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현. 2017. “이승만과 한국 자유주의: 중기 사상을 중심으로.”
이승만과 한국 자유주의 255
이승만과 한국 자유주의:
중기 사상을 중심으로*
1)
정승현 |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 국문요약 |
이 글은 서구 정치사상의 한국화라는 문제의식에서 개화기 이래 도입된 서구 자유주의가
보수적 자유주의로 변모ㆍ정착된 궤적을 이승만을 통해 추적하려고 한다 . 논문은 두 개의 주
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 첫째, 자유민주주의라는 형태로 조선에 도입된 자유주의가 식민지
상황 속에서 어떻게 변용되었는가 하는 점을 분석한다 . 이 부분에서는 이승만이 국가 ㆍ국민
만들기의 관점에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적극 수용했으며 제도의 조속한 도입에 주안점을 두었
음을 지적했다. 또한 개인이 독립된 주체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존재로 설정되면서 강한 국가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었음을 자유주의임을 밝히고자 했다 . 둘째,
이승만의 반공노선은 국가독립이라는 민족주의의 개별 과제가 계급평등이라는 또 다른 과제를
중층결정하는 민족주의의 층위, 그리고 민주주의/공산주의의 대립구도와 친자본주의론을 바탕
으로 하는 자유주의의 층위 위에서 구축되었음을 분석하였다 . 결론에서는 그의 자유주의가
보수적 자유주의로 규정되는 계기를 분석하며 , 해방공간에서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들은 보수
적 자유주의라는 이념적 상호 친화성 때문에 쉽게 결집할 수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했다 .
주제어 | 이승만, 서구정치사상의 한국화, 자유주의, 보수적 자유주의, 반공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4S1A3A2043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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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봄호(제10권 제1호)
Ⅰ. 들어가는 말
현재 한국의 정치체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국인들은 아마 십중팔구 ‘자
유민주주의체제’라고 말할 것이다. 물론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름이 한국에 타당
하기나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겠지만, 최소한 형식의 측면에서 한국의
정치체제는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는 데 큰 이견(異見)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자유민주주의는 자유주의라는 포괄적 철학과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의 합
성어이지만 한국에서는 두 용어의 결합에 이의가 제기되지 않으며 그동안 별 문
제없이 자유민주주의로 호칭되어 왔다. 그리고 이 자유민주주의가 언제 한국에
설립되었냐고 물어본다면 아마 백에 구십구는 ‘해방 이후에 들어와 48년 정부수
립과 더불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해방공간에서 자유민주주의체제의
수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승만이 그 이전부터 민주주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기에 그와 같은 체제로 정착되었는가에 관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과 한국 자유민주주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보수적(긍정적)ㆍ
진보적(비판적)ㆍ분석적 접근법으로 나누어져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이승만이
한국에 자유민주주의를 ‘세웠다’는 주장으로 특히 보수주의자들에게 널리 퍼져
있다.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이승만의 단정 노선에서 출발”(김
일영 2013, 83), “자유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시장경제가 무엇이고 근대 국민국가
의 헌정질서, 정치체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았던 사람의 최고봉에 이승만 박사
가 … 건국헌법을 만드는 데 기본적 틀을 제공”(강경근 2008, 149), “자유민주주
의 원칙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미국식 대통령 중심제 통치원칙을 확
립”한 ‘국가 창건자’(유영익 2012, 8), 혹은 조금 폭을 넓혀 “한국 근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승만을 주요 대리인으로 한 개화기 이래의 문명개화파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하면서 이승만을 ‘문명개화의 적자(嫡子)’라고 표현하는(이
영훈 2007, 249) 보수적 논객들은 ‘건국의 아버지’로서 이승만을 평가하는 데 열
심이지만, 막상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인식에 관한 체계적 연구는 찾기 어렵다.
둘째,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미국에 의해 이식되었고, 그 내용도 기껏해야 반
공국가주의에 불과하다거나 혹은 서구 자유주의와 비교할 때 ‘거짓 자유주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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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적 연구들이 있다. 해방공간에서 “미국을 통해 한국에 이식
된 ‘자유민주주의이념’은 이념과 사상의 국가적 통일을 전제로 한 ‘냉전자유주
의’”라는 주장(박찬표 1997, 316), 이승만은 “미국이 부과한 … 미국식 자유민주
주의를” 내세웠지만 실제 그 내용은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억압하는 ‘거짓
자유주의’”에 불과했다는 평가(조현연 2003, 307, 296), 한국에서 자유주의란 “현
존 자본주의 사회에서 존재할 수 있는 자유주의자의 유형 중에서 가장 타락한
자유주의자” 혹은 ‘상처받은 자유주의’라고 지적하면서(김동춘 2001, 127) 이승
만을 “말로는 자유주의를 외치는 엉터리”(김동춘 1996, 283) 정도로 취급하는 논
평들에서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는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심지어 이나미
는 일제강점기 자유주의를 ‘친일파의 자기정당화의 논리’로 해방 후의 자유주의
는 ‘분단의 논리’로 격하시키면서 “이승만도 자유주의 내지 자유민주주의를 표
방했지만, 실제 그의 정치행태는 가장 반(反)자유주의적인 모습을 보였으므로 이
범주에 넣기 어렵다고 보여진다”고 지적하며(이나미 2011, 157n) 이승만을 불명
예스러운 한국 자유주의자들의 명단에서조차 제외시킨다.
셋째,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그 자체를 분석한 많지 않은 연구들이 있다. 특
히 ‘이승만 재평가’라는 계획 아래 그의 초기 사상을 연구한 논자들은 독립정신
을 논거로 삼아 이승만의 사상을 ‘생명, 자유, 재산의 보전 및 인민주권론을 강
조한 로크적 자유주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최연식 2010; 오영달 2008). 그러나
생명ㆍ인권ㆍ재산권ㆍ인민주권론은 개화기 이래 거의 모든 계몽지식인들이 거
론하던 요소였다. 이승만이 로크적 자유주의를 중시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생명
과 재산권 보호에 역점을 두고 국가권력을 제한하려는 로크 계열의 자유주의를
이념적 내용으로 갖고 있었던 미국 자유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
다. 이와는 달리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인식의 성격에 초점을 맞춘 연구들이
있다. “자유에 바탕을 두고 있는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선호와 국가에 대한
책임이 따르는 제한된 의미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승만의 친미적 자유민주주의
국가건설사상”이라는 연구(이시형 2006, 50), 이승만의 자유주의는 “반공에 종속
된 자유주의, 곧 ‘반공적 자유주의’”,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고전적 자유주의
가 아니라 국가를 강조하는 국가주의에 더 가깝다”고 지적하는 연구가 있다(양승
태ㆍ전재호 2007, 268, 256). 또한 이승만의 사상을 개화기 이후 한국 우파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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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서 파악하며 이승만의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를 규정하는 공통의 요소를 ‘반
공 국가주의’에서 찾는 전재호(2001)의 글도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 연구들은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를 서구의 어떤 ‘원형’ 혹은 ‘순수’ 자유민주
주의와 관련하여 평가하지 않고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서 변모되거나 혹은 선택
적으로 수용된 측면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앞의 두 연구들보다 진일보했다고 평
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승만에게만 집중하여 그의 자유민주주의에
관해 체계적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아쉽다.
첫 번째 입장의 논자들은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를 한국의 보수적 자유주의와
같은 것으로 보며, 이것이 개화기 이래 계승되어온 한국 자유주의의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두 번째 입장은 서구 자유주의와 비교하여 한국 자유주의의 파행성을
지적하고 ‘반공국가주의’에 불과한 이승만의 ‘허구적’ 자유민주주의를 비판한다.
