천적 결과로서는
‘반동적’인 것 속에서도 ‘혁명적’인 계기를” 추출한다는 시각에는 『연구』에서의 소라이의
사례를 연상시키는 그 방법론적 연속성이 보이지만, ‘복종’이나 ‘체관’에서도 그 ‘능동적 계
기’를 발견한다는 의미 안에 포섭되는 형태로 서술되고 있어서 그 단절면에 대한 의식이
5) 물론 『硏究』의 세 논문의 집필시기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파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1940년대 초반이
라는 점을 감안하면, 마루야마에게 목전의 현실은 유럽에 대한 일본의 ‘후진성’이 더 크게 부각되고
있었을 것은 짐작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 앞서 지적한 것처럼 다른 한편의 아시아(중
국)에 대한 ‘상대적 진보성’ 의식 또한 여전히 강하게 살아남아 있었을 것이라는 점도 추측하기 어렵
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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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강하게 느껴진다. 각주 7번에서 언급하는 쇼난이나 쇼잔의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유교
적 세계상이나 그 범주에 대해 취했던 『연구』에서의 단순화, 즉 ‘정체성’의 상징으로 간주
하던 태도는 자취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적 세계상의 침투도 결코 단순히 ‘봉건적 충성’의 정태화, 고정화의 역할만을 연출했던 것은 아
니다. 오히려 일반적으로 …인간 또는 집단에 대한 충성… 그것과 구별되는 <원리에 대한 충성>을
가르쳤던 것은 역시 중국의 전통적 범주인 도(道) 또는 천도(天道) 관념이었다.(마루야마 1998b, 30)

그뿐만이 아니다. 유교적 ‘공’ 관념 역시 새롭게 재해석된다. “‘천하위공(天下爲公)’ ‘천
하는 천하의 천하다’라는 식의 관념이 …구체적인 지배관계를 넘어선 규범적 제약으로 암
암리에 작용하고 있던 것 역시 숨길 수 없는 사실”(마루야마 1998b, 32)이라 하여, “초기
마루야마의 공사 분열 논의에서, 전통적 공 개념으로부터의 해방과 변용이 근대적 사유의
특색으로 여겨지고 있던 데 비해, 이들에서 전통적인 공 개념 자체가 근대화 과정에서 수
행한 적극적인 의미에 주목”(고바야시 2013, 328)한다. 더 나아가 유덕자군주(有德者君主)
사상이라든지 폭군방벌의 혁명론(마루야마 1998b, 31)까지 시야에 넣고 있다. 마찬가지로
‘중기’ 저술 “일본의 사상”에는 “‘천하는 천하의 천하다’라는 막번제에 내재한 ‘민정(民政)’
관념”(마루야마 1998a, 95)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마루야마 자신도 의식하는 일본 기독
교도에 대한 막부의 무자비한 탄압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 또한 ‘초기’ 저술 『연구』
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규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기’ 마루야마에는 흥미로운 부분이 존재한다. 앞서 논술했던 진사이의
‘천하공공의 도’나 ‘폭군방벌의 혁명론’, ‘천하의 천하’에 대해서는 ‘침묵’했던 그가 ‘중기’
에는 태도를 정반대로 역전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만큼, 그런 역전이 어떻게 초래된
것일까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앞서 지적한 것처럼 후쿠자와
의 유교 비판에 보이는 ‘탈아론’적 구도에 심각하게 규정당했던 지난 날의 그 자신에 대한,
명시적이지는 않지만 명확한 부정으로 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6)
다른 한편, “충성과 반역”에 보이는 유교 이해에 대한 선회와는 대조적으로, 거의 동일
한 시기에 ‘후기’의 주요 문제의식이라 할 만한 이른바 ‘고층론(古層論)’, 즉 일본의 ‘역사
의식‧정치의식‧윤리의식’에 있어서 ‘좌표축’(마루야마 1998a, 55) 혹은 ‘보편 의식’의 형성
을 끊임없이 제약하는 전통으로서의 ‘집요저음’과 연관된 맹아적 저술들이 등장하고 있다.
1961년에 출간된 『일본의 사상』의 주요논문, 즉 제1장 “일본의 사상”이나 제4장 “‘이다’라
는 것과 ‘하다’라는 것”이 대표적이다.
