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후. 2015.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에 대한 비판적 검토: 법, 동의, 정의, 토의를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에 대한 비판적 검토: 법, 동의, 정의, 토의를 중심으로 97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에 대한 비판적 검토:
법, 동의, 정의, 토의를 중심으로*
1)
이관후 | 서강대학교
| 국문요약 |
본 논문은 법, 동의, 정의, 토의가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가 되기에 불충분하다고 주장한다 .
정당성은 어원적, 역사적으로 법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합법성은 정당성의 근거로서 자기완결
성을 갖추지 못한다. 사회계약론의 등장 이래 동의는 정치적 정당성이 필수적 조건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동의 개념에 대한 정의 (definition)의 불명확성, 묵시적 동의의 불안정한 기반 ,
동의가 가능한 조건의 불확정성 때문에, 현대 민주주의 이론은 ‘합당한 동의’ 개념을 도입했다.
합당한 동의에서는 계약적 동의 아니라 공정한 선거와 같은 일정한 절차가 순수한 동의를 대
체한다.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절차적 정의와 토의가 합당한 동의 개념의 유력한 대안으로 떠오
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절차주의 역시 과정과 결과의 합당성 (reasonableness)을 보장할 수
없다. 이는 정당성 개념이 법 , 동의, 정의, 토의를 넘어서서 상대적인 가치 , 역사성, 문화적
다양성의 문제를 고려해야 함을 뜻한다 .
주제어 | 정당성, 법, 동의, 절차주의, 합당한 동의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4S1A3A2043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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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가을호(제8권 제2호)
Ⅰ. 서론
1. 민주주의와 정당성
현대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정당성은 인민의 동의에 기반하고, 이 동의는 법치
주의에 의해 보장되며, 동의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정한 절차와 참여자
들 간의 원활한 소통에 있다’는 견해는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
한 주장의 불충분성을 논하고자 한다.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현대 정치에서 정치적 정당성은 전적으로 민
주주의의 정도에 비례한다는 입장부터 검토해보자. 이 주장이 타당하다면 정치
적 정당성 개념은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로 귀결된다. 그러나 정당성은 민주주의
로 환원되기 어렵다. 민주주의가 정치적 정당성의 중요한 요소지만, 민주성을 거
의 찾을 수 없는 정부가 정당성을 부여받는 상황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시민들
은 충분히 혹은 명백히 민주적이지 않은 통치에 대해서도 종종 정치적 정당성을
인정하곤 하는데, 이는 민주주의의 결핍을 보상하는 다른 메커니즘들이 존재함
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인민들은 경제 성장을 이유로 독재정치를 정당한 정치체
제로 용인하거나, 심지어 민주적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이것을 지배 이데올로기,
허위의식, 단순한 착각 등 그 무엇이라고 부르더라도, 그러한 현상이 있다는 것
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이에 더해 경제 성장이 장기적으로 민주주의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특정 국가에서 경제 성장을 수반한 독재를 민주주의의 정초를 쌓은
것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근대화 이론에까지 이르면, 통치의 정당성에서 민주주
의가 반드시 필수적 조건인지에 대해서조차 완전히 확신하기 어렵다.
정치적 정당성은 민주주의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러나 정당성은 민주주의
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정당성의 어떤 부분은 민주주의로 구성되지만 그렇지 않
은 부분들도 존재한다. 이것이 현대 민주주의에서 여전히 정당성에 대한 독자적
인 연구가 필요한 이유다. 여기서는 법, 동의, 정의, 토의라는 개념들과 정당성의
관계를 검토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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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엇이 정당성의 근거인가: 법, 동의, 정의, 토의
현대 서구 정치학계에서 정당성에 대한 최근의 논의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각
각 비담(Beetham 1991)과 코아코(Coicaud 2002[1997])에 의해 정리된 바 있다. 비
담은 정당성을 구성원들이 정당하다고 받아들이는 규칙(justifiable rules)이나 확
실한 동의(evidence of consent)에 의해 권력이 획득되었을 경우 발생하는 것이라
고 보고, 그 근거를 법적 타당성(legal validity), 도덕적 정당화(moral justifiability),
믿음에 기초한 정당성(belief in legitimacy)으로 구분한다(Beetham 1991, 3-7). 이
와 유사하게 코아코는 정당성이란 통치할 권리의 인지와 그 통치 권력에 대한
정치적 복종으로 구성되고, 이는 동의(consent), 법(law), 규범(norm)이라는 세 요
건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다(Coicaud 2002, 10). 두 사람의 차이는 크지 않다. 비담
의 믿음이 기반을 둔 정당성은 코아코의 동의와 대응되고, 도덕적 정당성은 규범
과 대응된다.
비담은 자신이 제시한 세 요소 중 정당성 문제의 핵심은, 무엇이 복종의 옳은
기반인가를 제시함으로써 도덕적 딜레마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복
종하고 불복종하게 되는 원인과 결과는 무엇인가’라는 메커니즘적인 측면에 있
다고 보았다(Beetham 1991, 6-7).1) 동의와 법이라는 형식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코아코 역시 법과 동의를 주목한다. 그는 파슨스의 이론을 따라 ‘사회적 가치’를
통해 사람들이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사회적 정체성이 입
법과 사법이라는 ‘정치적 기능’을 통해 표출되고 확정될 때 비로소 정당성이 생
겨난다는 점을 강조한다(Coicaud 2002, 14-8). 그렇다면 비담과 코아코가 정당성
의 기반으로 검토하고 있는 것은 법과 동의라고 할 수 있다.
법과 동의가 근대 정치사상에서 전통적인 정당성의 원천으로 제시되었다면, 현
대 민주주의에서는 정의(justice)와 토의(deliberation)가 정당성을 구성하는 핵심요
소로 새롭게 떠올랐다.2) 법과 동의라는 행위의 결과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이르는
1) 비담에게 도덕적 타당성이란, 무엇이 타당한 복종의 근거인가라는 질문과 관련된 문제
다. 그는 이것이 정의, 권리, 공리 등 규범적으로 복종을 강요할 수 있는 합리적 원칙이라
고 이해했다. 하지만 그는 도덕적 타당성이 본질적으로 철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연구에서 이를 직접 다루기는 어렵다고 보았다(Beetham 199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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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과 절차가 정당성에 더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것이다. 전자를 주장한 대표
적 학자로는 롤즈(Rawls 2001), 후자는 엘스터(1998), 구트만과 톰슨(Gutmann and
Thompson 2004), 마넹․스타인․맨스브리지(Manin, Stein, and Mansbridge 1987),
드라이젝(Dryzek 2000; 2009), 뷰캐넌(Buchanan 2002)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롤즈
는 정의론을 통해, 무지의 베일과 같은 사적 이기심이 작동하기 어려운 공정한
절차가 정치적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주장한다. 토의 민주주의자들은 동의
가 정치적 정당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동의의 정당성은 다시
의사결정 과정에서 다수의 구성원이 참여하는 충분한 토의가 이루어졌는가에 달
렸다고 본다. 따라서 동의 그 자체보다는 과정에서의 토의가 정당성을 부여하는
실체라고 주장한다. 또한 동의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많은 경우에도 충분한
토의의 존재는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으로 작동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정의와 토의는 기본적으로 법과 동의에 이르게 되는 절차에서의 공정성과 민주성
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에스트룬드(Estlund 1998)의 분류
를 따라 이 둘을 ‘절차주의’로 묶어서 함께 논의할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면, 정치권력이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한 조건은 법적 정
당성(legitimacy-in-law)과 동의에 의한 정당성(legitimacy-in-consent), 그리고 절차
에 의한 정당성(legitimacy-in-proceduralism)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
에서는 이러한 조건들이 정치적 정당성을 구성하는데 충분히 타당하고, 자기완
결성을 갖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2) deliberation은 일반적으로 ‘심의’ 혹은 ‘숙의’로 번역되곤 하는데, 실제로는 공적사안에
대한 아주 가벼운 대화에서 반드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 전문적인 대화까지 그 범주
가 매우 넓기 때문에(Elster 1998; Dryzek 2000; Gutmann and Thompson 2004), 이 글에서
는 보다 일반적으로 특정한 사안에 대한 이성적 대화(reasoning by communication)를 가리
키는 ‘토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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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본론
1. 법적 정당성
1) 법적 정당성의 기원과 발전
정당성은 어원적, 역사적으로 법과 분리될 수 없다. 용어상으로 보아도 영어
단어 ‘정당성(legitimacy)’은 ‘법(law)’에 어원을 두고 있다. 정당성(legitimacy)이라
는 명사는 중세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지만, ‘무엇이 정당하다’라는 개념은 라틴
어 ‘레기티움(legitium)’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여기서 정당하다는 것은 어떠한
것이 법으로 정해져있기 때문에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Coicaud
2002, 18-19).