셋째 입장은 이승만의 자유주의가 한국의 역사적 경험 속에서 서구자유주의의
요소들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며 서구의 그것과는 다른 형태로 변형되었음을 강
조하면서 한국의 보수적 자유주의와 연결시키고 있다. 필자는 두 번째 입장의
비판적 정신에는 동의하지만, 한국의 자유주의가 서구와 같을 이유도 없고, 서구
정치사상은 그것이 수입된 시공간의 문제의식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용된다고 보
는 점에서 그들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첫 번째 입장이 내세우는 이승만
과 개화기 이래 자유주의의 연결에는 동의하지만, 그 둘이 무매개적으로 처음부
터 동일한 내용을 갖는 것으로 보는 데에는 반대한다. 이 글은 ‘서구 정치사상의
한국화’라는 문제의식 아래 개화기 한국에 수용된 서구의 자유주의가 이승만이
라는 인물을 통해 한국의 보수적 자유주의로 변용된 사상적 궤적을 그의 중기
저작들에 초점을 맞추어 추적하고자 한다.1)
좋건 싫건 이승만이 현대 한국의 기초를 쌓은 인물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이승만의 긴 생애에서 중기는 미국에 체류하며 독립
운동가이자 정치가로서 국제정치의 현장을 절감하며 본격적 경륜을 쌓고 미래
1) 초기와 중기는 필자의 편의상 구분이다. 초기는 국내에서 애국계몽기의 지식인으로 활동
하던 시기(1890년대 후반-1912), 중기는 ‘105인 사건’이 터지자 미국에서 열리는 국제감
리교대회에 한국 평신도 대표로 참석한다는 명목으로 떠난 1912년 3월부터 1945년까지
의 기간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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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독립국의 구상을 발전시켰던 시기이다. 초기의 이승만이 기독교 문명개화론
자로서 애국계몽기 지식인의 일원이었다면, 중기의 그는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서 – 잘했건 못했건 – ‘정치적’ 활동에 진력하였다. 이때 형성된 인식ㆍ정책ㆍ노
선은 해방 이후 신생 한국의 진로를 결정지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유산으로 구조
화되어 현재의 한국정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
한국정치의 궤도를 결정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이승만의 현실인식이 견고
하게 굳어진 중기 사상에 대한 보다 심도 깊고 체계적인 분석은 당연한 요청이라
고 할 수 있다. 곧 이승만의 초기 사회정치적 견해들이 시공간의 변화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일정 부분 바뀌거나 혹은 그 기본은 같더라도 세부적 내용을 달리
하며 해방정국으로 이어진 경로를 추적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이승만의 초기 사상에 관한 연구는 상당히 축적되어 있고 그 내용도 비교적
다양하지만,2) 중기로 들어오면 관련 연구들은 압도적으로 그의 ‘행적’에 집중되
어 있다. 그 행적 중에서도 미국에 한국의 위임통치를 의뢰한 이른바 ‘위임통치’
문제, 임시정부 대통령 노릇을 ‘제대로’ 했느냐, 독립운동을 ‘제대로’ 했느냐 하
는 점에 집중되어 있다. 오영섭(2012)의 글이 거의 유일하게 1910-20년대 이승만
의 정치사상을 추적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정치학에서는 그동안 거의 방치되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관련 연구들은 압도적으로 역사학계에 집중되어
있다. 필자는 또 다른 연구자와 함께 작성한 글에서 이승만의 초기 사상을 ‘서구
중심주의’라는 시각에서 고찰한 적이 있다(강정인ㆍ정승현 2014). 이번 글에서는
개화기 이래 수입된 자유주의가 한국의 독특한 역사적 현실 속에서 변형되며,
오늘날 학계에서 보수적 자유주의라고 부르는 형태로 귀결된 경로를 이승만에게
초점을 맞추어 추적하고자 한다. 이것은 ‘서양 정치사상의 한국화’, 즉 서구의
자유민주주의가 한국적 맥락에서 변용되거나 선택적으로 수용된 양상에 주목하
며 주변부 후발국으로서 한국 현대정치사상의 전개가 드러내는 특징을 밝히려는
것이다.
2) 최연식 2010; 오영달 2008; 김명섭ㆍ김석원 2008; 고정휴 1986 등의 문건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또한 연세대학교 출판부에서 내놓은 저서를 통해 본 이승만의 정치사상과
현실인식에 수록된 글들은 이승만의 초기 사상을 다각도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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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분석 틀과 서술 방식
앞에서도 보았지만 진보적 논객들은 서구에서 발견되는 자유주의를 ‘순수’ 혹
은 ‘진정한’ 자유주의로 상정하고 한국의 자유주의를 ‘상처받은’ 혹은 ‘가짜’ 자
유주의로 보며 자유주의의 위상을 부정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 자유주의의 이러한 변화 양상을 자유주의의 ‘왜곡’ 혹은 ‘일탈’이 아니라
개화기 이래 국권 상실과 식민지의 쓰라린 역사적 경험을 통해 변용된 ‘서구 정
치사상의 한국화’라는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한국화’란 서구의
정치이념이 한국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굴절ㆍ변용 혹은 선택적 수용 과정을 거
치며 본래의 그것과는 다른 독특한 내용을 갖게 된 현상을 가리킨다. 여기서 주
어는 한국의 역사적 맥락이다. 즉 서구 정치사상이 한국에 도입된 계기, 배경,
문제의식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것이 독특한 ‘한국적’ 내용을 갖추게 되는 데 초
점을 맞추는 것이다. 필자는 강정인이 제시한 ‘비동시성의 동시성(simultaneity of
the non-simultaneous)’과 ‘민족주의의 신성화’라는 틀을3) 빌려 서구 근대 정치사
상의 한국적 수용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양상을 추적하고자 한다.
강정인은 한국 현대정치를 규정한 두 가지 틀을 세계사적 시간대와 일국사적
시간대의 불일치가 일으키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그리고 19세기 후반 이래 자
체적 근대화의 좌절, 일제 식민지 경험, 분단 등으로 인한 ‘민족주의의 신성화’로
지적했다. 강정인은 ‘비동시성의 동시성’ 개념을 통해 한국 현대 정치의 이념적
지형을 다섯 가지로 지적했는데, 필자는 그 중에서 ‘최종적 완성물로서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수용’과 ‘민족주의의 신성화’에 주목한다.
한국에서 도입된 서구 정치사상은 그 수용 계기, 배경, 문제의식, 그것을 작동
시킨 정치사회적 특성이 다르기 때문에 서구의 그것과는 전개 양상이나 내용에
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한국 근현대 정치사상의 도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3) 강정인은 여러 글들을 통해 ‘비동시성의 동시성’ 개념을 제기했는데 최근의 저작(강정인
2014, 제3장)에서 가장 상세하게 설명했다. ‘민족주의의 신성화’ 또한 이 책의 4장을 참
조하면 제일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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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특징은 ‘최종적 완성물로서 다양한 이데올로기의 수용’이라는 데 있다.4)
한국 근현대정치에서 정치사상은 내재적 발전 계기를 거치면서 자생적으로 성장
하기보다는 외세에 의한 정치공동체의 생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수입되었다.
조선은 문명개화에 성공한 서구 열강의 뒤를 따라가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서구의 정치사회제도 및 그것을 떠받치는 이념을 도입해야 한다는 인식은 개화
지식인들에게 이론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었다. 사회의 변화는 물론
사상의 변화 역시 서구의 경로를 따라가야 한다는 목적론적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고, 또한 목적론적 변화의 성격상 중심부에서의 최종적 산물인 완제품이 수
입되었다. 서구에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은 오랜 역사를 통해 이루어졌
던 반면 처음부터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이미 그 시점에서의 완성품인 ‘민주적
제도를 갖춘 자유주의’, 즉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했다.5) 자유민주주의는 이미 서
구인들이 그 가치와 중요성을 충분히 입증된 것이었고, 우리에게는 그 이념적ㆍ
가치론적 문제보다는 ‘어떻게’ 그것을 실현하는 데 관심이 집중되었다(강정인
2013, 287-88).
진보적 입장에서는 자유주의를 개화기 이래 한국(조선) 부르주아계급의 지배
이념으로 규정하는 경향도 일부 있지만, 한국에서 자유주의는 미래의 질서를 규
정하고 추동하는 진보의 측면과 주어진 질서에 순응하며 변화의 동력을 차단하
려는 보수의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개화기의 자유주의는 분명히 조선의
구체제를 개혁하는 저항이념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서는 비록 실력양성론을 내
세우며 일제와 타협 혹은 순응의 양상을 나타내기는 했지만, 그 자체가 식민지
상황에서 자유주의의 변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자유주의는 자유민
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공식적 지배이념의 의상을 확보했던 반면 또 다른 측면에
서는 장준하ㆍ함석헌ㆍ김재준 등 이른바 ‘재야인사’와 야당을 중심으로 ‘진정
4) ‘민족주의의 신성화’는 이 논문의 (4)와 (5)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5) 문지영은 이런 이유에서 자유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용어상의 혼란을 피할 수 없다고
지적했는데(문지영 2004, 76), 앞에서 보았듯 이승만의 자유주의에 대한 세 가지 접근법
역시 자유주의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를 혼용하고 있다. 필자 또한, 자유주의와 민주
주의의 역사적 관계 및 엄밀한 개념적 분석을 거쳐야만 정당화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와 자유민주주의의 혼용을 피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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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주장하는 저항이념으로서 기능했다. 곧 개화기 이래
한국 자유주의의 수용ㆍ전개ㆍ발전에는 “공식적인 지배이념이면서 동시에 저항
이념”(문지영 2011, 34)으로서 기능해왔던 그 역사적 위상이 고려되어야 한다.
사실 민주화 이전 한국정치에서 보수적 자유주의는 보수주의라는 이름으로 지
칭되어 왔다. 그것은 ‘집권 우익세력이 공산주의의 침략과 위협으로부터 자유민
주주의를 방어하고 국가 안보(반공)와 경제발전에 필요한 정치적 안정을 명분으
로 내세우며 (민주주의의 이름 아래) 권위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는 이
념’으로 기능해 왔다.6) 국가주의와 반공을 기본 내용으로 삼고 권위주의를 정당
화했던 이러한 ‘사이비’ 자유주의에 자유민주주의라는 호칭을 붙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특히 진보적 지식인들이 거센 반대를 제기한 바 있었지만, 필자는 그것
을 – 그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 자유주의의 한국적 변용이라는 시각에서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 글은 자유주의의 ‘한국화’에는 지배와 저항의 두 위상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서구 정치사상의 한국화라는 문제의식에서 개
화기 이래 도입된 서구 자유주의가 보수적 자유주의로 변모ㆍ정착된 궤적을 그
이념에 따라 신생 한국을 건설하는 데 주역을 맡았던 이승만을 통해 추적해보려
는 것이다.
