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인·이상익. 2015.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한국철학논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강 정 인(Jung In Kang)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주저자)

이 상 익(Sangik Lee)

(부산교대 윤리교육과 교수, 교신저자)
Ⅰ. 서 론

大一統) 사상과 문덕론(文德論)

Ⅱ. 대일통(

1. 대일통 사상
2. 왕도와 패도의 문제

事大字小論)과 책봉 – 조

Ⅲ. 사대자소론(
공 체제

1. 사대와 자소
2. 책봉 – 조공 체제의 성립
Ⅳ. 현대적 재음미
Ⅴ. 결 론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
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4S1A3A2043763).”

172 한국철학논집 제47집

<논문 요약>

周代)의 봉건제와

유교의 사대자소론과 분봉 – 조공 체제는 바로 주대(

文德)의 정치를 이상으로 삼는 것이었다. ‘주대의 봉건제’는 ‘종법적
(宗法的) 위계질서’를 내포하는 것인바 이로부터 천자국과 제후국 사이의
문덕(

위계관계가 형성되는 것이요, ‘문덕의 정치’는 그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방
식으로 무력이 아닌 문덕을 내세운 것인바 이로부터 사대자소론이 성립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성립한 주대의 ‘분봉 – 조공’ 체제는 본래
중국 내부에서 ‘천자국과 제후국’ 사이의 국제질서를 규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 내부적으로는 봉건제가 붕괴하고, 외부적으
로는 천하가 전통적인 중국의 영역 밖으로까지 확대됨에 따라, ‘분봉 – 조
공’ 체제는 ‘책봉 – 조공’ 체제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사대자소론에서 ‘대국과 소국’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강대국과 약소
국’이다. 전통 유교에서는 강대국을 대일통적 질서의 중심으로 설정하여
그 지도력을 인정함으로써 대일통의 실현가능성을 강화하면서도, 강대국
에 문덕이라는 이념적 굴레를 가함으로써 강대국의 약소국에 대한 횡포
를 예방하고자 했던 것이다. 문명사적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출현한 제국
의 긍정적 역할에 주목하는 서구의 최근 이론에 비추어 유교적 국제질서
를 로마제국, 대영제국, 현대 미국의 국제질서와 이념 및 현실의 차원에서
비교하여 볼 때, 우리는 유교적 국제질서가 문물의 전파와 교류, 평화와
번영의 유지 등에 있어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
렇게 본다면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
한 유교의 공헌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大一統 文德
冊封 朝貢 帝國

事大字小), 분봉(分封), 책
文明).

주제어: 대통일(
), 문덕(
), 사대자소(
봉(
), 조공(
). 제국(
), 문명(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173

Ⅰ. 서 론
事大字小)’

주지하듯이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이른바 ‘사대자소(

冊封) – 조공(朝貢)’ 체제라는 말로 설명된다. 사대자소론은 중국을

와 ‘책봉(

천하의 중심이 되는 대국으로 전제한 다음 주변의 소국은 중국을 대국으
로 섬기고 대국 중국은 주변의 소국을 사랑해야 한다는 논리였는데, 이

儀禮)의 형태로 구체화된 것이 ‘책봉 – 조공’ 체제였다.

사대자소론이 의례(

그런데 사대자소론이나 책봉 – 조공 체제는 오늘날 종종 비판의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한다. 사대자소론이나 책봉 – 조공 체제는 국제관계를 평등의
관점에서 설정하지 않고, 중심국과 주변국, 대국과 소국이라는 위계적 관
점에서 설정하기 때문이다.

周代)의 봉건제도와 표리를 이루

사대자소론과 조공 제도는 본래 주대(

는 것이었다. 주대의 봉건제는 중앙의 천자와 주변의 수많은 제후들로 구
성되었는데, 조공 제도는 천자가 제후들을 제어하는 지배수단의 하나로

朝覲),

출발한 것이다. 즉 제후들은 정기적으로 천자를 찾아뵈어야 했으며(

入貢), 이는

천자를 찾아뵈올 때에는 그 지방의 특산물을 바쳐야 했는데(

臣服)한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곧 제후들이 천자께 신복(

1)

따라서 ‘평등한

주권국가’라는 오늘날 국제관계의 대전제에 입각해 볼 때, 전통시대의 사
대자소론이나 조공제도는 납득하기 어려운 요소들을 많이 품고 있었음이
사실인 것이다. 더군다나 중국에 대해 소국의 입장에 처해있었던 우리 한

事大) 중국으로부터 책

국의 경우, 우리 조상들은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며(

봉을 받고 중국에 조공을 바쳐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는데, 이는 무

韓末)

언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리하여 한말(

이후 근대화를 지향하면서, 이른바 ‘개화의 선각자들’은 조상들의 사대론
에 대해 ‘주체성이 없는 비굴한 노예근성의 발로’라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中國 古代 朝貢의 實體와 性格」, 82쪽.

1) 이춘식, 「

174 한국철학논집 제47집

大國도 一國이요 小國도 一國이라 國上에 國이 更無
하고 國下에 國이 亦無하야 一國의 國되는 權利는 彼此의 同然한 地位로
分毫의 差殊가 不生한지라” 라고 하여 종래의 ‘위계적 국제질서관’을 비
예컨대 유길준은 “

2)

판했고, 김옥균은 “이제까지 청국은 스스로 조선을 속국으로 여겨 왔다.
이것은 참으로 있을 수 없었던 부끄러운 일이요, 또한 이로 인해 우리나
라가 진작할 희망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까지의 속박을 철퇴하고 독전자

獨全自主之國)을 건립하는 것이 오늘날 첫째의 과제이다.” 라고

주지국(

3)

하여 ‘자주독립의 기치’를 내세웠으며, 서재필은 “조선 인민이 독립이라
하는 것을 모르는 까닭에 외국 사람들이 조선을 업신여겨도 분한 줄을 모
르고 조선 대군주폐하께서 청국 임금에게 해마다 사신을 보내시어 책력
을 타오시며 공문에 청국 연호를 쓰고 조선 인민은 청국에 속한 사람들로
알면서도 몇 백년을 원수갚을 생각은 아니하고 속국인체 하고 있었으니
그 약한 마음을 생각하면 어찌 불쌍한 인생들이 아니겠는가?”4)라고 하여
기존의 청에 대한 사대를 ‘나약한 굴종’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이러한 인
식은 일제시대의 ‘식민사관’이나 ‘민족주의 역사학’5)에 의해 더욱 심화되
었고,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6)