정치적 정당성이 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생각은 로마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레기티움 개념은 정치적 실체가 법적 권위를 가지고 권력을 행사할 때에 정당하고,
정당한 통치는 법의 제한을 받는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키케로가 합법
적으로 수립된 권력이나 판사들을 ‘레기티뭄 임페리움legitimum imperium’이라고
지칭한데서 잘 나타난다. 현대적 의미의 합법적인 통치와 정당한 통치라는 개념이
여기에서는 서로 중첩되어 있다. 그는 또한 이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법적인(정당
한) 적legitimus hostis’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들이 합법적인 문서를 통한 협
정을 위반했기 때문이다(Coicaud 2002, 19).
이러한 정당성 개념은 중세에 들어, 주권자가 통치의 권위를 법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되었다.3) 서구에서 키케로 이후 법적 정당성 개념이 가장 분
명하게 드러난 사건은 1215년 잉글랜드의 대헌장 공포로서, 이것은 통치자가 신
민들에게 복종을 요구할 때 지켜져야 할 ‘법적’ 조건을 제시한 것이었다.4) 대헌
3) 여기서는 왕권신수설 역시 신법과 자연법이라는 법 형식 내에서 정당성을 획득했다는
의미이며, 그 의미는 결코 간과할 수 없다.
4) 대헌장을 단순히 통치자들 간의 권리를 확정한 문서, 즉 왕과 귀족간의 관계에서 귀족들
의 왕에 대한 권리를 보장한 문서로 보는 해석과, 본고의 주장처럼 통치자의 정당성을
규정한 것으로 보는 해석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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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이후 수 백 년에 걸쳐, 특히 17세기 이후에는 권리장전, 인권 선언, 독립선언
과 같은, 통치의 정당성에 대한 법적 조건을 제시하는 협약과 선언 등이 영국,
프랑스, 미국 등에서 나타났다. 1215년의 문서가 주요하게 왕과 귀족간의 관계에
서 통치의 정당성을 위한 조건을 규정한 것이었다면, 그 이후의 여러 문서들은
그 관계를 통치자 일반과 피치자 일반으로, 국가와 국민으로, 식민지 모국과 식
민지의 인민들로 확대해 나갔다.
정치적 정당성과 법의 관계에서 주목할 것은 ‘헌법’ 개념의 출현이다. 17세기
이전까지는 ‘컨스티튜션(constitution)’이라는 용어가 뜻하는 바가 분명하지 않았
다. 그러나 17세기 초반의 영국에서는 이미 ‘ancient constitution’이라는 개념이 법
률가들과 하원의 지도자들에게 널리 확립되어 있었다. 이 당시의 ‘컨스티튜션’ 개
념은, ‘통치자의 권리와 신민의 자유 사이에 지켜져야 할 균형에 관한 것으로, 고
대로부터 내려왔고, 관습적으로 구축되었으며, 과거의 법률에 산발적으로 나타나
있지만 문서화된 어떤 것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버제스(Burgess)는
이 개념의 연원을 최소한 15세기로 보고 있으며, 엘리자베스 1세 시기에는 ‘관습
법(common law)’의 일부이자 그 토대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컨스티튜션은 영국
내전의 원인이 된 1640년 장기의회가 열리기 이전에도 스튜어트 왕조 내내 왕과
하원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논쟁이 된 개념이었다(Burgess 1993). 그리고 컨스티
튜션은 내전과 명예혁명 이후에 마침내 ‘국가의 근본법’이라는 의미로 확정된다.
제임스 2세는 이러한 맥락에서 ‘왕국의 컨스티튜션을 전복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이는 ‘컨스티튜션’이라는 용어에서 저항권 개념이 도출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1733년 영국의 볼링브룩(Bolingbroke)은 영국의 컨스티튜션을 ‘특정의 확고
한 이성원칙에서 유래한 일단의 법, 제도, 관례이며, 공동체의 통치원칙으로 동
의한 일반적인 체계를 구성하는 특정의 확고한 공공선을 지향하는 법’이라고 찬
양했다. 이러한 영국의 컨스티튜션 개념은 18세기 미국에서 성문법을 통해 오늘
날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헌법’ 개념을 획득한다(조지형 2013, 40-1). 이러한 과
정을 통해 근대 헌정주의에서는, 베버가 주장한대로 정당성의 가장 보편적이면
서 불가피한 형태가 합법성(legality)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Coicaud
2002, 19-21).
현대에 들어서도 권력의 정당성을 합법성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은 여전히 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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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통치자의 권력 획득 과정과 이후의 정치적 행위가 법적으로 타당한가를 정당
성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이 때 정당한 권력이란 정당한 소유물, 정당한 결혼,
정당한 친권(親權) 등과 같은 유형의 개념으로 이해된다(Beetham 1997, 4). 가령
정당한 소유는 다음의 세 가지 질문에 답해야 한다. 첫째 어떤 소유물이 합법적
절차를 통해 쟁취되었는가? 둘째, 소유자가 그 소유물을 가질 자격이 있는가?5)
셋째, 그 소유권은 법적 제한 내에서 행사되는가? 이 질문을 권력에 적용해보면,
권력이 합법적으로 쟁취되었으며,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법적으로 통치자의
위치에 오를 자격이 있고, 그 통치가 법적 제한 내에서 행사된다면, 이 때 그 권
력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 합법성의 한계
합법성이 통치의 정당성을 제공하는 하나의 근거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합
법성이 정당성으로 치환될 수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무엇보다 법 자체의 속성에
서 그러한 정당성의 기반이 곧바로 도출되는 것인지가 자명하지 않다. 예를 들어,
사회 혹은 통치권력의 생성과정과 정당성을 사회계약을 통해 주장하는 홉스나
로크조차도, 계약이 지켜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역시 신적 권위나 자연법과
같은 제 3의 보다 근원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즉, 법에 대한 복종을 강제할
무엇인가가 필요한 것이다.
