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성. 2016. “성경적 서사와 저자의 죽음, 혹은 서구형이상학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성경적 서사와 ‘저자의 죽음’:*
1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 비판
최 일 성**
2
국문초록
본고는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을 성경적 서사에 적용해 보고, 그의 철학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적 성격을 드러내 보고자 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서구의 형이상학전
전통을 해체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이 역설적으로 그러한 전통
특히 서구형이상
학적 존재신론(onto-theˊ ologie) – 을 오히려 공고히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요컨대 성경적 서사에서 데리다의 해체주의에 의해 기
대 가능한 ‘저자의 죽음’, 특히 실제저자의 죽음은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으로 이
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신을 부활시키고 더욱 완벽한 신으로 이끌고 있다는 주
장이다. 해체와 함께 절대자는 이제 실제저자들이 현전할 필요가 없는 영속적인 존
재로 승화되며, 따라서 그의 의미는 오히려 완성되고 강화된다. 이것이 본고가 밝히
고자 했던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적 성향인 것이다.
중심어 : 서구중심주의, 데리다, 해체, 성경적 서사, 부활, 서구형이상학, 메시아주의
Ⅰ. 서 론
본고는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을 성경적 서사에 적용해 보고, 그
의 철학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적 성격을 드러내 보고자 한다. 그것
은 구체적으로 서구의 형이상학적 전통을 해체하고자 했던 그의 노력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
구임 (NRF-2014S1A3A2043763).
** 한서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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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인권(제16권 2호)
이 역설적으로 그러한 전통 – 특히 서구형이상학적 존재신론(ontotheˊ ologie) – 을 오히려 공고히 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
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론의 영역에서 데리다(J. Derrida)의 해체주의 철학의 등장은 몇
가지 새로운 논쟁을 자극한다. 바르트(R. Barthes)가 언급한 ‘저자의
죽음’은 이 이론이 적용된 모범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1 데리다의
생각은 ‘현전(preˊ sence)’과 ‘차연(diffeˊ rance)’을 구분한 것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데리다 1992: 31-38). 그가 말하는 현전은 서구의 형
이상학적 전통을 관통하는 로고스 중심의 세계, 즉 진리와 실재가 내
재되어 있는 것으로 가정된 텍스트의 세계를 말한다. 여기서 독자가
해야 할 일은 저자의 의도를 따라가며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
나 차연은 진리와 실재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회 안에
서 합의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언어는 개연적이고 우
연적인 것인데 서구형이상학은 이러한 언어를 바탕으로 현전을 보여
주려고 했다. 데리다가 보기에 이것은 허구이자 꿈이다. 오로지 모사
적인 차연만이 가능할 뿐이다. 따라서 의미는 항상 “유예·연기·이
송·우회·지연·유보(데리다 1992: 31)”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데리다의 유명한 경구, “텍스트 밖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il n’y a
pas de hors-texte; 데리다 2004: 287)”2는 말은, 텍스트 그 자체가 본질
1 Roland Barthes, “La mort de l’Auteur”, Le bruissement de la langue, Paris: Seuil,
1968. 이 글의 번역본은 롤랑 바르트, 김희영 역,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전집 12, 서울: 동문선, 1997에 수록되어 있다.
2 본고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를 번역한 김웅권의 한글번역인 “텍스트
밖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를 따랐다. 여기에 등장하는 “Il n’y a pas de horstexte”에 대해 위트슨(James A.T. Whitson)은 “텍스트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There
is nothing outside of text)”로 번역하는 것은 오역이며, “텍스트 외부는 없다(There
is no outside-text)”, 다시 말해 텍스트 그 자체의 해석가능성만이 존재한다로 번역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Cf. James A.T. Whitson, “Post-structuralist Pdeagogy
as Counter-Hegemonic Praxis(Can we find the baby in the bath water?)”, in
Peter Mclaren ed., Postmodernism, Post-colonialism and Pedagogy, Albert Park: James
Nicholas Publishers, 1995, pp. 129-130. 김웅권의 번역은 이러한 입장에 충실해 보
성경적 서사와 ‘저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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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다의적이며 다중적인 것이라는 그의
생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텍스트는 이제 저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읽는 독자에 의해 다의적으로 해체된다. 서구의 형이상학적
전통 그 자체가 저자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1966년 10월 21일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발표된 그의 논문 “인문과
학 담론에 나타난 구조, 기호 그리고 놀이(J. Derrida 1967b: 409428)”3는 그의 해체주의 철학에 담긴 핵심적인 주장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그는 레비스트로스(C. Leˊ vi-Strauss)의 신화론에 투영되어 있는
구조주의의 인식론이 우연적인 ‘사건(eˊ veˊ nement)’이나 독립적인 ‘놀이
(jeu)’ 등을 잘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하고, 그 원인으로 궁극적인 본
질 – 아르케(archeˋ ) 등과 같은 – 을 추구하는 서구형이상학의 로고스중
심주의를 지목한다. 그는 말한다. “서구형이상학사(史)의 본래적인 형
식은 그 단어의 모든 의미에 있어서 존재를 ‘현전’으로 결정하는 것이
다. 우리는 본질적인 것, 원칙적인 것 또는 중심적인 것의 이름들을
항상 어떤 현전 – 에이도스(eidos), 아르케(archè), 텔로스(telos), 에네르
게이아(energeia), 우시아(ousia), 알레테이아(aletheia), 초월성, 의식, 신,
인간 등등 – 의 불변항으로 지시해 왔음을 밝힐 수 있다(J. Derrida
1967b: 411).” 요컨대 서구형이상학은 궁극적인 본질을 미리 전제하고
본질/현상, 중심/주변, 공/사, 남/녀, 이성/비이성, 참/거짓 등과 같은
이항대립의 의미를 주장해 왔기 때문에, 우연적인 사건이나 놀이 등
과 같이 대립항을 상상하기 힘든 실재들에 대해서 제대로 된 해석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이러한 이항대립은 사회
가 세상을 이해하려는 방식 – 이데올로기 – 의 전형에 불과한데도 서
구형이상학은 이러한 이항대립을 전제로 특정 영역이 로고스이고 나
인다.