6)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첫째, 역시 중국에 대한 『연구』에서의 ‘정체성’(후진성) 규정
으로부터 중국의 ‘상대적 진보성’에 대한 실감으로의 변화, 즉 앞서 언급한 중국의 ‘대중적 기반에서
의 근대화’에 대한 인정과 함께 ‘오늘날은 실로 거꾸로의 대비’(마루야마 1995, 83)라는 실감의 변화
가 그 촉매제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중국의 사회주의가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에게서 중국 ‘정체성’론이라는 편견의 해소가 동시에 유교에 대한 편견 해소
를 동반하여, “바깥의 그런 것들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안에 있는 것’이 바깥의 것들을 그다
지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변질되어 있었기 때문”(마루야마 1995, 321)이라고 생각
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둘째, 『연구』 제3장의 ‘전기적’ 국민주의론에서 다룬 해방론자‧부국강
병론자‧존황양이론자들과는 다른 타입의 유학자, 즉 유교적 세계상의 카테고리를 사상적으로 순화하여
그 범주의 재해석을 통해 근대 서구사상을 수용해간 요코이 쇼난(橫井小楠), 주자학적 ‘궁리(窮理)’라
는 범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근대적 자연과학을 수용해간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등과의 해후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들의 사례를 통해 유교적 세계상이나 범주도 활용방법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긍정적 가능성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 13 –

그런데 거기서도 유교는 유럽의 ‘자연법 사상’(마루야마 1998a, 94)과 유사한 위치를 부
여받고 있는 것이 눈에 띤다. 그러한 재평가는 오히려 ‘보편 의식의 형성을 제약하는 전통’
에 대항하는 주체 형성의 이념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자연법적 규범’(마루야마 1998b,
32)으로서 유교를 재평가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극의 지점에서 일본주자학의 ‘일본적인 특성’을 언급하는 대목도 본고의 주
제와 관련해서 흥미롭다. 마루야마는 “영어판 저자서문”에서 『연구』에서의 주자학 이해가
일본주자학이라는 ‘필터’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문제와 함께 그 ‘일본적인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점을 자기비판하면서, 중국의 ‘순수한’ 주자학과는 달리 에도시대의 주자학이 이미
‘수정주의적’ 궤도변화를 거쳤으며, 그 궤도변화의 요인으로서 ‘집요저음’을 문제시하는, 마
루야마 자신의 ‘후기’ 저술 “역사의식의 고층”을 각주에서 언급(마루야마 1995, 73)하고 있
다. 거기서는 ‘규범으로서의 유교와 그것을 일본적으로 특수화시키는 제약으로서의 집요저
음의 전통’이라는 ‘중기’의 구도 변화가 전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데, 그 변화된 구도는
『硏究』에서의 유교에 대한 편견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보편 의식’의 착근(着根)과 성장을
가로막는 ‘집요저음’의 전통에 의해 ‘수정주의적’으로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주자학의 정
착이 필요했음을 시사하는 뉘앙스조차 풍기는 것이기 때문이다.7)
그렇다면, 그가 ‘초기’의 『연구』에서 크게 주목했던, 이른바 ‘고학파’의 시도와 주자학과
의 사이에는 ‘근대성’으로 구분지을 만한 ‘발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진사이나 소
라이가 주자학을 비판하면서 부각시킨 ‘본래의 유학’(古學)과 거기서 발견한 ‘근대성’은 한
낱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을까? 어쩌면 ‘고학’의 대두조차 그런 부정적인 ‘일본화’의
현상으로 그는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일까? 이러한 예상되는 의문에 대한 『연구』 이후의
‘수정’된 답변이 결여된 채, 오히려 ‘중기’의 마루야마에는 『연구』에서의 분석 모두를 마치
부정하는 듯한 언급이 더 눈에 띠고, 그에 따라 그의 유교에 대한 입장을 애매모호하고 알
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8)
필자가 보기에 마루야마의 ‘사유양식’론에서 살려져야 할 긍정적 ‘가능성’이 그 안에 내
재된 ‘문제’의 비판과 함께 쓸려가버린 경우는 바로 이 부분, 즉 주자학의 역사적 위상에
대한 평가와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평가는 주자학과 ‘고학’의 차이, 특히
주자학과 공맹철학의 차이에 대한 재검토에 달려 있으며, 그것도 ‘역사적’ 근대에 대두되는
문제, 즉 ‘민’의 사회정치적 위상과 역할의 증대에 대한 시각의 문제와 연관이 깊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마루야마가 ‘본래의 유학’과 주자학을 구분하지 않은 채 양자
를 하나로, 그것도 유교를 주자학의 시각으로 일반화하는 현상을 문제화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진사이든 소라이든 주자학이 원래의 공자나 성인군주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 왜곡이
라는 것을 역설하면서, 그 발견을 위한 방법론과 그에 의한 성과를, 각각 ‘고의학’(古義學)
과 ‘고문사학’(古文辭學)’이라는 이름으로서 주자학과 구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루야마는 『연구』에서 일관되게 주자학을 유교와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교사상의 자기분해과정을 통한 근대의식의 성장을 사유방식의 변용”(마루야마
1995, 307)이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연구』에서의 사유양식론에 입각한 사상사
7) “영어판 저자서문”에서 마루야마는 퇴계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일본의 학계에서 조선사상사를 경
시해온 ‘맹점’을 비판하고 있는데, 그 강조의 배경에는 단순히 비교 및 영향관계의 차원만이 아니라,
‘순수한’ 주자학 전개의 역사에 대한 이러한 ‘중기’ 이후의 관심도 섞여 있을지 모른다.