특정한 법적 문서나 사건이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단지 그 법의
존재 뿐 아니라 그 법에 복종해야 할 필연성과 당위성이 존재해야 한다. 이때의
복종은 경험적으로 증명되어야 할 뿐 아니라 규범적 근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법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법을 왜 준수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서로 다르기 때문
이다. 서구 근현대에서 가장 권위 있는 법학자들인 오스틴(John Austin)과 하트
(H.L.A. Hart), 드워킨(Ronald Dworkin)은 모두 법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자동적으로 판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에
5) 가령 전근대 사회에서는 많은 경우 노예에게 일반인과 동등한 소유권이 주어지지 않았
다. 현대에도 소유권에 대해서는 나이, 국경 등의 제한이 여전히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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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한다. 법은 원칙적으로 공적인 강제에 정당성(justification)을 제공한다.6) 그
러나 시민들 뿐 아니라 판사도 때로는 법을 무시해야 하며, 사람들은 이 견해가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잘 운용되는 법체계 혹은 헌정질서에 법이 있다는
사실은, 어떤 이례적인 반론이 없는 한 유효한 강제력의 행사에 대한 이유를 법
이 제공한다는 것을 전제할 뿐이다. 따라서 법적 정당성에 대한 강조는 법 자체
에 대한 회의주의를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으로, 보다 완전한 법 이론이 되려
면 더 구체적인 질문들, 곧 법에 근거한 강제가 부정되는 예외적인 상황은 언제
인가, 공직자가 법을 무시할 수 있는 경우는 언제인가, 그리고 그들이 법을 무시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그렇게 할 때도 여전히 남는 의무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드워킨 2004, 166-8).
또한 합법성 개념 자체가 갖는 한계도 제기될 수 있다. 가령 정당한 결혼이나
친권이 순전히 합법성에만 의존할 경우, 실질적으로 누가 봐도 정당한 결혼이나
양육이 이루어진 경우에도 법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결혼이란 두 사람이 부부가 되는 것이라고 할 때, 부부가 되는 과정에
서 법적 절차가 얼마나 필수적인지는 의심스럽다. 무엇보다 부부 관계는 법 이전
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7) 현대에서도 동성애 결혼, 피임, 가정폭력에 대한 국가
개입의 여부와 정도는 합법성을 넘어서는 도덕적, 규범적 논의를 필요로 한다.
국제법에서도 마찬가지다. 미국 독립은 과세와 통상권을 둘러싼 국가 간의 분쟁
이었고, 국가 간, 국가․기업 간에 소송과 권리다툼은 여전히 현대의 국제법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다. 무엇보다 19세기와 20세기에 서구 제국주의가 구축한 국제
법 질서가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이론적 무기로 작동했다는 사실은 합
법성 개념의 객관성, 중립성에 의문을 제기한다.8)
요컨대 법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법적 해석에 문제가 없다는 것만으로는
6) ‘legitimacy’와 ‘justification’의 차이에 대해서는 이관후(2015) 88쪽을 참조.
7) 이것이 권력의 정당화나 정치적 정당성과 큰 관련이 없다고 볼 수 없는 것은, 당장 근대
이전의 많은 정치투쟁의 핵심이 왕위 계승과 결혼의 정당성에 기인하는 것만 보아도 명
백하다.
8)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에서 시작해 주권박탈에 이르는 과정이 국제법상 합법적이라는
외피를 쓰고 진행되었던 우리의 역사에서도 이는 잘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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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의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정치권력이나 의사결정의 정당성에서도
마찬가지다. 법이 통치의 정당성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합법성의 이러한 한계는 르네상
스 시기의 로마법 해석과정에서 나타난 갈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13세기에 이탈
리아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도시들은, 신성로마제국이 로마법에 기초해 이탈리아
에 대한 통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부정할만한 법적인 힘(legal force)을 갖지 못
했다. 로마법을 축자적으로 해석하는 전통을 고수하는 한, 로마를 계승한 국가의
권리를 존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전통이 지속되었다면, 법적 타당성
이 권력의 정당성을 제공하는 본질적 요소라는 주장이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14세기에 이르러 사스페라토의 바르톨루스(Bartolus of Saxoferrato)가
기존의 로마법 해석을 전복시켰다. 그는 법과 사실이 충돌할 때 법이 사실에 맞
도록 수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내 놓았다. 그는 로마의 프린켑스와 마찬가지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세계의 유일한 통치자라고 법적(de jure)으로는 주장할 수
있지만, 실제상(de facto)으로 그에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주장했다.
“제국의 법은 예컨대 피렌체 시민과 같이 황제의 칙령에 실제로는 복종하지 않
는 사람들을 구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스키너 2004[1978], 89-93).
합법성이 정당성으로 곧바로 치환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법이 다른 외부적
개념들의 도움을 받아 정당성으로 연결될 수는 있지 않을까? 일반적으로 법의
강제가 확보되는 방법은 크게 힘에 의한 것, 권위에 의한 것, 동의에 의한 것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9)
먼저 첫 번째 주장은 법이 순수하게 강제성을 그 본질로 한다든지, 혹은 이러
한 강제성을 법의 본질로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그러
나 힘에 의한 법적 강제성이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법의 강제성만으로는 규범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Coicaud
2002, 22). 여기에는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한 정치공동체에서 구성
원의 전부 혹은 다수가 실질적으로든 묵시적으로든, 강자의 이익이 정의라는 트
9) 이 장에서는 먼저 첫 두 개념을 논의하고 동의에 의한 것을 별도의 장에서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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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마코스 식의 정의관을 갖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
가 법적 정당성의 본질을 현실의 권력관계나 그 결과와 동일시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힘(power)이 아니라 ‘법’이라는 다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할 만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셋째, 법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자발적 동의에 의한 질서와 강제
적으로 주입된 명령에 대해 복종의 차이를 형해화(形骸化)하는 것이다. 이는 복
종이라는 형식의 동질성에만 주목하고, 내용적 차이-협력의 질적 차이는 물론,
강요된 복종에 의해 그 질서의 붕괴를 앞당기기도 하는-를 간과한 결과다. 무엇
보다, 강제성을 법의 본질로 이해하는 것은 법의 성격과 내용에 대한 평가나 수
정에 제한을 가져오게 된다. 긴급조치 시대처럼 법에 대한 비판이나 개폐와 같은
절차적 논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권력의 정치적 정당성을 논구하
기 어렵다.
대안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권위다. 이것은 구체적인 ‘힘’에 의해 뒷받침
되거나 힘으로 표출될 수 있지만, 힘 자체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때로 그것은 물
리적 힘에 기반을 두지 않고서도 사회구성원들에게 복종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권위는 정당성을 요구하기 이전에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는 개념이라고도
할 수 있다(Raz 1990). 그렇다면 법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강자의 힘이 법적
정당성의 근본이 될 수 없다는 회의에 대한 대안으로 서구의 중세에는 ‘종교적
권위’라고 하는 확실한 해결책이 존재했다. 세속적인 법적 타당성의 기반을 신의
섭리나 자연법에 의지한 것이다. 사회계약론 역시 이러한 종교적, 형이상학적 기
반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사회계약론이야말로 중세적 관념에서 출발하
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로크는 기독교적인 통찰과 자연법에 기초한 세계관으로
부터 사회계약을 도출하고 있다. 자연상태에서 출발해 ‘신성한 제도’로부터 ‘시
민 권력의 분배’를 정당화하는 것이다(Waldron 2002, 3-17). 문제는 현대의 법적
정당성이 근대 초기의 사회계약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종교적이거나 신성한 가
치를 기반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법률 이론에서 자연법은
실정법의 수립과 동떨어져 있거나, 실용적 측면에서 강한 회의주의에 부딪쳐 기
능적 가치를 거의 상실했다(Coicaud 2002, 21).
