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후. 2015. “정당성은 빌려올 수 있는가?”『정치사상연구』(한국정치사상학회) 1

정당성은 빌려올 수 있는가*1)

이관후
서강대학교

이 연구는 ‘정당성은 빌려올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갖추고 있다. 본고는 이러한 준거적 타당성을 바탕으로
통해, 문화적 상대성의 관점에서 정당성(legitimacy) 개 정당성과 문화적 상대성의 관계를 분석하며, 정당성은
념의 특성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둔다. 본고는 정당성 개 개념적 특성상 빌려올 수 없다고 결론한다. 첫째, 정당
념이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정치사상의 비교연구에서 한 통치는 인민의 믿음(belief)에 기반을 둔다. 둘째, 이
유용한 준거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 정당성은 믿음은 다시 실천과 관습에 기초하면서 믿음 체계
모든 통치에서 가장 발본적이면서도 보편적인(radical (belief-system)를 형성한다. 셋째, 정당성은 특정하고
and universal concept) 개념이다. 둘째, 정당성은 민주 가시적이며 유의미한 인간들의 행위인 ‘삶의 방식’과 배
주의나 자유주의 등 근대 서구에서 발견・발전되어 온 타적 관계에 있으므로, 믿음 체계를 형성하는 정당성의
가치와 달리 개념적 중립성(conceptual neutrality)을 구성방식과 내용은 문화적으로 상이하다.
주제어: 정당성, 개념적 중립성, 믿음 체계, 실천, 관습

Ⅰ. 서론: 정치적 정당성과 문화
1. 정당성은 빌려올 수 있는가?
정치적 정당성은 교차 문화연구, 특히 탈서구중심적 비교정치사상 연구에서 핵심적 주제
다. 여기서 주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는 하나의 이론적 현상은 ‘빌려온 정당성(borrowed
legitimacy)’의 문제다. 빌려온 정당성 개념은 역사적 연원을 갖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대부분의 비서구 국가에서, 정치적 정당성은 서구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이들 나라 대부분-실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4S1A3A2043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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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전 세계 인간의 대부분이 살고 있는 나라들-은 현재 그 나라에서 수립된 민주적 정치제도
의 역사적, 이론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한 정치 제도와 헌법은 서구에서 이식된 것이다.
특히 70년대 이후 세 번째 민주주의의 물결에서는, 이전의 민주주의의 물결에서 탄생한 많은
서구 정치 제도와 이념이 근대화라는 형식을 통해 비서구로 이식되었다. 피터 윈치의 표현을
빌자면, 그러한 제도와 이념은 ‘외부자(aliens)’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Winch 1990, 51). 이러한
이식과정은 비교적 신속했고, 문화적 차이에 대한 고려는 제도의 보편성이라는 명제의 힘에 눌
려 작동하지 않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즉, 문화적 차이는 정치 발전과 관련이 없거
나, 장애물로 여겨지는 즉시 변화를 강요받아야 했다. 제도를 이식하는 사람도, 그것을 받아들
이는 사람도 기존의 고유한 가치와 정치 발전의 조화, 혹은 기존 가치와 양립 가능한 정치발전
이라는 발상을 거의 하지 않았다. 외부자에 의한 이러한 정치제도와 이념의 이식과정에서 정당
성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충분히 ‘발전된’ 것이므로 ‘정당한’ 것으로 인
식되었고, 많은 경우에 그러한 인식의 적정성에 대한 논쟁의 필요성조차 제기되지 않았다. 이
를 통해 이식된 정치 체제와 이념은 자동적으로 정당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여기에 중대한 오해, 혹은 착각이 있다는 것이 본고의 주장이다. 그것은 ‘제도의 이식과 더
불어 정당성이 이식되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정당성 자체가 빌려올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서 제기되는 것이다. 즉, 정치적 정당성이 바로 그 정치공동체에 살고 있는 사람들 자신
에 의해, 그들 자신의 문화, 가치, 신념, 규칙, 전통에 의해서만 수립되고 승인되는 개념이라면,
정치제도나 이념과 함께 정당성도 이식될 수 있는가를 묻는 질문은 그 자체로 무의미한 것이
된다. 본 연구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정치적 정당성 개념을 분석한다.1) 이를 위해 본고에서
는 비담, 피너, 오크쇼트, 비트겐슈타인, 흄, 베버, 파레크 등의 논의를 중심으로 정당성 개념을
재해석하고, 이것이 문화적 다양성을 다루는 정치사상 연구에서 갖는 함의를 논하고자 한다.

2. 왜 정당성이 문제인가?
본 연구가 정당성 개념에 특히 주목하는 이유는, 이 개념이 탈서구중심적 연구에서 비교 준
거가 가져야 할 개념적 중립성(conceptual neutrality)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 정치학은

1) 정치적 정당성과 관련하여, 현재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정당성을 법치국가적 합법성 혹은
제도적, 절차적 합리성과 동일시하는 한계가 나타나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 논문(신진욱 2014)은 정치학이 아
니라 사회학 분야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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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를 중심으로 형성 발전되어 왔으며, 여전히 그 구심력을 강하게 갖고 있다.2) 기실 보편적
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바람직한 정치 이념이나 가치들 대부분이 근대 서구에서 발견, 혹은
발명된 것들이다. 당장 우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정치적 가치들인 민주주의, 공화주의,
자유주의, 인권 등은 그 사상의 본원적 가치가 보편적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서, 번역어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개념이 확정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적 비토
종성은 상이한 문화적 전통을 가진 사회 간의 비교정치사상 연구에서 난제로 작동하고, 결과적
으로 민주주의 등의 비교 기준을 통한 탈서구중심적 연구는 ‘동화’ 혹은 ‘역전’이라는 두 개의 선
택적 전략을 벗어나기 어렵다.3)
이러한 경향은 동아시아 유교민주주의 담론이나 한국에서 서구사상의 수용과정에 대한 최
근 연구에서도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김성문(Kim 2014)은 동아시아와 한국이 서구와는 구분
되는 유교적 문화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내용과
실제가 서구와 일부 다를 수 있다는 관점을 옹호한다. 그는 유교민주주의 담론의 공동체주의적
성격을 비판하면서 민주주의에서 자유주의 개념이 중요하다고 보고, 롤즈의 합리적
(reasonable) 다원주의에 기초한 다원주의적 유교 민주주의를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에서
가장 핵심적인 ‘합리성(reasonableness)’이 어느 범주에서 어떤 기준에 의해 결정될지에 대해
서는 선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합리성’이 통치에서 왜 중요한 주제이고, 그것은 어떻게 규
정되고 형성되며 변화하는지에 대한 논의 자체는 생략되어 있는 것이다. 장동진은 서구에서 자
유주의의 사상적 기반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롤즈의 정의론이 한국에서 수용될 때, 문화적
주저성(cultural reluctance), 약한 개인주의와 권리 개념, 계약론적 발상과 구성주의의 낯섬, 도
덕과 정치의 분리 등으로 인해 상당한 어려움이 있다고 밝힌다(장동진 2014). 그럼에도 불구하
고 정의론이 여러 측면에서 한국정치에 기여할 수 있는 점이 있기 때문에, 일부 수용하여 실험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여전히 남겨진 문제는 정의론이 한국적 사상과
충돌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거나 되지 않는지, 그리고 정의론의 수용이 특히 한국정치사상에서

2) 이는 비단 담론 차원에서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프란시스 후쿠야마를 위시한 일단의
미국 비교정치학자들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벌이고 있는 ‘국가 만들기 실험’은 거의 아무런 이론적 제지
를 받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후쿠야마의 Nation-building(Fukuyama 2005)을 참조.
3) 이에 대해서는 강정인(2004)을 참조. 아시아적 가치 논쟁에서 헌팅턴과 리콴유를 모두 비판한 김대중(Kim, 1994)
은 동서양의 가치를 상호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양자의 공통점을 찾아내고 그것의 보편적 가치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과거에 비해 진일보한 관점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역시 자유민주주의라는 개념 내에서 동아시아 정치
와 문화의 관계를 사고했다는 점에서는, 서구중심적 개념을 통한 방법론이라는 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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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가 있는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두 연구는, 동서양 정치사상의 비교와 접목, 해
석과 적용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방법론에서는 민주주의나 다원주의, 정의(justice)와 같은 서
구중심적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와 달리 정치적 정당성은 권력, 지배, 통치 등과 더불어 정치학에서 가장 발본적인 개념
중 하나로서 시간적 공간적으로 중립성을 갖는다. 즉, 동서양의 다양한 시간대에서 통치가 존
재하는 모든 곳에서 정당성은 문제적 개념이다. 민주주의나 자유주의 같은 근대 서구기원의 개
념에 비해 문명적으로 훨씬 넓은 지리적 보편성을 띠는 것이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정당성’ 개
념을 중심으로 동서양 정치사상을 비교한 연구가 있다. 이상익 강정인(2004)의 동서양 정치
사상에 있어서 政治的 正當性의 비교 로, 이 논문은 서론에서 루소와 로크를 인용하면서 정치
적 정당성의 본질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연구에서 제시된 바로는 동의와 공동선(공공선)이 정
치적 정당성의 두 요소인데, 이 두 요소는 긴밀히 상호 의존적이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로크
의 주장을 따라 ‘정부가 공공선을 중대한 면에서 위반하거나 침해할 때 동의나 계약이 무효화’
된다는 것이 정당성의 핵심적 쟁점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므로, 이 연구는 정당성의 보다 근본적
원천을 사실상 ‘동의’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본고는 공공선을 위반한 것이 얼마
나 ‘중대한가’의 판단 주체와 기준의 문제를 중심에 놓는다. 두 번째로, 이상익 강정인의 연구
는 다양한 비교 기준 중에서 정당성을 주제로 동서양의 정치사상을 비교하고 있다는 데에 의미
를 두고, 정당성이라는 개념으로 비교할 때 특별히 어떠한 장점이 있는지를 별도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 반면 본고는 오히려 방법론적인 측면에 궁극적인 목적을 둔다.