글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3장에서는 이승만이 근대 민족국가 그리고 애국심
투철한 국민 만들기의 관점에서 미국식 공화주의 혹은 민주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그 사상적 측면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는 제도의 조속한 도입에 주안
점을 두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4장은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개념 속에서 개인
과 국가ㆍ민족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 개인이 독립된
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쳐야 하는 존재로서 그려지는
이승만의 자유주의 인식은 강한 국가주의적 성향을 바탕으로 권위주의와 밀접한
친화성을 갖는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했다. 3장과 4장은 자유민주주의라는 형태
로 도입된 자유주의가 어떻게 변용되었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5장은
민족주의의 신성화와 자유주의라는 두 가지 틀을 통해 이승만의 반공노선을 분
6) 필자의 이러한 규정은 강정인(2013, 283; 2014, 37)의 보수주의 개념 규정을 하나로 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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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한다. 이승만의 반공노선은 국가독립이라는 민족주의의 개별 과제가 계급평등
이라는 또 다른 과제를 중층결정하는 층위, 그리고 자유주의의 층위 위에서 구축
되었음을 강조하고자 했다. 결론에서는 해방공간에서 이승만과 그 추종세력들은
개인적 이해관계 외에도 보수적 자유주의라는 이념적 상호 친화성 때문에 쉽게
결집할 수 있었으며, 이승만의 이와 같은 자유주의 인식이 보수적 자유주의로
규정되는 계기를 분석하고자 했다. 중기 저작은 주로 태평양잡지를 활용했
다.7)
Ⅲ. 국민ㆍ국가 만들기의 수단으로서의 자유(민주)주의
박영효의 「건백서」, 서유견문 등에서 보듯 19세기 말 조선에서 자유주의는
하나의 철학 내지 관념체계로서가 아니라 민주정 혹은 입헌정이라는 정치체제
내지 제도의 차원에서 이해되었다는 것이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이었다. 즉 서구
의 부강의 원인이 자유주의 제도에 있다고 보고, 그것을 조선의 근대화를 위한
대안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개화기 지식인들은 개인, 자유, 권리 등의 개념을 해
설하고 의회제, 삼권분립, 민(民)의 정치참여 방식에 대해 소개하는 데 그칠 뿐
그러한 제도가 그 자체로 바람직한지 또 그것이 조선에 도입되는 것이 바람직한
지에 대해 깊은 고민은 결여되어 있었다. 그들의 문제의식은 그러한 관념과 제도
를 유교 전통이 지배하는 조선에 도입하여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의 근대국민국가
를 만들어내는 데 집중되었다.8) 또한 그들은 조선의 현실적 필요에 맞게 서구
자유주의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였다. 권리를 강조하면도 의무에 더 방점을 두거
7) 이 잡지의 창간ㆍ운영ㆍ집필자ㆍ내용 등에 관한 사항은 오영섭(2012)의 글에 잘 설명되
어 있다. 국가보훈처에서 발간한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36, 37권은 태평양잡지
를 영인본으로 묶었다(2013년). 여기에 실린 최기영의 해설도 이 잡지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잘 알려준다.
8) 이 부분은 정용화(1998, 1999), 안외순(2000)의 연구를 참조하여 작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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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민권을 말하면서도 국권에 더 중점을 두거나, 불가침의 천부인권 및 제한정
부 관념을 강조하면서도 군주권의 강화를 내세우는 등 그들은 조선의 독립과 생
존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자신이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 거부ㆍ수용ㆍ
변용하며 자유주의를 재구성했던 것이다.
이승만 역시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는 제국신문에 기
고한 논설을 통해(1903/2/21) 당시 조선을 “닻줄도 끊어지고 돛대도 거의 부러져
가는 파산한 배”와 같은 상황에 비유했다(「국권이 날로 감삭함」 뭉치면 살고
414).9) 이 위태한 상황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문명부강이었다. 그는 문명개화
의 방법을 외교, 내치의 정비, 낡은 습관과 사상의 개혁 등 여러 측면에서 설명했
지만, 그가 보는 문명국의 핵심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국강병이 아니라 탄탄하게
정비된 국가제도, 그리고 그 밑에서 나라를 떠받치는 국민의 애국심이었다. 이승
만에게 모든 ‘백성’을 애국심을 갖춘 국민으로 만들어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정
치제도는 인민의 평등과 자유를 보장해주는 민주주의, 그 중에서도 미국 민주주
의였다. 미국은 “민주국을 실시”함으로써 “사람마다 그 나라의 흥망성쇠가 다
제 한 몸에 달린 줄로” 알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이다(독립정신
89).
이승만은 미국의 정치제도를 ‘민주’ 혹은 ‘공화’라는 말로 설명한다. 곧 공화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말한다. 그가 민주정치를 묘사할 때는 항상 미국을 전거로
삼았다. 미국은 국민의 교화가 가장 잘 되어 있으며 정치체제가 완비됨으로써
“참 즐겁고 편안하여 곧 인간에 극락국”으로 표현되었다(독립정신 84). 그리고
미국 민주주의를 부연설명하면서 ‘백성을 위하여 백성으로 조직한 정부’, ‘지극
히 공번되고 바른 제도’, ‘요순 세상’, ‘가장 선미한 제도’라고 묘사했다.10) 1919
9) 「청년 이승만 자서전」, 제국신문에 기고한 논설들, 기독교 관련 논설 등 주로 이승만
의 초기 저작을 모은 원영희ㆍ최정태 편 뭉치면 살고: 언론인 이승만의 글모음을 가리
킨다. 이 글에서 인용된 이승만의 글은 (이승만 1998)의 형태가 아니라 독립정신 한
국교회 핍박 등 구체적인 출처를 명기하였다.
10) 이승만은 초기에는 입헌군주제를 가장 바람직한 정치제도라고 주장하면서 ‘충군애국’
을 강조했다. 고종을 중심으로 국가를 강화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성의 탓이었다. 그
러나 을사늑약 이후 재미교포 신문 공립신보에 게재한 논설(1908/3/4)에서 “임금이
자기 일신의 이해와 평강안락을 위하여 나라와 백성을 외국에 팔아먹을 경우에는” 백
이승만과 한국 자유주의 265
년 4월 14일-16일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대한인총대표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에서 채택된 결의 중의 하나인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Aims and
Aspirations of the Koreans)」에도 이러한 생각은 그대로 반영되었다. 「필라델피아
총대표회 종지」라는 제목으로 대한독립혈전긔에11) 수록된 번역문에는 이 결
의안의 “요지는 우리나라를 회복한 후 정부를 미국 제도로 할 수 있는 대로 모본
하여 공화정치와 기독교 문명을 숭상하는 나라로 만들어 종교와 통상과 언론 등
모든 사회의 자유를 하겠다는 뜻으로 선고함이오”라고 설명되어 있다(김영우 편
1974, 313). 서재필, 이승만, 정한경, 임병직, 조병옥, 장택상, 유일한, 김혜숙 등
해방 후 남한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인사들이 다수 참가한 이 회의에서도
공화주의는 미국 민주주의로 이해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이 공화 혹은 민주를 정치의 모범으로 삼은 것은 미래 자주독립국가의
국가체제와 국민 만들기의 일환이었다. 그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주는
민주정치를 최고의 정치로 본 것은 자유와 평등 자체가 갖는 가치의 고귀함 때문
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애국심을 갖게 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그는 나라의 부강과
일가(一家)의 번영을 같은 것으로 알며, 나라의 평안과 집안의 평안을 같은 것으
로 알며, 국가의 부강과 태평을 공통된 이익으로 아는 것이 “국민된 중임”(독립
정신 120), “국민된 직책”(독립정신 122)이라고 하였다. 이 국민을 만드는 제
도가 공화 혹은 민주였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중기에 들어서도 일관되게 지속
된다. 그는 공화주의가 존속하려면 ‘백성의 단합’이 필요하며, 백성이 단합하려
면 “개인이 자기의 자유와 명예와 이익과 목숨까지 다 희생하여 나라의 권리와
영광과 이익과 생명을” 돕고 정부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국민된 직책”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한족 단합이 언제」 태평양잡지 1923년 3월, 6).12)
성이 나라를 위해 임금을 버리는 것이 “참 충국애국이라”고 주장하며 국가와 군주를
분리시켰다.
11) 이 책은 1919년 하와이 호놀룰루 소재 태평양잡지사에서 간행된 것이다.
12) 이 잡지의 기사를 인용하는 연구들은 보통 ‘ 「한족 단합이 언제」 태평양잡지 5권
1호, 6쪽’이라는 형식을 사용한다. 필자는 ‘「한족 단합이 언제」 태평양잡지 1923년
3월, 6’이라는 형태로 표기하고자 한다. 권호수보다는 발행 연도로 해당 문헌을 찾는
편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또한 이승만의 기명(記名) 논설, 혹은 무기명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작성한 것이 거의 확실한 글들만 논거로 삼았다.
266 현대정치연구
2017년 봄호(제10권 제1호)
이승만은 애국심 투철한 국민을 만들어내는 이 새로운 정치체제를 설명하는
데 자유주의의 기본 원리를 동원한다. 예를 들면 “나라를 세우고 정부를 두어
정치를 마련하며 법률을 정하는 것이 다 사람의 일신상 자주 권리를 보호코자
함”(독립정신 58), 혹은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정치와 법률을 마련하고
다스릴 자를 정하여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나라의 설
립과 본의”라고 하며(독립정신 75) 사회계약의 논리를 설명하였다. 또 1903년
11월 신학월보에 기고한 「교회경략」에서는 “하느님이 세상 사람을 똑같이 내
시고 그 중에 똑같은 권리를 주셨으니” 하면서 천부인권 혹은 자연권을 지적했
다(뭉치면 살고 158). 이러한 것들은 전형적인 자유주의 논리에 해당하지만 단
편적 언급에 그칠 뿐 더 이상의 서술은 없다.