西遊見聞, 제3편 <邦國의 權利>, 88쪽.
3) 김옥균, <朝鮮改革意見書>, 金玉均全集, 117쪽.
4) 서재필, <독립문건립의 의의>, ≪독립신문≫ 1896년 6월 20일자 논설.
5) 신채호, <朝鮮史 整理에 대한 私疑>, 丹齋申采浩全集 中, 135∼136쪽 참
조. 日帝時代의 植民史觀은 ‘韓民族史의 停滯性論⋅他律性論(事大主義)’ 등을
내세우면서, 따라서 韓民族은 독립할 자격이 없으므로 ‘日帝의 保護와 指導’
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에 대항하고자 한 당시의 ‘민족주의 역
사학’ 역시 ‘朝鮮時代 歷史의 停滯性⋅他律性’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들은 韓
民族의 近代史를 停滯와 他律에 빠진 것으로 비판하고, 古代史를 榮光의 시
대로 규정하여, ‘古代的인 것의 부활’을 꾀했던 것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논
의는 이상익, 「신채호의 民族主義的 歷史觀과 그 비판」 참조).
6) 예컨대 이종항은 ‘事大’를 ‘완전히 自我를 말소하고 自主性을 상실한 것’이라
고 혹독하게 비판한 바 있다(이종항, 韓國政治史, 239∼244쪽 참조). 한편
오늘날의 日人 學者 기무라 간(木村 幹)은 조선/한국의 이러한 ‘小國意識’이
조선/한국의 近代化를 방해했다고 설명한 바 있는데(기무라 간, 조선/한국의
2) 유길준, 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175

이러한 가운데 이용희7), 김용구8), 조동일9), 전원섭10), 권선홍11) 등은
새로운 관점에서 사대자소론의 본질을 제대로 규명하고자 노력했고, 이들
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에는 ‘사대자소’란 ‘지배와 종속의 체제’였다는 선입
견이 많이 타파되었다. 이들에 의하면 ‘사대자소’란 ‘평등한 주권국가관’에
입각한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배와 종속의 체제’도 아니었던 것으로
서, 오늘날 우리들의 통념으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든 ‘제3의 국제질서론’
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서구 근대 공법질서(베스트팔렌 체제)의 한계

盲信)을 경계하

를 적나라하게 해명함으로써, 근대 공법질서에 대한 맹신(

기도 했다. 요컨대 서구 근대의 ‘공법질서(베스트팔렌 체제)’는 서구의 기
독교국가만 ‘문명 국가’로 인정하여 ‘평등한 주권국가관’을 적용하였고(유

럽중심주의), 그 밖의 세계에 대해서는 ‘반( ) 문명 국가’라 하여 ‘불평등
조약’을 강요하거나 ‘야만 국가’라 하여 ‘침탈과 점령’의 대상으로 간주했
다는 것이다.12)

宗屬的) 위

사실 전통시대의 사대자소론은 대국과 소국 사이에 ‘종속적(

계’를 설정하고, 개인 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국가들 사이에도 서로 예를
갖춤으로써 평화를 이루자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권선홍

은 ‘사대 – 자소’와 ‘책봉 – 조공’ 문제를 ‘예( )’라는 차원에서 접근하여 설
내셔널리즘과 소국의식, 406쪽 참조), 그렇다면 오늘날의 한국인에게 조선시
대의
는 더욱 ‘
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7) 이용희, < ─ 그 현대적 해석을 중심으로>, 노재봉 편, 한국민족주
의, 서문당, 1977.
이용희. 
( ), 박영사, 1962.

事大主義
怨望
事大主義
一般國際政治學 上

8) 김용구, 세계관 충돌의 국제정치학, 나남, 1997.
김용구,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1866∼1882, 문학과지성사, 2001.
9) 조동일, <책봉체제>, 문명권의 동질성과 이질성, 지식산업사, 1999.
조동일. 하나이면서 여럿인 동아시아문학, 지식산업사, 1999.

平和를 위한 歷史, 道道, 1991.

10) 전원섭, 

11) 권선홍.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제관계, 부산외대출판부, 2004.
권선홍, 「유교사상에서 본 동아시아 전통질서」, 2015.
12) 김용구, 세계관 충돌과 한말 외교사, 1866∼1882, 62∼64쪽 참조.

176 한국철학논집 제47집

명하면서 “전통시대 동아시아국제관계의 실상을 제대로 보려면 실제상황
과 함께, 그에 못지않게 정신문화적 측면의 이해가 중요함은 물론이다. 즉
유교사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무엇보다 핵심적인 선행과제라 할 수
있다. 예컨대 기독교나 이슬람 문명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당 종교사
상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듯이, 유교문명권의 경우도 마찬가지라 본다.
특히 물질적 이익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근대와는 달리, 중세에는 어느 문
명권이든지 명분 등 관념을 중시하였기 때문이다.”13)라고 설파한 바 있다.
본고는 권선홍의 주장에 호응하여 ‘유교 경전’에서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이념적 근거’를 찾아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본
고는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대해 역사적 관점에서 사실적으로
고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상적 관점에서 이념적으로 고찰하려는 것이
다. 이어서 본고는 유교적 국제질서가 시사하는 현대적 함의를 역사적으
로 출현한 제국의 긍정적 역할에 주목하는 서구의 최근 이론에 비추어 검
토하고자 한다. 이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본론에 들어가기로 하자.

Ⅱ. 대일통 사상과 문덕론
1. 대일통 사상과 문덕론

大一統)’이란 ‘온 천하(大)’가 ‘하나(一)’로 ‘통합된다(統)’는 것으로,
이는 춘추 공양전(公羊傳)에서 유래한 말이다. 춘추의 첫머리 ‘은공원
년(隱公 元年)’조에서는 “원년 춘 왕정월(元年, 春, 王正月)”이라 하였는바,
‘대일통(

이에 대해서 춘추 공양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원년’이란 무엇인가? ‘군( )의 첫 해’이다. ‘춘( )’이란 무엇인가? 한 해의 시
작이다. ‘왕’이란 누구를 말하는가? ‘문왕’을 말한다. 어찌하여 먼저 ‘왕’을 말하
고 그 다음에 ‘정월’을 말했는가? 왕의 정월이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왕의 정월’
13) 권선홍, 「유교사상에서 본 동아시아 전통질서」, 4쪽.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177

大一統)’이기 때문이다.

