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성. 2015.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 비판: 역사관을 중심으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 비판*1)
역사관을 중심으로

최일성
한서대학교

이 글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을 중심으로 그것 주도할 비판적・개혁적 주체를 해체시킨다. 포스트모더
의 서구중심주의적 성격을 밝힌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니즘이 주장하는 권력의 해체는 서구적 입장에서는 업
20세기 말 거의 동시대에 등장한 탈식민주의적 지적 흐 악적 권력층에 대한 해체로 이해될 수 있으나, 비서구
름과 더불어 서구중심주의적 패권과 그 폐해를 비판하 적 입장에서는 해방을 위해 투쟁할 비판적・개혁적 주
면서 서구적 이성 및 진보 개념에 대한 비판을 역설하 체에 대한 해체를 의미한다. 셋째, 역사적 맥락을 거부
였다. 그런 이유로 역사학분야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하는 이른바 몰역사성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러한 입장
의 해체전략이 전일적 관념을 강조해 온 서구적 모더니 은 결국 비서구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지배, 종속, 착취
즘과 결별함으로써 서구중심주의적 역사관을 극복할 등과 연관된 역사적 맥락을 간과하게 만든다. 넷째, 비
수 있는 주요한 이론틀이라는 입장이 개진하기도 하였 서구사회가 당면한 역사적 실재를 보려하지 않는다. 따
다. 그러나 이 글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을 추론하 라서 그것은 비서구사회에 고질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면서 그것에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측면의 서구중심주의 고통의 연속성을 드러내는데 부적합하다. 이러한 측면
가 내재해 있음을 지적한다. 첫째, 어떠한 형태의 비판 에서 보았을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자신들이 비판하고
적 역사이론도 허용하지 않는 한계를 드러낸다. 따라서 자 했던 서구중심적 모더니즘의 역사관을 오히려 새롭
비서구사회의 미래지향적 변혁이나 개혁을 가능하게 게 양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드는 역사이론은 불가능해진다. 둘째, 역사의 변화를
주제어: 서구중심주의, 포스트모더니즘, 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 역사

Ⅰ. 서론 : 서구중심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갈등과 연대의 이중주
이론과 현실 모두에서 ‘서구중심주의(Western-centrism)’와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1)의 상관관계에 대한 활발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본 연구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14S1A3A2043763).
1) ‘포스트모더니즘’은 흔히 ‘포스트구조주의(Poststructuralism)’와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고 있는데,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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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중심으로 사이드(E. Said)가 오리엔탈리즘(1978)에서 고발하고 있는 ‘비서구사회에 대한
서구의 사고-지배방식’을 드러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시도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서구적 담
론과 경향에 대한 맹목적인 공격이나 부인이 아니라, 그러한 담론과 경향을 이질적인 사회에
(무)의식적으로 주입시키려고 하는, 그 속에서 서구적 사고-지배방식이 정당성의 유일한 근거
로 군림하는 은밀한 권력관계와 인식틀을 문제 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학의 경우, 고의적
으로 주석 달지 않는 ‘정치(철)학’

—그것은 분명 ‘서구’의 것이다— 을 중심으로 ‘동양정치(철)

학’을 주변에 위치시키며, 이에 대한 판단근거로 서구의 개념틀을 내세우는 차등적이고 차별적
인 격률 같은 것이 그것이다. 서구중심주의는 이렇게 학문까지도 ‘정통과 잔여’로 구분하는 불
평등한 권력관계와 인식틀로 이해된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본고에서 다룰 서구중심주의의 개념을 한정할 필요가 있다. 사실 서
구중심주의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매우 다층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있는 복잡한 개념으로
확인된다.2) 먼저, 그것은 ‘식민주의’와 자주 혼동되기도 하는데, 식민주의가 주로 정치적 식민
통치의 관행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되는 반면, 서구중심주의는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에 의해 축
성된 위계적 권력관계를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내면화하는데 이용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
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파농(F. Fanon 2002)은 식민주의의 공식적 종결이 투쟁의 끝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탈식민주의의 주요 투쟁대상으로 서구중심주의

—서구의 정치 경제 사

— 를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회 문화적 패권의 과정이자 결과라 할 수 있는

3)

그렇다고 해서 서

구중심주의를 정치적 경제적 식민주의가 단절된 오늘날의 새로운 현상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
을 것이다. 서구중심주의의 기원 자체가 근대의 정치 경제적 식민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종속이론가들에 의해 드러난 바와 같이 정치 경제적 식민주의의 폐해는 식민통치가 공
식적으로 종결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본고는 서

가 레비스트로스(C. Lévi-Strauss)의 구조주의 인식론에 대한 이론적인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러한 인식론
적 경향이 건축, 예술, 문학 그리고 정치 및 사회비평에 확산된 개념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로
버트 J.C. 영, 김용규 역, 백색신화: 서양이론과 유럽중심주의 비판, 경성대출판부, 2008, pp. 110-111 참고. 그러
나 두 개념은 모두 탈중심, 탈경계, 위계적 이항대립의 해체, 그리고 의미의 비결정성과 불확실성 같은 주요 개념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흔히 혼용되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이 개념들 사이의 구분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양자
를 서로 구분하여 사용할 것이다.
2) 이에 대해서는 특히 강정인의 두 논문, 즉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시론적 고찰 -현대 한국정치사상의 빈곤 원인에
대한 탐색-(2000)”과 “서구중심주의의 이해: 용어 및 개념 분석을 중심으로(2003)”을 참고할 것.
3) 그런 이유로 하상복(2008)은 파농의 탈식민주의가 “정치경제적 현실과 실천의 맥락이 배제된 담론적 유희(2008,
114)”로 전유되는 기존의 비평을 비판하고, 그의 사상을 정치경제적 실천의 맥락, 즉 “유럽중심주의 비판”이라는
맥락에서 접근할 때 그 핵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100

정치사상연구 제21집 2호, 2015 가을

구중심주의의 외연을 정치 경제적 식민주의를 배제하지 않는 문화적 사상적 식민화 과정으로
포괄적으로 정의하고자 한다.4)
둘째, 서구중심주의는 이른바 ‘유럽중심주의(Eurocentrism)’와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기도
하는데, 유럽중심주의가 (서)유럽의 지정학적 패권을 우선적으로 문제 삼는 ‘비유럽권(북미 등
과 같은 비유럽-서구권을 배제하지 않는)’ 지식인들에게 특권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반
면,5) 서구중심주의는 확대된 유럽문명(북미 등과 같은 비유럽-서구권을 포함하는)의 패권을
통합적으로 문제 삼는 ‘비서구권’ 지식인들에게 유용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요컨대 유럽중심주의가 ‘(서)유럽’이라는 지정학적 관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면, 서구중심주의는 확대된 유럽문명, 즉 ‘서구문명권’이라는 문화주의적 관념에 주로 의지
한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로 유럽의 지정학적 패권을 문제 삼는 비유럽-서구권 학자들에게 있
어서 ‘유럽중심주의’는 많은 부분 비서구적 입장에서의 ‘서구중심주의’로 치환되기 어려운 측면
이 있는 반면, 국내의 학자들이나 아민(S. Amin 1988; 2008) 등과 같이 비서구적 지적 배경을
가진 학자들에게 있어서 ‘유럽중심주의’는 많은 부분에서 ‘서구중심주의’와 병치될 수 있는 가
능성이 높은 것이다.6) 이를 바탕으로 본고는 ‘한국’이라는 비서구사회의 입장에서 서구중심주
의를 ‘서구/비서구’ 혹은 ‘서구사회/비서구사회’의 개념틀

—‘유럽/비유럽’이 아니라— 을 활용

하여 지칭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이 서구중심주의와 유럽중심주의의 미묘한 개념차이를 희
석시키고자 하는 것은 아니며, 단지 본고의 전개를 위한 임시적 방편임을 밝혀둔다.