한편, 어떤 법이 정치권력의 통치를 피치자들이 수용 가능한 수준에서 지속적
으로 제한할 때, 이 사실 자체에서 ‘권위’가 나온다는 관념도 있다. 근대 이후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에 대한 비판적 검토: 법, 동의, 정의, 토의를 중심으로 107
헌법이 그러한 역할을 한다. 헌법은 법을 왜 지켜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해 한
사회가 도달한 답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헌법이 헌법을 지켜야할 이
유까지 제공할 수는 없다. 헌법의 존재와 그 내용의 타당성만으로는 헌정주의가
완성되지 않는다. 헌법전의 명문규정들을 위배하고도 강권에 의해 통치가 지속
되는 경우에는, 헌법이 있지만 지켜지지 않는 상황이 아니라 이미 헌법이 존재하
지 않는 상황이다. 문자로 적혀있고 제목이 ‘헌법’인 어떠한 문서가 있는 것이지
헌법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박동천 2003, 21-3). 바로 이러한 경우가, 법적 정
당화(legal justification)가 독립적으로 정당성(legitimacy)을 구성할 수 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대해 정치적 헌정주의(Political constitutionalism)에서 벨
라미(Bellamy)는 법적 헌정주의(Legal constitutionalism)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지
적한다.
퀸틴 스키너나 필립 페팃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키케로, 그리고 마키아벨
리, 해링턴과 같은 로마의 계승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법에 의한 정체를 구성
해야 한다는 것을 공화주의의 첫 번째 원칙으로 삼았다. 이들은 법에 의한
지배를 자의적 지배와 대비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의적 통치를 극복
하고 법에 의한 통치를 달성하는 것이 법 자체보다는 정부의 형태에 달려있
다고 믿었다. … 어떠한 법도 그 자체로는 통치를 담보할 수 없다. 법은 ‘정치
적 상황(circumstance of politics)’을 넘어서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운용된다
(Bellamy 2007, 80, 88).
다른 말로 하면, 현대 정치에서 “법의 통치는 민주주의, 곧 주장할 자유와 권리
를 표현하고,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대우받을 것을 요구할 수 있는 개별적 시
민의 권력을 필요”로 한다(Bellamy 2007, 141). 헌법이 다루어야 하는 권리의 문
제들, 가령 ‘낙태를 허용할 것인가, 납세의 기준은 무엇인가, 복지는 소유권을 얼
마나 침해하는가, 표현의 자유는 언제든지 허용되어야 하나’와 같은 문제들은 정
치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고 될 수밖에 없다(Bellamy 2007, 17-20). 어떤 정부를
정당한 정부를 만드는 것은 법이 아니라 정치다. 무엇보다 법적 헌정주의는 혁명
을 설명할 수 없다. 현대정치에서는 법을 단지 복종해야 하는 준칙이 아니라 통
108 현대정치연구
2015년 가을호(제8권 제2호)
치의 정당한 수단으로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다.10)
마지막으로 법이 정치적 정당성을 위한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 문화적 다양성을 들 수 있다. 설령 한 사회에서 법이 자기 완결성을 갖는
것으로 인식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유교문화권에서 법에 기반을 둔 통치는 덕(德)이나 인(仁)을 기반으로 한 통치에
비해 그 정당성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 공자와 맹자는 합법성에 의존하는
통치가 정치적 정당성을 보장하는데 불충분하다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피치자
들의 도덕적 타락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한 통치는 복종을 강
제․동원해 낼 수는 있지만,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발적 복종
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유교문화권의 법 관념이 이와 같다면, 해당 문화권에서
합법성이 정치적 정당성의 필요충분조건을 충족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하면, 우선 정당성이 그 어원을 법에 두고 있듯이 이 둘
간의 관계가 대단히 밀접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합법성에 기초한 정당성은
자기완결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인민들이 통치에 복종해야 하는 근본적인 이유
를 법 자체에서 찾기에는 여러 난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2. 동의에 의한 정당성
1) 동의에 기반을 둔 정당성
로크와 루쏘 이래 현대 민주주의에 이르기까지 동의(consent)는 정치적 정당성
의 가장 필수적인 조건으로 여겨져 왔다.11) ‘동의에 의한 정당성’은 앞서 살펴
10) 여기서 민주주의란 단지 절차로서의 다수의 지배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는
그것이 도덕적이며 내용적으로도 좋은 결론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
받는 이념이다. 이러한 민주주의 개념에 대해서는 에스트룬드(Estlund, 2008)를 참조.
11) 로크의 통치론은 사회가 동의에 의해 계약되고 원초적 계약이 이루어진 후에는 묵시
적 동의에 의해 계약이 유지된다는, 사회의 발생과 유지 존속에 대한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로크가, 소유의 불평등을 용인해야 하는 것은 화폐의 발명과 유통에 대해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에 대한 비판적 검토: 법, 동의, 정의, 토의를 중심으로 109
본 합법성에 기초한 정당성에 비해 지배하는 자와 지배 받는 자의 관계가 보다
직접적이며, 분명하게 드러난다. ‘동의’ 개념에서 중요한 점은 그것이 특정한 행
위를 통해 증명된다는 것이다(Beetham 1991, 3). 정당성은 관찰가능하고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거의 없는 공적 행위를 통한 표현에 의해 뒷받침되며, 이 표현이
발휘되고 인지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규범적 힘을 갖게 된다.12) 동의의 행
위가 곧바로 실질적이며 상징적인 강제력의 원천으로 작동하면서, 그 행위에 참
여하는 사람들에게 ‘구속력(binding force)’을 부여하는 것이다.13)
모든 이론가들이 이 같은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인민의 ‘동의’가
가진 정치적 역할과 가치를 소극적으로 받아들이는 학자들이 있다. 세계사적 차
원에서 역사적 구조주의를 주장한 스카치폴은 한 국가 내에서 피치자들의 동의
가 중요한 정치적 국면에서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Skocpol 1979). 미헬스
(Michels 1966[1911])나 파레토(2011[1935]) 등도 역사적으로 인간 사회는 대부분
귀족정 형태의 지배를 받았고, 인민의 역할은 단지 그들을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요컨대 과두제의 철칙과 지배 엘리트의 순환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 결정론이나 엘리트주의에 따르면, 정치적 정당성
이란 피치자의 동의는 부차적이고, 사후적 해석에 불과하다.
그러나 역사적 구조주의에서 피치자의 역할은 전혀 결정적이지 않은가? 코아
인간들이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는 맥퍼슨의 지적에도 주목해야 한다(패이트만
1995, 249-250).
12) ‘자연스럽게’라고 하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자연스럽다는 것은 동시에
더 이상 설명하기 어려운 추론의 과정을 뜻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추가적인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동의가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이 되는 과정이 그것을 받아
들이는 혹은 창조하는 주체들의 어떠한 상태변화를 통해 일어난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러한 마음의 변화를 통일적인 논리로 설명하기가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하다는 뜻이
다. 이에 대해서는 윈치가 루이스 캐롤(Lewis Carroll)의 논문 「거북이가 아킬레스에게
한 말」의 사례를 들며, “논리의 핵심 부분에 해당하는 실제 추론 과정을 어떤 논리
공식으로 표상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 부분을 참조(윈치 2011[1958], 123-5).