중기 저작들에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서술은 변하는 내용이 없다. “헌
법이 아니면 인민의 생명 재산과 자유 행복을 보전하고 살 수 없는 줄로 아는바”
라고 하면서(「미국헌법의 발전」 태평양잡지 1914년 2월, 19) 자유주의 원리를
간략하게 거론하지만 더 이상의 설명 없이 미국 정치의 삼권분립제도를 길게 다
룬다. 또한 「미국공화사상」에서는 공화를 “영어로 데모크라시(DEMOCRACY)라
하나니 … 지금 미국사람들이 항상 일컫는바 백성이 백성으로 백성을 위하여 세
운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라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태평양잡지 1914년 2월, 2). 이 글의 전체 내용은
독립정신의 공화제 설명 부분과 똑같다. 여전히 이승만은 ‘미국 공화사상’의
본뜻은 인간 평등, 인민 주권, 그리고 ‘백성’이 맡긴 일을 ‘님군’이 올바르게 시행
하지 못하면 “백성은 그 지위를 뺏어다가 다른 이에게 맡기고 정부를 전복하는
것이 가하다”는 사회계약론과 유사한 생각을 설명하기도 한다(「미국공화사상」
7). 그렇지만 이 글도 미국의 대통령, 각 장관의 역할, 상원과 하원, 국회의원의
역할 등을 설명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초기 저작과 비교할 때 국민의 저항권을
추가한 점이 눈에 띄지만 그 이후의 글들에서 저항권에 관한 언급은 찾지 못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사상적 토대에 관해서는 국내의 초기 저작에서 기술했던 내용을
반복할 뿐 더 이상 진전된 인식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승만에게 자유주의는 민주주의 혹은 공화주의라는 이름의 정치제도로서 파
악되고 있었다.13) 이처럼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실현된 자유민주주의의 외형적
이승만과 한국 자유주의 267
제도에 주목하며, 그것을 국가ㆍ국민 만들기와 연결시킨 이승만의 사고는 세부
적 차이는 있을지라도 당시 개화 지식인들의 주장과 별 차이가 없다. 그들 모두
는 서구문명을 하나의 목적으로 삼고, 그리고 그 목표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의문
을 제기하지 않으며,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조속한 방안을 모색하려는 데 집중
했다. 특히 3.1운동 이후 모든 독립운동 단체들이 미래의 정치체제를 공화주의로
설정하면서 공화주의는 논쟁의 여지가 없는 민족국가의 미래 이념이 되었다. 그
러나 민주주의의 사상적ㆍ정신적 토대보다는 미국 민주주의에서 발견되는 것과
똑같은 외형적 제도의 조속한 실현이 가장 큰 관심사였다. 성문화된 규정으로서
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공화제를 천명한 대한민국임시헌장(1919/4/11)의 제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으로 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임시헌장 제정 당
시 이를 둘러싼 특별한 논의는 없었다는 사정도(정상호 2013, 17) 이와 같은 인식
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도의 조속한 실현에 주목하는 자유민주주의관을 잘 보여주는 문서가 앞에서
말한 필라델피아 ‘대한인총대표회의’에서 채택된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이다.
이 결의안에는 대한민국이 앞으로 삼권분립 원칙에 입각한 미국식 대의제 공화
국을 채택하고 국민의 평등 및 신앙과 언론의 자유 보장, 국민 교육, 국민에게
지방의회 및 도의회 선거권 부여, 종교의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 등을 보장할
것을 선언했다. 이것은 이승만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당시 미국의 정치제도
를 모방한 미래 한국의 국가건설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은 미국의 민주주의 제도를 한시라도 빠르게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면서 민
주주의의 기본 이념과는 정반대의 주장을 내세웠다.
이 선언서에서 가장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부분은 이른바 ‘독재’ 논란이다. 이
대회에서는 “우리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미국의 정체를 모방한 정부를 세우기로”
하며 민중의 교육수준이 저급하고 자치경험이 부족한 점을 감안하여 독립 이후
“앞으로 오는 10년 동안에는 필요한 경우를 따라서 권세를 정부로 더욱 집중”한
다는 선언을 했다는 것이다(김영우 편 1974, 322).14) 이에 대해 “이러한 인식은
13) 필자는 그의 중기 저작에서 ‘자유민주주의’ ‘자유주의’의 용어가 사용된 사례를 아직
찾지 못했다.
268 현대정치연구
2017년 봄호(제10권 제1호)
이승만의 왕족 의식과 겹쳐지면서 해방 후 독재체제 형성을 가져오는 배경이 되
었다”는 비판(정병준 2005, 111), 혹은 문건 작성에서 서재필의 역할을 강조하면
서도 이러한 인식은 “우민관에 입각한 일종의 교도(敎導) 민주주의적 발상”이라
는(유영익 2003, 376) 비판들이 있다. 실제로 서재필은 1921년 김규식이 상해에
갈 때 임시정부에 보내는 영문 편지를 동봉했다.15) 이 편지에서 서재필은 “앞으
로 10년간 강력한 혹은 거의 전제적인 중앙집권적 정부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에
는 권위를 나누어주고 민주주의 정부의 책임을 맡길 만한 교육받은 인력이 부족”
하다고 기록했다.16) 민주주의의 ‘조속한’ 정착을 위해 강력하고 심지어 전제적인
중앙집권정부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국력의 조속한 발전을 위해 민주주의를 유
보한다’는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정병준의 지적도 타당한 측면은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문건이 한인 대회의 승인을 받았다는 점, ‘독재’에 대한
논의를 찾을 수 없다는 점, 이승만이 당시에 이러한 생각을 얼마나 지지했는지에
관한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지나친 사후적 해석은 삼가고자 한다.
미국 체류기 중의 거의 마지막 저작이라 할 수 있는 일본 군국주의 실상에
는 색다르게 ‘개인주의’를 거론하는 부분이 있다. “정부의 민주주의 원칙을 믿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자다. 정부의 권력은 시민권으로부터 나온다. 그러
므로 개인적인 자유와 권리는 국가 기구가 설립되는 근본적인 기초”라는 대목이
다(일본 군국주의 실상 241). 이 구절은 이승만이 ‘개인주의’를 언급한 거의
14) 유영익은 “이승만이 번역한 것으로 판단되는 이 번역문”이라고 지적한다(유영익 2003,
371). 영어 원문은 “For the next decade it may be necessary to have more centralized
power in the government”이다.
15) 방선주(1989, 210n)의 연구에 따르면 김규식이 미국 수송함으로 밀항하려다가 체포됨으
로써 전달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16) 번역문은 유영익(2003, 391)의 것이다. 서재필이 쓴 영어 원문은 이렇다. “We must have
a compact and systemized government which must be representative in form and spirit,
but for the next decade, a strong or almost autocratic centralized government is
necessary”(Jaisohn 1999, 204-05). 그런데 서재필은 해방 후 이승만과 불화를 빚으며 삼
천리 1948년 6월호에 이런 글을 기고한다. “독재정치는 동기가 선의라 하더라도 미구
(未久)에 권력유지에 도취하여 필연적으로 공포정치, 권력의 남용, 부패가 발생하는 것
이니 깊이 깊이 삼가야 할 것이다”(최기영 엮음 2010, 322). 표기는 현재의 맞춤법에
맞게 고쳤다.
이승만과 한국 자유주의 269
유일한 부분인데, 그렇다고 그가 자유주의의 근본 원리 중의 하나인 개인주의에
대한 철학적 이해를 깊이 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이승만의 중기 저작에서 개인은
언제나 민족의 일원으로서의 개인, 민족에게 희생하는 개인으로 묘사될 뿐 자율
적이고 주제적인 판단 주체로서 개인으로서의 위상은 부정되고 있다. 그가 ‘개인
의 발전’이라고 할 때는 “개인이 날로 진보하여 점점 앞으로 나가기를 힘쓰지
아니하면 나라가 스스로 문명부강에 이를 수 없으니”라는 대목에서 보듯이 ‘민
족의 일원으로서 개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송구영신」 태평양잡지 1914년
1월, 5). 그 외의 경우 개인은 거의 부정적 의미와 결합되어 있다. 예를 들면 「미
국공화사상」에서는 “정부도 없고 주권도 없고 다만 개인끼리 제 생각대로 행하
는” 무정부사상이 공화주의의 가장 큰 적이라 지적하였고(태평양잡지 1914년
2월, 10), 그가 이끌었던 동지회의 정강 중의 하나는 ‘우리는 개인행동을 일절
버리고 단체 범위 안에서 질서를 존중하며 지휘를 복종하자’는 등 개인은 개인
감정, 개인적 이해관계, 개인 행동 등 거의 언제나 부정적 의미와 결합되어 있다.