이라 하는가? ‘대통일(

14)

위의 인용문에서, ‘군( )’은 ‘제후’를 말하고, ‘왕( )’은 ‘천자’를 말한다.
천자는 제후들에게 달력을 하사했던바, 이 왕력을 따르는 것은 대일통의
중요한 상징이었다. 흔히 ‘춘추대일통’이라 하듯이, 춘추의 ‘의리론’은
대일통의 관념을 저변에 깔고 있다. 이는 ‘천자’를 중심으로 ‘제후’들이 종
법질서를 이루는 것으로, 대일통의 위계적 질서는 천자의 분봉과 제후들
의 조공으로 표현되었다.
대일통은 무엇보다도 ‘천하에 통일된 정치적 질서를 구현한다’는 뜻이
었지만, 보다 포괄적으로는 ‘온 천하가 문명의 이상을 함께 한다’는 뜻이
기도 하였다. 즉 유교적 이상은 ‘온 천하가 왕도에 입각해 통일되는 것’이
다. 왕도와 대일통의 이념에 따라 규정되는 대국과 소국의 바람직한 관계

字小, 恩), 소국은 대국을 섬긴다(事大, 義)’는
것이었다. 패도는 은(恩)과 의(義)를 추구하지 않고 ‘힘의 논리’에 따르는
것인바, 이러한 맥락에서 ‘존왕천패(尊王賤覇)’ 역시 대일통사상의 한 축이
는 ‘대국은 소국을 사랑하고(

었던 것이다.
대일통사상은 유교 경전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平天下)’를 들 수 있다. 대학에서는 ‘수신, 제가, 치국’

대학의 ‘평천하(

을 거론한 다음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평천하’를 거론했다. 요컨대 대학
의 궁극적 이상은 ‘평천하’에 있는 것이다. ‘천하를 평정함’은 ‘천하를 하나의
질서 아래 통합시키는 것’인바, 이것이 바로 대일통이다. 시경과 예기에
보이는 다음의 세 예문 역시 모두 대일통사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넓은 하늘 아래는 모두 왕의 땅이며, 모든 땅의 끝까지 모두 왕의 신하이다.15)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왕이 없으며, 나라에는 두 임금이 없고,
집안에는 두 높은 사람이 없으니, 하나로써 다스리는 것이다.16)

春秋 公羊傳 <隱公> 元年條.
詩經 小雅 北山.

14) 
15) 

178 한국철학논집 제47집

朝覲)을 받고,
天子 자신을) ‘나 한 사람(予

천하에 군왕 노릇을 하는 사람을 ‘천자’라 한다. 제후의 조근(
직책에 따라 정사를 나누어주고 일을 맡길 때에는 (

一人)’이라고 말한다.

17)

위의 첫째 인용문에서는 하늘 아래 모든 지역, 모든 사람들이 왕의 통
치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둘째 인용문에서는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왕이 없다’고 설명한 다음 ‘하나로써 다스리는 것’이라 하
여, 온 천하가 하나의 질서 아래 포섭되어야 함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셋
째 인용문에서는 ‘천하에 군왕 노릇을 하는 사람’ 즉 그 ‘하나의 질서를 주
관하는 사람’을 ‘천자’라 하였다. ‘천자’는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하늘의
아들’로서, 유교에서는 ‘천명을 받은 사람’을 지칭하여 ‘천자’라 불렀던 것
이다.18) 그런데 천자는 오직 한 명이기 때문에, 천자는 아랫사람들에게는
자신을 ‘나 한 사람’으로 호칭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일통사상은 ‘천하사상’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서, 분명 유교
의 핵심 관념이었지만, 앞에서 소개한 춘추 공양전의 예문 외에 유교경
전에서 ‘대일통’이라는 용어를 찾아보기는 어렵다. 유교경전의 천하사상을

漢代)의 유학자

대일통이라는 맥락에서 정리하여 체계화한 사람은 한 대(

董仲舒)이다.

동중서(

19)

동중서는 대일통사상을 전개하면서, 정치적 통일의

漢武

토대로서 사상과 문화 등 학술의 통일을 중시했다. 동중서는 한무제(

帝)에게 올린 대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常經)이며 고금의 통의(通誼)입니다. 지금은

춘추의 대일통은 천지의 상경(


여 각자 지의(指意)가 다르니, 그러므로 윗사람은 통일을 견지할 수가 없어 법

스승들이 도( )를 달리하고 사람들이 의론을 달리하며 백가가 방도를 달리하
제가 자주 바뀌고, 아랫사람은 지킬 바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禮樂射御書數)에 속하지 않는 과목과 공자의 학술에 속하지 않는
16) 禮記 喪服四制.
17) 禮記 曲禮下.
18) 禮記 表記.
19) 韋政通, 中國哲學辭典, 大林出版社, 民國 67년, 71쪽.
생각에, 육예(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179

儒學과 함께) 병진할 수 없도록 하십시오. 간사하고
統紀)가 하나로 되고 법도가 밝혀져서, 백

것들은 모두 그 길을 끊어 (

편벽된 학설이 사라진 다음에야 통기(

성들이 따를 바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20)

獨尊儒術)’을 주

위의 인용문은 대일통의 가능근거로서 이른바 ‘독존유술(

청한 것이다. 이는 나쁘게 해석하자면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좋게 해석하자면 학문과 사상 등 문화적인 영역에서
공통의 토대를 구축함으로써 정치적 통일의 발판으로 삼자는 것이다.21)
동중서는 ‘대일통’을 ‘천지의 상경’이며 ‘고금의 통의’라고 했다. 이는 ‘대
일통’을 ‘시공을 초월한 진리’로 규정함으로써, 대일통의 정당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동중서는 대일통의 토대를 ‘사상과 문화 등 학술의

武力)에 의한 대일통’이 아니라 ‘문덕(文

통일’에서 찾았거니와, 이는 ‘무력(

德)에 의한 대일통’을 추구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동중서의 이러한

입장은 유교의 본래 정신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다. 다음의 두 예를 살
펴보자.
우선 이념적 측면에서, 대학에서는 ‘평천하’를 다른 말로는 ‘명명덕어

明明德於天下)’라고 표현했다. ‘명명덕(明明德)’은 대학의 삼강령(明
明德, 新民, 止於至善) 가운데 하나이거니와, ‘명명덕어천하’란 임금이 먼
저 자신의 명덕을 밝히고(明明德), 이를 바탕으로 백성들을 새롭게 진작시
켜(新民),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명덕을 밝힐 수 있도록 교화
하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지극한 선에 머묾(止於至善)’의 궁극적
경지는 바로 ‘천하에 명덕을 밝힘(明明德於天下)’인 것이다.
천하(

22)

漢書 <董仲舒傳>.
民主平和論

20) 

21) 예컨대 오늘날의 ‘
(democratic peace theory)’을 생각해 보자. 민주평
화론자들은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는 무력 충돌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세계 각국에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세계 평화를 모색하자고 주장한다. 같은
맥락에서, 동중서의 생각도

되면
이 쉽게 달성될 수 있
다는 것이었다.