Ⅱ. 본론
1. 정치적 정당성
1) 문화, 민주주의, 정당성

모든 통치는 정당성을 필요로 한다. 통치는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사이의 관계에
서 도출되는 개념이며, 정당성은 이 두 주체들 사이에서 필수적 개념이다. 정당성 없이 통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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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될 수 없다. 이러한 정당성의 필연성은 정치권력의 행사와 그에 대한 복종이라는 특정한
형태의 관계가 정치에서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4) 즉, 정당성 개념을 통해서만
통치라는 정치적 관계는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이러한 정당성 개념이 민주주의와 만나면 몇 가지 논쟁점이 발생한다. 우선 정당성과 민주
주의간의 위상의 문제를 꼽을 수 있다. 현대 정치에서 민주주의가 갖는 위상은 대단히 절대적
인 것처럼 보인다. 현 단계의 민주주의 체제가 갖는 불완전성에 대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유로 민주주의 자체의 폐기를 주장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주의와 정치
적 정당성 중에서 보다 근원적인 개념을 선택해야 한다면, 여기에 또한 이론의 여지가 거의 없
다. 정치에서 정당성은 민주주의보다 근본적이며 넒은 개념이다. 비민주적이면서도 정당한 통
치는 가능하다. 근대 이전에 존재한 대부분의 통치는 비민주적이었지만, 그 중에는 상당한 수
의 정당한 통치가 존재했다. 오늘날 민주주의가 가장 환영받는 정치 이념과 체계가 된 것은, 사
람들이 민주주의를 가장 정당한 체제로 여기기 때문이지, 그 이상의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
니다. 민주주의는 정치적 정당성과 달리 자기완결적 개념이 아니다.
현대의 대표제(representation) 정치에서 민주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이는 무엇보
다 선거제도의 다양성과 같은 제도의 상이성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
가 보다 발본적인 차원에 눈을 돌려보면 이처럼 상이한 제도의 발전은 그 공동체 성원이 그러
한 제도를 발생시키고 유지, 경장(更張)할 수 있는 특정한 조건과 행위 자체, 즉 문화적인 차이
에 근원한다. 즉, 한 사회의 성원들이 가진 특정한 사유와 삶의 방식이 민주주의의 개념과 형태
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제도의 수립과 운영에 다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5) 즉, 민주주의가
문화라는 조건에 의해 제한된다면, 그러한 문화적 조건은 정치적 정당성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
는다.
이러한 생각을 통해 본고가 주장하고자 하는 주요한 논지는 다음의 세 가지다. 첫째, 정당
성은 모든 통치에서 가장 필수적 개념이다. 둘째, 정당한 통치는 인민의 믿음(beliefs)에 기반을

4) 권력의 행사와 복종 이외에 다른 종류의 관계에서 정당성이 파생된다는 주장들도 있다. 우르비나티는 정당성이 국
가와 사회의 관계에서(Urbinati 2006), 페팃은 국가와 시민들간의 관계에서 정당성이 문제된다고 주장한다(Pettit
2012). 이러한 주장들은 정당성을 ‘관계’적 관점보다 ‘주체’적 관점에서 보면서, 권력의 작동과정에 주목한다. 다만
이 논문은 정치적 정당성의 실제적 작동과정보다는 개념의 형성과 특성을 문화적 상대성의 측면에서 탐구하는데
목적이 있으므로, 보다 추상성이 높은 관계적 관점을 취한다.
5) 물론 그 반대로 제도가 민주주의 개념에 대해, 나아가 삶의 사유와 방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뿐
만 아니라 여기에는 일정한 경로의존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발본적인 차원에서 보면, 제도 이전의 상태에서 어떠
한 제도가 발생하는 것이 논리적 인과성을 획득할 수 있다거나, 제도 이전의 모든 (문화를 포함하여) 것을 또한 제
도로 규정해야 한다면, 이러한 태도를 제도환원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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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다. 셋째, 이러한 정당성 개념은 문화적 상대성을 필연적으로 내포한다.6) 이를 근거로 본고
는, 정치적 정당성이 각각의 사회에서 서로 다른 ‘믿음 체계(belief-system)’에 의해 형성되며,
이 믿음 체계는 실천(practice)과 관습(custom)에 기반을 둔다고 결론할 것이다.7) 또한 이를 통
해 정당성 개념이 문화적 상대성과 관련하여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시론을 제시하
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2) 정당성: 정부의 권력 행사와 이에 복종할 의무가 있는 인민들 사이에 형성되는 경험적 규
범적 관계

정치권력이 행사 될 때 ‘정치적 정당성’이 필수적이라는 인식, 즉 일단 정치적 권력이 존재
하고 그것이 인간 공동체에서 통치의 형식 띠게 되면 그것에 특정한 규범적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의 역사에서 보편적인 것으로 보인다. 모든 통치는 정당성(legitimacy) 혹은
정당화(justification)를 필요로 한다.8) 그런데 왜 정당성이 통치에 필연적인가? 이는 통치가 단
순히 지배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 지배 권력에 대해 인민들이 맺고 있는 특정한 형태의 의무,
곧 복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통치에 대한 복종의 기반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법, 물리적 힘, 권위 등이 아니라 이와 구별되는 특정한 개념, 곧 정당성이다(Barker
1990, 4-5).
한 개인이나 그룹의 타인(들)에 대한 지배, 곧 권력의 실현은 모든 인간사회에서 나타나는
일반적 정치 현상이다. 그런데 정치권력이 존재하는 곳에는 필연적으로 대항 권력이 나타난다.

6) 본고에서 사용하고 있는 상대성과 상대주의의 차이에 대해서는, 윈치(Winch 2011[1958])의 사회과학의 빈곤에
서 박동천의 편역자 해제 22-30쪽을 참조.
7) 본고에서 practice는 ‘실천’으로 번역되었지만, 이 번역어로 뜻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말의 ‘실천’은
대체로 생각을 표현하는 단편적인 인간 행위를 지칭하는 반면, 이 글에서 소개되는 오크쇼트, 매킨타이어, 파레크
의 용법은 ‘집단적으로 반복되고 축적된 유의미한 인간행위’라는 의미에 가깝기 때문이다. practice의 개념을 더 잘
표현할 우리말을 찾는 것은, 후속 연구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8) 흔히 우리말에서 정당화는 정당하지 않은 것들까지도 ‘정당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고, 정당성은 ‘정당하다는 개
념’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러한 일반적인 이해는 정치사상적으로 보다 분명해질 필요가 있다. 시몬스(Simmons
1999)는 정당화(justification)와 정당성(legitimacy)을 이론적, 역사적으로 구분하면서, 정당화가 기존에 존재하는
국가 혹은 통치권력이 신민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개념이라면, 정당성은 국가와 통치권력의
수립이나 존재 자체에 구체적으로 신민의 동의가 있었는가 하는 것을 문제시하는 개념이라고 규정한다. 전자는 만
족스러운 재화의 공급이나 법에 의한 통치, 인신과 재산의 보호 등 납득할만한 수준의 서비스가 제공되는 것으로
달성될 수 있으며, 통치과정에 인민의 참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몬스는 이것은 역사적으로 홉스에서
완성된 개념이라고 보았다. 반면 정당성은 인민의 참여와 동의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으며, 역사적으로 로크에
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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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권력과 그 법에 대항하는 권력, 하나의 물리적 힘과 그에 대항하는 또 다른 물리적 혹은 비
(非) 물리적인 힘, 하나의 권위에 대항하는 새로운 권위, 혹은 새로운 권위 체계(탈권위라는 대
항개념까지를 포함한)의 등장과 같은 상황에서, 정당성이라는 개념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새로
운 힘과 제도가 여하한 방법을 통해서 기존의 것들을 몰아냈을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통
치’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바커(Barker)가 지적한대로 지배와 복종의
관계에서 단순히 권력이나 권위 이외의 개념이 정치에 본질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지배 권력은 곧 이를 대체하고자 하는 지배 블록 내의 다른 권력들이나, 아래로부터
피지배자에 의해 정당한 이유와 방식으로 도전 받을 수 있고, 바로 이러한 경우에 정당성은 문
제적 개념이 된다(Beetham 1991). 정당성이라는 개념이 없다면 정치는 단순히 지배권력의 획
득을 위한 물리적 대결에 불과하다. 정치에서 정당성이 문제적 개념이듯, 정당성을 통해서만
정치 역시 문제적 개념이 되는 것이다.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그 내용적 측면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이 문제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를 두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쉽게 떠 올릴 수 있는 것
은 베버적 전통을 따른 경험주의적 접근이다. 즉, 현존하는 특정한 통치 체제가 그 정치 공동체
의 구성원들에게 적절한 것으로 이해된다면, 이를 정당성의 근거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러한 관점은 대체로 경험적(empirical), 혹은 서술적(descriptive) 접근으로 분류되며, 이 때 그
정치체제는 믿음의 존재에 따라 정당성이 확정된다(Schaar 1989, 20; Beetham 1991, 6-11;
Peter 2009, 56-9).
그러나 정치적 정당성은 비단 경험주의적 접근 뿐 아니라 규범적(normative) 접근, 즉 도덕
이나 가치적 측면에서의 판단 역시 필요로 한다. 가령 한 정부의 문제 해결 능력이 인민들로부
터 충분히 정당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은, 그 인민들이 특정한 문제 해결의 방식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이 경우 해당 정치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특정한 규범적 인식에 따라, 같
은 방식과 수준의 정책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사회에서는 충분히 정당한 것으로, 다른 사회에서
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9) 또한 그 ‘문제의 해결’ 이전에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
한 공동의 인지 역시 필수적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레펠드는 정당성 개념 때문에 정치적 복종
은 규범적 요소를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들이 그 제도들을 실제로 정당하다고 생각
하든 않든 간에, 시민들은 그들을 통치하는 특정한 제도를 수용할만한 충분한 이유(good