이승만의 중기 저작에서 국가ㆍ국민 만들기는 아직 독립국가와 자주 국민이
없는 상태에서 미래의 기획이었다. 기본적으로 그는 한 공동체가 외부의 압박으
로부터 벗어나 자율성과 자유를 획득하면, 곧 국가독립과 더불어 그 밑에 소속된
구성원들 또한 자유와 자주를 회복할 것이라고 보았다. 이승만의 이러한 인식은
서구와 한국의 자유주의가 각각 다른 역사적 경험 속에서 발전해왔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서구에서는 국가독립이 중요한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으며 개인주
의를 바탕으로 한 평등ㆍ자유ㆍ인민주권의 개념 아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결합시킴으로써 민주주의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한 철학적 논구가 이루어졌다.
반면 한국에서는 국가주권 회복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부각됨으로써 민권보다는
국권이 강조되었고, 민주주의가 독립 이후의 당연한 정치제도로서 인식되며 그
조속한 도입에 문제의식이 집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자유주의를
국가주의로 급속하게 기울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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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봄호(제10권 제1호)
Ⅳ. 국가ㆍ민족ㆍ애국: 국가 앞에 목숨을 바치는 국민
앞에서 필자는 이승만의 자유주의 인식이 자유주의 혹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
리나 정신에 관한 깊은 이해보다는 ‘국가ㆍ국민 만들기’의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주로 그 제도적 측면을 논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근대적인 독립 민족국가의 국민
을 만들려는 기획은 개화기 이래 지식인들의 공통된 과제였다으며 이승만의 초
기 저작을 관통하는 핵심 단어 또한 단연 민족과 국가였다. 태평양잡지에서도
가장 많이 사용된 용어는 국가와 민족, 혹은 민족과 같은 뜻을 가진 한인, 한족,
동포, 백성 등의 단어였는데, 항상 애국ㆍ국민ㆍ민족ㆍ국가를 하나로 연결시키
고 있다. 예를 들면 “배우는 사람이 곧 애국하는 자요 배우는 사람이 민족을 구원
하는 자라 할지라”는 서술(「학생제군에게」 태평양잡지 1914년 6월, 93), 한글
은 “우리 국민의 사상을 발전하여 우리 민족의 행복을 도모하는 큰 미관[sic]”이
라는 대목은 국가ㆍ민족ㆍ국민이 하나로 연결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국문은
조선의 대복」 태평양잡지 1913년 11월, 11).
민족에 대한 열정적 헌신과 달리 이승만이 민족을 분명하게 규정한 내용은 찾
기 어렵지만, 그가 일종의 혈통 민족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1916년 3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축
사에서 이승만은 민족의 단합을 강조하며 한인은 “단군의 자손 … 단군 성조”라
고 묘사하면서 한반도의 주민은 같은 조상의 자손임을 강조했다(뭉치면 살고
200). 그는 ‘한족’이라는 말을 제일 많이 사용했는데, 딱 한 번 부여족이라고 표
현했다. 당시 미국인과의 결혼으로 점점 숫자가 줄어드는 한인 사회의 실상을
우려하며 이승만은 한인 여성들은 한인 남자와 결혼하여 “우리 부여족의 혈통을
유지함이 가하다 하노라”고 주장했던 것이다(「외국인과 혼인」 태평양잡지
1924년 7월, 35). 이승만을 비롯한 애국계몽기 자주 사용했던 동포라는 말이 같
은 어머니에게 태어난 형제자매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면 한국에서 민족은 프랑
스혁명에서처럼 군주정에 반대하는 정치이념을 공유하는 근대적인 시민계층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ㆍ역사ㆍ문화ㆍ언어ㆍ공간을 공유하면서 5천년을
이어온 ‘원초적ㆍ영속적 실체’로서 이해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이승만과 한국 자유주의 271
애국계몽기 지식인들은 민족을 전면에 내세우고 국수 혹은 민족혼을 강조하
며 민족에 대한 자부심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이승만에게도 그러한 점은 일부
보인다. 독립정신에서 그는 “대한은 단군 이후로 거의 5천년 내에 당당한 독립
강국이라”고 하면서 중국이나 일본의 침략을 격퇴한 역사적 사실을 강조한 바
있었다(독립정신 133). 중기 저술에서는 한글의 우수함을 강조하거나, 한인의
‘미풍양속’을 내세우며 한인은 ‘음탕한’ 춤에 빠져든 서양인의 ‘천한 풍습’은 받
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논설(「춤과 노래」 태평양잡지 1914년 2월), 3.1운동 이
후 “민족자각성이 일어나서 자체를 존중하는 감상”이 더욱 깊어졌다고 하면서
전통 학문의 중요성과 가치를 강조하는 글도 있다(「재외학생제군에게」 태평양
잡지 1925년 8월, 7). 한국의 모든 것을 ‘천한 것’이라 여기던 초기의 저술과는
확실하게 차이를 보이지만 이승만 자신이 특별히 민족주의적 자부심을 고취한
사례는 더 이상 찾기 어렵다.17)
이승만의 저작에서 제일 눈에 띄는 것은 민족의 ‘어리석음’을 질타하는 내용
이다. 물론 이것은 ‘민족 만들기’ ‘국가 만들기’를 위해 인민을 자극하려 했던
애국계몽기 지식인들의 전형적인 논법이었다. 초기 저작들에서 이승만은 한국
(조선)인을 묘사하며 ‘어리석은 백성’, ‘완고한 백성’, ‘몽매한 백성’, ‘어두운’,
“다투고 잔해하던 습관이 아주 골수에 박힌”(한국교회핍박 459)” 등의 수식어
를 주로 사용했다. 독립정신에서도 민족 앞에 가장 많이 붙은 수식어는 ‘어리
석은’이었다. 중기에 들어서도 이승만은 계속 이런 식으로 민족을 묘사하였다.
음력설을 고수하는 한인에 대해서는 “구습에 젖어 있는 사람들”, “무식”, “어두
워서 개명에 나가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거나(「새해 지키는 풍속」‘ 태평양잡
지 1914년 1월, 14), 한인의 도덕심을 강조하며 “모든 죄악 속에서 아주 썩어진
민족”이라고 묘사하는 부분도 있다(「하와이섬 여행기」 태평양잡지 1914년 6
월, 78). 이런 표현들은 문명개화와 독립을 위해 민족적 분발을 요구하려는 시도
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승만은 이 정도로 그치지 않고 ‘지도자’,
17) ‘일민주의’에서 혈통 민족주의, 국수(國粹) 등이 유독 강조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해방
이후 이승만과 일민주의 제창자들의 사상적 고리에 대한 분석은 이 논문의 범위를 넘어
선다.
272 현대정치연구
2017년 봄호(제10권 제1호)
다시 말해 그 자신을 따르지 않거나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은 용어를 동원
한다. 이러한 양상은 이승만이 여러 가지 이유에서 비판을 받던 시기에 작성된
글들에 잘 나타나있다.
이승만이 운영하던 태평양잡지는 가스라 타로(桂太郎)의 사망이 “일본에 불
행이라. 이등박문과 목인 천황폐하 … 등 제씨가 차례로 죽고 계태랑의 죽은 것이
일본의 제일 위대한 인물 한 시대를 마치는 것”이라고 논평했다(「일본 전총리대
신 계태랑」 태평양잡지 1914년 1월, 32). ‘천황폐하’ ‘위대한 인물’이라는 용어
를 사용한 데 대해 많은 비판이 미국과 중국의 한인들로부터 제기되자 이승만은
비록 적국이라고 해도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 세계여론이라고 강조하며 “남의
나라 사람을 대하여 무단히 욕하는 것은 변시 미개한 인류로 들리는 법”이고,
왜놈이라 부르는 것은 “결단코 개명한 사회 사람들의 쓰지 않는 바”라고 반박했
다(「본 잡지의 주의」 태평양잡지 1914년 2월, 70). 자신에 대한 비판자들은 ‘미
개한 인류’나 개명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작성된 또
다른 논설은 과거 한국(조선)에서 문명개화에 노력했던 사람들이 도리어 핍박당
했던 사실을 지적하며 “어떤 사회에든지 선지 선각자들이 일을 시작할 적에 제
일 염려하는 바는 정부집정자들의 반대 핍박이 아니오 무식한 백성들이 도리어
이해와 충역을 분간치 못하고 인도자를 도리어 해하는 것이라” 하면서 비판자들
을 ‘무식한 백성들’로 자신은 ‘선지 선각자’로 묘사한다( 「조선에 세 가지 없는
것과 세 가지 있는 것」 태평양잡지 1914년 4월, 24).
이승만의 이러한 생각은 상해 임시정부와 알력이 심해지며 더욱 강화되었다.
이승만은 1921년 상해를 방문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
(1921/2/5)에 게재된 「대통령방문기」에는 “공화제의 取結하는 本旨가 一事를 결
정하기 전에는 각자의 의견을 주장하여 논쟁하다가 한번 從다수결취결이 된 후
에는 아무 異論이 없이 복종하는 법이오”라는 이승만의 발언이 기록되어 있다.18)
또한 임시의정원 제8회 개원식에서 발표한 교서를 통해 이승만은 공화제를 ‘논
의는 활발하게 하지만 일단 결정되면 따르는 정치’로 표현하고 정식으로 결성된
조직을 통해 “民意가 한번 발표된 후에는 일반 인민이 일률 복종함이 즉 공화정
18) 이승만의 발언들 중 몇몇 부분은 의미를 보다 정확하기 위해 한자를 그대로 표기했다.