3 “La structure, le signe et le jeu dans le discours des sciences humaines”, in J.
Derrida,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Paris: Seuil,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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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인권(제16권 2호)
머지는 열등하고 하찮은 것이라는 해석을 강요해 왔다. 이러한 이해는
동질성보다는 이질성을 강조하고, 양자 가운데 어느 한쪽에 긍정적인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폭력적인 위계’를 조장한다(데리다 1992: 65).4
데리다가 고대 그리스 철학 이래로 서구형이상학이 주장해온 로고스중
심주의에 대한 해체를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실재의 다양성에 대한 파악은 중심과 주변으로 이원화된
이러한 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해체’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는 것이
데리다의 입장이다(이광래 2007: 112-114). 이러한 해체작업에 일군의
학자들이 동참하는 바, 예를 들어 기호학분야에서 바르트(R. Barthes),
심리분석분야에서 크리스테바(J. Kristeva)와 라깡(J. Lacan), 여성주의
및 문학이론분야에서 식수(H. Cixous), 역사 및 문화이론분야에서 푸
코(M. Foucault), 료타르(J. F. Loytard), 보드리야르(J. Baudrillard) 등
이 그들이다. 이들은 서구형이상학이 전제하는 절대적 진리나 중심은
사실은 상대적이고 유동적이며 불완전하다고 보고, 이러한 형이상학
적 이항대립을 해체시킴으로써 닫힌 구조를 개방하고 텍스트에 대한
열린 해석을 시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데리다 1992: 65). 그런 이유
로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1968)’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데리다의 해체실험이 구조주의자들의 신화적(혹은
문화적) 서사를 넘어 성경적(혹은 종교적) 서사에까지 적용되고 있다
는 사실이다(Cf. J. Derrida 1967b: 1992). 사실 신화적 서사라고 하는
것은 절대자와 같은 초월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일지라도 전적으로 인
간의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비롯된 역사적·문화적 생산물 – 바르트의
표현에 의하면 ‘문학작품(R. Barthes 1970: 9)’ – 에 해당된다(이상봉·
김재철 2007: 238). 반면 성경적 서사는 절대자의 실재성(혹은 그의
의지)이 인간의 언어를 통해 매개되었을 뿐 인간의 자유로운 상상력
4 Cf. “Violence et meˊ taphysique: Essay sur la penseˊ e d’Emmanuel Levinas”, in J.
Derrida, L’écriture et la différence, Paris: Seuil, 1967.
성경적 서사와 ‘저자의 죽음’
581
의 결과로 치부되지 않는다. 선지자나 예언자 등과 같은 신적 대리인
에 의해 작성되었을지라도 성경적 서사는 궁극적으로는 절대자의 의
지에 종속된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성경적 서사에서는 신화적 서사에
서와는 달리 누가 진정한 저자인가에 대한 질문이 중요해진다. 요컨
대 텍스트를 직접적으로 기술한 ‘실제저자(대리인 혹은 기록자)’와 텍
스트의 의미를 가장 잘 담고 있는 가상적이며 이상적인 ‘내포저자(절
대자)’를 별도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Cf. 김정우 2008:
144-146). 이것이 지난 수 세기 동안 진행되어 온 성경해석사(史)의
논쟁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데리다가 기획
하고 있는 저자의 죽음은 성경적 서사에 있어서 누구의 죽음을 의미
하는 것인가? 내포저자(절대자)의 죽음인가, 아니면 실제저자(대리인
혹은 기록자)의 죽음인가? 이러한 질문은 신화적 서사에서와는 달리
성경적 서사에서 해체주의 철학의 함의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데리다의 해체주의에 대한 본고의 비판은 바로 이 부분에 맞춰
진다.
Ⅱ. 성경적 서사에서 ‘저자의 죽음’
데리다와 니체(F. Nietzsche)의 철학적 연계성을 고려한다면5 성경
적 서사에서 저자의 죽음은 아마도 내포저자(절대자)의 죽음에서 찾
아야 할지 모르겠다.6 이를 논증이라도 하듯 데리다는 여러 곳에서 자
5 니체와 데리다의 철학적 연계성에 대해서는 이광래, 해체주의와 그 이후, 파주:
열린책들, 2007, pp.15-30; 이진우, “글쓰기와 지우기의 해석학 – 데리다의 “문자론”
과 니체의 “증후론”을 중심으로 -”, 니체연구 제4권, 한국니체학회, 2001 참고.
6 오늘날의 일부 포스트모던 신학자들은 니체의 회의주의와 데리다의 해체주의를 신
학적 존재론에 적용시켜 신의 부재(죽음), 즉 사신(死神)신학을 주장하기도 한다. 예
를 들어 테일러(Mark C. Taylor)는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이 “신의 죽음에 대한
‘해석학’(테일러 1998: 185)”이라 정의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구 신학의 신적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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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인권(제16권 2호)
신의 철학이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에게 빚지고 있음을 명시적으
로 선언한다. 그는 말한다. “그(니체)는 단순하게 형이상학 속에 결코
머물지 않고 기표가 로고스에 대하여, 그리고 진리나 근본적 기의라
는 인접 개념에 관하여 맺고 있는 종속성이나 파생으로부터 기표를 해
방시키는 데 강력하게 기여했다. […] 니체에게 독서·글쓰기·텍스트는
또 다른 시원적 활동들이라 말할 수 있다(데리다 2004: 42-43, 강조는
필자).” 데리다가 보기에 니체는 신에 대한 사망선고를 바탕으로 서구
형이상학과 그러한 형이상학의 결과물인 진리와 의미의 가치를 의심
할 수 있도록 이끈 선구자이다. 데리다는 니체의 이러한 회의주의적
입장에 자신의 글쓰기 전략을 결합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서구형이상
학의 요체인 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해체를 기획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이 데리다에게서 기표의 해
방, 즉 글쓰기로 구현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그의 그라마톨로지에서 소개되고 있는 이른바 ‘말소(抹消)전략’
은 기의와 기표의 임의성 그리고 이에 따른 로고스의 해체가능성을
예시하는 좋은 사례가 된다(데리다 2004: 85-122 참고). 사럽(M.