9) 이것은 개념적으로 단순히 ‘정도’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정도’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질적인 차이로 현시될 수 있
는 경우는 적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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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sons)를 필요로 한다(Rehfeld 2005, 16)”고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개념적 분화는 시민들이 그들에 대한 통치의 정당성에 대해 ‘이유’를 갖
는 것과 ‘규범적으로 충분한 이유’를 갖는 것 간의 차이다(Bellamy and Weale, 2015). 이러한
차이는 통치나 정당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권위’ 개념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라즈는 “권위는
거기에 그것을 받아 들일만 한 충분한 이유가 있을 때 정당하다”고 지적하면서, 정당성의 ‘일반
적인 이유’들과 ‘보다 나은, 충분한, 최상의, 결정적인, 타당한, 주요한’ 이유들을 구분한다(Raz
1986, 29-54). 법치의 원리에 대해 연구해 온 하트 역시 “법을 포함한 실제적 권위들의 역할은
사람들이 권위에 복종할만한 충분한 이유를 확정하는 것”이라면서, ‘충분한 이유’라는 개념이
그러한 권위를 정당한 것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Hart 2012, 54-6). 즉, 권위와 법은 그 자체로
정당성의 기반이 될 수 없고, 그것들이 정당성의 기반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특정한 이유
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구분에서 우리는 정당성과 관련해 네 가지 요소, 혹은 영역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정당성을 구성하는 경험적, 규범적 조건과 이에 상응하는 필요, 충분조건이 그것이다.
예컨대, 하나의 정치적 권위가 인민의 복종을 이끌어 낼만한 ‘이유’를 가졌고 경험적 측면에서
그러한 관계가 관찰되고 인식될 경우, 우리는 이 정치적 권위가 정당성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킨
다고 말할 수 있다.10) 반면, 인민이 그러한 통치에 복종할만한 ‘충분한 이유’들을 규범적 차원에
서 발견할 수 있고 인민들이 이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을 경우, 우리는 충분조건이 충족되었다
고 판단할 수 있다. 그리고 통치와 인민의 복종은 어떤 이유에 의해서도 가능하지만, 인민은 그
러한 경우에도 보다 나은 이유, 더 타당한 이유를 요구할 수 있다.11) 그렇다면 정당성을 충족시
킬 수 있는 경험적, 규범적 조건은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되는가? 비담은 정당성이 다음과 같은
경우에 충족된다고 보았다.

사회와 권력이 정당하다고 여겨지는 규칙 혹은 동의(justifiable rules or consent)를 요구받는 곳에서,
그 권력이 정당한 규칙과 동의의 증거들에 따라 획득되고 행사될 때, 우리는 그 통치가 정의롭거나 정
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Beetham 1991, 3).

비담에 따르면, 한 정치 공동체에 정당하다고 여겨질 만한 통치의 규칙이 존재한다면, 우리

10) 라즈(Raz 1986)는 이러한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정당성과 구별되는 ‘귄위’ 개념이 필요하다고 본다.
11) 이 논의는 비담의 ‘정당성은 본질적으로 전부 혹은 전무의 개념일 수 없다(Beetham 1991)’는 주장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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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이것이 정당성의 경험적 증거라고 주장할 수 있고, 이 경우 정부는 사람들에게 정치권력을
행사할 이유들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12) 그러나 이 때 이 규칙이 어느 정도로 정당한가의
여부가 확정할만한 구체적인 행위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통치가 인민에게
‘충분한 이유’를 제공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 경우 통치 권력의 정당성을 완성하는
것은 인지 가능한 집단적 인간 행위이며, 이 행위는 규범적 조건 뿐 아니라 경험적 조건 역시
층족시키게 된다.13) 즉, 한 정치공동체에서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특정 인간 행위에 의해 인민
의 복종을 확정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들이 확인될 때, 우리는 이 통치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시간적 맥락에서 본다면, 인민의 복종이 정치적 의무로 인지되는 순간 정치적 정당성이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당성은 통치자가 정치적 힘을 행사할 때 그에 복종할 의무가 있는
인민들과 정부 사이에서 경험적 규범적으로 형성되는 필수적 관계로 정의될 수 있다. 바로 이
러한 관계에서 “정당성이야말로 정치권력과 복종 사이에 발생하는 근본적인 정치적 문제를 해
결하는 유일한 개념(Coicaud 2002, 10)”이라는 이해가 도출된다.
이러한 정의에서 명확히 드러나는 것은 두 가지 행위와 두 주체다. 행위는 정치권력의 행사
와 복종이며, 두 주체는 정부와 인민이다. 그런데 일반의 선입견과 달리, 정당성의 핵심적 문제
는 정치권력의 행사나 이에 대한 복종이라는 행위보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명확해 보이는 주체
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통치, 즉 권력 행사의 방식과 이에 대한 인민의 복종은 현대 사회에서
법과 제도들을 통해 확립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예상치 않은 모호성이 드러나는 경우에
도 법과 제도의 근간인 헌법, 그리고 헌법에 대한 해석을 통해 대부분 (잠정적으로) 해결된다.
그런데 권력 행사의 주체와 복종의 대상, 그리고 권력 행사의 대상과 복종의 주체는 본질적으
로 헌법의 문제를 벗어나는 지점에서 논의가 시작되고 종결되기 때문에 막상 문제가 발생할 경
우 헌법적 틀 내에서 해결되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주체의 불확정성(uncertainty) 문제가 있다.
가령 서구에서 발생한 근대 초의 주요한 세 민주주의 혁명은 모두 통치의 주체와 대상을 두
고 벌어진 사건이었다. 영국 혁명과 프랑스 혁명은 복종의 주체들이 기존에 존재하던 ‘합법지
배’의 형식을 전복시키는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영국의 명예혁명은 지배의 주체를 왕으로
둔 가운데 문제를 해결하려던 시도를 중단하고, 지배의 주체를 왕에서 의회로 교체시켰다. 프

12) 이러한 의미에서 쏘이꼬는 정당성을 ‘통치할 권리(right to govern)’로 간단히 정의한다(Coidcaud 2002, 10-24)
13) 여기서 비담의 논의를 해석함에 있어 ‘동의’라는 표현은 의도적으로 제외되었다. 정치적 정당성의 절차적 근거로
‘동의’는 너무나 협소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비단 동의뿐 아니라, 법(law), 토의(deliberation), 정의(justice) 역시 정
당성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개념이라는 것이 본고의 입장이다. 이를 위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한데, 이는 본
고에서 해결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고 다만 그 암시만을 제공하고자 한다.