4) 이러한 정의가 서구중심주의를 문화적・사상적 식민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강정인(2000, 318-319)이 밝힌 바와 같이 ‘서구중심주의’는 또 다른 차원에서 이른바 ‘문화제국주의’ 혹은 ‘의식의
식민화’ 과정과 차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에 의하면 서구중심주의에는 서구역사의 보편성에 대한 강한 역사주
의적 신념이 존재하는 반면, 문화제국주의나 의식의 식민화 과정에는 그러한 역사주의적 신념이 결여되어 있기 때
문이다.
5) 강성호(2013, 188)는 역사학계의 입장에서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미국학계의 비판을 소개하는데, 그에 의하면 “유
럽중심주의 세계사에 대한 미국 역사학계의 비판은 유럽의 역사적 역할을 축소시켜 미국의 세계적 패권을 정당화”
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를 근거로 판단할 때 미국 역사학계에서 사용하는 ‘유럽중심주의’라는 용어는 유럽이라
는 지정학적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며, 우리의 통념상 비유럽-서구권을 포함하는 ‘서구중심주의’
와 구분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6) 국내의 학자들 가운데 강정인은 영어문헌을 중심으로 우리말의 ‘서구중심주의’로 번역될 수 있는 다양한 용례들 —
Western-centrism, West-centrism, Eurocentrism, Europocentrism— 을 검토하면서, 이 가운데 Eurocentrism,
Europocentrism 등과 같이 ‘유럽중심주의’로 직역될 수 있는 용어들이 문화적인 함의보다는 지정학적인 성격을 강
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에서는 “문화적 현상이나 세계관을 지칭하는데 다소 부적절(강정인 2003,
35-36)”하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Eurocentrism 등에 대한 적절한 번역어로써 ‘유럽중심주의’라는 직역어보다
는 ‘서구중심주의’라는 의역어가 타당하다고 본다. 이러한 제안은 ‘비유럽 서구권’과 구분될 수 있는 ‘비유럽 제3세
계권’ —한국— 의 문화주의적 위상을 반영한 해석으로 이해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 비판

101

이러한 개념적 정의에서 본고는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기원적 논쟁보다는 그것에 관통되어
있는 정치사상적 문제의식에 주의를 집중하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그것은 서구만이 예외적
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강조되는 ‘우월성’, ‘중심성’, ‘보편성’, ‘근대성’ 등에 대한 확신 신념 태도
등이다(강정인 2000; 2003, 42). 이러한 전제로부터 서구중심주의는 ‘서구문명’

—확대된 유럽

— 만이 인류의 역사발전단계 가운데 최고의 단계에 도달했다는 믿음을 표출

문명을 포함하는

하며, 이러한 역사발전 경로는 서구뿐만 아니라 전 인류사에 보편적으로 타당한 것이고, 따라
서 역사발전의 저급한 단계에 머물러 있는 비서구사회는 오직 서구문명을 수용함으로써 발전
할 수 있다는 이른바 ‘역사철학’

—진화론적 역사관— 을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고에 등장

하는 서구중심주의는 비서구사회의 열등성, 주변성, 특수성, 비역사성에 대하여 서구사회의 우

월성, 중심성, 보편성, 역사성 등으로 대비될 수 있는 차별적이고 차등적인 모순관계로 정의된다
(Cf. 강정인 2004; 사이드 1991; K. Lindner 2010).7) 이런 이유로 본고는 서구중심주의의 여러
특성들 가운데 ‘비역사성 대 역사성’이라는 모순적인 관계에 한정해서 논의를 집중하고자 한다.
아마도 이러한 서구중심주의적 모순관계에 직접적으로 의문을 제기한 지적 흐름은 20세기
말에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와 더불어— 일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을

대변하는 사람들은, 서구중심주의적 패권과 그 폐해를 주로 정치 경제적으로 문제삼았던 탈식
민주의자들과는 달리, 서구중심주의의 사상적 개념적 준거틀이라고 할 수 있는 데카르트의 코
기토(Cogito), 즉 인간의 사유능력 그 자체에 대한 회의, 계몽주의적 진보에 대한 거부, 로고스
(Logos)에 대한 해체, 합리적 이성에 대한 반성 등을 역설하면서 이른바 이론투쟁에 집중하였
다. 따라서 구체적으로는 기존의 지배담론을 거부하는 미시정치학이나, 혹은 생태학 등과 같이
다양성을 연구하는 학문분야에 주된 관심을 보였고, 경제학적인 측면에서는 기존의 자본주의
적 근대화과정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이른바 후기자본주의, 소비자본주의, 다국적기업 등과 같
은 새로운 주제들을 다루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들이 집중적으로 진출한 분야가 문
학과 예술 등과 같은 이른바 비사회과학적 영역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나중에 포스트모

7) 세계체제론자로 널리 알려진 월러스틴(I. Wallerstein)의 유럽적 보편주의: 권력의 레토릭(2008, 64-65)는 서구
(유럽)중심주의를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는 유럽 ‘문명’만이 자본주
의 세계체제에서 흥성한 관습, 규범, 관행의 잡탕에 붙이는 포괄적인 용어인 ‘근대성’을 산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근대성이 문자 정의상 진정한 보편적 가치들, 즉 보편주의의 구현이라고 운위되었기 때문에, 근대성은 윤리적 선
이자 역사적 필연성이었다. 비유럽적 고급문명에는 근대성과 진정한 보편주의를 향한 인간의 행진과 양립할 수 없
는 어떤 것이 있음이 분명하고 또 언제나 그런 어떤 것이 있었음이 분명했다. 본래부터 진보적이라 주장되는 유럽
문명과는 달리, 다른 고급문명들은 그 궤도가 아무래도 경직되어서 외부(즉 유럽)세력의 강요 없이는 근대성의 일
정한 변형으로 변모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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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21집 2호, 2015 가을