13) 구트만과 톰슨은 토의(deliberation)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로 구속력을 불러일으키는
‘이유 부여 기능(reason giving function)’을 제시하고 있는데(Gutmann & Thompson
2004), 이러한 기능은 토의 이외에 동의나 다른 행위를 통해서도 나타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핏킨 역시 대표제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대표 선출과정에 참여하
는 사람들에게 구속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Pitkin 1967).
110 현대정치연구
2015년 가을호(제8권 제2호)
코는 피치자의 동의가 항상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지는 않더라도, 그것을 무의미
한 행위로 보는 것은 역사에 대한 오독이라고 말한다. 엘리트주의 이론에 따르더
라도, 통치자들은 그들의 권력 기반이 사회에 깊숙이 침착해 있는 때에만 안전하
고 안정된 상황을 누릴 수 있다. 통치자가 권력을 향유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상태는 피치자들이 통치자의 지배에 동의하는 경우다. 그렇지 않다면, 반드시 얼
마 지나지 않아 위기가 찾아오게 마련이다(Coicaud 2002, 54-66). 결국 구조결정론
에 대한 극단적인 이해를 제외한다면, 행위가 구조에 제약되지만 동시에 구조 역
시 다양한 가능성들의 조건을 제공하는데 그친다는 것은 사회과학 일반에서 받아
들여 질 수 있는 입장일 것이다.14) 특히 혁명과 같은 중대한 정치적 변화에서 동
의와 관련된 구체적인 정치 행위의 중요성은 결코 간과될 수 없다. 따라서 정치적
정당성이 인민의 ‘가시적으로 표현된 행위로서의 동의(consent as expressively
visible actions)’에 기반을 둔다는 주장은 검토할 가치가 있다.
2) ‘동의 ’ 개념에 대한 비판과 합당한 동의 (reasonable consent)
그러나 동의에 기초한 정당성에 대한 반론이 적지 않다. 이에 대한 가장 오래
되고 치명적인 비판으로는 실제로 그러한 방식의 계약과 동의에 의해 정치공동
체가 수립되지 않았다는 데이비드 흄(Hume)의 지적을 들 수 있다. 그는 동의에
기초한 계약에 의해 사회가 수립되었다면 그 계약 이전에는 사회가 부재(不在)했
다는 것인데, 사회가 부재한 상황에서 계약이 어떻게 가능하고, 또 왜 그것이 지
켜져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졌다. 즉, 계약론은 원천적인 범주의 오류를 범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현대에 들어서는 동의와 계약의 실재(實在)
여부 보다는 개념적 적실성을 따지는 것이 보다 중요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도 세 가지의 문제점이 있다.
첫째, 동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적 정의(definition)에 대해 인민들 간에 혹
14)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한 해석으로서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이러한 관점을 잘 보여
준다. 벨라미에 따르면 그람시의 핵심 주장은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이해를 뛰어넘어, 경제적 토대란 어떠한 발상이나 상상력을 가능, 혹은 불가능하게 하
는 물적 조건이다(Bellamy and Schecter 1993, 106).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에 대한 비판적 검토: 법, 동의, 정의, 토의를 중심으로 111
은 정치공동체 간에 합의할 수 있는 형식과 내용의 불명확성이다. 동의가 단일한
보편적 정의에 의해 확정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며, 만장일치(unanimity)와 완전
한 무질서(anomie)의 어느 중간에 위치한 일종의 구성적 개념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면, 그 중간의 어느 지점을 임의로 동의의 기준으로 삼아 정당성을 논의하는
것이 이론적, 실제적으로 대단히 어렵다.15)
둘째, 묵시적 동의(tacit consent)가 가진 불안정한 논리적 기반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정치 공동체의 성원들은 그들이 실제로 동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현존하는 통치 권력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들의 단기적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악한 정부를 수용하는 것이 무정부상태보다 낫
다는 홉스식의 주의주의(voluntarism)를 수용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현재의 통치
권력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현행 선거 제도 하에서 합법적으로 승리했다는 점이
분명하기 때문이 그 통치를 승인해야 한다는 관점이 있다. 그러나 지극히 제한적
인 수의 경쟁적 정치권력 중에서 누군가를 지지한다는 정도의 선택은, 자유로운
계약이나 동의가 가진 원래의 맥락에서 너무 멀리 있다. 이러한 약점들 때문에
흄(Hume)은 계약에 의한 동의의 대안으로 관행(custom)을 제안하기도 한다. 관행
은 겉으로는 드러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합의로서, 약속 행위가 아
니라 ‘우리에게 공통되는 일반적인 이익감각(a general sense of common interest)’
에 따라 편리(convenience)를 추구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다(이병택 2015, 124).
세 번째로, 설령 동의의 개념과 그것을 확정하는 과정에 대해서 합의한다고 하
더라도, 그것이 어떤 조건에서 유의미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합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동의는 동의를 의미하는 행위가 나타나고 인지되는 순간에 정치적 정당
성의 기반으로서의 의미를 획득하기 때문에, 그 행위의 조건이 동의의 내용과 질
을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가 된다. 또한 정치적 동의 자체는 완결․미완결이라는
이분법이 아니라 동의가 이루어지는 개별적 조건에 따라 정도의 문제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 어떠한 수준의 동의가 일어났다고 할 것인지, 그처
럼 서로 다른 수준의 동의가 계약의 이행여부에 따라 어떤 권리들을 추가로 발생
15) 이 점은 현대 민주주의에서 가장 보편적인 의사결정 수단인 다수결 원칙이 루쏘의 사회
계약론에서 얼마나 변변치 못한 지위를 갖고 있는지를 상기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12 현대정치연구
2015년 가을호(제8권 제2호)
시킬 것인가의 문제 등이 중요하다. 그런데 뷰캐넌은 동의라는 개념이 문제가 아
니라, 그것을 얻기 위한 조건을 규정하는 것 자체가 확정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
기 때문에 동의 개념의 유용성을 긍정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동의를 확정짓
고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떠한 평등이나 자유, 인권이 보장된 상황에서 이루어
진 동의 행위가 수용가능한지에 대해 먼저 토론해야 하는데, 이것 자체가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난점을 ‘동의의 허구(fiction of consent)’라고
불렀다(Buchanan 2002, 699-710).