정당성은 빌려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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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스의 경우 왕정 자체를 부정하고 폐지함으로써 지배 주체의 교체가 가장 명확히 드러났다.
미국 혁명은 지배의 주체가 식민지 모국에서 독립 자치 연방으로 교체되었고, 그 과정에서 제
시된 원칙들은 이후 제국주의와 식민통치 일반에서 통치의 대상 및 복종의 주체에 대한 정당성
의 문제를 야기하는 시초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통치의 주체로 확인받고자 하는 독재자의 인
정투쟁, 통치의 대상이자 복종의 주체이기를 거부하는 인민의 저항은 헌정질서 안에서 일어나
는 합법독재의 전형적인 특성과 그에 대한 항거의 모습이다.
기실 정당성의 문제에서 지배와 복종의 주체 문제는 이론적으로도 근대 초기부터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었다. 로크와 루쏘가 사회 계약을 위반한 정부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한 저항권과 전복권을 옹호한 반면, 홉스와 칸트는 상대적으로 통치의 주체로서 국가(이성)
의 절대성을 강조했다. 후자의 논리는 단순히 왕권과 국가의 신성성을 강조했다기보다는, 국가
가 통치의 주체에서 끌어내려질 경우 발생하게 되는 상황, 즉 내전, 무정부상황, 주변 강대국에
의한 식민지화 등을 염두에 둔 현실주의적 보수주의의 입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홉스
와 칸트의 보수적 견해가 사회계약론에 의해 완전히 해소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이유는, 지난
반세기동안 한국에서 그러했듯이, 아직도 많은 국가에서 내전의 방지, 질서의 유지, 외부의 적
으로부터의 위협 등을 이유로 권위주의적 통치가 어느 정도의 정당성 위에서 유지되고 있기 때
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보다 세련된 이론들이 요구되는데, 통치의 주체, 복
종의 대상을 단지 정부가 아니라 보다 발본적인 차원에서 ‘시민정부’라고 보는 견해가 그것이
다. 이에 따르면, 정당성이란 단지 “인민이 특정한 권위와 제도에 대해 규범적으로 복종할 가치
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의 문제를 넘어서, 장차 그들이 동료 시민들에 의해 받게 될 통제에 대해
믿음을 갖고 있는가”의 문제다(Føllesdal 2010, 28).
이를 통해 현대 정치에서 정치적 정당성이 가진 몇 가지 새로운 특성이 발견된다. 먼저, 정
당성 문제의 핵심은 권력의 행사와 이에 대한 복종의 주체이며, 현대 사회에서 정부와 국가보
다는 시민이 통치와 복종 모두에서 중요한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푈레스달의 주장은 특히 대표제 민주주의에서, 복종의 대상으로서의 정부가 정당성을 획득하
려면 그 정부가 진정한 의미에서 시민의 대표들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배와 복종의 주체에 대한 이러한 다양한 이론적 변화에서 확인되는 것
은, 정치적 정당성의 의미와 조건, 함의가 그것을 형성하고 받아들이는 인민의 의사(people’s
mind)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화해 왔다는 것이다. 즉, 정당성 문제의 핵심인, 지배와 복종의 주
체라는 개념은 언제나 전복가능하고 또 전복되어 왔다. 통치가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지
배와 복종, 그리고 그 두 행위의 주체가 경험적, 규범적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하지만, 이 모든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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념들의 내용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거기에는 공통된 개념(concept)이 있을 뿐, 이 개념들에 대
한 해석(conceptions)은 늘 상대적이다.
이러한 관계적 설명이 정당성에 대한 정의(定義)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가 발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당성에 대한 기존의 일반적 정의는 현존하는 통치 권력의 여부, 법, 동의, 토
의(절차), 정의의 실현 등 상당히 구체적인 현상과 개념들을 근거로 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본고의 정당성에 대한 정의는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설명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본고의 정의
는 그 자체로, 정당성에 대한 정의가 기존의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하는데 그 주
요한 의미와 목적이 있다. 곧, 이상에서 제기된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들 중 어느 하나가 모든
사회에서 압도적 지위를 차지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다양한 근거들이 정당성의 충분한 이유
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우리는 정치적 정당성에 대해 관계론적 정의를 통
해 그 틀(frame)을 규정할 수 있을 뿐이지, 그 내용(contents)을 확정할 수 없다. 이것을 정당성
의 근거에 대한 불확정성의 원리(principle of uncertainty)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인민의 의사가 어떠한 형식과 조건을 통해 확정되고 변화될 수 있는지
를 알아보는 것이다.

2. 정당성과 문화
1) 정당성은 인민이 공유하고 있는 믿음(beliefs)에 기반을 둔다14)

통치의 정당화에서 인민의 ‘믿음’은 핵심적 요소다. 베버는 정당성을 권력에 대한 인민의 믿
음이라고 정의하고, 사회과학의 주요한 과제는 이러한 인민들의 믿음에 대한 설명이라고 주장
했다. 비담 역시 정당성은 ‘공유된 믿음(shared beliefs)’ 에 의해 확정되며 관습적 통제와 동의
의 표현에 의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Beetham 1991, 31).
그런데 이 ‘믿음’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시공간에서 변화무쌍하다.

14) belief는 언뜻 ‘신뢰’로 번역되는 것이 적절할 듯 보인다. 그러나 ‘믿는다’고 하는 행위 전체가 신뢰로 적절히 이해
되기는 어렵다. 믿는다는 것은 신뢰(trust or confidence)보다 훨씬 넓고 광범위한 개념이다. 이 논문에서 사용되는
맥락에서 보더라도, 인류사에서 오랫동안 종교적 권위가 정당성의 기반이 되었던 점을 상기하면, 우리가 신을 믿
는다고 하는 것과 신을 신뢰한다고 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비담과 피너 역시
trust-system이 아니라 belief-system이라는 표현을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적절한 번역어는 ‘신뢰’와
‘신뢰체계’가 아니라 ‘믿음’과 ‘믿음체계’일 것이다.

정당성은 빌려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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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믿음이 다수의 인민으로부터 나오고 또한 공유되어야 한다면, 이러한 종류의 믿음에
정치적 정당성이 기초한다는 것은 개념적으로 가능할지 모르나, 실제 현상의 이해에서 실효성
을 담보하기는 어렵다.15) 이러한 설명은 현존하는 정치체제에 대한 정당화의 수단으로 이용될
가능성이 적지 않으며, 특히 정부의 역할과 기능에 있어 복합성이 증가한 현대에 들어 그 가능
성이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Schaar 1989, 22-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민의 믿음이 여전히 유
일한 정당성의 근거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면, 여기서 필요한 것은 체계화된 형태의 믿음,
곧 믿음의 체계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역사학자 피너(Finer)는 정치적 정당성이 ‘믿음 체계
(belief-system)’에 기초하고 있다고 말한다.

통치자는 정당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의 권위를 지속할 수 없으며, 그들은 믿음 체계(belief-system)에
의해 정당화된다(Finer 1999, 28-9).

그는 모든 통치가 정권의 안정과 유지를 위해 정치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사회 계층에 부
합하는 정치 제도를 필요로 하며, 이는 곧 믿음 체계로서의 구속력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러한 유형의 믿음 체계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으나 증명될 수 있는 명제’, 즉 ‘모든 사람은 동등
하게 창조되었다’는 류의 명제로부터 출현한다(Finer 1999, 29). 그러나 정치철학보다는 역사
에 초점을 맞추어서인지, 그는 이 믿음 체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라고 분명히 정의를 내리
지는 않았다. 따라서 피너의 믿음 체계 개념을 그의 저작과 다른 사상가들의 도움을 통해 재구
성할 필요가 있다.16)
우선 분명한 것은 믿음 체계가 권위, 통치, 권력과 같은 개념들과 구분되는 믿음의 조합적
형태라는 것이다. 권위 등의 정치 개념들은, 정당성이라는 인민들과 믿음 체계 간에 형성된 보
다 발본적인 관계의 바탕 위에서 발현된 일종의 현상이며, 이를 통해서만 개념적 실재와 실체
적 유용성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권위, 통치, 정치권력은 통치할 권리와 복종할 의무를 가능하
게 하는 인민의 믿음과 그것의 조직된 형태 없이는 존재할 수 없거나 무의미하다. 따라서 이 믿
음 체계에 대한 인민의 자각이 없이는 사실상 어떠한 형태의 정치도 불가능한 것이다. 바로 이