더니즘의 지나친 관념주의를 지적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문명사가 토인비(A. Toynbee)가 역사의 연구(1934~39)에서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시대적 혼란상을 두고 사용한 말인데(영 2008, 109), 이것이 20세기 후
반 데리다(J. Derrida)에 의해 주창된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틀과 결합되면서 근대성
에 대한 비판담론으로 정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지적 배경에는 고전주의와 계몽
주의로 인해 보편화되기 시작한 서구적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회의가 깔려 있으며, 이것이 확대
되어 서구적 근대성, 즉 ‘모더니즘’에 대한 반성을 요구하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확대된 것이
다. 그런 이유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은 역사주의로 치환되는 단선적 역사에 대한 거부,
서구적 진보관에 대한 회의 등으로 독해될 수 있고, 바로 이 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
적 보편주의의 논리를 지배해 온 역사주의적 가설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이론적 가능성을
내비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중심주의적 편견을 비판하고자 하는
본 연구의 목적에 부합하는 중요한 이론적 자원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예를 들어 젠킨스(K. Jenkins) 등과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자들은, 서구중심적 진보
사관에 힘입어 ‘역사란 무엇인가’를 질문해 왔던 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역사 서술 그 자체가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8)에 대한 대답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역사적 해석이라고 하
는 것은 “어떤 사건은 이야기에 포함시키고, 다른 사건은 배제함으로써 또는 어떤 사건은 강조
하고 다른 사건은 그에 종속시킴으로써”9) 이데올로기적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누
군가의 입장을 옹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기존의 메타서사와는 달리 사
실과 해석 사이의 끊임없는 해석가능성을 제안한다. 따라서 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전
략이 전일적 관념을 강조해 온 모더니즘과 결별함으로써 인식의 개방화를 촉진하고 역사적 사
실에 대한 분석시야를 확장시키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고 서구중심주의적 역사
관을 극복할 수 있는 주요한 이론틀로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강성호 2001, 174-175; 김기봉
2003, 12-13). 더욱이 그들은 진리의 궁극적인 토대를 의심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본연의 회의주
의가 인간존재의 형식과 내용이 서구적 보편사의 정형으로 구획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구성재구성될 수 있음을 함축하기 때문에, 그것이 실질적으로 서구중심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
을 제시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오늘날 만연해 있는 서구중심주의를 극복

8) 키스 젠킨스(Keith Jenkins), 최용찬 역,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서울: 혜안, 1999.
9) 헤이든 화이트, 천형균 역, 19세기 유럽의 역사적 상상력: 메타역사, 문학과지성사, 1991, p. 17; 김기봉, “역사학
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역사이론을 중심으로”, 인문연구제43권, 영남대 인문과학연구소, 2003, p. 13에
서 재인용.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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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천적 전략이 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의심스럽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요구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변호하거나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구중심
주의가 오히려 자신을 공격하는 이론틀로서 거론되는 포스트모더니즘조차도 어떻게 포섭하고
있는지, 따라서 그 문제가 얼마나 복잡하고 구조적인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
연구의 일차적인 목적은 무엇보다도 서구중심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은밀한 갈등과 연
대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 될 것이다. 본고는 이 작업을 위해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에 집
중해서 논의할 것이다.

Ⅱ.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 : 사르트르, 레비스트로스 그리고 데리다의 역사논쟁
1966년 10월 21일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열린 구조주의 세미나에서 데리다는 “인문과학 담
론에 나타난 구조, 기호 그리고 놀이”라는 논문10)을 통해 레비스트로스(C. Lévi-Strauss)의 구
조주의 인식론을 비판하고 이른바 ‘포스트구조주의’의 시대를 열었다. 여기서 그는 독립적이고
우연적인 ‘놀이(jeu)’가 구조주의적 인식틀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했다. 레비스트
로스는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 이론을 근거로 문화에서 통일된 구조를 찾으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이항대립적 인식틀을 사용하여 사물의 실재를 ‘중심’과 ‘주변’으로 분류하였다. 그런
데 데리다가 보기에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식틀은 너무나 경직되어 있어서 놀이와 같은
우연적인 사건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워 보였고, 따라서 문화의 실재적인 다양성을 제대로 설
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그는 이항대립적 사고틀로는 설명되지 않는 문화의 다양
성을 설명하기 위해 구조주의적 인식틀 그 자체에 대한 해체를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선언에
일군의 학자들이 동참하는 바, 예를 들어 기호학분야에서 바르트(R. Barthes), 심리(분석)학분
야에서 크리스테바(J. Kristeva)와 라깡(J. Lacan), 여성주의 및 문학이론분야에서 식수(H.
Cixous), 역사 및 문화이론분야에서 푸코(M. Foucault), 료타르(J. F. Loytard), 보드리야르(J.
Baudrillard)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레비스트로스가 전제하는 이항대립적 인식틀이 사실은 상
대적이고 유동적이며 불완전하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상대주의야말로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

10) J. Derrida, “La structure, le signe et le jeu dans le discours des sciences humaines”,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Paris: Seuil, 1967, pp. 409-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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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21집 2호, 2015 가을

고틀을 전복시킴으로써 실재(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이
런 이유로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1984)’을 선언한 것이다.
데리다의 비판이 제기된 이후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인식틀은 사물의 다양한 실재
와 그러한 실재들의 생동감 있는 다양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아마
도 이러한 비판들 가운데 일정 부분은 타당성을 확보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의 인
식론이 역사마저 중심과 주변으로 이원화하고자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M. Hénaff 1991, 409-428). 이는 데리다가 해체하고자 했던 레비스트로스
의 구조주의 인식론이 자칫 서구역사와 비서구역사의 대립을 강조하는 모더니즘의 역사관으로
오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실제로 슬픈열대(1955)에서 레비스트
로스는 서구사회의 진화론적 역사주의를 비판해 왔고, 자신이 수행하는 인류학적 연구들이 오
히려 그 동안 배제되어 왔던 비서구사회의 역사를 밝혀줄 수 있다고 주장하여 왔다(Cf. C.
Lévi-Strauss 1974, 9-39). 사실 데리다의 해체철학이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식론에 대한
이론적 해체를 시도한 것은 분명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레비스트로스의 역사관을 비판하기
보다는 오히려 포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포스트구조주의는 레비스트로스의 가설
에 대한 반발에서 시작되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특정 영역

—특히 역사관— 에 있어서만큼

은 레비스트로스와 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포스트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미묘
한 입장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역사문제와 관련하여 ‘모더니즘의 역사관’을 대변하는 이론가는 레비스트로스가 아니
라 실존주의 철학의 거장 사르트르(J.P. Sartre)라고 할 수 있다. 데리다의 비판이 제기되기 불과
몇 년 전 레비스트로스는 사르트르와 심각한 역사논쟁을 벌였다. 그는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비판(1960)에 관한 자신의 세미나에서 ‘분석적 이성’과 ‘변증법적 이성’의 구분을 설파한
사르트르의 역사가설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였다(C. Lévi-Strauss 1962, 328). 그가 보기에
사르트르 역사관은 주체가 자신의 인식활동을 바탕으로 실천하는 경험과 연관된다. 사르트르
에 의하면 인간은 인식능력에 따라 모든 것을 무화할 수 있는 존재로 승격될 수 있는데(J.-P.
Sartre 1943, 57),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역사는 조금은 덜 숙련된 인식능력(분석적 이성)으로
부터 보다 숙련된 인식능력(변증법적 이성)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기원
및 진화에 대한 인류학적 가설을 의미하는 바, 사르트르가 실존주의 철학을 “인류학 그 자체”11)