天下 儒敎化

大學章句 經1章, 朱子註.

22) 

大一統

180 한국철학논집 제47집

다음, 역사적 사례로서, 논어에는 다음과 같은 사례가 보인다. 공자

季氏)는 노나라의 부용국 전유(顓臾)를 정벌

당시에 노( )의 실권자 계씨(

하려고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공자는 전유를 정벌하는 일에 반대하면
서 “먼 곳 사람들이 복종하지 않으면 문덕을 닦아 그들이 다가오게 만들
고, 이미 다가오면 그들을 편안하게 해주어라.”23)라고 훈계하였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유교에서 추구한 대일통은 다음과 같

秦始皇)이 추구했던 대일통’이 아니었다.

은 두 가지 점에서 결코 ‘진시황(

첫째, 유교의 대일통 사상은 진시황이 시행한 군현제처럼 ‘온 천하를
하나의 정치권력 아래 통합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다. 진시황
은 천하의 모든 지역 곳곳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자신의 지시대로 통치하
도록 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요컨대 이는 천하를 1인지배체제로 만든 것
이다. 이와 반대로, 유교의 대일통사상은 주대의 봉건제도를 배경으로 삼
는 것인바, 그것은 크고 작은 여러 나라들이 일정한 규율 아래 하나의 질

天子國)이 사방의

서를 공유하는 체제였다. 주대의 봉건제는 중앙의 왕국(

여러 나라들을 통솔하고, 사방의 여러 나라들은 중앙의 왕국에 복속하는
것이었던바, 이것이 유교에서 말한 대일통의 원형이었다. 이를 오늘날의
말로 표현하자면, 세계 각국이 각자의 주권을 누리면서 국제규범을 존중
하고, 국제연합(UN)의 통솔에 기꺼이 따르는 것이다.
둘째, 유교의 대일통 사상은 진시황처럼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하고 제
패하자는 것이 아니다. 진시황의 무력통일은 법가사상에 입각한 것인바,
유가에서는 이를 패도로 규정하여 가차 없이 비판하였다. 패도로 천하를
정복하는 것은 그 방법도 옳지 못하며, 또한 오랫동안 정복상태를 유지할
수도 없다는 것이 유가의 지론이었다. 유가에서는 대일통의 방법으로 무
력 대신 문덕을 내세운다. 이를 맹자의 말로 표현하면 ‘왕도’이거니와, 이
는 오늘날의 민주평화론과 궤를 같이 한다.
위의 첫째 사항은 대일통 체제에서 ‘각국의 주권을 인정하느냐, 부정하

論語 季氏 1.

23) 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181

느냐’의 문제이고, 둘째 사항은 대일통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문덕이냐, 무
력이냐’의 문제이다. 첫째 사항은 잠시 뒤에 사대자소론을 논의할 때 살펴
보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먼저 ‘문덕과 무력’의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2. 왕도와 패도의 문제
‘문덕과 무력’은 맹자의 용어로는 ‘왕도와 패도’에 해당한다. 맹자는 전국
시대에 패권경쟁을 일삼던 여러 제후들의 통치를 패도로 규정하고, 패도는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찾는 것’처럼 부질없는 시도라고 비판했다. 맹자가
대안으로 제시한 노선이 왕도였던바, 왕도는 요⋅순⋅우⋅탕⋅문⋅무 등

仁政)으로서, 맹자는 ‘어진 정치를 베푸는 왕에

의 성왕들이 실천했던 인정(

게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논리로 제후들에게 왕도를 권하였다.
먼저 왕도와 패도의 개념을 살펴보자.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仁政)을 가장하는 것은 패도이니, 패도는 반드시 큰 나

힘으로 다스리되 인정(

라를 차지하고자 한다. 덕으로 인정을 행하는 것은 왕도이니, 왕도는 큰 나라를
기다리지 않는다. 탕은 사방 70리로 왕도를 행하셨고, 문왕은 사방 100리로 왕
도를 행하셨다.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진심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복종하는 것이다. ‘덕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속
부터 기뻐하여 참으로 복종하는 것이니, 예컨대 70 제자가 공자께 복종하는 것
과 같다. 시경의 “동쪽에서, 서쪽에서, 남쪽에서, 북쪽에서 복종하지 않는 이
가 없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24)

패도는 힘으로 백성을 억압하고 착취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한 다음, 이
를 바탕으로 영토를 넓히고 패권을 차지하려는 것인바, 그러면서도 겉으

仁政)’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에 반해, 왕

로는 ‘인정(

도는 명실상부하게 인정을 행하는 것이다. 왕도는 인정을 통해 백성의 행
복을 증진하려는 것일 뿐, 영토의 확장이나 패권 경쟁에는 관심이 없는

孟子 公孫丑上 3.

24) 

182 한국철학논집 제47집

것이다. 또한 왕도는 덕으로 다스리는 것인바, 덕으로 다스리면 백성들은
통치자에게 저절로 감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시 제후들이 부국강병을 통한 패권경쟁에 혈안이 되었을 때, 맹자는
왕도정치가 ‘천하의 왕’이 되는 지름길이라고 설파했다. ‘인정을 베푸는 사
람에게는 대적할 사람이 없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맹자와 양혜왕의 다음
과 같은 대화를 보자.