이승만과 한국 자유주의 273
체의 기초적 通例라. 만약 그 중에서 소수인이 여기에 불복하여 편견 고집으로
법령을 경시하고 인심을 선동하여 어지럽게 하면 이는 즉 共和政體에 위반되는
행동”이라고 반박한다(「대통령의 교서」 독립신문 1921/3/5). 이 발언들은 겉으
로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이른바 ‘한성정
부’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은 민의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왈가왈부하
지 말라고 상해임정의 반대파를 겨냥하는 것이었다.
상해임정과의 불화가 계속 이어지면서 이승만은 도망치듯 다시 미국으로 돌아
가 계속 자신의 아래 단결을 강조한다. 그는 한인에게 가장 시급히 필요한 것은
‘단결’ 혹은 ‘단합’임을 강조하는데, 그 단결은 자신의 지휘에 따르는 단합이었
다. 이러한 생각들은 「공화쥬의가일너[sic]」라는 제목의 이승만 기명(記名) 논설
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논설에서 그는 지난 5,6년의 경험을 통해 “공화
주의는 변할 수 없으나 공화제도는 다소가 변해야 우리의 대사를 이룰 수 있는
줄로 확실히 깨달았노라”고(「공화쥬의가일너」 태평양잡지 1924년 10월, 7) 선
언하면서 지도자의 명령에 대한 복종을 강조하였다. 이승만은 그 이유를 제도의
민주적 운영방식에 대한 한인의 몰이해, 각종 독립운동 및 한인 단체 인도자들의
분열을 꼽았지만, 실제로는 상해임정 반대파와의 갈등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
다. 그는 공화주의란 “주권을 가진 사람이 자기의 자리를 찾아서 직책을 행하며
그 범위 안에서 자기 권리를 지킬진대 이것이 참 공화 국민의 상당한 자격”이라
고 강조하며, “지금부터는 우리 모든 충의 동포들이 공화사상이라는 것은 아직
좀 덮어두고 … 복종하는 마음으로 다 희생적 주의로 따라 행해야 민족의 완전한
대단결을 성취할지라”라고 주장한다(「공화쥬의가일너」 태평양잡지 1924년 10
월, 9). 즉 지금까지 알던 공화주의의 ‘기본 원리’는 덮어두고 자신의 명령에 복종
하는 국민이 됨으로써 앞으로 공화주의의 ‘올바른 뜻’을 체득한 국민을 만들어내
겠다는 발언이다. 이와 같은 생각에는 ‘(앞으로 실현될) 자유를 위해 (현재의) 자
유를 유보’하는 국가의 명령에 따름으로써 비로소 ‘자유의 참뜻’을 알게 된다고
주장했던 권위주의의 논리가 상당 부분 마련되어 있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
다.
이승만에게 한국인은 민주주의를 함께 건설하고 운영하는 동료가 아니라 훈계
와 가르침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태도 역시 애국계몽기의 일반적 태도라고 이해
274 현대정치연구
2017년 봄호(제10권 제1호)
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생애 전체에 걸쳐 국민을 교화와 계몽의 대상으로 보았
다. 태평양잡지에 서술한 논설에서도 “우리 평민의 지식 정도를 속히 개발시
키는 것이 우리 공화 사회의 기초를 굳게 함이라”고 주장하며 ‘평민’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등(「평민시대」 태평양잡지 1924년 7월, 15), 거의 모든 글이 훈계조
로 되어 있고 한국인은 자신이 알려주는 내용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고 끝을
맺고 있다. 그에게 국민은 가르침의 대상이었을 뿐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개인으
로서의 위치는 부여받지 못한다. 이승만의 자유주의 인식에서 국민으로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주체적 판단 위에서 자유롭고 적극적인 권리를 행사할 때가 아니
라 국가를 위해 죽을 때이다. 단적으로 태평양잡지를 출간한 본뜻이 “의리를
숭상하여 천창만검지중에 들지라도 의를 굴치 않기를 목숨보다 중히 여길” 국민
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천명할 정도였다(「본 잡지의 주의」 태평양잡지 1914
년 2월, 66). 그는 공화주의에서도 “전체를 위하여 분자를 희생하는 것이 옳으니
국가에 유익될 일에는 개인이 자기의 자유와 명예와 이익과 목숨까지 다 희생”
하라고 요구하면서 ‘국민된 직책’ ‘국민의 의무심’ ‘국민의 단합’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며 전체에 대한 개인의 희생을 내세웠다(「한족 단합이 언제」 태평양잡지
1923년 3월, 6).
개인은 그 자체로서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하는 존재라는 주장 역시 애국계몽기 지식인들에게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그
러나 ‘공화’의 이름으로 이런 주장을 계속하는 데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국가로부터 독립된 개인의 절대적 존엄성을 주장할 수 있는 이념적
공간이 용납될 수 없다는 데 있다. 민주주의는 공적 영역에 적극 참여하는 ‘국민’
을 필요로 하는데, 국민은 주권 행사에 적극적 발언권을 행사하며 공공영역에
활발하게 참여함으로써 스스로를 주체적ㆍ자율적 판단의 주체로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국민은 복종과 희생의 대상이었다. 개인의 존엄성은
설 자리가 없고 자유와 권리의 크기와 규모는 국민 만들기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
지 가감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교육자이자 선각자인 집권자
의 손에 맡겨져 있다. 국가와 민족의 틀 속에 매몰된 자유주의의 위험성이 여기
에 있으며, 진보적 논객들이 ‘국가주의’라고 부르며 한국의 보수적 자유주의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부분 또한 이 지점에 있다.
이승만과 한국 자유주의 275
Ⅴ. 반공: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층위
19세기 말 이래 한국의 다양한 정치세력들은 자신의 정치적 목표에 대중을 동
원하기 위해 민족과 국가에 호소하였다. 개화기 이후 한국이 겪은 역사적 충격과
상처는 한국에서 민족주의를 다른 그 어떤 이념들보다 중요한 정치적 상징성을
내포한 이념으로 만들었다.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민족주의가 불가침ㆍ무오류의
신성성을 획득하며 “여타 이데올로기들을 압도하고 정당화하는 ‘최상위의 이데
올로기’ 혹은 ‘이념 중의 이념’으로 군림하는 민족주의의 신성화” 현상이 전개되
었던 것이다”(강정인 2014, 128). 보다 중요한 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민족주의
의 의제가 확장ㆍ교체되면서 민족주의의 내용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한국의 경우 20세기 중반까지 근대 민족주의의 주요 목표는 민족자결의 원칙
에 따른 독립된 민족(국민)국가의 건설이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경제발전, 민주주
의, 통일 민족국가의 수립 등이 민족주의의 목표로 설정되었다. 곧 해당 국면에
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가 민족주의의 최우선 과제로 설정되고, 그것이
민족주의의 여타 요소들을 압도하며 민족주의 담론을 지배하는 “민족주의 내에
서 한 과제에 의한 다른 과제들의 과잉결정” 양상이 나타나는 것이다(강정인
2014, 156). 이승만의 반공담론 역시 자주독립국가 건설이라는 민족주의 내의 한
과제가 계급평등이라는 다른 과제들을 과잉결정하는 틀 속에서 펼쳐지고 있지
만, 다른 한편 자유주의적 논거도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필자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라는 두 개의 층위 위에서 이승만의 반공노선이 구축되었다고 파악하
며, 먼저 민족주의의 층위부터 서술하고자 한다.19)
19) 이승만이 민족주의의 대의에 충실한 인물이었는가 하는 문제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반공노선이 민족주의의 중층결정이라는 틀 안에서 형성되었음을 분석하려는 것
이다. 이승만의 반공노선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홍용표(2007)는 이
승만의 반공노선이 현실주의 시각에 근거하여 형성되었음을 지적하고, 김명섭ㆍ김석
원(2008), 김명섭ㆍ김주희(2013)은 지정학적 인식과 결부시켜 설명한다. 이승만의 반공
노선이 강화된 원인을 공산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 꼽은 연구로는 양동안(2012)이 대표
적이다.
276 현대정치연구
2017년 봄호(제10권 제1호)
이승만은 초기 저작에서부터 러시아를 강하게 비판했지만, 조선의 독립을 위
협하는 침략 세력으로서의 러시아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미국에 정
착한 이후에는 사회주의 소련이 한국의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는 한에서는 그것
을 적극 이용할 수 있다는 자세를 취하게 된다. 이승만이 김병조에게 보낸 서한
(1920/3/6)에서는 중국과 러시아가 합세하여 일본과 전쟁을 벌이는 날을 기대하
는 등 러시아가 한국의 독립에 기여할 방안을 적극 모색하였다(이승만 동문서
한집 상, 13-14). 반공노선이 굳어진 이후의 글에서도 그는 공산주의가 독립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는 분명히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다. 이승만은 소련과의 협
력 여부를 묻는 윤치영의 편지에 답신을 보내(1928년 2월) “약소국과 소비에트와
도 연락하는가 하는 문제에는 이것이 吾人의 유일한 대외운동인데 曷不力圖리요
[어찌 힘써 도모하지 않으리오: 필자]”하면서 적극 찬성했다(이승만 동문서한집
상, 92).