11) Jean Pouillon, “Sartre et Lévi-Strauss” in Bernard Pingaud et al., Claude Lévi-Strauss, L’ARC, n⁰26, Paris:
Inculte, 2006, p. 55에서 재인용.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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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공공연하게 선언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역사관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비판하고자 했던 모더니즘의 역사관을 상징
적으로 대변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분석적 이성은 실재를 부분으로 분해하면서 자연
과학 속에서 작동하고 변증법적 이성은 분석적 이성의 활동영역을 뛰어 넘어 인간과학 속에서
작동한다. 여기서 사르트르가 원시사회와 같은 비서구사회에 부여한 성격은 확실히 분석적 이
성의 측면이다. 그가 보기에 이들의 인식능력은 숙련되지 못하여 역사 및 실재에 대한 변증법
적 활동을 이끌 수 없고 그것들을 분해하는 저차원의 능력만을 보여줄 뿐이다. 따라서 비서구
사회의 역사는 단지 “비루하고 기형적(rabougrie et difforme)”12)일 뿐이라는 것이 사르트르의
역사관인 것이다. 사실 이러한 역사관은 아프리카의 역사를 부인한 헤겔(G.W.F. Hegel)이나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투영된 마르크스(K. Marx)의 서구중심적 지적 계보를 그대로 계승한 것
이다(Cf. 영 2008, 77). 그 역시 서구의 역사를 관통하는 서구중심주의적 역사관에 의문을 제기
하지 못하고 오히려 힘을 보태왔던 것이다.
사르트르의 이와 같은 서구중심주의적 역사관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바로 레비스트로스
였다. 그의 야생의 사고(1962)는 변증법적 이성비판(1960)이 출간된 직후에 발표되었고,
그 가운데 마지막 장 역사와 변증법 은 전적으로 사르트르의 역사관을 비판하는데 할애되었
다.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사르트르가 실수한 부분은 인간의 이성능력을 바탕으로 해당 사회
의 역사를 설명하고자 한 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실존철학은 비서구사회가 서구사회보다 역사
적으로 열등하고, 그러한 열등성은 구성원들의 지적 능력의 차이를 반영한 것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의 차이로
설명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역사는, 비록 그 외형에 있어서는 서구사회와
비서구사회의 차이를 드러낼지라도, 그것을 관통하는 ‘의식의 원형’ 그 자체

—구조주의의 절대

— 는 그것이 서구인의 것

교의라고 할 수 있는 ‘이항대립적 사고틀(C. Lévi-Strauss 1962, 355)’

이든 비서구인의 것이든 간에 동일한 원형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인
간의 역사는 이러한 원형적 구조가 시간적 혹은 공간적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되어 왔다
는 점에서만 설명이 가능한 것이었다.13) 이는 서구사회의 진보적 역사관에 대한 거부였으며,

12) Jean-Paul Sartre,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 p. 203; Claude Lévi-Strauss, La pensée sauvage, Paris: Plon,
1962, p. 329에서 재인용.
13)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변형이론’을 바탕으로 인류학의 오랜 논쟁거리인 ‘토테미즘’과 ‘카스트제도’의 관계를 설
명한다. 그에 의하면 토템미즘은 자연(토템동물)의 차이를 바탕으로 문화(토템집단)적 차이를 설명하는 문화인 반
면, 카스트는 서로 다른 문화적 요소(기능, 서비스 등등)의 차이를 바탕으로 또 다른 문화(신분)적 차이를 설명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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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21집 2호, 2015 가을

서구사회가 비서구사회보다 우월하다는 서구적 나르시시즘에 대한 내부적 비판이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러한 원형적 구조를 ‘야생의 사고(la pensée sauvage)’라고 명명하고, 이
개념을 바탕으로 실존주의의 철학을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에 의하면 야생의 사고는 “원시사
회의 사고가 아니며, 원주민들의 사고도 아니며, 원시인 혹은 고대인들의 사고도 아니다. (오히
려) 그것은 야생상태의 사고(C. Lévi-Strauss 1962, 289)”로 이해된다. 이러한 야생의 사고는 서
구인들의 것과 마찬가지로 비서구인들의 것 역시 똑같은 방식과 똑같은 의미 속에서 ‘논리성’과
‘합리성’을 보유한다(C. Lévi-Strauss 1962, 355). 그러므로 서구인들의 사유능력에 어떠한 종류
의 특권도 부여할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유능력은 단지 실재화의 과정
속에서만 차이 혹은 역사를 드러낼 것이다(J. Pouillon 2006, 59). 이런 이유로 클레망(C.
Clément 2002, 103)은 인류학자들이 연구하는 글자 없는 민족, 혹은 자신들의 역사를 기술할
문서화된 자료들이 존재하지 않는 민족들의 삶의 과정을 역사 이전에 혹은 그 외부에 놓는 것
은 오류라고 진단한다. 이들 사회 역시 완벽하게 역사적이며, 원주민들 역시 자신들의 문화를
역사적인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원시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토테미즘’
의 경우, 각각의 부족에 고유한 토템나무나 토템동물들은 각각 자신의 조상들과 연결되어 있으
며, 비록 그 내용이 기술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은 ‘일화적(C. Clément 2002, 60)’인 방식으로
자신의 역사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사르트르와 레비스트로스 사이의 간극은 넓어 보인다. 분명한 것은 사르트르에게서
인류의 역사는 ‘서구의 역사’와 동의어이며, 레비스트로스가 비판한 것은 사르트르의 이론에 내
재되어 있는 이와 같은 서구중심적 편견이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사르트르의 역사관은 역사
의 단선적 진화를 지지하며, 따라서 총체적 역사 혹은 대문자 역사(History)를 지향한다. 그러
나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에 역사는 전적으로 상대적이며, 따라서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인 역사
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총체적인 역사관은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파악되며(Y.
Simonis 1980, 138), 결과적으로 비서구사회의 역사는 ‘비루하고 기형적인’ 것이 아니라 서구의
시각에서 파악하기 힘든 그 자체의 의미와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Y.
Simonis 1980, 135-138).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은 총체적인 역사

—이것 역시 ‘서구의 역사’이다— 에 대한

레비스트로스의 비판이, 모더니즘의 진화론적 역사관을 비판하고자 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역

문화이다. 따라서 양자는 서로 다른 문화적 환경에서 유래한 서로 다른 문화가 아니라, 단지 이항대립적 사고가 서
로 다르게 적용된 변형의 결과라는 것이다(Cf. C. Lévi-Strauss 1962, 161-171).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 비판

107

사관과 많은 부분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은, 비록 그것이 레비스트로
스를 비판한 포스트구조주의에 지적으로 의탁하고 있을지라도, 일정 부분 레비스트로스와 이
론적으로 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지적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의 차이를
드러내는데 중요한 것이다.14) 특히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비록 양자의 입장이 대립적

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특히 전자는 이항대립적 사유체계를 지지하고 후자는 해체한다는

— 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 즉 소문자 역사들(histories)에 대한 신념을 함께 제공

점에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게 거론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구조주의적’이라는 용어가 대서사로서의 역사주의, 즉 총체적 역사
관에 대한 불신을 지칭하는데 유용하다는 영의 지적(영 2008, 204)이 만일 포스트구조주의에
게 특권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면 확실히 불충분한 것이다. 대서사로서의 역사주의는 포스
트구조주의뿐만 아니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역시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포
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은 레비스트로스와의 대립에서보다는 사르트르와의 대립에서 보다 잘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파악된다. 이때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은, 한편으로는 사르트르의 역
사관에 상징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이른바 서구중심주의적 진화론적 세계관

—서구적 역사주

— 에 대한 회의를 담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중심주의의 사상적 토대인 계몽주의적

합리성이 다양한 문화들의 상대적 본질이나 성격차이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
의식을 담고 있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있어서 역사란 모더니즘의 기본 전제가 되
었던 목적론적이고 종말론적인 대문자 역사(History)가 아니라, 의미와 해석의 문제가 끊임없
이 제기되는 소문자 역사들(histories)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데리다는 역사(텍스트)에 대한 보편적 이해가능성을 부인하면서 역사(텍
스트)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을 제안하고, 이것이 오늘날의 철학이 담당해야할 임무라고 주장한
다. 그가 보기에 서구의 철학적 전통은 역사를 언어화(텍스트화)함으로써 실재와 의미를 확정
하고자 했지만, 언어 자체가 개연적이고 우연적인 까닭에 그러한 기획 역시 허구이며 꿈에 불
과했던 것이다. 서구철학이 전제하는 실재의 현전(présence)이란 “철학의 역사에서 제시될 수
없으며(데리다 1992, 29)”, 단지 모사적인 ‘차연(différance, Cf. 데리다 1992, 31-38)’만이 그 징
후를 감지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이때 차연은, 기호의 차이에서 의미(현전)를 확정하고자 했