양혜왕 : 우리 진( )나라가 천하에 막강한 나라임은 노인께서도 아시는 바일

것입니다. 그런데 과인의 때에 이르러, 동쪽으로는 제( )나라에 패하

여 맏아들이 전사하였고, 서쪽으로는 진( )나라에 패하여 7백리나

되는 땅을 잃었고, 남쪽으로는 초( )나라에 모욕을 당했습니다. 과인
은 이것을 부끄러워하여, 전사한 맏아들을 위하여 한 번 설욕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맹 자 : 영토가 사방 1백리만 되어도 왕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왕께서 만약
백성들에게 인정을 베푸시어 형벌을 줄이고 세금을 가볍게 하시면,
백성들은 농사일에 열중할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한가한 틈을 타서
효제충신을 닦아서, 들어가서는 부형을 섬기고 나와서는 윗사람을 섬

길 것이니, 그들로 하여금 몽둥이를 만들어서 진나라 초나라의 견고
한 갑옷을 입고 예리한 무기를 지닌 병사들을 종아리 치게 할 수 있
을 것입니다. 저들이 (군사훈련을 위해) 백성들의 농사철을 빼앗아,
백성들로 하여금 제대로 농사를 지어 부모를 봉양할 수 없게 한다면,
그들의 부모는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고 형제와 처자는 뿔뿔이 흩
어지게 될 것입니다. 저들이 자기의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거든, 왕께
서 가서 바로잡으신다면, 무릇 누가 왕과 대적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인정을 베푸는 사람에게는 대적할 사람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 왕께
서는 이 말을 의심하지 마십시오.25)

맹자는 “임금이 인정을 베풀면, 백성들은 그 윗사람을 친애하고 윗사람
을 위해 죽을 것”26)이라고도 했고, “임금이 인정을 베풀면 이웃나라의 백

孟子 梁惠王上 5.
孟子 梁惠王下 12.

25) 
26) 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183

성들이 부모처럼 우러를 것이니, 그 자제를 이끌고 그 부모를 공격하는
것은 이제까지 성공한 예가 없었다.”27)고도 했다. 요컨대 통치자가 인정을
베풀면, 자기 나라 백성은 물론 이웃나라의 백성들까지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된다는 말이다. 목숨을 바쳐 충성하는 백성을 나라 안팎으로 두루
거느린 통치자에게는 과연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仁者無敵)’이라고 옹호한 반

맹자는 이처럼 왕도에 대해서는 ‘인자무적(

緣木求魚,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찾는 것)’

면, 패도에 대해서는 ‘연목구어(

처럼 부질없는 시도라고 비판했다.28) 맹자가 패도를 ‘연목구어만도 못한
것’으로 비판한 논거 역시 둘로 정리된다. 첫째, 무력으로 패권을 추구하
는 것은 이웃나라들과 원수를 맺는 것으로서, 한 나라가 주위의 여러 나
라를 모두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 패권을
위해 부국강병을 추구하다보면 결국엔 내부적 반발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패도정치는 부국강병을 위해 민력을 과도하게 착취하게 되는
데 그러면 국민들이 반발하게 된다는 것이며, 또한 패도정치는 부국강병
을 위해 공리를 숭상하게 되는데 그러면 백성들 간의 이익다툼으로 국가
가 내부적으로 붕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것처럼, 맹자는 패도를 ‘연목구어만도 못한 것’으로 비판

法家)의 한비

하고 ‘인자무적’이라 하여 왕도를 옹호했다. 이에 대해 법가(

韓非子)는 왕도를 ‘수주대토(守株待兎)’처럼 어리석은 것이라고 비판하

자(

고, 엄한 형벌로 백성을 통제하고 부국강병으로 천하를 제패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29) 중국을 통일하여 전국시대를 마감한 진시황은 한비자의
가르침대로 패도를 숭상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진나라는 통일을 완성한
후(서기전 221년) 불과 15년 만에 반란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진시황의 사
례는 패도의 의의와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교훈이 되었다. 이후 ‘무력으
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으나, 무력으로 천하를 지킬 수는 없다’는 것을 깨

孟子 公孫丑上 5.
28) 孟子 梁惠王上 7.
29) 韓非子 <五蠹>.
27) 

184 한국철학논집 제47집

달은 사람들은 패도를 배격하고 다시 왕도를 숭상하게 되었다.

Ⅲ. 사대자소론과 책봉—조공 체제
1. 사대와 자소
유교의 사대자소론은 크고 작은 나라들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를 제시

事大),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한 것으로,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고(

字小, 事小) 것이다. 유교에서는 이처럼 국제관계도 은

돌보아야 한다는(

( )과 의( )에 따라 맺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다. 먼저 춘추
좌전에 보이는 다음의 예문을 살펴보자.


事大)는 대국이 때때로 요구하는 것을 공급하는 데 있고, 자소(字小)는 소

예( )라는 것은 소국이 대국을 섬기고, 대국이 소국을 돌보는 것을 말한다.
사대(

국에 없는 것을 구휼하는 데 있다.30)

위의 인용문에서는 사대와 자소를 대국이 요구하는 것을 공급하고 소
국에 없는 것을 구휼함으로 설명했다. 이는 오늘날의 말로는 ‘호혜적 교
류’를 뜻하거니와, 좌전에서는 이를 크고 작은 나라들 사이의 예로 규정

한 것이다. 춘추 좌전에는 또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인다. 노( )나라의

계강자가 주( )를 정벌하고자 여러 대부들을 모아놓고 연회를 벌이며 일

子服景伯)과 여러 대부들은 정벌을 반대하면서

을 꾀했다. 이때 자복경백(
다음과 같이 말했다.



不信)’이고, 소국을
정벌하는 것은 ‘불인(不仁)’입니다. 백성은 성(城)으로 보존되고, 성은 덕으로 보
존됩니다. 신(信)과 인(仁)을 잃으면 위태롭게 되니, 장차 어떻게 보존될 수 있겠
자복경백이 말하기를,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은 ‘신( )’이고, 대국이 소국

을 보호하는 것은 ‘인( )’이며, 대국을 배반하는 것은 ‘불신(

春秋 左傳 昭公 30년 8월조.