초기의 이승만은 명확하게 반공노선을 취하지 않았으나 계속되는 일련의 사태
는 공산주의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가장 큰 요인은
임정에서 사회주의자들과의 갈등이었다. 임정에서 이승만의 실정을 공격하는 데
가장 앞선 인물들은 주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이동
휘는 미국에 대한 위임통치와 실효성 없는 외교노선을 주장한 이승만을 축출해
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사회주의 계열과의 갈등은 기본적으로 외교노선
과 무장투쟁 노선의 대결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반감이
크게 강화되었다. 또한 국내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의 평판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
도 우려의 대상이었다. 이승만의 추종자 장붕(張鵬)이 상해로부터 이승만에게 보
낸 편지(1922/9/12)에는 “내지[조선: 필자]에 있는 청년들은 사회주의의 선전에
취하여 독립운동자들을 전일과 같이 열성으로 환영하지 않고 공산주의 선전자라
하면 환영”한다고 전했다(동문서한집 하, 287).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태평양잡지에 공산주의 관련 글들을 기고하며
반공노선을 정립하게 된다. 그가 이 잡지에 쓴 공산주의 관련 논설은 모두 4편이
다. ①「공산당의 당부당」(1923년 3월. 무기명. 이승만의 글이 확실하다) ②「평민
시대」(이승만 기명 논설. 1924년 7월), ③「사회공산주의에 대하여」 (이승만 기명
논설. 1924년 7월), ④「공산주의」 (1925년 7월. 무기명. 앞의 3편 논설의 내용이
이승만과 한국 자유주의 277
반복되는 것을 보면 이승만의 글이 분명하다). 이 글들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반
공노선이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두 가지 틀로 정당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잡지에 수록된 최초의 공산주의 관계 논설 「공산당의 당부당」은 이승만의
반공노선을 집약하고 있다. 그 이후의 공산주의 관련 논설들은 기본적으로 이 내
용들을 반복하거나 혹은 특정 항목을 강조하고 있다. 반공에 관련된 이 첫 번째
논설에서부터 공산주의와 민족주의가 강하게 대비되는데, 일차적으로 그는 공산
주의가 주장하는 “정부도 없고 군사도 없으며 국가사상도 다 없이 한다”는 부분
을 반공의 가장 중요한 이유로 꼽았다(「공산당의 당부당」 18). 그는 세계가 공산
주의로 통일된다고 해도 “우리 한인은 일심단결로 국가를 먼저 회복하여 세계에
당당한 자유국을 만들어놓고 군사를 길러서 우리 적국의 군함이 부산항구에 그림
자도 보이지 못하게 만든 후에야 국가주의를 없이할 문제라도 생각하지 그 전에
는 설령 국가주의를 버려서 우리 2천만이 모두 다 밀년에아[백만장자: 필자]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원치 아니할지라”고 분명하게 선언한다(「공산당의 당부당」
18). 그리고 글의 끝에서는 “우리 한족에게 제일 급하고 제일 긴하고 제일 큰 것은
광복사업이라 공산주의가 이 일을 도울 수 있으면 우리는 다 공산당되기를 지체
치 않으려니와 만일 이 일이 방해될 것 같으면 우리는 결코 찬성할 수 없노라”고
하면서 이중적 입장을 보이는 듯하지만(「공산당의 당부당」 18), 실상 ‘민족독립’
의 이름으로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뜻을 명확하게 밝혔다.
이승만이 민족이나 민족주의를 상세하게 논한 대목은 없으나 그의 저작 전체
를 보면 민족주의의 의미는 ‘나라의 부강’, ‘자주독립’, ‘번영’, ‘민족 생존’ 등으
로 나타난다. 이승만의 기명 논설인 「사회공산주의에 대하여」에서도 어떤 사상
을 받아들이는 기준을 ‘민족의 생존’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방침을 방해하는 것
은 “곧 민족적 자살”이라고 (「사회공산주의에 대하여」 13)강조한다. 또한 이 글
에서는 “세계적 주의가 전파되는 곳마다 민족주의와 충돌이 생기나니”(「사회공
산주의에 대하여」 13) 하면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대척점에 있는 사상으로
보며, 분명하게 반대의사를 밝힌다. 이승만에게 민족주의는 ‘민족의 단위와 정치
적 단위’를 일치시키고 국가ㆍ민족의 생존 및 부국강병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원칙으로 이해되고 있었으며, 그 과제가 민족주의 내의 다른 과제, 예컨대 공산
주의가 주장하는 계급평등과 국제주의를 압도하고 있었다. 곧 그의 반공노선은
278 현대정치연구
2017년 봄호(제10권 제1호)
민족주의의 중층결정이라는 층위를 기본 바탕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반공노선을 떠받치는 자유주의적 층위는 두 가지 논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친자본주의론이다. 이승만은 20세기에 들어 전파되고 있는 공산주의에서
오늘날 인류사회에 ‘합당한 것’과 ‘합당치 않은 것’을 당부당이라고 표현하였다.
이승만이 합당한 것으로 꼽은 것은 ‘인민의 평등주의’였다. 반상의 구분, 신분의
귀천, 노예제도의 혁파, 가난한 자와 부자의 혁파는 받아들일 만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균평하게 만들 것은 딴 문제이거니와 평등을 만들자는 주의는
대개 옳으니 이는 적당한 뜻이라”고 인정한다(「공산당의 당부당」 17). 이승만이
여기서 말하는 평등은 신분의 평등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공존을 가리킨다. 그
리고 ‘시세에 부당한 것’을 ‘재산을 나눠가지자 함’, ‘자본가를 없이 하자 함’,
‘지식계급을 없이하자 함’, ‘종교단체를 혁파하자 함’, ‘정부도 없고 군사도 없으
며 국가 사상도 다 없이한다 함’이라는 다섯 가지로 정리했다. 재산을 나눠가지
면 사람들의 근로 의욕이나 노동 동기부여가 사라지고, 자본가를 없애면 상업과
공업이 발달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한 이 부분은 자유주의적 신념에 입각한 반
공노선으로 해석될 수 있다.
다른 한편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대립시키는 논지를 내세웠다.
미국 체류 초기의 이승만이 공화주의의 가장 큰 위험으로 든 것은 “정부도 없고
주권도 없고 다만 개인끼리 제 생각대로 행하는 것이 자유”라고 주장하는 ‘무정
부사상’이었다(「미국공화사상」 태평양잡지 1914년 2월, 11). 그런데 공산주의
와 갈등을 겪으며 공화주의의 가장 큰 위협이 공산주의가 되었다. 이런 주장은
「평민시대」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다. 이승만은 여기서 공화주의를 “평민들이 참
주인이 되어 하나님이 내신대로 다 평등자유를 누리게 하자는 것이 곧 그 근본”
이라고 하면서 20세기에 “부강전진을 도모하는 민족은 먼저 이 사상을 고취하여
우리의 속박에 있는 동족을 먼저 해방함으로 우리 세력을 크게 증가”해야 한다
고 주장한다(「평민시대」 15). 그리고 아무런 설명 없이 “로국의 공산사회주의가
지금 공화주의와 충돌될 것은 자연 면할 수 없는 일”이며(「평민시대」 15) 설사
공산주의 세계가 실현된다고 해도 한인은 먼저 ‘철저한 공화정신’으로 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승만의 어법에서 공화주의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한
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가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것은
이승만과 한국 자유주의 279
확실하다. 그리고 일본 군국주의 실상에서 독일ㆍ이탈리아ㆍ일본ㆍ소련을 모
두 “국민이 정부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
(totalitarian ideology)”로 규정하고(일본 군국주의 실상 241)20) 이들과의 전쟁을
‘선악의 대쟁투(Armageddon)’라고 표현하였다. 공산주의는 자유주의와 양립 불
가능한 사상으로 확실하게 규정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 내의 사회주의 계열과의 갈등을 거치며 반공노선을
확립하였다. 그의 반공노선이 분단과 전쟁을 통해 강화된 것은 분명히 사실이지
만, 그 이전부터 이미 강한 반공노선을 갖고 있었다. 필자는 미국 체류기에 형성
된 그의 반공노선이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두 층위에서 구축되었음을 지적하고
자 했다.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의 이 어설픈 봉합은 이후 보수적 자유주의의 반공
노선을 떠받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해방공간에서 이승만과 우익은 한편으
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의 반역자’라는 주장을 내세워 좌익
을 탄압했고,21) 역대 권위주의 정권은 ‘반공을 위해 자유민주주의를 유보’한다는
주장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내세웠으며, 지금도 ‘민족사의 정통성’과 ‘자유민주
주의의 수호’를 명분으로 삼아 북한을 ‘반민족’이자 ‘독재’로 매도하는 반공노선
을 이어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와 같은 이승만의 자유주의를 보수적 자유주의
로 개념화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검토하고자 한다.
Ⅵ. 맺는말: 이승만과 보수적 자유주의
앞에서도 밝혔듯 보수적 자유주의란 해방 이후 공식적 지배이념으로 확립된
자유주의, 즉 국가주의와 반공을 기본으로 삼아 권위주의체제를 정당화하는 집
20) Japan Inside Out이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출간되었다(1941년). 이종익의 번역본을 인
용했으며 용어와 내용은 원본과 대조를 거쳤다.
21) 해방공간에서 좌우익이 각각 민족주의 담론을 동원하여 상대방을 격렬하게 매도한 사
실은 정승현(2012)에 잘 소개되어 있다.