14)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치환 가능하지만, 그 역관계가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구조주의뿐만 아니라 구조주의의 지적 흐름도 일정 부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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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21집 2호, 2015 가을

던 구조주의 언어학의 가설과는 달리, 기호가 오히려 그러한 의미와 현전을 “유예 연기 이송
우회 지연 유보(데리다 1992, 31)”한다는 것을 암시하며, 따라서 실재의 현전을 드러낼 수 있
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사이를 무한히 반복하는 일종의 ‘무한한 반복운동’으로 이해된다(데리다
2004, 27-41). 그가 보기에 보편적 진리나 가치를 추구해온 서구의 철학적 전통은 일종의 ‘폭력
(데리다 2004, 184-250)’이었으며, 이 속에서 텍스트들은 성/속, 진/위, 선/악, 미/추, 고/저 등과
같은 서열이나 우열을 함축하는 대립항들을 폭력적으로 강요해 온 것으로 파악된다. 서구적 전
통이 이러한 이항적 요소들 가운데 어느 일방에 보다 긍정적인 가치나 논리성이 부여해온 까닭
에 인류역사에 다양한 방식의 ‘폭력적 위계’가 만연했다는 것이다(데리다 1992, 39-60). 결국 서
구철학은 동질성보다 이질성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으며, 때로는 독단적이고 비현실적이어서
역사의 실재성과 다양성을 드러내기 어려웠다는 것이 데리다의 주장인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즘의 역사관과 구분되는 몇 가지 중요한 합
의를 이끌어 내는데, 크게 네 가지 측면에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대서사 혹은 메타서사적 역
사관의 거부이다. 이들이 보기에 모더니즘의 역사관에 내재된 ‘총체화’의 경향은 이러한 메타서
사적 시각에서 비롯된다(Lyotard 1983). 그러나 우리에게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말해줄
수 있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객관적이고 총체적인 설명은 불가능하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메
타서사를 토대로 하는 모더니즘적 역사관과 단절하고, 다양성, 특수성, 우연성, 상대성 등을 중
시여기는 새로운 역사관을 주장한다. 둘째, 역사적 진리와 실재에 대한 구성적 관점이다. 이들
이 보기에 진리와 실재는 사회나 문화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합의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Derrida 2004). 셋째, 역사적 실재에 대한 재현 불가능성을 전제한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은 주체의 외부에 객관적이고 본질적인 실재가 존재하고 이를 재현할 수 있다고
가정한 데카르트적 근대적 사고를 거부한다(Baudrillard 1981; Foucault 1970; 데리다 1992).
인간은 언어라는 매개에 의해서 개별 현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이미 언어에 의해 번역되고 구성
된 현실만을 접하게 될 뿐 그 본질을 접할 수 없다. 데리다의 유명한 경구, “텍스트 밖이란 존재
하지 않는 것이다(il n’y a pas de hors-texte; 데리다 2004, 287)”15)는 말은, 역사(텍스트) 그 자

15) 본고는 김웅권의 한글번역 “텍스트 밖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를 따랐다.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에 등장하는 “Il n’y a pas de hors-texte”에 대해 위트슨(James A.T. Whitson)은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There is nothing outside of text)”로 번역하는 것은 오역이며, “텍스트 외부는 없다(There is no outside-text)”, 다
시 말해 텍스트 그 자체의 해석가능성만 존재한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Cf. James A.T. Whitson,
“Post-structuralist Pdeagogy as Counter-Hegemonic Praxis(Can we find the baby in the bath water?)”, in Peter
Mclaren ed., Postmodernism, Post-colonialism and Pedagogy, Albert Park: James Nicholas Publishers, 1995,
pp. 129-130. 김웅권의 번역은 후자의 입장에 충실해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 비판

109

체가 외부적 의미나 함의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함축한다. 따라서 그것은 본질적이
거나 필연적이지 않고 다의적이며 다중적인 것이 된다. 넷째, 역사적 지식과 권력의 유착관계
이다. 푸코(M. Foucault)에 의하면 지식과 권력의 관계가 서로 분리될 수 없고, 따라서 순수하
고 중립적인 지식이란 존재하기 어렵다(Foucault 1971). 그러므로 우리가 역사적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은 보편타당한 진리를 담고 있기보다는 특정 권력을 지향하는 이데올로기의
다름 아니며, 따라서 관련된 권력의 게임에 종속된 위치에 놓이게 된다. 푸코는 이러한 현상을
‘담론(Discours)’이라는 개념을 통해 제시하는데, 그에게 있어서 담론이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
할 수 없는 것, 정당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 그리고 진리인 것과 아닌 것 등을 구분하고 분절시
키는 사회적 규약으로 이해되는 바, 이때 담론은 권력층에 의해 대상세계가 “평가되고 분배 배
급되고 이를테면 할당되는 방식”16)을 바탕으로 지식을 구성하기 때문에 생산된 지식 그 자체
가 권력관계를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네 가지 특징들은 보다 세부적으로 논의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그러
한 특징들이 각각 어떠한 포스트모더니즘적 조류로 유입되고 또한 어떠한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을 양산하는지를 관찰하는 것은 중요한 연구과제를 구성한다. 그러나 본고는 그러한 세부
적 논의를 차후로 연기하고, 단지 그러한 네 가지 특징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흐름 하나에 논의
를 집중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것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적 세계관과 역사관
을 설명하는 하위변수로 기능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레비스트로스의 이
론적 전제를 뒤집은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오히려 입장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양자 모두 다양성, 유연성, 상대성을 지닌 소문자 역사들(histories), 즉 상대주
의적 역사관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은 포스트구조주
의에게서 뿐만 아니라 레비스트로스의 상대주의적 역사관에도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결론은 본고의 입장에서 중요한 함의를 제공하는데,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이 포스
트구조주의뿐만 아니라 레비스트로스의 역사관에 대한 비판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
실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16) M. Foucault, “The Discourse on Language”; 김성기, “포스트모더니티의 사회 이론 : 료타르, 들뢰즈, 푸코를 중
심으로”, 문학과사회 제3권 제1호, 문학과지성사, 1990, p. 368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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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21집 2호, 2015 가을

Ⅲ.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
레비스트로스의 역사관이 모더니즘의 서구중심적 역사관으로부터 벗어나 상대주의를 지
향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인간의 의식에 무의식적인 ‘원형’