Sarup)에 의하면 이러한 말소는 “낱말이 부정확하기 때문에, 아니 차
라리 불충분하기 때문에 그것을 지운다는 뜻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판독할 수 있도록 해둔다는 것(사럽 외 1991:
18-19)”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바깥쪽은 안쪽이다(데리다 2004: 85)”
라는 데리다의 실험은 바깥쪽이 안쪽이라는 의미나 혹은 안쪽이 아닌
다른 무엇이라는 의미 모두를 거부하는, 따라서 ‘안/밖’이라는 기존의
이항대립적 로고스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일종의 언어적 ‘유희’이다(데
리다 2004: 95; Cf. 이진우 2001: 36). 이러한 전략의 핵심은 언어의
을 반성하고 포스트모던적인 종교적 상상력을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테일러의 사신신학은 데리다의 비존재론적인 해체의 개념 – 차연 혹은 말소(抹消) 을 존재론적 무(nothing)의 개념으로 잘못 해석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Cf. 윤원
준 2015: 92-93).
성경적 서사와 ‘저자의 죽음’
583
불완전성을 확인하기 위해 기표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며, 이를 통해 서구형이상학이 추구했던 문자언어를 통한 로고스의
현전가능성을 의심하는 것이다. 이 경우 로고스의 현전에 바쳐진 저자
의 역할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게 되고, 그가 언어를 통해 생산해낸
의미는 더 이상 유효성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데리다가 보기에 서구형이상학은 이러한 모호함과 마주하지 않기
위해 로고스를 목소리, 즉 음성언어에 할당해 왔다. 이 경우 문자언어
는 음성언어(로고스)를 현전하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활용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서구형이상학의 ‘음성중심주의’이다. 그는 말한다. “로고
스가 소크라테스 이전의 의미이든 철학적 의미이든, 아니면 신의 무
한한 오성의 의미이든 인류학적 의미이든, 또는 헤겔 이전의 의미이
든 이후의 의미이든, 그 어떤 의미로 이해되든 이 로고스 속에서 소리
와의 본질적이고 시원적 관계는 결코 단절된 적이 없다(데리다 2004:
28, 강조는 원저자).” 성경적 서사의 경우, 로고스는 전적으로 신적 존
재(혹은 신의 의지)에 있으며 그것은 은밀하거나 혹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는 어떤 ‘음성(목소리)’을 통해 소수의 선지자(대리인)에게 계
시된다. 데리다가 예로 들고 있는 예레미야 36장은 이러한 음성중
심주의가 성경적 서사 속에 어떻게 관철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J.
Derrida 1967b: 19-20).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이르시되 2. 너
는 두루마리 책을 가져다가 내가 네게 말하던 날 곧 요시야의 날부
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모든 나라에 대하여 내가 네게 일러
준 모든 말을 거기에 기록하라 4. 이에 예레미야가 네리야의 아들 바
룩을 부르매 바룩이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니라(예레미야 36: 1, 2, 4.
강조 추가)”
584
민주주의와 인권(제16권 2호)
구약성서에서 여호와는 모든 정당성의 원천이지만 그의 실재성은
오직 예레미야에게 음성(말씀)으로만 전달되며, 그의 음성은 대리인인
예레미야가 ‘불러주는 대로’ 서기관인 바룩에 의해 문자언어로 기록된
다. 여기서 예레미야(혹은 바룩)는 실제저자이기 때문에 내포저자인
여호와와 분리되지 않을 수 없지만, 신의 음성이 문자언어를 통해 온
전하게 – 일말의 오해나 왜곡도 없이 – 현전될 수 있는 것으로 전제
되면서 양자 사이의 오해가능성, 즉 내포저자에 대한 실제저자의 오
작가능성은 전적으로 차단된다. 이것이 성경적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
적인 원칙이 된다. 아마도 모세 5경에 등장하는 십계명 계시는 서구
형이상학이 추구해 왔던 음성중심주의에 흠집을 낼 수 있는 상징적인
사건이 될지 모르겠다. 왜냐하면 십계는 다른 서사들과는 달리 여호
와가 자신의 백성들을 위하여 자신의 음성(로고스)을 ‘직접’ 석판에 새
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
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증거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
의 양면 이편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출애굽기 31:18, 32: 15-16,
강조 추가).”
여기서 여호와는 십계의 내포저자인 동시에 실제저자로 등장하며,7
7 성경에 의하면, 이 첫 번째 돌판(십계)은 모세가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
성에 분노하여 깨뜨린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출애굽기 32: 19). 모세가 시내산 정상
에서 받은 두 번째 돌판(십계)과 관련하여서는, 대한성서공회에서 발행한 한글판 개
역성경의 번역본(2008)은 이 역시 여호와께서 직접 쓰신 것으로 번역 – “모세가 여호
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
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출애굽기 34:
28, 강조 추가).” – 하고 있으나,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교회일치주의(Ecumenism)’의
일환으로 공동번역한 공동번역본은 여호와가 아닌 모세가 직접 작성한 것 – “모세는
성경적 서사와 ‘저자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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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그의 음성과 기록(십계)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설
명해주는 대리인으로 설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역시 이
해 불가능한 신의 언어(음성)가 이해 가능한 인간의 문자언어로 전
환(현전)되는, 혹은 그러한 전환(현전)을 신봉하는 음성중심주의의
전형적인 환영을 보여준다. 이는 서구형이상학이 추구해온 “최초의
규약, 즉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의미 작용의 질서에 즉각적으로 관련
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그 규약(데리다 2004: 29)”이 음성언어 – 신
적 존재 혹은 신의 의지 – 로 ‘별도로’ 존재하고, 문자언어는 그것을
사후적으로, 혹은 데리다의 용어에 의하면 ‘대리 보충’적으로(데리다
2004: 255-279) 현전한다는 서구형이상학의 변함없는 이항대립 – 음
성/문자, 신/인간 등과 같은 – 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이다.