사회계약 이론의 현대적 발전은 동의 개념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
하려고 애썼다. 그 결과 나타난 개념이 ‘합당한 동의(reasonable consent)’다.16) 합
당한 동의는 사리에 맞고 받아들일만한 절차와 조건이 충족되면 그것을 동의로
인정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비롯한다. 이를테면 현대의 대의 민주주의에서 합당
한 동의는 선거를 통해 통치의 권위가 인정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민주
적인 선거를 합당한 동의의 필요충분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Urbinati and
Warren 2008). 공정한 게임에 의해 피치자가 통치자를 결정한다는 점이 명확하
다면, 즉 선거를 통해 통치자가 정해지면, 동의를 위한 추가적인 절차는 필요치
않게 된다(Beetham and Lord 1998, 16; Føllesdal 2010). 엘리트 간의 경쟁이 공정
한 선거에 의해 보장되고 인민의 동의에 의해 확정되면 충분하다는 슘페터의 최
소주의적 민주주의론은 이러한 견해의 극단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합당한 동의는 현실정치에서 민주주의와 동의 간에 발생한 긴장을 해
소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이론적 탈출구다. 민주주의가 아테네에서 처음 생겨날
때부터 만장일치에 기반하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합당한 동의라는
개념은 충분히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모두의 동의가 아닌, 참
여, 동등한 기회, 공정한 선거와 같은 조건들과 그 조건에서 발현된 행위들의 반
16) 영어단어 reasonable은 우리말로 이해하기가 까다롭다. 단순히 합리적이라고 해서는 계
산적 합리성을 뜻하는 rational과 차별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서술어로는 ‘사리에 맞
다’ 혹은 ‘이치에 맞다’가 적절하나, 간결한 수식어로 쓰일 때는 ‘기준이나 조건에 알맞
다’는 ‘합당한’과 ‘사리에 어긋나지 않고 알맞다’는 뜻의 ‘온당한’도 적절해 보인다. 본
고에서는 ‘합당한’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였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이치에 맞아 받
아들일만한’이라는 뜻의 조어(造語)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에 대한 비판적 검토: 법, 동의, 정의, 토의를 중심으로 113
복적 실천을 민주적 정당성의 구성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합당한 동의에
의해 민주적 권위가 보장되는 순간에 그 권위에서 나오는 정치권력이 정당성을
획득한다. 현대 대의민주주의에서는 이러한 합당한 동의 개념은 다양한 변주를
통해 점차 강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공정으로서의 정의와
토의 민주주의다.
3. 절차적 정당성: 정의와 토의
계약적 원리에 기반을 둔 ‘동의’는 여러 약점에도 불구하고 현대 민주주의 이
론에서 폐기되지 않고, ‘합당한 동의’라는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정당성과
관련해 민주주의가 유일한 게임으로 뿌리내린 20세기에는, 민주적 원리에 부합
하는 합당한 동의가 순수한 개념적 동의를 대체할 수 있는 절차적 정당성을 갖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절차주의(proceduralism)라고 하는 시험의 과정을 통과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차주의의 특징은 도덕이나 가치 같은 규범적 요소보다, 절차의
형식적, 기능적 중립성에 상대적으로 주목하게 된다는 점이다.
1) 정의에 기반을 둔 정당성과 그에 대한 비판
롤즈의 공정성으로서의 절차적 정의(procedural justice as fairness)는 합당한 동
의에 대한 현대 이론에서 가장 뛰어난 것 중 하나다. 이것은 어떠한 개인적 취향
이나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고, 타인이나 국가의 개입 없이 이성적, 감성적으로
순수하게 격리된 상태를 이론적으로 가정했을 때 무사공평한 판단을 내릴 수 있
다는 주장이다. 즉, 타인과 자아의 이해관계와 교류가 정지된 무개입 상태에서의
판단이 하나의 절차적 정의를 구성하며, 이것이 ‘합당한 동의’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항상 바람직한 결과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제한적 조건에서의 공적 추론이 잘못된 결론으로 귀결될 가능성도 적지 않다.
과정은 공정했으나 결론이 잘못되었다고 판단될 때 그 가능성은 두 가지다. 하나
는 절차에서의 공정성은 보장되었지만, 주체들이 의도치 않은 소통과정의 실수,
114 현대정치연구
2015년 가을호(제8권 제2호)
오해, 오류 때문에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경우다. 둘째로, 어떤 결정이 그
시점에는 구성원들이 원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정으로 인해 나타난
결과는 구성원들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아닌 경우다(드워킨 2004, 256-61). 그리
고 이 두 가지 모두 우리의 의사결정과정에서 일상적으로 빈번히 일어나는 것으
로, 결정의 주체가 부당한 선입견이나 감정에 휩싸여있거나, 시간적 제약, 부족
한 정보에 근거해 결정을 내릴 때 곧잘 나타난다. 이 때문에 절차적 정의의 내용
물을 헌법적 가치의 범위 안에 제한하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헌법적 권리는
시공간을 넘어서 확정적일 수 없으며, 정의(justice)가 아니라 정치에 의해서 결정
된다.17) 이 때문에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합당한 동의의 기반으로 삼는 경우에도
그 내용은 여전히 문제가 될 수 있다.
피터(Peter 2009)는 롤즈의 정의론을 재해석하면서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인다.
그는 기본적으로는 무지의 베일에 기반을 둔 롤즈의 절차주의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공정한 절차에 의한 결정도 다시 결과를 통해 재평가할 수 있다는 맥락에
서 ‘합리적 절차주의(rational proceduralism)’ 개념을 제안한다.18) 보다 나은 결과
를 얻기 위해, 절차적 정의와 독립적인 기준에 따라 결과가 보정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이것이 롤즈의 순수 절차주의(pure proceduralism)와 자신의 합리
적 절차주의의 차이라고 말한다. 피터는 의사결정의 최종단계에서 결과의 합리
성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경우 정당성은
그 결정을 지지할만한 이유를 시민들이 공유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그 결정을 따라야 하는 의무를 가진 시민들이야말로 그 결정이 이치에 맞는지를
판단할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Peter 2009, 69-71).
그런데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결과의 합리성을 담보하기 위한 개입이 언제,
누구에 의해 일어나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롤즈의 정의론에서는 의사 결정 과정
에서 각각의 구성원이 무지의 베일 뒤에서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그 결과에 대해 구성원들이 불만족스럽다고 느껴서 결과를 보정하고자 한다면,
17) 벨라미는 롤즈(Rawls)와 흄(Hume)을 따라 정의(justice)를 ‘인간이 협력을 추구할 수 있고
또 해야하는 규범적 조건’으로 이해한다(Bellamy 2007, 17).
18) 물론 그는 이 주장이 롤즈의 이론에 이미 내제되어 있다고 말한다.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에 대한 비판적 검토: 법, 동의, 정의, 토의를 중심으로 115
그 추가적인 ‘합리적 절차’에 참여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 때의 개인들은 무지
의 베일 뒤에 계속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밖으로 나온 것인가? 만약 전자라면,
결과가 달라질 것을 기대할 수 있는가? 만약 후자라면 베일 밖의 주체가 베일 뒤
의 주체가 결정한 내용을 수정하는 것이 롤즈의 절차적 정의를 여전히 존중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절차적 정의를 통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두 개의 상반된 판
단 기준이 존재하고, 시간적으로 후자의 기준이 전자의 기준을 보정하게 된다면
앞의 절차가 굳이 필요한가? 마넹은 바로 이 지점이 합당한 동의의 기초로서 정의
론이 가진 원초적 문제라고 지적하고, 공적추론(public reasoning)에 기반을 둔 ‘소
통의 반복(repetition of communications)’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Manin 1987, 355).
2) 토의 (deliberation)에 기반을 둔 정당성과 그에 대한 비판
마넹과 같은 학자들은 합당한 동의가 도출될 수 있는 절차는 토의라고 말한다.
토의를 통해 타인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것이야말로 정치적 정당성을 위한 절
차주의의 조건이자 내용이며, 이점이 시장 매커니즘을 통해 이루어지는 슘페터
식의 정치와의 차이점이다. 토의를 통해 정치적 설득이 가능하고, 그 결과가 장
기적으로 효과를 가지며, 대중이 개명되는 데, 이것이야말로 정치에서 가장 필수
적인 요소라고 보는 것이다(Manin 1987, 355-7).