30) 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185


塗山)에서 제후들을 규
玉帛)을 잡은 자가 만국이나 되었는데, 지금까지 보존되는 나라

습니까?” ( ) 여러 대부들이 대답하기를, “우( )가 도산(
합했을 때 옥백(

는 수십국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는 대국은 소국을 돌보지 않고 소국은 대국을
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31)

자복경백은 크고 작은 나라들이 사대와 자소를 통해 호혜적으로 교류
해야만 서로 국가를 보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여러 대부
들도 그동안 수많은 제후국들이 멸망한 까닭은 각각의 나라들이 사대와
자소를 외면하고 서로 공벌을 일삼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요컨대 위
의 인용문은 사대와 자소를 크고 작은 나라들 사이의 바람직한 외교 관계
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맹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仁者)만이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으니, 그러므로 탕
(湯)은 갈(葛)을 섬기고, 문왕(文王)은 곤이(昆夷)를 섬겼다. 오직 지자(智者)만이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으니, 그러므로 태왕(太王)은 훈육(獯鬻)을
섬기고, 구천(勾踐)은 오(吳)를 섬겼다.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
오직 인자(

늘을 즐거워하는 것이며,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하늘을 즐거워하는 자는 천하를 보전할 수 있고, 하늘을 두려워하
는 자는 자기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32)

智者)의 덕목’으로 규정할 때, 여기서의 ‘지(智)’란 신중하
고 냉철하게 현실의 형세와 이해(利害)를 판단하는 ‘타산적 이성’을 뜻할
‘사대’를 ‘지자(

것이다. 요컨대 사대는 현실의 형세와 이해에 대한 신중하고 냉철한 판단

仁者)의 덕목’으로 규정했는

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반면에 ‘자소’는 ‘인자(

데, 인자는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이다. 요컨대 자소는
‘우월한 입장에 있는 대국이 소국에 베풀 수 있는 아량’에 속하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 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春秋 左傳 哀公 7년 8월조.
孟子 梁惠王下 3.

31) 
32) 

186 한국철학논집 제47집
어진 사람은 관대하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있고, 대소와 강약을 따지는 사

私心)이 없어서, 소국이 비록 간혹 공손하지 않아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그칠 수 없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의리’에 밝고 ‘시세(時勢)’를 알기 때문
심(

에, 대국이 비록 침략하고 능멸해도 그를 섬기는 예를 더욱 폐지하지 못하는 것

○ 대국이 소국을 사랑하고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은 모두 ‘이치의 당
연’이다. 저절로 이치에 부합하므로 ‘낙천(樂天)’이라 하며, 감히 이치를 어기지
못하므로 ‘외천(畏天)’이라 한다. 모든 나라를 널리 감싸주는 것은 천하를 보전
하는 기상이며, 절도(節度)를 삼가 감히 함부로 굴지 않는 것은 한 나라를 보전
이다.

하는 규모이다.33)

사대는 본래 ‘대소와 강약이라는 형세’에 따르는 것인데, 주자는 이것을
‘의리’라 했다. 요컨대 소국은 대국을 섬기는 것이 ‘의리’라는 것이다. 반면
에 자소는 ‘대소와 강약이라는 형세’를 초월한 것으로서, 이는 대국이 소
국에 베풀 수 있는 아량이라는 것이다. 대국은 여러 소국들을 널리 감싸
줌으로써 천하를 보전할 수 있게 되며, 소국은 삼가 대국을 섬김으로써
일국을 보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유교의 사대자소론이 추구하는 바람직
한 국제관계인 것이다.34)

九經)’를 논했는
데, 자신을 닦음(修身), 현자를 높임(尊賢), 친한 사람을 친하게 대함(親親),
대신을 공경함(敬大臣), 여러 신하들을 몸소 살핌(體羣臣), 백성들을 자식
처럼 돌봄(子庶民), 온갖 장인들이 모여들게 함(來百工),먼 곳에서 온 사람
들을 부드럽게 대함(柔遠人), 제후들을 회유함(懷諸侯)이 그것이다. 이 가
중용에서는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법도(

운데 국제관계의 법도에 해당하는 것은 ‘제후들을 회유함’인바, 중용에
서는 “제후들을 회유하면 천하가 두려워한다”고 설명한 다음, 제후들을
회유하는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孟子集註 梁惠王下 3, 朱子註.
34) ‘事大’나 ‘字小’는 모두 ‘大小와 强弱이라는 形勢’를 전제한 것인바, 여기에는
‘華⋅夷’라는 관념도 개입하지 않고, ‘敵國’이라는 관념도 개입하지 않는다.
‘華’인 湯과 文王은 ‘夷이며 敵國’인 葛과 昆夷를 섬겼으며(事小), 역시 ‘華’인
太王(文王의 祖父)은 ‘夷이며 敵國’인 獯鬻을 섬겼던 것이다(事大).
33) 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187
끊어진 세대를 이어주고, 없어진 나라를 일으켜주며, 혼란한 나라를 다스려주

朝覲)과 빙문(聘問)을 때에 맞추어 하며,

고, 위태로운 나라를 붙들어 주며, 조근(

가는 것을 두텁게 하고 오는 것을 얇게 함이 제후들을 회유하는 방도이다.35)

‘끊어진 세대를 이어준다’는 것은 제후국의 통치권이 원만하게 계승되
도록 돌보아준다는 말이며, ‘없어진 나라를 일으켜준다’는 것은 침략 등으

로 인해 망한 나라를 복원시켜준다는 말이다. ‘조( )’란 제후가 천자를 찾

아뵙는 것을 말하며, ‘빙( )’이란 제후가 대부로 하여금 천자를 찾아뵙고
예물을 바치게 함을 말하는바, ‘조근과 빙문을 때에 맞추어 한다’는 것은
요즈음 말로 주기적으로 외교사절을 교환하는 것이다.36) ‘가는 것을 두텁
게 한다’는 것은 천자가 조근을 온 제후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선물을 하
사할 때 두텁게 한다는 말이며, ‘오는 것을 얇게 한다’는 것은 제후들이

貢物)은 적게 받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천자께 바치는 예물(

대국은 소국의 안정과 안전을 후원하고, 주기적으로 사절을 교환하되, 항
상 많이 베풀고 적게 받는 자세를 견지하라는 것이 중용의 가르침이었
다. 한편, 중용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천자가 아니면 예를 의논하지 않으며, 제도를 만들지 않으며, 문자를 상고하
지 않는다. 지금 천하는 수레의 궤도가 같으며, 글은 문자가 같으며, 행동은 윤
리를 같이 한다. 비록 그 지위에 있더라도 진실로 그 덕이 없으면 감히 예악을
짓지 못하며, 비록 그 덕이 있더라도 진실로 그 지위가 없으면 또한 감히 예악
을 짓지 못한다.37)

위의 인용문에서 말하는 ‘지위’란 ‘천자의 지위’를 뜻하며, ‘덕’이란 ‘성인

聖人)의 덕’을 뜻한다. 요컨대 위의 인용문에 의하면 천자의 지위와 성인

(

中庸章句 20.
禮記 王制에서는 “諸侯는 天子께 1년에 한 번 小聘을 하고, 3년에 한 번 大
聘을 하며, 5년에 한 번 朝覲을 한다. 天子는 五年에 한 번 제후국을 巡狩한
다”고 했다.
37) 中庸章句 28.
35) 
36) 