15) 신진욱은 베버의 정당성 이론에 대해 논하면서 이에 대해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라는 일차원적 접근에 의존하여
그의 지배유형론을 적용하는 것만으로는 정당성을 둘러싼 개인, 집단, 조직, 제도의 복잡한 관계구조와 상호작용
을 분석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신진욱 2014, 37). 물론 그 역시, 정당성 개념이 ‘믿음’을 떠나서 논의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16) 이 논의의 출발은 피너의 책 1권(Finer 1999)의 서문에 해당하는 ‘개념적 프롤로그(The Conceptual Prologue)’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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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한 맥락에서 베버, 비담, 피너 등은 정당성이 인민의 믿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통치란 인민의 공유된 믿음에 기초하며, 이 공유된 믿음은 ‘믿음 체계’의 형태로 조직화
되고, 이 믿음 체계가 정당성 개념의 근간을 형성하며, 이는 각각의 정치 공동체에서 종교, 사
상, 신화, 군사력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만한 것은, 이러한 믿음 체계가 그것을 구성하는 종교와 사상 등은 물론 인민
의 감정과도 구분된다는 점이다. 정치적 요소를 가져야 한다는 점, 그리고 체계화 조직화의 과
정을 거친다는 두 가지 점에서 정당성의 근간으로서의 믿음 체계는 단순하고 즉흥적인 지지나
감정들과 구분된다. 믿음 체계는 안정성과 지속성을 확보해야 하며, 대부분 세대를 넘어 존속,
유지, 발전한다. 가령 종교가 믿음 체계의 바탕, 내용, 외형이 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정치적 맥
락에서 정당성 개념으로 유의미하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종교적인 것과 다른 세속적인 위계질
서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즉, 통치를 위한 권위가 믿음 체계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후자는 전
자보다 정치적으로 강력하며, 바로 이점에서 종교적 권위와 종교에 기반을 둔 믿음 체계는 구
분된다. 가령 유럽의 역사를 크게 종교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의 대결로 이해하고, 중세를 종교
적 권위의 승리의 시대로, 르네상스 이후를 세속적 권위가 승리한 시기로 이해하는 경우가 적
지 않다. 그러나 정당성의 관점에 보면, 지배와 복종의 관계를 도외시하고 단순히 지배 권력 간
의 힘의 대결에 초점을 둔 이러한 분석은 정치의 핵심을 놓친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통치는 단
순히 지배 권력의 행사뿐만 아니라 복종의 의무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인민의 믿음, 그리고 그
것의 체계화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대부분의 인간 역사에서 종교에 바탕을 둔 믿음 체계는 인간과 우주의 관계에서
출발하는 정치적 정당성을 창출했다. 통치자는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매개하는 능력을 통해 이
믿음 체계 속에서 정치적 정당성을 누렸다. 따라서 정치적 정당성과 믿음 체계의 관점에서 서
양의 중세와 근대를 이해하면, 중세에는 인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믿음 체계가 종교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세속적 통치 권위가 충분한 정당성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루터가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사제”라고 선언한 이후, 종교에 바탕을 둔 이 믿음 체계는 서
서히 변화하거나 붕괴하였고, 근대 민주주의 혁명기에는 기독교로부터 보다 자유롭고 추상성
이 높은 차원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근대 초기에는 ‘천부인권’등의 형태로 그 영향력
이 남아있었고, 오늘날에도 미국에서 대통령이 성서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며 낙태와 진화론
교육 등 종교적 쟁점이 정치 쟁점화 되듯이, 서양의 믿음 체계가 완전히 중세적 형태에서 벗어
났다고 선언하기는 이르다. 그러나 피너의 말대로, 전근대에 존재한 모든 믿음 체계가 종교에
만 기초한 것은 아니다. 특히 동양에서 유학에 기초한 믿음 체계는, 전 근대에서 종교와 믿음

정당성은 빌려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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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계가 개념적으로 구분되었고 구분되어야 한다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피너는 이에 대해
“유학은 종교가 아니면서도 서양에서 중세 로마 카톨릭이 믿음 체계와 관련해 수행한 모든 역
할을 담당했다”고 평가한다(Finer 1999, 28-30).
따라서 정치를 권력의 행사와 그것이 복종의 의무와 맺고 있는 관계, 곧 정당성 개념에서
이해한다면, 바로 이 특정한 개념, ‘믿음 체계’에 근거해서, 전근대 사회에서는 많은 경우 원초
적 불평등과 사회적 위계가 충분히 정당한 것으로 수용되었고, 근대사회에서는 그것이 점차 부
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현대에는 물신화된 자본주의가 새롭게 ‘믿음 체계’에 영향을 주
면서, 경제적 부와 그것의 세습을 통한 사회적 위계가 용인되거나, 사실상 상당 부분 인간이 통
제할 수 없는 능력에 기반을 둔 기회의 평등이 새로운 원리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정당성 개념을 다시 확정해 보면, 정당성은 특정한 집단적 인간 행위를
통해 인지되고, 공유된 믿음을 통해 확정되며, 이 믿음이 안정성과 지속성을 담보할 때 ‘믿음 체
계’로 정립될 수 있다. 이 믿음 체계 하에서 정치권력은 권위의 유지와 확장이라는 자체의 속성
을 발현할 수 있다. 또한 이 믿음 체계 위에서 정치적 안정은 통치-복종 관계의 수용을 뒷받침
하는 경험적 증거가 되며, 이 경험적 증거 안에서 인민이 수용할만한 종교적, 법적, 전통적, 도
덕적 자원들은 ‘충분한 이유’를 위한 규범적 기반의 잠재적 후보자들이 된다.

2) 인민의 믿음은 실천(practice)과 관습(custom) 안에서만 발현 인지될 수 있으며, 믿음 체계
는 고유한 가치와 이념에 기반을 둔다

비담에 따르면 정치적 정당성은 프레임과 그것을 채우는 콘텐츠로 구성되는 논리적 구조를
가진다.17) 모든 정치 공동체에서 정치적 정당성의 프레임은 동일하지만, 그 프레임을 구성하
는 콘텐츠는 상이하다. 즉, 모든 정치공동체에 ‘믿음 체계’가 존재하지만, 그 체계를 구성하는
인민의 ‘믿음’의 기반, 형태, 속성은 다른 것이다. 달리 말하면, 믿음 체계의 형식과 내용이 정확
히 일치하는 두 사회를 찾아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통된 프레임과 상대성을 갖는 콘텐츠라는 정당성의 논리 구조는 현대 정치에서 ‘민주적
정당성’을 통해 잘 이해될 수 있다. ‘현대정치에서는 민주주의를 통해서만 정치적 정당성이 확

17) 비담은 정당성의 체계를 도식화해서 나타냈고(Beetham 1991, 72), 이 도식에서 그가 사용한 용어는 ‘권위적 자원
(authoritative source)’과 ‘정당한 요소(justifiable content)’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이를 변형하여 공통된 개념적 기
반으로서의 프레임과 이를 구성하는 다양한 문화적 변이들을 통해 믿음 체계라는 개념을 설명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를 프레임과 내용으로 재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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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될 수 있다’는 명제가 성립한다면, 이 민주주의는 우선 관념(idea)뿐만 아니라 하나의 체계
(system)로 구축되어야 하며, 이 때 민주주의는 정치적 정당성의 프레임이 되고, 이 프레임은
저 명제를 받아들이는 정치공체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런데 프레임으로서의 민주주의가
유의미하려면, 이 프레임이 적절한 내용으로 채워져야 한다. 이 경우 그 콘텐츠는 직접적으로
민주적인 내용을 담고 있거나 적어도 일맥상통한 측면이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요건을
충족하면서도 각각의 사회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민주적 요소들은 반드시 일치할 필요가
없고, 일치하기 어렵다. 이것은 각 정치공동체의 공간적, 시간적 조건과 주체의 상이성에 기인
한다. 이를테면 민주주의가 정치적 평등을 필요조건으로 요구하더라도, 정치적 평등을 달성하
는 데에는 다양한 방법들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과연 무엇이 정치적 평등인가 하는 것 역시 민
주주의 안에서도 다양한 이견이 존재할 수 있다. 또한 현대 민주주의에는 다양한 형태의 대표
제가 존재하고, 이에 따라 민주적으로 정당하지만 서로 다른 정부 형태, 정당 체제, 헌법이 수립
되어 있다. 이를 정당성에 있어 공동의 프레임을 구성하는 콘텐츠의 본연적 상대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이 정당성의 콘텐츠를 구성하는 조건인가? 우선 많은 사상가들은 정당성이 한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표현되는 인간 행위에 의해 확정된다는 데 동의한다. 물론 이 행위는 그들
의 ‘믿음’이 가시적으로 구체성을 띠고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특히 믿음 체계라는 개념
에 정치적 정당성이 기반하고 있을 때 명확하며, 정당성과 관련된 모든 원리는 이 체계와 상호
모순되지 않을 때 유의미하다. 이러한 점에서 정당성은 공간적으로 공동체와 인민의 ‘믿음들’ 사
이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오크쇼트는 이 공간적 관계의 필연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이란 사회, 공동체, 집단을 통해 끊임없이 창의적인 존재이며, 이 때 각 공동체에서의 창의성이란
믿음, 즉 집단의 학습된 조건에 대한 관계다. 만약 누군가가 어떠한 집단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를 추구
한다면, 그는 반드시 그러한 조건들에 대한 가정을 의심해야 한다(Oakeshott 1976, 358).

그는 여기서, 모든 인간이 기본적으로 창의적 개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창의적
인 행위가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믿음들 위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믿음은 다름 아닌 그 집단이 갖고 있는 특정한 조건들이며 이것은 그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학
습된 어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이 믿음과 조건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고, 창의성은 어떻게 발현되는가? 오크
쇼트는 창의성의 발현이 행위를 통한 상호작용에 의해 가능하며, 이를 가능케 하는 조건 즉, 상

정당성은 빌려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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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간에 존재하는 믿음은 ‘실천(practice)’이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이 상대적으로 긴 시간동안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들 간에 필연적인 상호작용을 구성하는 행위가 일정한 형태를 필요
로 하며, 이는 결코 단편적이거나 거래적인 형태를 띨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상호작용이
그가 ‘실천’이라고 부르는 구조를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실천은 “인간의 행위와
언표를 통해 유용한 절차를 구체화하거나 의무를 표현할 수 있는 고찰, 매너, 활용, 관찰, 관습,
기준, 규범, 격률, 원칙, 규칙, 지위 등의 총합”으로 정의될 수 있다(Oakeshott 1975, 55; Parekh
1979, 491-2).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사회적 요소의 총합으로서의 실천은 특정한 행위 자체를
이끌어내지는 않는다. “실천은 단지 행위자가 무엇을 말하거나 행동 할 것을 선택할 때 반드시
수반해야 하는 어떠한 조건과 고찰을 구체화할 뿐(Parekh 1979, 492)”이다. 이와 유사한 정의
는 매킨타이어에게도 확인할 수 있다.