데리다가 의심하고 해체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로고스의 이러한 현
전가능성이다. 서구의 형이상학자들은 자신들이 기획했던 로고스중심
주의를 완성하기 위해 음성과 문자의 위계적 이항대립을 의도적으로
활용했고, 그 안에서 로고스, 본질, 진리, 실재 등은 항상 별도의 음성
언어로 존재하고 문자언어는 그것을 파생적으로 혹은 대리 보충적으
로 현전할 수 있다고 정의했다. 데리다에 의하면 이것은 부자연스러
울 뿐만 아니라 “인위적이고 교활한 술책(데리다 2004: 256)”이다. 그
가 보기에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임의적이며,
기표에 의한 의미결정은 항상 결정불가능성의 상태에 머물게 된다.
저자가 텍스트를 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문자언어는 일관적이지 않
을 뿐만 아니라 인위적인 조작 – 그의 용어에 의하면 ‘유희’ – 이 가능
하기 때문에, 저자가 기표를 통해 지시하고자 했던 특정 기의의 존재
거기서 주님과 함께 밤낮 사십 일을 지내면서, 빵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판에 기록하였다(강조 추가).” – 으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
서 여호와가 내포저자인 동시에 실제저자라는 본고의 해석은 적어도 첫 번째 십계
의 경우에는 논리성을 획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양자 모두 발견되지 않고
있어 고고학적 논증은 불가능한 상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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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인권(제16권 2호)
는 의심스럽고 기표를 바탕으로 로고스(음성)를 현전하고자 했던 저
자의 존재성은 사라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의 이러한 해체주의 전략은 글을 쓰는 ‘과정’ 혹은 ‘방
식’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글을 쓰게 된 ‘동기’ 혹은 ‘목적’과 관련해서
는 의미 있는 분석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
의 해체실험은 글을 쓰는 과정 혹은 방식의 유희를 통해 의미의 해체
가 가능하고, 그러한 의미의 해체가 글을 쓰게 된 동기나 목적 역시
해체할 수 있다는 이른바 차연의 놀이에 온 신경이 집중된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실제저자와 내포저자가 일치하는, 따라서 글쓰기의 방
식이 저자의 자율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순수 창작물 – 신화
적 서사 – 에서는 의미 있는 시도라 말할 수 있지만, 실제저자(기록
자)의 글쓰기가 자신의 의지의 산물이라고 볼 수 없는 성경적 서사에
서는 그 유효성을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성경적 서
사는 ‘기록’의 산물이지 ‘창작’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에, 기표의 유희에
의한 의미의 해체나 혼란은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이 성경적 텍스트를
가능하게 만든, 혹은 그러한 글쓰기를 이끌어낸 동기나 목적 그 자체
– 신적 존재 혹은 신의 의지 – 를 해체하는 데에는 이를 수 없기 때
문이다. 성경적 서사에서 기표의 유희, 즉 차연의 놀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저자의 죽음은 오로지 실제저자(대리인 혹은 서기관)의 죽음
에 해당할 뿐, 내포저자인 절대자의 죽음 – 신의 부재 – 이 아니라는
것이다.
Ⅲ. 죽음인가 희생인가? 부재인가 부활인가?
성경적 서사에서 실제저자(대리인) – 내포저자가 아닌 – 의 죽음은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을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끈다. 그것은
성경적 서사와 ‘저자의 죽음’
587
그의 해체주의가 오히려 서구형이상학의 존재신론을 완성하는데 일조
하고 있다는 모순된 결론이다. 여기서 우리는 데리다의 해체주의에
의한 저자의 죽음이 어떻게 성경적 서사에서 그런 모순된 결론에 도
달할 수 있는지를 좀 더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1913년, 정신분석가 프로이트(S. Freud)는 토템과 터부에서 인류
학자들이 선호하는 죽음의 문제 – 우리는 이 문제를 다음 장에서 데
리다가 기획하는 ‘저자의 죽음’과 연결시켜 논의할 것이다 – 가 그렇
게 간단한 주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의 분석은 죽음이
환기시키는 비참한 결과, 다시 말해 어떤 실재성의 부재를 확인하려
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숨겨진 문화적 상상력을 밝히려는 도전으로
설명된다. 물론 그의 이론이 남성의 욕망을 공식화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여러 분야의 비판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8 그러나 그
의 논의는 인간의 심리체계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진입하는 과정에
서 구체적인 실재성 – 그의 논의에 의하면 특히 ‘아버지’의 실재성 –
에 대한 거부와 배척이 그러한 실재성을 형이상학적으로 ‘부활’시키는
데 있어서 중요한 매개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공론화한 선구적인
측면이 있다. 여기서 구체적인 실재성에 대한 배척을 부재가 아닌 부
활의 개념으로 전환시키는 핵심적인 문화적 기제가 등장하는데, 그것
이 바로 해당 실재의 죽음에 대한 ‘희생의례’이다. 아마도 메시아(예
수)의 ‘십자가 사건’은 성경적 서사의 형이상학적 존재신론을 유지하
기 위한 대표적인 희생의례가 될 것이다. 요컨대 신의 실재성(예수,
메시아)을 배척함으로써 오히려 그의 실재성을 형이상학적으로 부활
시키는 전형적인 사례가 바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
러므로 우리는 서구형이상학을 해체하고자 시도했던 데리다의 해체실
험이, 그리고 그러한 해체실험 속에서 기대해 볼 수 있는 저자의 죽
8 이에 대해서는 특히 Werner Muensterberger, L’anthropologie psychanalytique depuis
Totem et Tabou, Paris: Payot, 1976을 참고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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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인권(제16권 2호)
음이 서구형이상학을 오히려 부활시키는데 일조하는 희생의례가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토템과 터부는 두 종류의 죽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제임스 아트킨슨(James Atkinson)의 가설에서 차용한 ‘부친살해’, 즉
원시 아버지의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로버트슨 스미스(Robertson
Smith)의 이론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토템살해’, 즉 토템동물
의 죽음이다. 왜 원시유목민 가설 속의 아들들은 부족질서(근친상간금
기)의 상징적 지표이자 물리적 강제력인 아버지를 살해하는가? 어떤
이유로 이들은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토템동물을 숭배하면서도 그에
대한 살해행위를 반복하는가? 희생의례 속의 죽음의 의미와 역할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토템과 터부에 드러난 두 종류의 죽음에 대한
세부적인 분석이 요청된다.