8) 마루야마의 말년 저술에 가까운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에서 보이는 후쿠자와의 ‘탈아론’적 유교
비판‧이해에 대한 그의 공감, 그리고 『연구』 “해제”에 소개되어 있는 김용옥과의 대담(1989년 5월)에
서 미루어보면, 그의 말년의 유교관은 ‘중기’의 그것과 또 역시 달라진 느낌을 받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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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발전을 ‘유교사상의 자기분해과정’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에 의거하
여 엄밀하게 표현한다면, 그 분해과정은 ‘유교사상’ 그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소라이의
사상적 혁신성에 대해 “주자학의 연속적인 사유는 여기서 완전히 분해”(마루야마 1995,
233)되었다고 규정하는 것처럼, ‘주자학’에 대한 분해과정인 것이다. 적어도 진사이와 소라
이의 주관적 의도는 주자학과는 구분된 ‘본래의 유학’의 발견을 통해 사상적 혁신을 이루
었다는 확신이었고, 그것을 마루야마가 평가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에 대한
마루야마의 혼용은 『연구』 여기저기서 반복되고 있었다. “유교가 봉건사회의 가장 강력한
의식형태”(마루야마 1995, 308)라는 명제도,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복종을 모든 인륜의
기본에 두고, 군신‧부부‧장유와 같은 특수한 인간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비시키
며, 그것을 상하존비(上下尊卑)와 결합시켜, 그 엄중한 ‘구별’(別)을 주장하는 유교 도덕”
(마루야마 1995, 108)이라는 규정 또한 마찬가지다.9)
그러나 적어도 진사이의 ‘오륜’은 상위자와 하위자의 ‘엄중한 구별’과 상위자에 대한 하
위자의 일방적 ‘복종’을 규정한 것이 아니다. 상위자의 ‘인애’와 ‘덕성’을 우선적으로 요구
하고(『童子問』), 앞서 언급한 것처럼 통치자에게는 ‘민의 의향에 따라 통치하라’는 주장과
함께 그에 반하는 ‘반민적’(反民的) 통치에 대해서는 순종할 수 없음을 천명한 주장이 담긴
것이다. ‘오륜’이라는 동일개념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진사이의 그것은 ‘봉건적’
함의를 완전히 배제하고 오히려 정반대 방향으로 환골탈태시키고 있다고 할 만한 것이다.