무분별한 소통이 오히려 선동의 위험을 낳고 일반의지를 발현할 수 있는 인간
본성의 순수성을 훼손할 수 있다는 루쏘나, 무지의 베일 뒤에서 가장 공정한 판
단을 내릴 수 있다는 롤즈에게는, 결과를 보정할 합리적 절차가 허용되더라도
상당한 수준의 제한이 따르게 된다. 하지만 루쏘나 롤즈와 달리 마넹이 제시하는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개인의 공적 선호가 사전(事前)적으로 결정되지도 않고, 되
어서도 안 된다. 타인과의 소통 이전에 개인이 갖는 선호는 토의를 통해 보완되
어야 하는 아직 불완전한(incomplete) 선호다.19) 소통 없는 궁리(reasoning without
communication)에 따른 원초적 선호에 의한 정치적 결정은 충분히 합당(reasonable)
19) 여기서의 완성된(complete) 선호는 개인별로 차별적이고 상대적이라는 점에서 루쏘의
일반의지나 전체의지와 다르다.
116 현대정치연구
2015년 가을호(제8권 제2호)
하지 않은 것이다.
토의가 가장 중요한 정당성의 기반이 된다면,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평등
하고 자유로운 토의에 대한 제한과 개입은 가능한 적을수록 좋다. 참여자는 더
자유롭고 더 많은 토의를 통해 이치에 합당한 선호를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정
당성의 수준은 그 토의 절차가 합당한 동의라고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는가의 여
부에 달려있다. 이 경우 토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조건과 운영방식이 중요한
변수가 된다. 그리고 현대의 토의 민주주의 이론에서는 ‘동등한 발언권’과 ‘합당
한 배제’가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원리로 제안된다.
토의에서 합당한 동의가 도출될 수 있다고 보는 첫 번째 원리는 ‘동등한 발언
권(equal saying)’의 보장이다. 가령 ‘누가 통치할 것인가’, ‘법으로 확정되어야 할
권리들이 무엇인가’와 같은 문제에 대해 시민들이 자유로운 의사표현의 기회를
평등하게 갖는다면,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제도나 절차에 따른 결론은 동의
와 같은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핵심적 문제는 동의 자체가
아니라 동의를 위한 조건이다. 그리고 동등한 발언권의 보장은, 반드시 모두가
발언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동등한 고려(equal consideration)가 충족되었다고 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된다(Buchanan 2002, 710-1).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토의를 통해 평등, 민주주의, 합당한 동의는 서로 밀접한 연관관계를 맺는다. 민
주적 제도는 시민의 도덕적 평등이라는 원칙에 기반하며, 민주적 제도에 따른
토의 절차는 개별 시민들에게 그 결과에 따라야 하는 이유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의 수립에서 결과의 도출에 이르는 과정 자체는 해당 정치체를 하나
의 윤리적 공동체로 만들어 내는데, 동등한 발언권이라는 조건하에서 각각의 시
민들은 그 정치 공동체가 만든 법에 따라 서로에게 복종할 의무를 갖게 되기 때
문이다(Buchanan 2002, 714-5).
두 번째로, 합당한 배제(reasonable exclusion)의 원칙이다. 정치적 결정은 반드
시 모든 시민들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정치적 결정이 일반 시
민에게 누구에게나 공개된 토의 절차에 의한 산물이라면, 그것은 정치적 정당성
을 획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여하지 않은 시민의 의견은 논의에서 배제될
수 있고, 또 토의 과정에서 반복적이고 집단적인 공적 추론을 통해 다양한 의견
들 역시 배제될 수 있다. 즉, 토의를 통해 다양한 해결책들이 제시되고, 또 설득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에 대한 비판적 검토: 법, 동의, 정의, 토의를 중심으로 117
과 배제라는 절차를 거치는 것이다. 가령 토의가 제도적, 실제적으로 중요한 정
치적 절차로 자리잡은 다원주의 사회에서, 정치인들은 설득이라는 수단을 통해
경쟁하며, 다당제에 기초한 정당 체제가 이러한 절차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다(Manin 1987, 357-9). 물론 이러한 절차를 통한 결론이 구성원 전체의 동의의
결과와 동등한 것인지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확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토의를
기반으로 한 절차가 충성 서약, 구두에 의한 동의 표시, 투표에 의한 선거 참여에
비해 정당성이 부족하다고 볼 근거는 없다(Beetham 1991, 18). 무엇보다 토의가
아닌 다른 가시적인 동의의 표현행위들 역시 모든 대상의 참여와 만장일치를 전
제하지 않는다.
토의에 기초한 정당성은 소통에 의한 합당한 동의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긍정
하며, 현존하는 통치 권력의 유지, 존속, 발전은 ‘소통-동의’의 매커니즘과 밀접하
게 연관된다. 반복적 소통에 의해 축적된 상호 신뢰와 호혜성(reciprocity), 공동체
내에서 자유로운 토의의 일상화와 제도화는 높은 수준의 합당한 동의에 이르는
중요한 조건이다. 물론 이러한 조건은 단기간의 교육을 통해 완성되기 어렵고, 반
복적 실천을 통한 연습을 통해 하나의 사회적 습관(social habit)으로 형성된다.20)
그러나 모두가 토의에 의한 절차적 정당성 개념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에스
트룬드는 토의에 의한 절차적 민주주의 역시 다른 민주적 절차와 마찬가지로 지
적(epistemic)으로 타당한 결과들을 요구받는다고 주장한다. 다수결 민주주의에서
의 결론을 우리가 수용하는 것은 잠정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합의했기 때문이지,
그것을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러한 입장은 토의에 의한 결론
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만약 토의에 의한 민주적 절차가 반복해서
정치적, 도덕적으로 나쁜 결과를 도출한다면, 그 절차가 아무리 평등하고, 공정
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받아들일 수 있는 동의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게 된다
(Estlund 1998). 이에 대해서는 토의 민주주의자들의 반론이 없지 않다. 이들은
오히려 토의야말로 지적 민주주의(epistemic democracy)가 추구하는 결과에 가장
20) 정치적 정당성과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이 상당한 연관성을 갖는다는 점을 이 논문
에서 추가적으로 논의하기는 어렵다. 다만 특정한 정치적 귄위가 정당성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습관의 형성이 미치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샤(Schaar 2000, 23)와 핏킨(Pitkin
1967, 219, 236)을 참조할 수 있다.