실천이란 사회적으로 구성된 협력적인 인간 행위의 일관되고 복합적인 형태로서, 이를 통해 탁월함을
달성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그 행위의 형태에 부합하는 내적 선이 드러나게 된다. 또한 부분적으로
확정적인 이 행위의 형태는 탁월함을 달성하려는 인간 힘의 결과, 그리고 이에 관련된 인간의 목적과
선이라는 개념을 통해 체계적으로 확장된다(MacIntyre 2007, 187; Mulhall & Swift 1992, 82).

여기서 매킨타이어는 실천을 선(善)이라는 개념과 더불어 협력적인 인간행위와 연결시키
고 있다. 그런데 이 선, 혹은 좋음은 적어도 두 가지 이유로 각 사회에서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
이다. 우선 이 좋음이라는 개념은 각각의 고유한 가치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둘째로, 설
령 유사한 개념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좋음을 표현하는 방식과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
한 협력의 과정 역시 상이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좋음에 대한 내용과 그 내용을 달성하
기 위한 작동과정에서 모두 상대성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오크쇼트와 매킨타이어가 실천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이것은 물론 정치적 정당
성이라는 개념과 직접적인 연관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적 정당성을 비담과
베버 등이 제시한 것처럼 ‘인민의 믿음’에서 출발하여, 하나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형태로서의
‘믿음 체계’에서 찾고자 할 때, 이 개념은 대단히 유용하다. 왜냐하면 실천은 바로 그 인민의 믿
음이 어디에서 발현되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적 배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오크쇼트에 따르면
실천은 상호작용을 통한 창의성의 발현이라는,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가장 본질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인간의 언표와 행위는 상호성을 획득하고
이를 통해 인간은 창의성이라는 본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유사하게 매킨타이어 역시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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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의 발현이 가능한 조건으로 실천을 상정하고, 이 조건 하에서 좋음이라고 하는 탁월함을 발
현시키고 그 행위들에 의미성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오크쇼트는 창의성의 발현을, 매킨타이어는 좋음의 탁월성을 성취하는 것을 인
간의 고유한 특성 혹은 목적으로 보았지만, 그들은 이러한 목표가 반드시 인간들 사이의 상호
작용, 혹은 협력적 행위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모두 실천이라는, 인간
의 경험적이고 집합적 행위의 총합이 형성하는 체계라는 개념을 통해 이를 설명하고 있다. 특
히 오크쇼트의 경우, 믿음이라고 하는 인민의 감정 혹은 의사 역시 실천 개념을 통해서만 유의
미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즉, 실천에서 발현되는 믿음이 그 자체로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
동하면서 다시 실천으로 기능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우리는 오크쇼트와 매킨타이어
가 제시한 실천 개념이 정치적 정당성을 설명하는 믿음 및 믿음 체계와 유사한 논리구조를 보
여주고 있다고 추론할 수 있고, 믿음 체계와 정당성이 가진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재설명 할
수 있다. 즉, 특정한 형태의 행위가 정당성을 확정하려면 그 행위는 주어진 규칙 안에서 상호작
용과 협력을 통해 유의미한 집단적 발현 형태를 가져야 하며, 서로 다른 사회에서는 이러한 행
위의 형태가 그 문화적 배경에 따라 상이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파레크에 따르면 이러한 실천은 마치 언어처럼 작동한다. “언어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관념적 자원을
제공하는 것처럼, 실천 역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Parekh 1979,
492).” 즉, 우리가 법, 합의, 정의 등의 기반 위에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 언어라는 또 다른 매
개체가 필요한 것처럼, 정치권력의 행사와 이에 대한 복종이라는 온전한 의미에서의 통치가 가
능하려면 인민의 믿음과 그 믿음의 체계가 필요하다. 또한 언어라는 공통된 개념 하에 수많은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듯이, 그 믿음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인 실천 또한 다양한 고유의 문화에
기반을 두게 된다. 그런데 파레크가 실천을 언어에 비유할 때, 그는 동시에 오크쇼트와 매킨타
이어의 이 개념을 비트겐슈타인의 관습(custom) 개념과 연관시킴으로써 정당성을 재해석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즉, 실천에 기반을 둔 모든 유의미한 (창의성이나 좋음의 발
현을 위한) 집단적 행위가 언어게임과 같은 것이라면, 소통(communication)이야말로 핵심적
인 요소가 되며, 이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설명 중 하나는 비트겐슈타인의 관습에 대한 이론이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유명한 기호에 관한 비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가 규칙에 따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아마도 가능한 사례는 이것일 것이다. 내가
어떠한 기호에 대해 어떠한 특정한 방식으로 반응을 보이도록 훈련 받았고, 내가 지금 그렇게 반응하고

정당성은 빌려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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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는 것 … 한 사람이 어떤 이정표를 보고 그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은 오로지 거기에 일상적으로 그
이정표가 사용될 때, 즉 그 이정표의 사용이 하나의 관습으로 존재할 때 가능하다(Wittgenstein 1953,
198).

여기서 비트겐슈타인이 설명하고 있는 내용은 정치적 정당성이 실천과 관습을 통해 확정되
는 과정과 조건을 잘 묘사하고 있다. 비담 역시 그가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는 동의 이외에도 관
습을 또한 정당성의 중요한 근거로 제시한 바 있다. 그는 “권력이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이냐는
규칙으로부터 파생되며, 그 규칙은 역시 같은 방식으로 관습이나 동의에서 비롯된다(Beetham
1991, 57)”고 말한다. 여기서 비담이 말하는 규칙, 오크쇼트의 실천과 비트겐슈타인의 관습이
정치적 정당성과 관련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가장 분명하게 말하고 있
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규칙에 복종한다는 것’은 하나의 실천이다. 규칙에 복종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규칙에 복종하
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규칙에 개인적으로 복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Wittgenstein 1953, 202).

이러한 논리에 따라 그는, “인간의 동의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결정한다.
이것이 인간이 그것은 진실과 거짓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사용하는 언어 안에서 동의한
다. 그것은 의견(opinion)에서의 동의가 아니라 삶의 형식(form of life)에서의 동의
(Wittgenstein 1953, 241)”라고 단언한다.
기실 비트겐슈타인 이전에 데이비드 흄은 관습이야말로 인간 행위와 믿음의 원리라고 설파
한 적이 있다. 그는 인간의 마음, 행위, 그리고 믿음 사이에 관습의 역할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
는 ‘인과관계’란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추론을 통해 하나의 존재로부터 다른 하나의 존재를
유추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이성은 그러한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
성이 아니라, 유사한 사례들에 대한 관찰이 지속적으로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로서의 경험이야
말로 그러한 유추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는 이러한 경험의 결과의 원칙을 관습이라고 부르고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특정한 행위나 활동의 반복이 바로 그 동일한 행위나 활동을 계속하게 만드는
성향을 만들어 낼 때, 우리는 항상 이러한 성향이 관습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관습은 인간의 삶에서 위
대한 지침이다. 관습의 영향 없이, 우리는 모든 종류의 사실에 대해 완전히 무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Hume 2007[1748],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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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은 또한 인간 행위와 관습 뿐 아니라 관습과 믿음의 관계에 대해서도 중요한 관점을 제시
한다. 그는 관습이야말로 한 사람이 무엇인가를 믿게 만드는 경험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다. 관습에 의해 움직이는 마음이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은
특정한 조건 하에서 마음이 움직였을 때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인 셈이다. 가령 춥다는 느낌
이나 화라는 감정은 바로 이러한 믿음에 기반을 둔 것이다. 즉, 춥다고 느끼는 것은 춥다고 믿
는다는 것이며, 화라는 감정은 화가 난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따라서 믿음
은 특정한 추상적 본질이나 사고의 질서가 아니라 그러한 관념의 방식, 그리고 마음 안에서 나
타난 느낌, 그리고 행위를 통한 그것의 발현으로 구성된다. 그는 분명히, 이러한 관념의 느낌이
나 방식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고백하면서도,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또한
그것을 믿음 이외에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믿음이야말로 모든 사람
들이 일상적 삶을 통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Hume 2007[1748], 42-5). 비록,
유의미하고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집단적인 인간 행위와 관습과의 관계, 그리고 다시 관습과
인간이 가지는 믿음에 대해 논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흄이 정치적 정당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
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성이 발본적으로 믿음 체계에 바탕을 둔 인민의 마음
에 근거한다는 점은 흄이 여기서 밝히고 있는 개념들에 대한 설명과 전혀 상반되지 않을 뿐 아
니라, 오히려 대단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상의 논의-비담, 피너, 오크쇼트, 비트겐슈타인, 흄-를 모두 종합해보면, 정당성이란 인민
의 믿음을 필요로 하며, 이 믿음은 반드시 가시적인 표현의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가시
적인 표현의 형태는 해당 사회에서 구성원들 간에 실천적으로 습득되고 관습적으로 이해된 어
떤 형식을 가질 수밖에 없다.18) 따라서 정치적 정당성의 기반이 되는 믿음 체계 위에서 어떠한
집단적 행위가 의미를 획득한 것으로 이해되기 위해서, 실천과 관습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다. 가령, 한 사회에서 통치자가 정치적 정당성을 증진하거나 수호하거나, 재생산하려고 할 때,
그 행위는 그 사회에서 통치를 확고히 하려는 의도를 지닌 것이지만, 실제로 그 행위가 이러한
의도에 충실한 유의미성을 획득하게 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 행위의 형식과 실천 및 관
습이 어떠한 관계에 있느냐에 달려있다.