그리고 진사이는 이러한 ‘민주적 민본주의’를 공자와 맹자에 의해 전개된 ‘본래의 유학’,
즉 ‘공맹철학’의 취지라고 재정의하면서, 이를 외면한 채 ‘리기’(理氣)의 세계관 혹은 “음양
(陰陽)이라는 자연계의 범주를 사회관계로 끌어들여”(마루야마 1995, 337) 상위자와 하위
자, 치자층과 피치자층을 구분하는 주자학과 구별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특히 『연구』 제2장에서 제기된 ‘자연’적 질서관으로부터 ‘작위’적 질서관
으로의 전환을 ‘근대성’의 징표로 파악하는 시각은 ‘역사적’ 근대를 이해하는 데에 여전히
중요한 징표다. 차별적 위계질서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는지 혹은 인간의 ‘의사’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사고하는지에 대한 입장을 구별하게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연구』 제3장에서 주제화하는 것처럼 그 ‘작위’적 질서관이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평에서
‘근대적 국민주의’ 형성에 기여할 수 있지를 묻는 시각이 결합되지 않으면 안 된다. 쇼군이
나 사무라이 지배계층에 한정된 ‘주체’화는 ‘근대적 국민주의’ 형성에 오히려 장애였음을
제3장에서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송학이 가지고 있는 배타성’(마루야마 1995, 267)이라는 규정과 함께
“주자학적 사유로부터는 …봉건사회의 자연적 질서관이 도출”(마루야마 1995, 346)된다는
『연구』에서의 명제는 여전히 ‘구조적 시점’(田尻 2012b, 15)에서의 분석적 유용성을 잃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마루야마가 『연구』에서 인용하는 것처럼, 메이지기 계몽사상가적 한학
9) 물론 마루야마도 ‘본래의 유학’과 그 이후의 것과의 차이에 대해 완전히 무시하고 있지는 않다. “유교
측에서도 전국시대로부터 진한시대에 걸친 전개과정에서 관학으로서의 적합성을 보다 높이기 위한 변
모가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마루야마 1995, 109)고 하면서, 그 성격의 차이에 대해, “전국
시대에는 유교의 ‘선왕의 도’가 실현되어야 할 이상이었던 만큼 …어느 정도까지 저항적인 성격을 띠
고 또 정치적=실천적인 색채도 현저했는데 반해, 이미 확립된 절대적인 왕조권위를 흔들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전제를 갖게 된 한대 이후의 유교가 저항적인 성격을 상실해버리고 일종의 ‘호교론적 교리
체계’로 변해버린 것”(마루야마 1995, 109)을 각주에서 지적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그러나 곧이어 그
런 변모도 “유교 그 자체에 처음부터 내재하고 있던 어떤 모멘트(예를 들면 계층적 질서유지를 위한
예(禮)의 주장, 왕위의 기초를 천명(天命)에 두는 것)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라 하여, 그
단절면보다는 연속면에 초점을 맞춰 그 차이를 상쇄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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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였던 니시무라 시게키(西村茂樹)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문제, 즉 “어떤 독립
적이고 시민적인 자유를 획득할 수 없는”(마루야마 1995, 108) 일방적 복종의 정신을 내면
화시키는, ‘근대적 국민주의’ 형성에 장애가 될 수밖에 없었던 ‘정신’적 문제를 해석하는
데에 여전히 중요한 시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유교의 도는 윗사람에게 유리하고 아랫사람에게 불리하며 윗사람에게는 권리만 있고 의무가 없는 것
같으며 아랫사람에게는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것과 같다. 국가의 질서를 정비하기 위해서는 이렇
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무겁고 가벼운 폐단이 있었던 것 같다.(마루야마 1995,
108)

막말기 주자학을 학습의 중심으로 삼은 번교에서 학문적 기초를 쌓은 니시무라 시게키의
위의 발언에서 ‘유교의 도’를 ‘주자학의 도’로 바꿔 읽기만 한다면, 주자학에 내포된 ‘정신’
적 문제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물론 주자학은 단순히 ‘정체성’의 철학이 아니다. 마루야마가 ‘중기’의 “충성과 반역”에
서 “‘군신‧주종의 의리’라는 ‘합리주의적’ 범주가 봉건적 계층제의 모든 레벨에 아로새겨졌
을 때 …결코 단순히 신하의 공손한 순종만을 일방적으로 의무지웠던 것은 아니며 동시에