프로이트는 다윈(C.R. Darwin)의 이른바 ‘원시군설(原始群說)’로부
터 원시 유목민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가정한다. “아득한 옛날에는 강
력한 남성이 무제한의 힘을 폭력적으로 행사하면서 한 무리의 주인과
아버지로 군림했다. 모든 여성, 다시 말해서 이 무리의 아내들과 딸
들, 그리고 다른 무리에서 약탈해온 모든 여성은 이 우두머리의 소유
물이었다. 이 우두머리의 아들들의 삶은 고달픈 것이었다. 만일에 아
버지의 질투심을 유발하게 될 경우, 이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거세를
당하거나 무리에서 내쫓기거나 했다(프로이트 2003b: 357).” 이 가설
에 의하면, 무리 속의 힘센 남성(아버지)은 집단의 상징이자 무리 내
에서의 난교(근친상간)를 방지하는 물리적 강제력이다. 집단 내에서
아직 장성하지 않은 남성들(아들들)은 가장 나이가 많고 힘이 센 남성
의 질투 때문에 성적·육체적으로 성숙하기 이전에 추방되었다. 그러
나 쫓겨난 이들이 자기 소유의 여성을 차지하는데 성공하기만 하면,
그들은 원시 유목민 집단 내에서 아버지가 차지했던 지위와 유사한
지위로 승격될 수 있었다. 이것이 그가 설명하는 문화질서(근친상간
성경적 서사와 ‘저자의 죽음’
589
금기)의 이른바 ‘역사적’ 기원이다.9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다윈의 원시
군설 속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힘과 권위에 저항하지 않는 철저히 수
동적인 존재라는 점, 그리고 그들 사이의 문화적 질서가 근친상간금
기로 표출되며, 그것이 힘센 아버지의 질투심에 의해 유지된다는 점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설은 힘센 아버지의 실재성이 영원하지 않
기 때문에 그의 질투심에 근거를 둔 질서체계 역시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프로이트는 질서체계의 지속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 다윈의 원시군설에 아트킨슨의 ‘부친살해’ 가설을 접목시킨다.
이 가설에 의하면 원시군 내의 아들들은 더 이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
니다. “어느 날 문득 추방당했던 형제들이 힘을 합하여 아버지를 죽이고
그 고기를 먹어 버림으로써 부군(父群)을 결딴낸다. 말하자면 자군(子
群)은 단결함으로써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던 일을 성취시키고 마
침내 부군의 결딴을 성사시킨다(프로이트 2013a: 215, 강조 추가).” 앙
리케즈(E. Enriquez)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어느 날’이라는 불특정
과거의 시점은 흔히 어떤 ‘원형적’인 사건을 도입하는데 활용된다(E.
Enriquez 1983: 34). 그 사건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이미 저질러진
역사라는 의미를 함축한다. 이제 ‘그들의 아버지’는 더 이상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며, 아버지의 역할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사회가
도래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아들들은 아버지를 죽여야만 했을까? 표면적인 분석에
의하면 자신들의 아버지가 “여자들을 독점하고 자식들을 모두 무리에
서 쫓아내 버리는 질투심 많은 폭력적인 아버지(프로이트 2013a:
215)”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한편으로는 집단 내부의 사
회적 관계 – ‘아버지/아들들’의 위계적 관계와 같은 – 에 대한 거부와
9 프로이트는 다윈의 원시군설에서 도출한 자신의 추론을 ‘역사적인’ 분석이라고 정의
하고 있으나(프로이트 2003a: 193), 그의 가설은 학문적으로 검증되지 않고 있다.