188 한국철학논집 제47집

의 덕을 겸비한 사람만이 예악을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천자가 아니면 예
를 의논하지 않으며, 제도를 만들지 않으며, 문자를 상고하지 않는다.”는
말은 제후국들은 천자국에서 제정한 예제와 문자를 준용해야 한다는 뜻
이다.38) “지금 천하는 수레의 궤도가 같으며, 글은 문자가 같으며, 행동은
윤리를 같이 한다.”는 말은 제후국들이 천자국에서 제정한 예제와 문자
등을 준용함으로써, 예제가 보편화되고 문자가 통일되며 행동규범 역시
통일된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유학에서 추구하는 ‘대일통의 핵심 내
용’이다.39)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첫째, ‘대국과 소국은 은( )과 의( )로 맺
어져야 한다’는 것은 대국과 소국의 위계질서를 설정하고 은과 의를 그에
합당한 덕목으로 부과함으로써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한 것이다. 둘째,
‘제후국들은 천자국에서 제정한 예제와 문자를 준용해야 한다’는 것은 보
편적인 규범과 보편적인 문화를 구축함으로써 ‘상호간의 교류와 소통을
원만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유가에서 추구한 ‘대일통의 국제
질서’는 대국은 소국에게 은혜를 베풀고 소국은 대국이 제시한 규범과 문
화를 따르자는 것으로서, 이는 결코 소국(제후국)의 주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었다.40)

天子國에서 불합리한 禮法을 만들 수도 있는바, 제후국에서는 이것도 따라야
만 하는가? 이런 곤란한 의문을 예방하기 위해, 위의 인용문에서는 ‘天子의
지위와 聖人의 덕을 겸비한 사람만이 禮樂을 지을 수 있다’고 부연한 것이다.
39) 위의 인용문에 대한 朱子의 주석에서도 “軌度⋅文字⋅倫理가 모두 같다는 것
은 ‘天下가 하나로 통일되었음’을 말한다.”고 했다.
40) 유교이념에 따를 때, 周代의 봉건제도 현실에서 ‘대국과 소국’이란 무엇보다
도 ‘천자국과 제후국’을 뜻하는 것이었고, 제후국이 천자국에 朝貢을 행하는
38)

것이었다. 그런데 봉건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던 춘추시대의 경우, 천자국의
권위와 통제력이 약화되고, 대신 강대한 제후국이 대국 행세를 하기 시작했
다. 그리하여 춘추시대에는 제후국들 사이에서 강대한 나라와 약소한 나라
사이에 ‘대국 – 소국’ 관계가 형성되어, 약소국이 강대국에
을 행하기도
했다. 또한 이 때 강대국이 약소국에 강요한
은 ‘정치적 복속’과 ‘과도한
경제적 부담’을 포함하는 것이었다(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춘식, 「


」, 55∼60쪽 참조). 또한 이러한 ‘강요된
’의 경

朝貢

古代 朝貢 實體 性格

朝貢

事大

中國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189

2. 책봉 조공 체제의 성립
이제까지 유교의 사대자소론과 그에 입각한 대일통사상을 살펴보았거
니와, 이것은 현실에서는 ‘분봉 – 조공 체제’ 또는 ‘책봉 – 조공 체제’로 구
체화되었다. ‘분봉 – 조공 체제’는 봉건시대 중국 내부의 일로서, 천자는 천

天子의 領土)를 나누어 제후를 봉하고(分封), 제후는 천자께 자신
이 다스리는 지역의 특산물을 공물로 바침으로써(朝貢), 크고 작은 나라들
하의 땅(

사이에 평화로운 공존과 교류를 지속하자는 것이다. ‘분봉 – 조공 체제’가
약간 변형된 ‘책봉 – 조공 체제’는 중국과 주변국들의 관계에 해당하는 것

冊封),

으로서, 중국의 황제가 주변국의 통치자를 승인해주고(

41)

주변국의

통치자는 중국의 황제께 조공을 바침으로써, 양국간에 위계적이고 우호적
인 외교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먼저 ‘분봉 – 조공 체제’에 대해 살펴보자. 예기 <왕제>에서는 천자
가 천하의 땅을 나누어 제후를 봉하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王者)가 작록을 제정함에,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의 다섯 등급
으로 한다. 제후의 경우도 上大夫(卿)⋅下大夫⋅上士⋅中士⋅下士의 다섯 등급
으로 한다. 천자의 영전(領田) 은 사방 1,000리이고, 공과 후의 영전은 사방
왕자(

42)

100리이며, 백은 70리, 자와 남은 50리이다. 사방 50리가 되지 못하는 자는 천자

朝覲)할 수 없으니, 제후에게 소속시키고 ‘부용(附庸)’이라 한다.

께 조근(

43)

事大 字小 交隣之禮 多額 獻物
事大 變貌
左傳 中
事大 意味
冊封
文書
42) ‘領田’은 ‘통치자가 領有하는 田野’를 말한다. ‘領土’라 하지 않고 ‘領田’이라
한 것은 ‘山林, 川澤, 原濕’ 등을 제외하고 실제로 경작할 수 있는 토지만을
계산하기 위한 것이었다.
43) 禮記 王制.

우 “상호 왕래적인 ‘

’의
에서

을 수반한 일방


”하기도 했다(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춘식, 「「
」 에
보이는

」, 38쪽 참조).
41) ‘
’은 중국의 황제(천자)가 자신의 영토를 나누어주고 통치를 위임하는 것
이 아니요, 다만 주변국의 통치자에게
로 통치권을 인정해주는 것일 따
름이다.

190 한국철학논집 제47집

천자가 제후들을 분봉할 때, 제후들을 다섯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이로
써 천자와 제후 사이에 대⋅소의 위계 관계가 성립함과 동시에 제후들 사
이에도 대⋅소의 위계 관계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예기 <왕제>의
내용을 더 살펴보자.