280 현대정치연구
2017년 봄호(제10권 제1호)
권 우익세력의 지배이념을 말하며, 그 연원은 식민지 권력과 타협했던 국내 자유
주의자들과 이승만의 결합에서 찾을 수 있다. 필자는 송진우ㆍ장덕수ㆍ조병옥
등 식민지 한국(조선)에 남아 있던 자유주의자들과 이승만의 자유주의의가 국가
주의ㆍ반공ㆍ친자본주의라는 측면에서의 내용적 동일성, 그리고 자유주의가 세
계사의 시간대에 처해 있던 위상적 차원을 근거로 이들을 보수적 자유주의자로
규정하는 것이다.
국권상실의 위기상황에서 개인의 권리보다는 국권(國權)을 더 앞세웠던 개화
기 자유주의는 이미 국가주의와 더 친화적이었다. 1920년대부터 확산된 사회주
의로 인해 우파의 자유주의는 자신이 지향해야 할 국가를 자본주의 국가로 정립
하였고, 민족개조론ㆍ물산장려운동ㆍ자치운동 등을 둘러싸고 사회주의자와 대
립하며 자연스럽게 반공노선을 띠게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자유주의자
들은 일본 파시즘의 일원이 되어 식민지 파시즘이 주장하는 국가주의와 반공노
선을 자신의 이념적 자원으로 삼았다. 그들이 내걸었던 실력양성노선ㆍ친자본주
의ㆍ반공노선ㆍ국가주의는 이승만과 쉽게 결합될 수 있었고, 해방공간에서 좌파
와의 대결은 그 접합을 더 한층 신속하고 수월하게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 국내
의 자유주의자들이 자신의 친일 전력을 무마하기 위해 이승만에게 합세한 것은
분명히 사실이지만, 이미 그들 사이에는 자유주의라는 이름 아래 반공ㆍ친자본
주의ㆍ친미ㆍ국가주의라는 공통분모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을 불러온 가장 직접적 계기는 한국 자유주의가 자체의 진보적
동력을 상실했다는 데 있다. 서구 자유주의는 종교박해ㆍ신분제ㆍ전제정치와 대
결하며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한 평등과 자유 개념을 확산시켰고, 인민주권의 개
념 아래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결합해나갔고, 선거권 확장이 이루어짐으로써
자유민주주의라는 형태로 정착되었다. 이처럼 서구 자유주의는 주어진 국면에서
의 현실과 대결하며 자기 이념의 내용을 수정ㆍ변용ㆍ확장시킴으로써 진보적
추동력을 획득하여왔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의 자유주의는 전제정치와 식민지
권력으로부터 해방을 추구하는 진보적 이념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식민지 권력과
의 대결에서 한국 자유주의자들이 타협 노선을 걷게 됨에 따라 그 진보성을 상실
했고, 해방 이후에는 미군정의 지원을 받은 우파 세력들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좌익과의 무장투쟁을 치루는 과정에서 대한민국(남한)의 존립을 절대가치로 간
이승만과 한국 자유주의 281
주하는 국가주의와 반공이 자유주의의 틀 속에서 결합되었다. 즉 한국의 자유주
의는 자체의 진보적 동력을 발휘할 계기를 획득하지 못한 채 식민지권력에 순응
하고 좌익과 대결하는 속에서 국가주의와 반공을 그 내용을 삼는 방어적ㆍ보수
적 성격을 갖게 되었으며, 한국 정치의 지배이념으로서 정립된 이후에는 ‘기존질
서를 옹호’하는 보수주의로 고착되었던 것이다.
지배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가 ‘보수’라는 명칭을 부여받게 된 또 하나의 요인
은 세계사적 시간대와 한국의 일국적 시간대의 괴리이다. 진보와 보수는 이념
그 자체의 내용뿐 아니라 해당 국면에서의 위상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서구의
경우 근대 정치사상의 전개과정에서 자유주의ㆍ보수주의ㆍ사회주의 등 주요 정
치사상이 순차적(계기적)으로 출현했으나, 한국에서는 여러 사상들이 완제품 형
태로 동시적으로 수용되면서 다양한 이데올로기들 사이의 경쟁이 더 치열한 양
상으로 전개되었다. 그에 따라 한국의 해당 국면에서는 충분히 진보적 성격을
지닌 정치사상들이 세계사적 발전 단계에 따라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지는 현상
을 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는 모두 진보성을 갖고 있었으
나 자유주의 이념은 일본 제국주의와의 타협적 성격으로 인해 일찌감치 보수성
을 띠게 되었고, 사회주의의 도전을 받아 보수로 규정되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자유주의는 – 국내와 달리 – 충분히 진보성을 유지할 여지가 있었지만, 역시 그
시점에서 보다 진보적이었던 공산주의의 도전에 직면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질서를 옹호하는 보수적ㆍ방어적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22) 필자는 이
두 가지 이유에서 이승만의 자유주의를 보수적 자유주의로 규정한 것이다.
이 글은 서구 자유주의를 전거로 삼고 한국 자유주의를 그것으로부터의 일탈
혹은 왜곡으로 파악하는 시각에 반대하고, 한국의 근현대 역사적 경험 속에서
자유주의가 보수적 자유주의로 변용된 궤적을 서구 정치사상의 한국화라는 시각
22) 그는 1941년부터 미국이 “큰 형의 자격으로 선봉에 서서 모든 사람을 위한 국제적 평등
과 공정의 기초 위에서 국가간에 평화와 선의를 가져오도록 그의 위대한 세력을 행사하
여야 한다”고 주장하며(일본 군국주의 실상 250), 미국 주도 세계질서를 적극 지지했
다. 2차대전 이후 이 세계질서의 도전자는 소련이 유일했고, 반공을 기치로 내걸며 미
국 주도 세계질서를 강하게 옹호하는 이승만의 자유주의 인식은 해방정국의 좌우갈등
과 맞물리며 한층 더 보수적ㆍ방어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282 현대정치연구
2017년 봄호(제10권 제1호)
으로 분석하고자 했다. 이에 대해 아무리 자유주의의 한국적 변용이라고 해도
이와 같은 보수적 자유주의를 자유주의라 부를 수 없다는 비판, 자유주의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반론, 또한 이것이 어떻게 ‘한국화’일 수 있느
냐는 힐문(詰問)을 충분히 받아들인다. 그렇지만 필자는 두 가지 이유에서 한국
의 보수적 자유주의를 자유주의의 ‘한국화’로 파악할 것을 제안한다.
첫 번째 이유는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한국 자유주의의 이러한 모습이 ‘자유
민주주의’로 인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조갑제는 “대한민국의 주인은 늘 보수세력
이었습니다. 우익이라고도 합니다. … 우익은 자유민주주의를 의미합니다”라고
주장했으며(조갑제 2001, 108), 뉴라이트 논객인 김일영은 민주화 이후 보수와
진보의 접합점을 자유주의에서 찾은 바 있다(김일영 2006). 또한 김병국은 한국
의 보수주의자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옹호하고 미국과의 연대를 주장
한 세력”이라고(김병국 2000, 330) 규정하며 한국 보수주의의 본령을 자유민주주
의에서 찾았고, 진보적 학자들 중 조현연도 역대 권위주의 정권의 지배담론을
자유민주주의라는 틀로 포괄하고 있다(조현연 2003). 곧 극우ㆍ뉴라이트ㆍ중도
ㆍ진보를 망라한 논객들이 한국의 보수적 자유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규정하
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연구시각의 교정이다. 종래 한국학계는 암묵적으로 ‘이상화된’
서구 자유민주주의를 모델로 삼아 한국의 근현대 정치사를 일종의 파행ㆍ일탈ㆍ
왜곡으로 규정하고, 서구 자유민주주의가 역사적으로 겪었던 갖가지 변형은 ‘자
유주의의 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포섭하는 경향이 있었다. 필자는 그와 같은 서
구중심적 시각을 걷어내고 우리의 역사적 경험과 문제의식 속에서 변형된 서구
자유주의, 즉 자유주의의 한국화에 주목하려는 것이다. 아울러 그 ‘한국화’는 고
정불변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의 목적의식에 따라 현실을
고쳐나감으로써 한국 자유주의의 폭과 심도를 확장시키는 것, 곧 ‘한국화’의 내
용을 다시 써내려가는 것이 이 시대의 과제 중의 하나이다. 물론 그렇게 전개ㆍ
발전된 ‘한국 자유주의’ 역시 서구의 자유주의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이승만과 한국 자유주의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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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 2017.02.19.
심사일: 2017.02.27.
게재확정일: 2017.03.29.
286 현대정치연구
2017년 봄호(제10권 제1호)
Rhee Syngman’s Middle Thought and Korean
Liberalism
Jung, Seung Hyun | Sogang University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relationship between Rhee Syngman’s middle
thought and conservative liberalism of Korea. This form of liberalism was imported
in enlightenment period(1880’s) and has been understood as American
liberal-democratism since then. I insist that Rhee’s middle period
thought(1912-1945) was formed under the influence of this kind of liberalism
and nationalism, and these two factors made Rhee and Korean(Joseon) liberalists
unite after emancipation(1945). This paper consists of two parts. First part identifies
the main characteristics of Rhee’s liberalism as anti-communism, capitalism
and statism. This part emphasizes the transformation of western liberalism in
Korea’s historical experiences. Second part shows his anti-communism was formed
by nationalism and liberalism, especially highlighting the over-determination
of nationalism. Lastly I contend that Rhee’s thought can be identified as
conservative liberalism although it looks contrary to some aspects of western
liberalism.
Key Words | Rhee Syngman, liberalism, conservative liberalism, anti-communism,
Koreanizaton of western political ide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