—‘야생의 사고’— 이 있다는

주장에 근거를 둔다.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야생의 사고는 성/속, 미/추, 고/저, 냉/온 등과 같
은 이항대립적 계열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자체는 서구인이나 비서구인에게 모두 원형
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고가 시간적 그리고 공간적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되어 나타나는
역사는 다양성과 상대성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야생의 사고 그 자체는 공시적이지
만 통시적인 ‘변형’의 와중에 있다는 것이다.17) 이러한 논리로부터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이 비
서구사회의 역사성을 도외시하지 않았으며, 서구사회가 비서구사회의 역사를 간과해온 오만하
고도 잘못된 전통에 대해서 반대할 수 있었다고 판단한다. 그가 보기에 원시사회와 같은 비서
구사회 역시 서구적 합리성에 해당되는 요건을 거의 완벽하게 갖추고 있으며, 따라서 서구사회
에 뒤처지는 열등한 사회가 아니라 단지 ‘다른 종류’의 사회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대주의는 확
실히 보다 우월한 사회에 대한 신념을 제거하면서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보다 열린 세계
를 지향하는 논리처럼 이해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대주의적 세계관이 레비스트로스에게만 고유한 것은 아니다. 이미 20세기
초반 보아스(F. Boas 1911)를 필두로 한 문화상대주의자들은 당대에 성행하던 이른바 문화진
화론을 거부하고 문화라는 것이 각각의 독특성으로 평가를 받는 것일 뿐 그것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불가능하며 무의미한 것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당대로서는 이러한 시각이 서구를 정점으
로 하는 위계적 세계관을 문제삼고 비서구사회 역시 존중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대두시킨 것은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그것은 이미 포스트모더니즘에 앞서서 서구적 보편주의나 역사주의를
비판할 수 있는 주요한 이론적 자원으로 거론되기도 하였고, 실제로 베네딕트(R. Benedict), 미
드(M. Mead), 허스코비츠(M. Herskovits) 등과 같은 보아스의 지적 후계자들은 그러한 전제를
실천하려고 노력하기도 했다(Cf. 유명기 1993; W.J. Vernon 1996).
그러나 문화진화론의 왜곡된 역사관을 비판해온 문화상대주의자들의 심각한 딜레마 가운
데 하나는 이들의 주장이 비서구사회의 역사를 또 다른 형식으로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7) 레비스트로스는 ‘토테미즘’과 인도의 ‘카스트제도’가 동일한 원리의 야생의 사고가 변형되어 서로 다른 역사적 형
태로 나타났다는 이른바 ‘변형이론’을 제시한다. 그의 변형이론에 대한 설명과 비판에 대해서는 최일성, “금지와 타
부, 혹은 이항대립적 사고의 정치사상적 기초에 관한 연구: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
로”, 사회과학연구제19집 1호,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2011, pp.273-282.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 비판

111

왜냐하면 이들은 비서구사회에 대한 형식적 배려에 집착한 나머지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배
제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모든 지식체계나 가치체계가 타당성을 가진다는 상대주
의의 함정에 쉽게 매몰되어 버리기 때문이다(김여수 1991, 79). 상대주의적 시각을 유지한다는
것은 서로의 차이에 대한 인정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따라서 서로의 자율성에 대한 불간섭의
원칙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비서구사회의 역사를 구원하겠다는 이들의 기치는 매우 안타깝
게도 서구사회와 비서구사회의 간문화적 ‘소통가능성’과 ‘비판가능성’에 대한 거부나 무시로 연
결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서구사회의 비서구사회에 대한 상대주의적 태도에는,
비서구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의 열악한 환경에 대해서도 그들이 쉽게 손을 놓게 만드는, 혹은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음을 은폐하게 만드는 일종의 ‘의도적 무관심’의 수
단이 숨겨져 있을 수 있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서구사회는 서구사회의 이러한 고의적 무
관심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할 수 없는 혹은 상대주의적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또 다른
형식의 억압에 짓눌린다. 결국 비서구사회의 입장에서 상대주의적 세계관은 역사를 회복시킬
수 있는 묘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

—특히 간문화적 ‘소통가능성’과 ‘비판가능성’을 거

— 에서는 그것을 옥죄는 굴레가 되는 것이다.

부한다는 차원에서

이러한 입장에서 본고는 레비스트로스와 포스트구조주의의 상대주의적 역사관을 수용하
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포스트
모더니즘은 자신들이 구원했다고 자랑하는 역사들

—즉 대문자 역사(History)로부터 해방된

— 에 대한 비판가능성을 제안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것으로 간주된 소문자 역사들(histories)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서구중심성을 문제삼고자 할 때 중요한 함의를 제공한다. 특히 역사
의 변혁가능성이나 개혁가능성을 심각하게 모색해야만 하는 미래지향적 입장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모더니즘에 내재된 서구적 신화를 탈신비화할 수 있는 이론적 역
량을 가진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 한계 역시 분명해 보이며, 오히려 비서구사회적 입장
에서는 서구중심주의의 신화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
까지 한다.
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은 어떠한 형태의 비판적 역사이론

—비록 그 자신은 모더

— 도 허용하지 않는 한계를 드러낸다. 보다 엄

니즘의 진보사관을 비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하게 말하자면 그러한 역사이론은 포스트모더니즘 내부에서는 가능하지도 않다. 포스트모더

18) 마르티니엘로(2002, 122-124)는 오늘날 회자되고 있는 다문화주의가 일종의 문화상대주의적 관점에서 해석될 때
소수집단의 열악한 환경에 대한 주류집단의 의도적 무관심이나 무책임으로 표출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112

정치사상연구 제21집 2호, 2015 가을

니즘에서 비롯되는 이론의 부재현상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다(Cf. 김욱
동 1990; 김문조 1993). 실재에 대한 궁극적인 해석을 부인하는 상대주의적 입장은 구체적인
대상세계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기 때문에 도덕적 혹은 윤리적 가치들에 대한 실천적 판단이나
결정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미래지향적인 변혁이나 개혁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론적 근
거들은 사라지게 되며, 비서구사회의 열악하고 참담한 사회적 조건

—많은 부분 서구사회의 식

— 은 불현듯 서구사회의 윤택하고 풍요

민주의와 제국주의로 인해 초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로운 사회적 조건과 동등한 위상을 갖게 되는 모순으로 치닫고 만다.
아마도 이러한 모순을 가장 냉혹하게 비판한 학자는 이글턴(T. Eagleton)일 것이다. 그의
저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2000)은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는데,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이 서구사회의 새로운 자본주의, 즉 기존의 노동집약적이고 노동착취적인
현장제조업을 넘어선 서비스업, 금융업, 정보산업 등과 같은 새로운 시장논리의 출현과 밀접하
게 연결되어 있음을 중요하게 거론한다(이글턴 2000, 11).19) 요컨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지
적 실험이 전개될 수 있었던 물적 조건은 분명히 ‘서구적 자본주의’

—대다수의 비서구사회에

— 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대주의

서는 아직도 요원한

적 태도를 강조하면서 착취와 소외로 얼룩진 비서구사회의 불합리한 역사들에 대해서 비판적
인 숙고를 거부하고, 이것들이 단지 문화적 다양성과 복잡성을 의미할 뿐이라는 문화(주의)적
이고 탈정치적인 해석만을 제시할 뿐이다. 달리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사회와 비서구사
회의 물적 조건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에 대해 침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비록 모더니즘의 서구중심적 물질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의 날을 세워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들의 물적 토대에 대해서는 비판의 태
도를 불허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 내부에는 어떠한 “개선이나 몰
락을 겪을 수 있는 역사(이글턴 2000, 108)”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미래지향적이
고 비판적인 역사이론 또한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19) 아마도 이러한 측면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학자는 보드리야르(J. Baudrillard)일 것이다. 그는 소비사회
(1970)에서 20세기를 전후하여 시장경제체제에 두드러진 변화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전은 대량생산시대로 생
산이 제품의 사용가치에 의존하고 합리적인 수요를 충족하던 시대였다면, 이후는 고도의 IT기술시대로서 욕망을
부추기는 시대가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오늘날의 상황은 물건이 인간을 유혹하고 조정하는 소비시대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품의 형식과 실용성에 의해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과 사회적 지위, 성공의 척도를 가늠하는 사
회구성원으로서의 욕망에 의해 구매한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소비사회가 포스트모던적 상황을 보여준
다고 간주한다. 이러한 개념정리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개념 자체가 서구적 조건과 개념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Cf. Jean Baudrillard, La Société de consommation, Paris: Gallimard, 1970.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 비판