590
민주주의와 인권(제16권 2호)
직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로 인한 문화적 무질서를 암시한다. 만
일 아버지가 지속적으로 부재하다면, 그와 연결되어 있는 문화질서,
특히 근친상간금기 역시 지속적으로 부재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 없는 아들들의 사회’는 사드(Sade)가 묘사했던 ‘쾌락에 바쳐
진 육체의 공화국’10과 비교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양자 모두 ‘남/녀’,
‘부모/자식’, ‘자아/타자’ 등과 관련된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모든 제
한이 폐지되며, 모든 구분이 해소된 그런 사회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기대했던 ‘해체가 실현된 사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아버지 없는 아들들의 사회’는 사드의 ‘쾌락 공
화국’과는 달리, 자신들이 태곳적에 행사한 폭력 때문에 ‘죄책감’을 내
면화하고 있는 괴로운 주체들의 사회이다. 요컨대 아버지에 대한 증
오로 가득 찼던 아들들이 이제 아버지의 죽음과 부재를 경험함으로써
비로소 그를 향한 모순된 감정, 즉 죄책감과 애정을 드러낸다는 것이
다. 만일 아들들의 죄책감을 ‘죽은 아버지’에 대한 (무)의식의 한 표현
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들들의 사회에 죽은 아버지가 관념
적으로 되살아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다. 프
로이트는 이 기원적 사건을 통해 아들들에게는 되돌릴 수 없는 과오
가 존재한다는 것을, 따라서 영원히 그들은 ‘죄책감’을 지닌 채 살아가
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상기시키길 원했다. 그런 의미에서 부친살해
는 죄책감의 잉태라는 심리적인 효과와 함께 이들의 (무)의식과 유리
될 수 없는 신경증적인 징후들을 전제하기 위한 매개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버지에 대한 아들들의 살해행위는 아버지의 실재성
에 대한 부재가 아니라 그의 실재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부활’을 확인
하는 필수불가결한 중간단계가 되는 것이다.
10 사드가 묘사한 ‘공화국’의 성격과 관련해서는 François Ost, Sade et la loi, Paris:
Odile Jacob, 2005, p.131 이하 참고.
성경적 서사와 ‘저자의 죽음’
591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성사된 이러한 가설은 그러한 부친살해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 역사적 조건에서 그러한 형이상학적 부활이 과연
지속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야기한다. 프로이트가 아트킨
슨의 부친살해 가설을 로버스튼 스미스의 토테미즘 가설로 대체하길
원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제 민족들의 토템공희
속에서, 즉 토템동물에 대한 접근을 금하면서도 폭력을 행사하여 그
살과 피를 나눠 먹는 반복되는 공동의 식사 속에서, 자신들의 폭력으
로 희생시킨 토템동물에 대한 형이상학적 부활과 함께 그에 대한 종
교적 숭배의 단면을 발견했다. 그가 토템동물을 원시 아버지의 대용
물이라고 주장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토테미즘을 관통하는 이러한
종교적 숭배에 대한 주목 덕분이었을 것이다. 요컨대 토템동물에 대
한 주기적인 희생제의를 통해서 희생된 아버지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부활을 종교적인 차원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무의식의 근원으로
공식화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마
도 인류 최초의 제사였을 토템 향연은 이 기억할만한 범죄 행위의 반
복이며 기념 축제였을 것이다. […] 아들들은 저희들 권력욕과 성욕의
막강한 장애물인 아버지를 한편으로는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랑
하고 찬미한다. 그들이 아버지를 제거함으로써 그 증오를 해소하고
그와 동일시하려는 자신들의 소망을 성취하고 나면, 이때까지 억눌려
있던 애정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이것은 통상 자책이라는 형태로 나
타난다. 이어서 죄의식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무리 전체의 집단적 자
책과 일치하게 된다. 이로써 죽은 아버지는 살아 있을 때보다 더욱 강력한 아
버지가 된다(프로이트 2013a: 215-217, 강조 추가).” 결국 프로이트에게
서 아버지의 죽음은 실재성의 부재가 아닌 그의 실재성에 대한 형이
상학적인 부활로 연결되는 것이며, 따라서 부친살해는 부재가 아닌
부활을 위한 종교적인 희생의례가 되는 것이다.
592
민주주의와 인권(제16권 2호)
Ⅳ. ‘저자의 죽음’을 통해 완성된
서구형이상학적 메시아주의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이 최근 서구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진지
하게 고민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런 이유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Cf. 대
버니 1992; 김동건 1999: 119-122). 이른바 ‘포스트모던 신학자’로 불
리는 이들은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 속에서 낡은 신학의 해체와 새
로운 신학 – 특히 메시아주의에 근거를 둔 부활신학 – 의 재구성이라
는 두 가지 비전을 동시에 발견한다. 예를 들어 미국의 대표적인 포스
트모던 신학자 카푸토(John D. Caputo)는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이
서구 기독교 신학에 기여할 수 있는 주요한 이론적 자원이라고 판단
하고 그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려고 노력한다.11 그가 보기에 데
리다의 해체주의는 ‘사건’, 즉 해체의 전략 – 특히 글쓰기 – 을 중시한
철학인데, 바로 이러한 사건이 기존의 전통 신학, 다시 말해 절대자와
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경험’에 기반을 둔 기존의 낡은 신학을 보편적
이고 일반적인 ‘믿음’에 근거를 둔 새로운 신학으로 승화시키는데 중
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실제로 앞서 소개한 데리다의 논문
“인문과학 담론에 나타난 구조, 기호 그리고 놀이(J. Derrida 1967b:
409-428)”는 구조주의 인식론으로 잘 설명되지 않는 사건 – 혹은
놀이 – 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제안한 글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기존의 서사에 만연한 모더니즘의 허구성을 들
춰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카푸토는 데리다의 이러한 사상이
기독교 신학을 부정하기보다는 오히려 긍정한다고 보고 사건(해체)을
중심으로 신학을 재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그는 말한다. “포스트모더
11 Cf. John D. Caputo, What Would Jesus Deconsturct: The Good News of Post-modernism
for the Church, MI: Baker Academic, 2007; The Weakness of God: A Theology of the
Event, Bloomington & Indianapolis: Indiana University Press, 2006.
성경적 서사와 ‘저자의 죽음’
593
니즘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은 이것이 사건에 대
한 철학이라는 것이고, 또한 급진적인 포스트모던 신학이 무엇을 의미
하는가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사건에 대한 신학이라고 답할 수 있다(이
은주 2012: 149에서 재인용, 강조 추가).”