‘군주’ 역시 어떤 보이지 않는 자연법적 규범에 구속된다는 사고방식도 사회적으로 정착하
게 되었다”(마루야마 1998b, 32)고 그 평가를 역전시키고 있는 것에는 일리가 있다. “주자
학자는 현상이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한 극도로 보수적으로 되지만, 현상이 올바르지 않다
고 생각하면 개인적 이해에 관계없이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단호한 반대자가 되기도 한
다. ‘쓸모없는 저항’이라는 생각 자체를 거부한다. 주자학자라고 해서 보수적·전통주의적이
라는 것은 오해다.”(渡辺 2010, 132)
그러나 주자학자들에 의한 그 ‘저항’도 혹은 ‘혁신’ 지향조차도 치자층과 피치자층의 절
대적 구분 하에 정치적, 경제적, 지적 권력이 치자층에 의해 독점되는 구조 안에서 벌어진
일이었음을 상기한다면, 그 현상을 곧바로 ‘근대적’인 그것과 연속적인 지평에서 논하는 것
은 일정한 유보를 필요로 한다. 특히 그 독점구조를 자연시‧당연시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문제는 앞서 제기한 동아시아에서의 근대를 전망함에 있어서 특히 ‘민’의 위상과 역할의
증대라는 현상에 대한 입장 차이와 맞물려 있음을 잊지말아야 한다. 물론 그 ‘저항’과 ‘혁
신’ 지향을 언제까지나 과소평가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사례를 보더라도 권
력의 ‘견제와 균형’에 대한 학습의 경험이나 관료 윤리의 확립 등에 내포된 의미는 작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면 동학(東學)에 대한 치자층의 부정적 반응에서 전형적으
로 드러나듯이 결국 ‘그들만의 리그’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근대적 방향성을 단순화하
면, 『연구』의 “영어판 저자서문”에서 개념화한 ‘관료적 국가주의’화에 가까운 ‘괄호가 처진
근대’에 머무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그 ‘관료적 국가주의’의 길은, 마루야
마가 『연구』 제3장에서 비판적으로 지적했듯이, 언젠가는 도래하게 될 ‘근대적 국민주의’
로의 탈피를 기다려야 하는 운명을 짊어진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로 이 유학과 주자학의 혼용 혹은 양자의 차이에 대한 무시 때문에,10) ‘중
기’ 이후 마루야마에게는 유교 이해를 둘러싼 사상적 동요와 함께 그의 ‘사유양식’론에서

10) 후쿠자와의 유교 이해에서의 ‘탈아론’적 구도도 그렇고, 위에서 인용한 니시무라 시게키도 주자학과
‘본래의 유학’ 혹은 공맹철학을 구분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마루야마의 혼용은 메이지기의
유교 이해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하는 한 측면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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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져야 할 긍정적 ‘가능성’을 경시하게 되는 결과가 초래된 것은 아니었을까. 역으로 그
차이에 대해 좀 더 면밀한 주의를 기울였다면, 주자학으로부터 탈주자학적인 흐름의 의미
를 재탐색하게 하고, 또한 소라이적인 경로와는 또 다른, 진사이적인 공맹철학에서 배태되
는 ‘민주적 민본주의’와의 해후도 가능하게 하는, 그런 ‘새로운’ 유교의 발견으로 나아가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때야말로 마루야마가 의도한 ‘방법으로서의 근대’(黒住 1996)도
그 빛을 발하여, 내재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였던 ‘근대적 국민주의’의 길에 대한 전망도 새
롭게 열리지 않았을까.

Ⅴ. 맺음말
마루야마는 전후에 일본 근대의 운명을 크게 바꾼 ‘획기’로서 ‘국체명징’운동을 꼽는다.
(苅部 2006, 64) 그런데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 흐름을 이끌었던 것은 마루야마가 동경제국
대학 법학부 1년생 학년말에 터진 ‘천황기관설’ 공격사건도 그에 못지 않은 획기적 의미를
띠는 분수령적 사건이었다. 잘 알다시피 ‘천황기관설’ 사건은 마루야마의 소속학부 교수를
역임한 헌법학자 미노베 다쓰키치(美濃部達吉)의 헌법학적 해석을 빌미로 삼아 파시즘세력
이 테러와 그 위협을 무기로 미노베 교수를 궁지에 몰아넣고 일본사회에서 그 입장의 전폐
를 주도해간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파문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본사회 전체를 ‘국
체’라는 심판대에 세워 일거에 전체주의적 분위기로 휘몰고 간 시발점과 같은 사건이었다.
‘국체명징’운동도 사실상 그 연장선상에서 출현한 것이었다.