113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이 드러내는 두 번째 문제점은 역사의 변화를 주도할 비판적 개
혁적 주체를 해체시킨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이항대립이 해체되는 상황에서는 궁극
적으로 ‘주체/객체’의 구분마저 불명료해지기 때문이다. 이는 비서구사회의 입장에서는 치명적
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권력 개념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헤겔의 용어를
빌리자면 그것이 ‘주인/노예’의 이항대립과 같은 위계적 관계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
유로 푸코는 감시와 처벌(1975)에서 기존의 권력관계

—‘주인/노예’— 에 따라 지식의 제 형

태가 왜곡되는 역사적인 과정을 분석하면서, 그러한 권력관계에 대한 해체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이다. 제3세계적 입장이나 노예의 입장에서 이러한 제안이 갖는 해방적 가치를 부인할 순 없
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제3세계가 혹은 노예가 직접적으로 기존 권력에 대한 해체를 주장
완결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기존 권력관계에 대한 해
체를 주장 완결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응권력이 필수적인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제3세
계가 혹은 노예가 그러한 대응권력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해체

—권력은 부정적인 것이기 때문

— 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수없이 반복하는 ‘해체’의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 요컨대 그것은 “무엇에 대한 해체인가(영
2008, 108)?”
영에 의하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그 대답을 “‘서양’이라는 개념과 그것의 권위와 우선성
(Ibid.)”에서 찾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서양’이라는 개념 자체를 문제
삼는 혹은 문제 삼을 수 있는 주체가 서구사회, 즉 ‘권력자’ 혹은 ‘주인’의 입장을 향유할 수 있는
주체에게만 한정된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반복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해체라는 것은 권력의 지위(서구사회)를 문제 삼을 수 있는 또 다른 권력자의 입장(서구사회)
에서 주장일 뿐, 이미 정치 사회적으로 무장해제당한 ‘피권력자’ 혹은 노예의 입장(비서구사회)
에서 주장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해체를 주장할만한 대응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게다가 서구사회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그나마 가지고 있는 권력마저 해체하
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권력이라는 것은 다면적이어서 한편으로는 억압의 수
단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해방의 수단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 자체를 해체
하려는 시도는 서구사회의 입장에서는 많은 부분 억압적 권력자에 대한 해체를 의미할지 몰라
도, 비서구사회적 입장에서는 거의 대부분 해방을 위해 투쟁할 비판적 개혁적 주체에 대한 해
체를 의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포스트모더니즘이 주장하는 해체의 개념은 비서구사
회의 입장이 반영되어 있지 않거나 거의 전적으로 무시된 개념처럼 보이며, 이 속에서 비서구
사회는 부당하게도 비판적 개혁적 투쟁적 주체에 대한 해체를 선언하지 않을 수 없는 부당한

114

정치사상연구 제21집 2호, 2015 가을

굴레가 되는 것이다.
셋째,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관은 역사적 맥락을 거부하는 이른바 ‘몰역사성’의 한계를 드
러낸다. 끝도 시작도 없는 무한한 ‘차연’의 반복운동으로 이해되는 역사관에서는 시간의 선차성
이 부정되며, 따라서 서구역사뿐만 아니라 비서구사회에 고유한 어떠한 역사적 맥락도 인정되
지 않는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즘적 거대서사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간
주한 ‘우연적 사건’, ‘놀이’ 혹은 ‘개별적 특이성’을 강조하기 위해 거대서사 자체를 해체하는 방
식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러한 제안은 우연적 사건이나 특이성 자체는 구원할 수 있는지 모르
겠지만, 그것을 판단하고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양한 역사적 맥락들을 와해시키는 무모
한 측면이 있다. 요컨대 특정한 사건을 복잡하고 다중적인 맥락 속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평면적인 차원에서 단지 ‘차이’만을 드러내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그
런 이유로 일부 비판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단지 “‘역사’를 […] ‘변화’라는 것으로 암암리에 환
원”20)시키는 일종의 기계와 같다고 평가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러한 입장은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2004)와 글쓰기와
차이(1967)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곳에서 그는 글쓰기 자체가 역사적이라는 말을 수없이 반
복하는데, 그것은 글쓰기만이 가장 적극적으로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그의 생각에서 비
롯된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만들어낸 ‘차연(différance)’이라는 용어는 ‘차이(différence)’라는
기존 어휘에서 e를 a로 변경한 의도적인 변형의 결과인데, 데리다는 양자가 음성적으로는 구분
이 되지 않을지라도 문자적으로는 차이를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중시 여긴다.21) 데리다가
보기에 기존의 모더니스트들은 음성적 차이에 근거하여 의미를 확정해 왔기 때문에 이와 같은
차이를 밝혀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차이를 생산하는 행위(글쓰기) 자체를 이해할 수 없
다. 그가 보기에 작가가 글을 통해 차이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역사적인 과정 그 자체로 보인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역사는 매우 관념적인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
록 글을 쓰는 행위 그 자체는 경험적이고 실천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글을 쓰는 의도와 맥락
자체는 작가의 의중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는 텍스트화된 글을 통해서만 작가의 의도와

20) Francis Mulhem ed., Comtemporary Marxist Literary Criticism (London, 1992), p. 22; 이글턴, 2000, op. cit., p.
102에서 재인용.
21) 이러한 실험을 가장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식수(H. Cixous)이다. 그녀는 글쓰기(차이의
생산)가 역사적이라는 데리다의 철학을 토대로 기존의 남성중심적 담론이나 서사와 구분될 수 있는 이른바 ‘여성
적 글쓰기’를 페미니즘적 운동차원에서 제안한다.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이론적 평가에 대해서는 M.
Calle-Grube, Hélène Cixous, corisées d’une œuvre, Paris: Galilée, 2000 참고.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 비판