그런데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에게서 영감받은 데리다의 해체주
의가 어떻게 서구의 기독교 신학을 재구성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적
자원이 될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일차적으로 서구 기독교 신앙의 핵
심이라고 할 수 있는 메시아(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데리다의 해체
(사건)개념이 보다 선명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윤원준
2015: 100). 요컨대 해체로서의 사건과, 사건으로서의 메시아의 죽음
이 절대자의 부재가 아닌 그의 실재성에 대한 형이상학적 부활을 의
미하는 희생적 죽음과 맞아떨어진다는 사실에 카푸토가 주목한 것이
다. 그렇다면 성경적 서사에서 데리다에 의해 선고된 실제저자(대리인
혹은 기록자)의 죽음 역시 절대자의 형이상학적 부활을 위한 이론적
자원 – 희생적 죽음 – 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이제 우리는 이 핵
심적인 질문에 대답할 차례가 되었다. 만일 이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
답할 수 있다면, 성경적 서사에 대한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은 서구
형이상학, 즉 서구형이상학적 존재신론을 해체하기보다는 오히려 완
성하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본고의 결론은 입증이 될 것이다.
성경적 서사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은 신의 ‘절대적 타자성’을 겨냥
한다. 이는 ‘신/인간’의 절대적인 이항대립을 주장하는 서구형이상학적
로고스중심주의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해 데리다는
자신의 저서 죽음의 선물(Donner la mort, 1992)에서 키에르케고
르(S. Kierkrgaard)가 두려움과 떨림(1962)12에서 다루었던 아브
라함의 이른바 ‘아케다(aqedah) 사건’13, 즉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
12 키에르케고르(S. Kierkrgaard), 강학철 역, 두려움과 떨림(Furcht und Zittern, 1962),
서울: 민음사, 1991.
594
민주주의와 인권(제16권 2호)
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여호와께 희생제물로 드리려 했던 사건을 재
해석한다(J. Derrida 1992: 96 이하). 그가 보기에 성경적 서사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에 의한 이삭의 희생은 절대자의 은밀하고 비밀스
러운 음성적 명령에 의한 것이다. 이 서사에 등장하는 절대자는 아브
라함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는 구체적
인 실재이기에 두려움과 공포는 오로지 절대자와 아브라함 사이의 특
수한 관계에 한정된다. 이러한 절대적 타자성에 대해 데리다는 “절대
자는 완전히 다르다”14는 명제로 표현한다. 전통신학에 일반적으로 등
장하는 절대자와 인간과의 관계는 이러한 절대적 타자성의 관계 위에
비밀스럽고 은밀하게 존속된다. 데리다가 보기에 이러한 절대적 타자
성은 ‘신/인간’의 절대적이고 위계적인 이항대립에 근거를 두고 있는
서구형이상학에 기여하며, 따라서 이러한 절대적 타자성에 대한 해체
야 말로 철학의 본질적인 임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절대적 타자성에 대한 데리다
의 비판은 오히려 구약성서에 의지하고 있는 낡은 신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신학으로 도약하는 좋은 자원이 된다. 그것은 두 가지 차원에
서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하나는 절대적 타자성에 의지한 신학이 몇
몇 소수의 선지자들의 개별적인 경험과 체험 속에서만 절대자의 실
재성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보편신학 혹은 열린 타자성으로 승화되기
어려운 한계점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절대적 타자 앞에서 아브라함
이 경험하는 것은 일반적인 인식의 범주를 벗어난 일종의 ‘비밀(J.
Derrida 1992: 103)’이며, 따라서 보편화되기 어려운 특수한 체험이라
는 것이다. 만일 절대적 타자가 이러한 비밀 속에서만 자신의 실재성
13 ‘아케다(aqedah)’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묶었다’는 히브리어에서 나온 용어이다(Cf.
김용성 2006: 222).
14 이 문장은 데리다가 쓴 “tout autre est tout autre(J. Derrida 1992: 114)”를 번역한
것이다. 프랑스어에서 주어로 쓰이는 tout autre는 일반적으로 절대자인 ‘신’을 의미
하며, 술어인 tout autre는 ‘완전히 다른’을 의미한다(손영창 2013: 193).
성경적 서사와 ‘저자의 죽음’
595
을 드러내려 한다면, 이러한 비밀은 보편적인 법이나 일반적인 합리
성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들 선지자들에 의해
기록된 성경적 서사는 절대적 타자와의 단절성에 대한 기록일 뿐이며,
실제저자(대리인)의 죽음은 이러한 단절성에 대한 해체인 것이다. 데
리다의 해체주의가 서구형이상학의 단절성, 개별성, 특수성을 비판하
고 오히려 그러한 존재신론에 대한 연속성, 보편성, 일반성을 제안하
는 이론적 자원이 될 수 있다는 포스트모던 신학자들의 주장은 바로
이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구약성서에 두드러진 서구형이상학의 음성중심주의가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불가피한 한계성을 드러낸다는 사실이
다. 왜냐하면 그러한 음성은, 예를 들어 절대자와 아브라함 사이에 소
통되었던 음성메시지는 필연적으로 역사성을 띄지 않을 수 없기 때문
에 비역사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절대자의 초월성을 설명하는데
일정한 한계를 노출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절대자의 존재를 역
사적인 실재성으로 내버려둔다면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모세의 하나
님, 그리고 일반인이 체험하는 하나님이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논증해야만 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들이 체험하는 절대자
들은 각각 ‘초월적이고’, ‘은폐되어 있고’, ‘비밀스러운’ 실재들(J. Derrida
1992: 96)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공통의 신앙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성서에 의지하고 있는 낡은 신학의 한계이다.
따라서 카푸토는 서구형이상학의 음성중심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데리
다의 해체주의가 역사적 존재신론을 극복하기 위한 주요한 이론적 자
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포스트모던 신학자들에게 ‘해체’는 그런 의미에서 서구형이상학의
낡은 존재신론을 부인하고 해체하기 위한 주요한 이론적 자원이 된다.