118 현대정치연구
2015년 가을호(제8권 제2호)
근접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정당한 과정이라고 본다. 토의 민주주의에서는 각 개인
이 참여과정에서 공적 대화를 나누게 되고 정보를 교환하면서 서로 간에 개명(開
明)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교육적 효과가 또한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집단적 의사결정 과정에서 새로운 지혜와 지식을 창출하는 능력을 각 개인이 함
양하는 것이 절차주의에서 필수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본다면, 토의 민
주주의는 지적 민주주의 이론과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필수적인 조건으
로 삼게 된다(Cohen 1986; Sen 1993, 3; Peter 2009, 63-5).21)
결과적으로 토의 절차와 지적 민주주의가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은 크게 두 부분
이다. 하나는 의사 결정과정, 다른 하나는 거기서 도출되는 결과의 질적 수준이
다. 곧 ‘무엇이 의사결정 과정이라는 절차의 질을 결정하는가’, 둘째 ‘결과를 평
가하는 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그것을 판단하는가’라는 질문이 정당성의 정도를
결정한다. 결국 토의에 기반을 둔 합당한 동의 개념에서 중요한 것은 ‘합당성
(reasonableness)’의 내용이다. 그것을 판단할 주체, 그들이 갖는 기준이 정당성의
기준이 된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의 정치공동체가 가진 역사성, 문화적 정체성과 필연적으
로 결부되는 질문들이다. 예를 들어, 파레크는 비서구 사회에서 비자유주의적 민
주주의(Non-liberal democracy)의 가능성과 필요성에 대해 말하면서, 서구적 선거
제도 없이도 실현가능한 합당한 동의의 정치형태를 제시한다. 그는 종족적, 종교
적으로 상이한 집단들이 한데 어울려 정치공동체를 형성하고 있고, 그러한 배경
이 각 개인의 정치적 정체성과 선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곳에서는, 보통선거
권에 의한 다수결 민주주의가 다수의 전제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리
고 그 대안으로 정부의 수립이나 중요한 정책적 사안을 결정할 때, 상이한 사회
집단 간의 합의를 추구하는 것이 오히려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Parekh 1993,
171). 여기서 그가 사용하고 있는 ‘합의제적(consensual)’이라는 용어는 경쟁에 의
한 선거에 기반하고 있는 현대 자유민주주의의 원리와 차별적인 것이지만, 이치
21) ‘대화’를 통한 개명(開明)의 가능성에 대해서 핏킨(Pitkin 1967)과 마넹(Manin 1997)은
선거에서 대표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대중의 공적․사적 대화가 가진 반복
성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지적한다.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에 대한 비판적 검토: 법, 동의, 정의, 토의를 중심으로 119
에 합당해서 받아들일만한 합당한 동의의 한 종류임이 분명하다. 또한 합의제적
민주주의가 갖는 정당성은, 방법론적 개인주의에 기초한 자유주의적 전통을 가
진 집단에서 나타나는 합당한 동의와 형식 및 내용에서 차이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정당성의 기반으로 합당한 동의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다양
성과 상이한 가치들이 해당 정치 공동체의 절차주의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은 절차가 구비해야 하는 조건과 결과, 주체와
대상에서 모두 실제로 합당성이 구현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보면, 합당한 동의는 민주적 원칙과 관계가 있지만, 이것이 개인주의적
전통이나 자유민주주의에만 배타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동의의 방
식은 다양하며, 합당한 동의에 도달하기 위한 절차와 과정의 질적인 차이는 문화
적 다양성에 기초한다. 어떠한 문화적 속성이 합당한 동의에 더 많은 절차적 정
당성을 부여한다고 하는 보편적 기준은 마련되기 어렵다. ‘이치에 타당한’이라고
하는 합당성의 개념 자체가, 공적 의사결정 과정이 진행되는 해당 사회의 주체들
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에 종속적이기 때문이다.
Ⅲ. 결론
통치는 언제 정당하며, 인민은 언제 복종해야 하는가? 본고에서는 이 질문을
정치적 정당성에 대한 기존의 이론들의 성격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었다.
첫째, 권력의 행사가 법에 의거하고 있는가? 둘째, 법의 수립과 집행에서 인민의
동의가 있었는가? 셋째, 합당한 절차가 있었는가?
먼저 합법성은 정당성의 중요한 개념적 원천이지만 자기완결성을 갖지 못했
다. 동의 개념은 사회계약론의 대두와 더불어 근대 정치에서 중요한 정당성의
원천으로 이해되었지만, 순수한 계약적 의미로서의 동의는 많은 이론적 반박에
부딪쳤다. 여기서 새롭게 ‘합당한 동의’라는 개념이 탄생했고, 그 중 최근 들어
가장 주목받고 있는 이론은 절차주의에 기반을 둔 정의와 토의다. 그러나 이러한
120 현대정치연구
2015년 가을호(제8권 제2호)
절차적 정당성 역시 합당한 동의의 기초로서 필요충분조건이 된다고 하기는 어
렵다. ‘합당성’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민이 언제 복종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합당성을 획득하려면, 그것을 승인
하는 주체인 인민의 다수가 그렇게 생각하고, 공적 공간에서 인민들의 가시적이
고 유의미한 행위에 의해 그 생각이 확증되어야 한다. 그런데 정당성의 기반으로
서 합당한 동의의 절차와 내용은 문화적, 사회적으로 특수하다. 따라서 어떠한
절차든지 그것이 정치적 정당성의 차원에서 최종적으로 동의의 합당성을 획득하
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그 절차는 보편적 정의(universal definition)에 의해 결정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Beetham 1991, 13-7).22) 이는 정당성 개념이 법, 동의,
정의, 토의를 넘어서서 상대적인 가치를 포괄해야 함을 뜻한다.
정치적 정당성을 단일한 기준과 절차에 의해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정
치공동체의 정당성 수준은 제도나 개념을 이해함으로써 판단 가능하지 않다. 한
정치체제가 정당한가의 판단은 그 사회의 주체들이 공유하고 있는 가치를 고려
할 때만 가능하다. 그것은 인민의 믿음이 발현되는 언표와 체계를 그 사회에서
익힘으로써만 가능하고, 삶의 방식(forms of life)에 대한 체득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이관후 2015).
22) 비담은 여기서 동의의 개념을 좁은 의미의 특수한 것과 광의의 일반적인 것으로 구분한
다. 즉 각각의 문화권에서 유의미한 동의 개념과, 이것이 문화권을 뛰어 넘어서 일반적
인 의미의 동의 개념으로 나뉠 수 있는데, 후자는 실체를 갖는 것이 아니라 동의라고
하는 개념의 외형, 즉 기표를 지칭할 뿐이다(Beetham 1991, 18-9).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에 대한 비판적 검토: 법, 동의, 정의, 토의를 중심으로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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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 2015.08.30.
심사일: 2015.09.11.
게재확정일: 2015.10.04.
정치적 정당성의 기초에 대한 비판적 검토: 법, 동의, 정의, 토의를 중심으로 123
【 ABSTRACT 】
A Critical Review on the Foundation of
Democratic Legitimacy
Lee, Kwanhu | Sogang
University
This paper argues that law, consent, justice, and deliberation are not enough
to be a foundation of political legitimacy. Though legitimacy is closely related
to law etymologically and historically, legality cannot be an independent ground
of legitimacy by itself. Since the emergence of Social Contract Theory, consent
has been understood as necessary condition for political legitimacy. However,
there are some difficulties with the concept of consent as foundation of legitimacy;
difficulty of defining the concept of legitimacy, unstable ground of tacit agreement,
uncertainty of the conditions for consent. Therefore, modern democratic theory
accepts the concept of ‘reasonable consent’ in which some reasonable procedures
such as fair election replace consent. In contemporary democratic theory,
procedural justice and deliberation are regarded as relevant contents for reasonable
consent. Yet, proceduralism cannot guarantee the ‘reasonableness’ in procedure
and outcome independently. It means that political legitimacy should consider
relative social values, history, and culture beyond law, consent, justice, and
deliberation.
Key Words | Legitimacy, Law, Consent, Proceduralism, Reasonable cons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