당시 ‘천황기관설’은 학계는 물론이고 정부 및 언론계, 심지어 천황조차 인정하던(다치바
나 2008, 206) ‘상식’에 가까운 학설이었다. 그런 ‘상식’이 ‘국체’에 반하는 것으로 공격당
해 폐기되었고, 그 학설의 주창자로 지목된 ‘간접적’ 스승은 귀족원 의원직에서 사퇴하게
되었으며 거의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테러를 당해 총상을 입는다. 그러한 ‘비상식’이 ‘상식’
을 전복시켜 압도해갈 때, 동경제국대학 법학부 동료교수들은 테러의 위협 앞에 ‘저항’다운
저항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굴종적 침묵만이 흐르는 ‘회한’의 터널로 빠져든다. 그리

고 그 흐름은 일본사회 전체에 급속히 퍼져, 마침내는 ‘국체명징운동’과 ‘2.26사건’ 등을
거쳐 전체주의화로의 폭주를 너무도 맥없이 허용하게 되는 결말에 이른다.
이러한 때 청년 마루야마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특히 이 ‘천황기관설’ 사건과 관
련한 기록이 거의 없어 그 사정을 잘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근대적 국민
주의’ 형성을 둘러싼 일본사상사적 탐색이 적어도 파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연구』 단계에
서 ‘영혼의 구원’을 위한 ‘필사적 거점’ 확보의 교두보였다는 회고를 고려한다면, 특히 『연
구』 제1장 단계의 마루야마는 사건의 전개에 대한 비극적 결말을 충분히 예상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저자후기”에서 “일군만민적인 절대주의 사상의 평가에 있어서도 이 책
은 “매우 후했다”는 지적을 면치 못할 것”(마루야마 1995, 84)이라고 자기비판하는 대목에
서 느낄 수 있듯이, 적어도 『연구』 제1장을 집필할 때까지는 ‘관료적 국가주의’(마루야마
1995, 69)로부터 ‘근대적 국민주의’로의 전환에 따르는, 유럽사에서 보여진 격동과 희생의
험로는 그의 예상에서 아직은 희미한 ‘불안’ 정도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연구』 제2장 말
미부터 보이는 일본의 ‘근대적 국민주의’ 형성의 애로를 깊이 의식한 단계서부터 『연구』
제1장에 비치는 ‘안이한 기대’는 그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다.
이처럼 ‘근대적 국민주의’를 심각하게 의식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근대적’ 사유양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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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싼 접근시각은 보다 지식사회학적인 뿌리를 내린 사상사로서의 면모로 일신되는 양상
을 보인다. 이 점을 생각하면 할수록 마루야마가 ‘탈아론’적 구도, 즉 ‘국민주의’ 형성의 불
가능성과 유교의 정비례 관계라는 편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만 있었다면, 그의 근대
적 사유양식의 출현에 대한 구상은 좀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커진다. 앞서
언급했듯이 좀 더 ‘대중적인 기반에서의 근대화’(마루야마 1995, 83)에 주의를 기울이고,
더 나아가 동아시아 차원에서 일본의 ‘상대적 진보성(비정체성)’(마루야마 1995, 83), 즉
‘괄호가 처진 근대’(마루야마 1995, 83)의 우위라는 목전의 현실을 좀 더 상대화할 수만
있었다면, ‘근대적 국민주의’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 진사이의 ‘민주적 민본주의’와도 해
후했었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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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Maruyama’s Studies of the History of Tokugawa Political Thoughts and
the Problem of the Euro-centrism’s Fetters

This paper is to reconsider Masao Maruyama’s studies on the history of
Tokugawa political thoughts. Especially, I make an object of criticism in earnest
about the problem of his perspective’s swaying on Confucianism and the trap
by the specifying the viewpoint of ‘Mode of Thought’ in the context of Japanese
history.
That is why although the problem of the gap between his theory and the
historical facts was criticized by Maruyama’s self-criticism and many other
scholar’s critical studies, the two problems mentioned above were not analyzed
properly yet. Moreover, in an extension of the problem, the critical mind on the
other problem of distorting the historical facts on political thinkers was very
weak since then. And consequently the problem is not corrected completely yet,
thus I think the aftermath of the kink left by Maruyama’s studies on the history
of Tokugawa political thoughts have given the opportunity of life prolongation
to the prejudice of the two extremes, so-called Orientalism and Occiden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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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rounding the understanding on the civilization of East Asia and Confucianism
even today.

keyword: Masao Maruyama, history of Tokugawa political thoughts, Ogyu Sorai,
Ito Jinsai, problem of the Euro-centr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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