카푸토는 데리다의 ‘해체’ 전략을 구약성서의 낡은 신학의 한계를 극
복하고 신약성서에 근거한 새로운 신학으로 도약하는 이른바 메시아
596
민주주의와 인권(제16권 2호)
의 ‘십자가 사건’에 비유한다(J. Caputo 2006: 2).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몇몇 소수자를 제외하고는 단절되었던 인간과 절대자의 관계가 개방
되고, 역사적이었던 절대자의 실재성이 영원한 것으로 도약할 수 있
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절대자는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제한 속에서,
다시 말해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음성언어를 바탕으로 소수의 구체적
인 실제 인물들(대리인)에게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자신의 의지를 표
출해 왔지만, 카푸토가 보기에 해체는 이러한 시간적이고 역사적인
절대적 타자성을 허물고 보편성과 일반성을 획득하도록 이끄는 결정
적인 사건이 된다(J. Caputo 2006: 30-34). 이러한 역사적인 신에 대
한 해체(죽음)가 십자가의 모습이고, 어느 한 시대에 정박되지 않은
신학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신학은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성경적 서사에서 절
대적 타자성을 묘사하고 기록해 왔던 실제저자들(기록자들)에 대한
해체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해체는, 달리 말해 구
체적이고 개별적이고 은밀하고 비밀스럽고 역사적인 신의 음성을 기
록해 왔던 실제저자들에 대한 해체는, 절대자의 부재로 이어지는 것
이 아니라 그들이 현전하고자 노력했던 절대자를 오히려 일반적이고
보편적이고 개방적이고 비역사적인 초월적 존재로 확립하기 위한 초
석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적 서사에서 데리다의 해체주
의에 의해 기대 가능한 실제저자들의 죽음은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
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신을 부활시키고 더욱 완벽한
신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해체와 함께 절대자는 이제 실제저자들
이 현전할 필요가 없는 그런 존재로 승화되며, 실제저자(기록자 혹은
대리인)의 죽음은 궁극적인 절대자의 의미를 오히려 완성하고 강화하
는 메시아의 역할을 한다. 이것이 바로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에 내
재된 서구형이상학적 메시아주의, 즉 서구중심주의적 편향인 것이다.
성경적 서사와 ‘저자의 죽음’
597
Ⅴ. 결 론
니체가 선언한 신의 죽음은 기표적인 차원이 아니라 기의적인 차원
이다. 반면에 데리다가 기획하고 있는 저자의 죽음은 기의적인 차원
이 아니라 기표적인 차원에 한정된다. 따라서 니체는 서구의 형이상
학적 전통을 의심하고 회의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예비할 수 있었
지만, 데리다는 오히려 그러한 전통을 완성하고 공고히 하는 모순적
인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니체와 데리다의 본질적
인 차이는 바로 이 부분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해
체주의는 오늘날까지 진행된 서구형이상학적 전통의 완성본이라고
평가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성경적 서사에 대한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의 입장을 통해서, 그러한 철학 속에서 기대
할 수 있는 저자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서구형이상학의 배타적이고 잘못된 세계
관 – 특히 이항대립적 세계관 – 에 필요한 다양한 처방책을 제안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히 또 다른 측면이 존재할 수 있
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그 가운데 가장 역설적인 것은 바로 ‘해
체’의 결과일 것이다. 데리다의 기표에 대한 집착은 실제저자와 내포
저자가 분리되는 성경적 서사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기표에
대한 해체와 이를 통한 실제저자(기록자 혹은 대리인)의 죽음을 받아
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서구형이상학적 존재
신론의 골칫거리였던 ‘절대적 타자성’ 혹은 ‘소통하지 않는 타자성’을
부인하기보다는 오히려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제시했다. 그것
이 바로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에 내재된 서구중심주의적 성향이다.
해체에서 오히려 서구형이상학의 실재가 완성되었고, 죽음에서 오히
려 그에 대한 부활이 실현되었다. 서구형이상학은 이제 데리다와 함
598
민주주의와 인권(제16권 2호)
께 더욱 공고화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그것도 이미 저질러지고
완성된 ‘사건’ – 메시아의 ‘십자가 사건’과 같은 – 을 토대로 되돌릴 수
없는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동건. 1999. “포스트모던 신론 – David Ray Griffin을 중심으로”, 신학과
목회 제13집, 영남신학대학교. 113-139쪽.
김용성. 2006. “아케다 해석과 철학적 신론의 문제”, 해석학연구 제18집,
한국해석학회. 221-247쪽.
김정우. 2008. “성경해석사에서 본 서사분석에 대한 서론적 고찰: 엘리야 이
야기를 중심으로”, 신학지남 제75집 제4호, 신학지남사. 132-1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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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
2016.05.27.
심사
2016.06.03.
확정
2016.06.27.
성경적 서사와 ‘저자의 죽음’
601
ABSTRACT
Biblical Narrative and ‘the Death of the Author’:
Critical Review of the Western-Centrism inherent
in Derrida’s philosophy of deconstruction
Choi, Il-Sung
(Professor, International Relations, Hanseo University)
This paper seeks to reveal the western-centrism inherent in Derrida’s
philosophy of deconstruction through his attitude of the biblical narrative.
This process means that his deconstructive effort of the western metaphysical
tradition, in particular, of the western metaphysical onto-theology, has
ironically contributed to consolidating this metaphysical tradition. In other
word, ‘the death of the author’ possibly expected by Derrida’s philosophy
of deconstruction, expecially ‘the death of the real author’ in the biblical
narrative, do not lead to the death of God, but to his resurrection. With
deconstruction, God is now sublimated into the Absolute who does not have
to be represented by the real author. This is the western-centrism inherent
in Derrida’s philosophy of deconstruction.
Key words: Western-Centrism, Derrida, Deconstruction, Biblical Narritive,
Resurrection, Messian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