18) 발화의 과정과 그것의 올바른 이해가 하나의 공동체에서 갖는 중요성,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서는 오스틴(Austin 1965)을 참조할 수 있다. 본고에서 오크쇼트와 비트겐슈타인을 다루면서 의사소통과 관련한
언표 혹은 행위를 논할 때는, 대체로 오스틴의 구분에서 진위진술적 발화(constative utterance)와 구분되는 수행
적 발화(performative utterance)를 염두에 두었다.

정당성은 빌려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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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실천과 관습은 어떻게 정치적 정당성을 형성하는가?

그렇다면, 정치적 정당성과 관련하여 이러한 행위와 그 행위의 형식, 그리고 그것이 유의미
하게 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가? 한 사회에서 규칙이나 가치와 관련하
여 실천과 관습은 어떠한 조건에서 정치적 정당성이라는 개념을 만나게 되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한 가장 좋은 사례는 비트겐슈타인과 오크쇼트의 철학적 계보를 이어 받은 윈치가 제공한다.
그는 1958년 발표된 “사회과학이라는 발상”19)이라는 짧은 책의 첫 두 장에서, 비트겐슈타
인을 따라, 우리가 규칙의 존재와 그것을 따르는 것을 통해서만 언어 게임을 할 수 있음을 주장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의미있는 행태를 분석함에 있어 규칙이라는 개념이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의미있는 행태-따라서 인간에게 특징적인 행태-는 모두, 의미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하여, 규칙에 따른 행동이기 때문(Winch 1990, 51-2)”이라고 말한다. 즉, 어떤 행위가 유의미
하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단순히 현재가 아니라 현재의 행위로 인해 내가 미래의 어떤 행위에
연관될 때를 뜻하며, 이것은 “오로지 현재의 행동이 어떤 규칙의 적용일 때 뿐”인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가장 개인적인 행위조차 의미를 가지려면 사회적 맥락 안에 놓여야 한다
(Winch 1990, 50).” 요컨대, 개념이 일반화에 선행하듯이, 행위 역시 개념에 선행하는 것이며,
이것은 사회적 맥락의 존재로 인해 가능하다. 여기서 사회적 맥락 안에 놓여야 한다는 것은 결
국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20)

어떠한 표준을 확립한다는 일은 다른 사람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이 한 개인이 고립되어 할 수 있는 일
이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확립된 표준이란 한 사람의 행동에 대한 외부적 견제와 분리될 수 없는데, 그
외부적 제약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오로지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뿐이기 때문이다(Winch 1990, 32).

19) 원제가 ‘The Idea of a Social Science and its Relation to Philosophy’인 이 책은 2011년 박동천에 의해 ‘사회과학
이라는 발상’으로 번역되었고, 다른 논문인 ‘원시사회의 이해’와 더불어 “사회과학의 빈곤(2011, 모티브북)”이라는
책으로 한데 묶여 나왔다. 본고에서 이 책의 내용을 인용할 때는 박동천의 번역을 따랐다.
20) 베버 역시 정당성을 논의하면서 사회적 행위는 오로지 집단 속에서 비로소 사회학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
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지배 조직과 관료 조직에 주목하여, 국가조직의 일상적이고 관료적 실천을 통해 현존 지배
질서의 정당성에 대한 순응을 피지배집단의 내면에 훈육시킨다고 보았다(신진욱 2014, 51-2). 이러한 분석은 공간
적으로 대륙철학의 맥락에서 ‘국가’가 실천 이성의 주체로 등장하는 근대적 시간대에 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고민의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비단 국가 뿐 아니라 작게는 지방정부나 비국가적 단위의 통치행위, 크게는 문
명권 단위의 일반적, 보편적 수준에서 정치적 정당성을 논하기 때문에, 근대 국가의 정당성에 대한 베버의 정치(精
緻)한 해석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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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어떤 표준을 확립하는 것, 즉 유의미한 행위는 타인과 관련하여 무엇인가를 하는 것으
로 귀결된다.21) 흥미롭게도 윈치는 이 과정을 한 개인의 투표 행위에서 유추한다. 다소 길지만
그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 충분히 인용될 가치가 있는 사례는 다음과 같다.

한 개인의 투표가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나는 그 투표자가
사회 안에 살고 있어야 하고 그 사회가 특정한 정치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의회가 일정한
방식으로 구성되고, 그 의회는 정부와 일정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 만약 이 투표자가 가부장
적 정치구조를 가진 사회에 살고 있다면, 그의 행동이 선거에 의해 정부가 성립되는 나라에서 투표자들
이 하는 행위들과 아무리 겉으로 닮아 보이더라도, 그가 특정한 정부에 ‘투표’했다고 하는 것은 성립하
지 않는 것이다. 둘째로는, 그러한 제도가 투표자 자신에게 어떤 정도로든 익숙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
이다. 여기서 그의 행위는 그 나라의 정치제도에 대한 일종의 참여인데, 이는 자체로 자기완결적일 수
없고 특정한 조건을 요구한다. 즉, 현재 자신의 행동과 선거 후에 집권하게 될 정부 사이의 상징적 관계
를 그가 깨닫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갖는 힘의 명백성은, 정치생활을 그런 방식으로
하는 일이 생소한 사회에 ‘민주적 제도’가 외부적 통치자에 의해 부과된 여러 사례들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그러한 나라의 주민들로 하여금 종이쪽지에 표식을 하여 상자에 넣는 동작을 하도록 유인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투표라는 단어의 의미가 유지될 수 있으려면, 그들이 스스로 하는 행동의
의미를 깨닫고 있어야 한다. 그들이 그렇지 않은 한, 이 행동을 ‘투표’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
고 그런 식으로 이루어진 ‘투표’의 결과 특정한 정부가 집권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점이 크게 달라
지지는 않는다(Winch 1990, 51 – 강조는 논자).

물론 윈치가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사례가 실천이나 관습으로 곧바로 이해될 수는 없다. 윈
치는 이 사례에서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투표가 의미를 획득하는 경우’를 논하고 있기 때문이
다. 즉, 그 개인이 스스로 하는 행동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벌인 ‘유사’ 투표 행
위와, 그러한 식으로 이루어진 투표의 결과 집권한 특정 정부 간에 유의미한 관계가 성립되지

21) 윈치가 주장하는 이러한 행위의 유의미성 획득과정이 어떠한 독창적인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서는, 행위의 유
의미성에 대해 베버가 주장하는 행위자의 의지 중심적 관점, 프로이드가 말하는 행위자에 대한 정신병리학적 분석
과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윈치(Winch 1990, 45-50)를 참조할 것. 다만 이와 관련해 신진
욱이 “기존의 베버 해석들은 그 믿음이 피지배자들의 문화적 의미세계에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했다. 즉 문화가 정
치를 규정하는 측면만을 강조했다. … 정당성을 둘러싼 의미 연관이 단지 문화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 구성되는 것임을 암시했다(신진욱 2014, 50-1)”고 주장한 것은, 믿음의 형성과정에서 문화와 행위를 대립적,
이분법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다소 지나친 면이 있다고 하겠다. 본고의 입장에서 신진욱의 주장은 ‘정당성은
행위(실천)에 의해 구성되며, 정당성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행위의 유의미성은 문화, 즉 사회적 맥락에서만 파악될
수 있다’로 재구성될 수 있다.