115

맥락을 유추해야 하는 매우 수동적인 상황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글을
생산하는 작가에게 있어서는 실천의 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것을 읽는 독자에게 있어서는
단지 관념적인 차원에서의 해석문제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22) 따라서 포스트모더니
스트들이 복원하고자 노력했던 소문자 역사들(histories)은 관념들의 역사가 되는 것이며, 독자
들은 그러한 역사의 생산이나 실천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몰역사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역사를 텍스트화 한다는 것은 미래를 위한 ‘변혁가능성’으로서보다는,
수동적으로 읽혀지는 따라서 자신에 대한 ‘해석가능성’만을 열어놓은 고정된 유물로서 취급하
겠다는 의도이다. 이는 비서구사회가 주로 경험하고 있는 지배, 종속, 착취 등과 같은 복잡하고
다양한 역사적 맥락보다는, 작가가 생산해낸 기호의 ‘차이’가 도대체 어떤 의중에서 비롯된 것
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일러주는 조야한 지적 유희에 불과할 따름이다.
마지막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관은 비서구사회가 당면한 ‘역사적 실재’를 보려하지 않
는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있어서 현실은 언제나 차연된 것, 혹은 모사
된 것들로 드러나기 때문에 무엇이 현실적인 실재인지에 대한 소모적 논쟁이 반복된다. 따라서
비서구사회의 입장에서는 과연 포스트모더니즘이 비서구사회의 역사적 실재를 제대로 드러내
고 진단할 수 있는가가 중요해지지 않을 수 없다. 달리 말해 포스트모더니즘이 비서구사회에
있어서 현실적합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글턴은 아도르노(T. Adorno)의 숙고를 빌어 제3세
계적 맥락에서 역사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화려한 언사와는 달리 고질적인 하나의 지속성에
시달리고 있음을 간파한다. 그것은 바로 “고통의 절대성”23)이다. 이글턴은 다음과 같이 기술한
다. “역사에 대해 사회주의자들이 지금까지 가장 강하게 받은 인상은 역사가 놀랄 정돌 하나의
지속성

—참혹함과 착취라는 지독스럽게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현실들— 을 보여주었다는 것

이다. 물론 이러한 현실들은 수많은 다른 문화적 형식들을 취해 왔다. […] 그러나 (포스트모더
니즘의 주장처럼) 만약 역사가 진정 철저히 무작위적이고 비지속적이라면, 어떻게 우리가 이상
하리만큼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연속성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이글턴 2000, 104-105, 괄호 추
가)?” 이러한 지적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비서구사회에 고질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고통의 연속

22) 포스트모더니즘 운동이 문학과 예술분야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관념주의를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르
겠다. 물론 래쉬(S. Lash 1990) 등과 같은 포스트모던 사회학자들은 앞으로는 사회운동도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
에서 진행될 때 보다 효율적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이러한 작가(이론가)
중심성은 그들이 제안한 포스트모던적 사회운동이 과연 비판적 대중운동으로 이끌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궁극
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제임슨(F. Jameson)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효과를 ‘비판 그 자체의 가능성의 종말’로 정의한
것(영 2008, 299-301)은 그러한 의문에 힘을 더해준다.
23) Theodor Adorno, Negative Dialetics (London, 1973), p. 320; 이글턴, 2000, op. cit., 104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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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21집 2호, 2015 가을

성을 드러내는데 부적합하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포스트모더니즘은 비서구사회가 당면
하고 있는 사회적 배제를 이론화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며, 경제적 착취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에 무관심해 보인다. 이러한 역사적 실재들은 단지 역사의 다양성을 확인하는 수많은 지표
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될 뿐이기 때문이다.

Ⅳ. 결론
포스트모더니즘은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인식틀을 근거로 서구사회와 비서구사회의
이원성과 관련된 차별적 권력관계를 설명하는 한편, 이러한 인식론의 해체를 통해 그러한 권력
관계를 해체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비록 포스트모더니즘이 이항대립적 관계질서가 어떻게 기
능하고 또한 어떻게 그것을 해체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러한 대립을
해체하기보다는 단지 활용한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본고의 논의를 통해 분명해진 바와 같
이 포스트모더니즘은 구조주의의 이원론적 사유의 구조를 ‘서구/비서구’의 방식으로 재현하고
자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서구사회의 역사를 구원하겠다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선언은
불행하게도 서구사회와 비서구사회의 간문화적 ‘소통가능성’과 ‘비판가능성’을 차단하면서 기
존의 서구중심주의를 해체하기보다는 그것을 더욱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돌진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러한 측면은 역사의 변혁가능성이나 개혁가능성을 심각하게 모색해
야만 하는 비서구사회적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것이다. 비록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스스로는 자
신들이 모더니즘의 진보사관을 비판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비서구사회적 입장
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적 세계관은 어떠한 비판적 역사이론도 허용하지 않는 한계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더불어 역사의 변화를 주도할 어떠한 비판적 개혁적 주체도 허용하지 않
으며, 따라서 역사 그 자체를 미래를 위한 ‘변혁가능성’으로서보다는 단지 수동적으로 읽혀지길
기다리는 ‘해석가능성’으로서만 설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포스트모더니스트들
은 실제적으로 비서구사회가 당면한 역사적 실재들, 다시 말해 비서구사회가 당면한 사회적 배
제나 경제적 착취 등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중심적인 모더니즘의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서구사회의 특
수한 역사적 경험과 상황에 대한 비판과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서구사회와 비서구사
회에서 전개된 모더니즘의 양상은 판이하게 다르다. 서구사회에서 모더니즘이라는 것은 중세
의 유기체적 전통에 대한 실천적 거부에서 시작된 반면, 비서구사회의 경우 대부분은 서구에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 비판

117

의해 급작스럽게 이식되어 철저히 뒤틀리고 왜곡된 형태로 진행되었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서
구사회는 ‘모더니즘의 위기’를 논할 수 있는 반면, 비서구사회는 그에 앞서 ‘모더니즘의 왜곡’ 혹
은 ‘뒤틀림’ 문제를 선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비서구사회의 이러한 뒤
틀린 근대에 대해 일부 탈식민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신중하게 접근하거나 이론
적으로 해명한 역사가 미천한 것이 사실이다. 대다수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서구사회의 후
기산업사회화를 전망하지만 아직까지 어느 누구도 그러한 변화가 서구적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의 산물이었으며, 비서구사회의의 농경 및 산업기반이 오늘날 서구사회의 변화를 지탱하는 물
적 토대가 되고 있음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고 있다. 그런 이유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무
비판적 수용은 사이드(E. W. Said)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서구의 시각에서
비서구를 재단하고자 하는 또 다른 모순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1980년대 하버마스(J.
Habermas 1981)가 료타르(J.-F. Lyotard)와의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서 오늘날 필요
한 것은 ‘근대의 해체’가 아니라 ‘미진한 근대’의 보다 철저한 수행이라고 했던 것은 그런 의미에
서 재론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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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21집 2호, 2015 가을

논문투고일: 2015년 09월 07일
심사개시일: 2015년 09월 15일
심사완료일: 2015년 10월 14일

포스트모더니즘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 비판

121

Critique on Western-Centrism Inherent in Postmodernism
Focused on Its Historical View

CHOI Il-Sung(Hanseo University)

This article clarifies the western centric characters inherent in postmodern historical view.
It seems that the postmodernism have criticised the western centric hegemony with the
contemporary intellectual flow, Postcolonialism in particular. In that reason, several
historians have voluntarily accepted the postmodern research method known as
‘deconstructivism’ as an emancipatory discourse to rise above the modern historical
perspectives. However this paper analyzed and revealed four aspects of western-centrism
in its historical view as follows: First, the postmodernism do not allow any critical theory of
history by which a future-oriented transformation or reform of non-western societies may
possible. Secondly, the postmodernism tends to deconstruct the critical or reformist
non-western subjects who are able to lead to a historical change in their society. The
deconstruction of power would be in fact associated with the repressive power in western
sense, but in non-western sense with the emancipatory one. Thirdly, in the postmodern
perspectives there is a tendency to overlook non-western historical context concerned with
their subordination or exploitation. Finally, the postmodernism do not want to see the
historical reality of non-western societies in which the continuity of pain is usually chronic.
In these respects the postmodernism could be also considered as a western centric theory.

Key words: Western-Centrism, Postmodernism, Structuralism, Poststructuralism,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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