정당성은 빌려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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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음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방식의 투표를 한 사람이 적지 않고, 그런 식
으로 투표를 이해하는 것이 하나의 실천과 관습으로 자리 잡아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행위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헌정 수립 이후 대단히 오랫동안 남한 지역에서 상당히 많은 수의 투표 행위가
사실상의 매수에 의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서 매수란 단순히 막걸리와
고무신으로 대표되는 6~70년대의 선거는 물론, 현재에도 횡행하는 음성적 비용에 의한 선거
운동 전반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 때, 이러한 매수에 의한 투표 행위가 실제로 민주적인 절차로
서 유의미한 것인지를 묻는 것은, 단순히 해당 개인들의 양심의 문제나 위법성을 넘어서 그러
한 행위의 유의미성과 정치적 정당성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물론, 매수에 의한 것이라고 할
지라도, 투표하는 개인들이 ‘현재 자신의 행동과 선거 후에 집권하게 될 정부 사이의 상징적 관
계’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매수에 의한 투표가 단지 그 결과의
예측이 가능하다는 정도의 인지로 유의미한 것으로 간주된다면, 강압이나 국가의 권위주의적
통제에 의한 투표도 유의미한 것으로 여겨져야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따라서 윈치가 제시한 사례에서 드러나는 것은, 정치적 제도와 함께 빌려온 정당성이 그 사
회에서 유의미한 행위들과 연관되지 않는 경우 대단히 취약하다는 사실이다. 즉 다수의 정치적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지하지 못해도 상관없
다고 생각한다면, 그 행위는 정당성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는, 말 그대로 ‘유사(類似) 행위’
에 불과하다. 유사 행위에서는 정치제도와 믿음 체계간의 괴리, 다시 제도와 행위 사이에 괴리
가 나타나고, 이것은 정치적 정당성과 믿음 체계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을 낳는다. 즉, 제도와 행
위간의 관계에서 아무런 구속력이 생겨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곧 지배와 복종, 정치적 권력
과 그것의 인지 체계 사이에 정당화가 가능한 구속적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
다. 이는 동시에 그 행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특정한 실천과 관습이 부재하다는 것을 의미
한다. 이 사례에서처럼 외부자에 의해 제도가 수립된 경우에 인간의 정치적 행위는 의미를 획
득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결과적으로 여기에는 진정한 의미의 통치가 부재하다.
이러한 정치적 정당성과 실천, 관습 간의 관계에 대한 호튼의 최근 연구는 상당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호튼은 흄과 윈치를 정치적 정당성과 정의, 동의라는 주제를 통해 연구하면서 “정당
성의 확정은 다양한 방식으로 가능한데, 그것이 얼마나 다양할 것인가는 부분적으로 그 개인이
살고 있는 국가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어떠한 유형의 고려들이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
서 정치적 정당성은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 따른 서로 다른 기준에 기반하고 있다(Horton 2012,
142-3)”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을 본고의 맥락으로 끌어 들여서 해석한다면 아마도 다음과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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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진술이 가능할 것이다. ‘정치적 정당성이 특정한 믿음 체계 속에서 그것을 문제시하는 사람
들의 특정한 행위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그것을 확립하고 유지하는 데에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공동체별로 다양한 방식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주장은 호튼이 흄과 윈치를 직접 인용하여 영국 왕정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데서 보
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흄은 “영국인들이 태생에 따라 왕을 그들이 합법적인 주권자로 받아들이는데 동의했다”고 말했고, 윈치
는 보다 명백하게, “이것은 사회 계약 이론가들이 주장한 역할이 아니다. … 이것은 그들의 삶의 방식
(form of life)에 속하는 세습적 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라고 밝혔다(Hume 1987; Winch 1991,
227; Horton 2012, 142).

여기서 호튼이 보다 현대적이고 일상적 용어로 표현한 ‘삶의 방식’은 흄과 비트겐슈타인, 오
크쇼트가 언급한 실천과 관습 개념과 상통한다. 삶의 방식을 통해서만 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제공되고 인지 될 수 있는 것이다.22)

Ⅲ. 결론
본론의 논의에 따르면, 서론에서 이 논문이 던졌던 질문, ‘정당성은 빌려올 수 있는가’에 대
한 대답은 명확하다. 정치적 정당성은 인민의 믿음 체계에 기반을 두고, 믿음 체계는 그것을 형
성하는 조건이자 구성요소인 실천과 관습에 의해 발현되고 인지된다. 이처럼 정당성은 특정하
고 가시적이며 유의미한 인간들의 행위인 ‘삶의 방식’과 배타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빌려올 수
없다. 외부인에 의해 수립된 정치 제도에서 인민의 집단적 행위가 언제 유의미한가는, 그 행위
가 어떠한 맥락을 갖고 있느냐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왜냐하면, 정치적 정당성이 믿음 체계라
고 하는 프레임을 요구하는 것은 모든 정치 공동체에서 동일하지만, 그 프레임을 구성하는 내

22) 호튼은 이 논문에서 영국의 사례를 다룬 다음 흥미롭게도 티베트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정치
적 정당성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는 여기서, 달라이 라마가 신비적인 종교적 권위에 의존하고 있으며, 그의 정치적
정당성을 뒷받침할만한 어떠한 정치 제도-가령 선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정치적 정당성을 훼손하
려는 시도에 대해, 삶의 방식이 다름을 인지하지 못한 천박한 이해라고 강하게 비판한다.

정당성은 빌려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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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의 상호작용, 집합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것이 모든 사회
에서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의 형식과 특성이 다양한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정치적 정당성은 불가피하게 문화적 상대성과 만난다.23) 인민의
믿음과 믿음 체계를 이해하는 것은 제도나 개념을 이해함으로써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인민의
믿음이 발현되는 언표와 체계를 그 사회에서 ‘익힘’으로써만 가능하다(Winch 1990). 믿음 체계
의 형성과 유지가 정치공동체 별로 상이한 문화적 맥락에서 나타나고, 그것은 관습 안에서의
실천이라는, 곧 삶의 방식에 대한 체득을 통해서만 실현(realization)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화적 상대성의 인정이, 극단적 문화 상대주의나 혹은 정당성 여부를 판정하는 과
정에서의 ‘기준 없음’으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상대적이기 때문에 상호 비교와 소통이 불가
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비교와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 공유되는 가치와 개념이 필수적이며, 다
만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범주를 혼동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령 종교, 도덕,
인민의 복리와 같은 정치적 복종의 규범적 이유들은 어느 정치사회에서나 존재한다. 하지만 한
사회의 도덕의 논리를 다른 사회의 종교의 논리에 들이대어서 정당성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
다. 물론 믿음 체계의 변화로 인해 각각의 내적 지배원리가 붕괴할 때 정당성은 약화된다. 그러
나 믿음 체계의 변화를 일으키는 동인(動因)은 실로 다양하다. 로마의 기독교화나 중세에 가톨
릭과 신교의 분리 같은 종교적 변화일 수도, 자유, 평등, 인권 같은 정치적 개념의 발명 혹은 재
발견 일 수도 있다. 더 다양하게는 효율적인 정부, 민족의 독립, 나아가 한 사회의 궁극적 목표
로서 가능한 많은 인민의 인간성의 최대 발현이 새로운 믿음 체계의 기반이 될 수도 있다. 바로
여기에 정치적 정당성과 문화적 상대성의 접점이 존재한다. 우리가 한 정치공동체의 정당성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거기에 어떠한 믿음체계가 수립되어 있는지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23) 이러한 주장은 흡사 공동체주의적 입장에서 정치적 정당성 개념을 파악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본고
에서 전거로 삼고 있는 사상가들 중 명시적으로 공동체주의로 분류될 수 있는 학자는 매킨타이어 뿐이다. 비트겐
슈타인은 공동체주의자로 분류되지 않으며, 윈치나 파레크는 베버의 사회학 이론이나 서구중심주의에 반대하고
사회과학에서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입장이지, 공동체주의를 특별히 옹호하거나 주창하지는 않는다.
비담은 굳이 분류하자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자이고, 오크쇼트는 보수주의로 이해될 수 있으며 방법론적 개인주
의를 철저하게 견지했다. 본고의 주장과 공동체주의 간의 관계에 대해 지적해주신 김희강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심사과정에서 날카로운 지적과 아낌없는 격려로 논문 마무리에 큰 도움을 주신 익명의 세 분 심사위원들께
도 큰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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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21집 1호, 2015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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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투고일: 2015년 02월 25일
심사개시일: 2015년 03월 10일
심사완료일: 2015년 0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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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21집 1호, 2015 봄

Can It be Possible to Borrow Political Legitimacy

Lee Kwanhu(Sogang University)

This research examines the concept of legitimacy by challenging to the question, ‘can it
be possible to borrow political legitimacy?’ from the view of cultural relativity. On
methodology, this study argues that the concept of legitimacy is a key of analysis for
comparative political thought. First, legitimacy is the most radical and universal concept in
government. Second, as a common framework for comparative political research, the
concept of legitimacy, unlike such ideas of democracy or liberalism which were discovered
and developed in modern west, has conceptual neutrality. According to the analysis on
basis of this methodology, this research claims that legitimacy cannot be borrowed thanks
to the conceptual characteristics. There are logically plausible reasons. First, legitimate
government is only sustainable with people’s beliefs. Second, the people’s beliefs become
belief-systems which are fundamentally derived from practice and custom. Third, contents
of legitimacy are diverse depends on culture, insofar as legitimacy is exclusively involved
with ‘ways of life’ as specific, visible, and meaningful human activities.

Key words: Legitimacy, Conceptual Neutrality, Belief-System, Practice, Custom

Abstra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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