무릇 사해의 안에 9주가 있는데, 각각의 주( )는 사방 1,000리이다. ( ) 사
방 1,000리의 지역은 사방 100리의 지역 100개를 만들 수 있거니와, 사방 100


… 名山)과 대택(大澤)은 봉하지 않
으며, 그 나머지는 부용국이나 한전(閒田)으로 삼는다. 제후로서 공을 세운 자
리의 나라 30개국을 봉하고 ( ) 또 사방 70리의 나라 60개국을 봉하며 ( ) 또
사방 50리의 나라 120개국을 봉한다. ( ) 명산(

에게는 한전으로 녹을 주고, (제후가 죄를 지어) 봉지를 깍은 것이 있으면 한전
으로 돌린다.44)

위와 같이 분봉하면, 사방 1,000리의 한 주에 210개의 제후국이 성립하
게 된다. 9주를 모두 이처럼 분봉하고, 중앙에 있는 천자의 직할지도 이처
럼 분봉하면, 중국 천하에는 약 2,000개의 제후국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처럼 천자와 제후의 관계가 성립한 다음에는 서로 교류하는 예법을

小聘)

마련해야 하는바, <왕제>에서는 “제후는 천자께 1년에 한 번 소빙(

大聘)을 하며, 5년에 한 번 조근(朝覲)을 한다.
천자는 5년에 한 번 제후국을 순수(巡狩)한다.” 고 했다. 앞에서 설명했듯
을 하고, 3년에 한 번 대빙(

45)

이, ‘조근’은 제후가 직접 천자를 찾아뵙는 것을 말하며, ‘빙문’은 제후가

大夫)를 시켜 천자를 찾아뵙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에

자신의 신하(

서는 제후의 ‘조근과 빙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君臣)의 의리를 밝히기 위한 것이며, 빙문의 예는 제후들로

신의 지위를 잃고, 제후들이 악행을 저질러, 마침내 배반과 침릉(侵陵)의 불상사
조근의 예는 군신(

하여금 서로 존경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 ) 조근과 빙문의 예가 폐지되면 군
가 일어난다.46)

禮記 王制.
禮記 王制.

44) 
45) 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191

위에 보이듯이, 조근과 빙문은 천자와 제후 사이에 ‘군신의 의리’를 주
기적으로 확인함으로써 배반과 침략 등의 불상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제후는 천자를 찾아뵐 때 자기 지역의 특산물을 예물로 바치는데, 이를

朝貢)’이라 한다. 제후의 조공에 대해 천자는 훨씬 많은 답례품을 하

‘조공(

사하는 것이 또한 예법이었다.47) 한편, 천자의 ‘순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岱宗)에 이르러 나무를

순수를 하는 해의 2월에 동쪽으로 순수를 한다. 대종(

望祀)를 지내고, 제후들을 접견한다. 나이가 100세 된 노인이
大師)에게 명하여 백성들의 시
(詩)를 채록하여 올리게 하여 민풍(民風)을 살핀다. 시장을 맡은 관리에게 명하
여 물가를 보고하게 하여 백성들의 호오를 살피는데, 백성들의 심지(心志)가 음
태워 산천에 망사(

있는지 묻고, 있다면 그 노인을 방문한다. 태사(

란하면 간사하고 편벽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예를 맡은 관리에게 명하여

⋅ ⋅ ⋅

계절과 달을 살펴 날짜를 정하고, 법률 예악 제도 의복 등을 통일시켜 바로
잡게 한다. 산천의 신께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을 ‘불경’이라 하는데, 불경한 군

昭穆)의 순서를 어지럽히고 제사를

주가 있으면 영지를 삭감한다. 종묘에 소목(

지내지 않는 것을 ‘불효’라 하는데, 불효한 군주가 있으면 그 작위에서 물러나게

不從)’이라 하는데, 부종한 군주가 있
으면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낸다. 제도와 의복을 제멋대로 바꾸는 것을 ‘반(畔)’이
한다. 예악을 제멋대로 바꾸는 것을 ‘부종(

라 하는데, 반한 군주가 있으면 성토한다. 백성들에게 공덕이 있는 자는 영지를
늘려주고 작위도 올려준다.48)

위에 보이듯이, 천자의 순수는 제후국들의 민생과 민풍을 살피고, 법
률⋅례악⋅제도⋅의복 등을 통일시켜 바로잡음으로써 ‘천하의 통일성’을
유지하며, 제후들의 통치실적을 평가하여 상이나 벌을 내리기 위한 것이
었다. 이렇게 본다면, 천자의 순수는 그 의도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더

禮記 經解.
47) 中庸의 九經에서 ‘가는 것을 두텁게 하고, 오는 것을 얇게 함(厚往而薄來)’
이 이를 말하는 것이다.
48) 禮記 王制.
46) 

192 한국철학논집 제47집

라도 다소 제후국들의 주권을 침범하는 점이 있었다.49)
이제까지 ‘중국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분봉과 조빙 – 순수의 예법을 살
펴보았다. 이는 말 그대로 ‘주대 봉건제도의 이상형’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
다.50) 이러한 이상형이 중국 울타리 안에서 그대로 실현된 것도 아니요, 중
국과 주변국의 관계에서 그대로 실현된 것도 아니다. 다만 이러한 이상형은
하나의 이념형으로 작동하여, 후대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제 이러한 이념형이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살
펴보자. 중국과 그 주변국들은 주대 봉건제도의 기본 틀을 약간 변형하여
국제관계의 기본 틀을 정립하였다.
우선, 봉건제에서의 ‘분봉’은 ‘책봉’으로 변형되었다. ‘분봉’이란 개념상
‘천자가 자신의 천하를 제후들에게 나누어주고 통치를 위임하는 것’이요,
제후들은 이로써 천자로부터 영토와 세습적 통치권을 부여받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주변 국가들은 천자(중국의 황제)로부터 영토를 나누어 받

는 것이 아니다. ‘책봉’이란 개념적으로 ‘문서( )로 봉한다’는 뜻으로서, 이
는 이미 존재하는 주변국과 그 통치자에 대해 ‘천자가 통치권을 인정하는
문서를 발급하는 것’일 뿐이니, 요즘 말로 ‘외교적 승인’에 해당하는 것이
다. 책봉을 통해 중국 황제와 주변국의 통치자들은 ‘천자와 제후’ 또는 ‘임
금과 신하’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51)

周代의 封建制 이념에 따른다면, 제후국은 천자가 자신의 천하를 나누어 分
封한 것이므로, 천자는 제후국의 통치에 간섭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이다.
50) 이춘식은 중국 고대의 조공체제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찰한 다음 “朝覲과 入
貢은 근본적으로 살펴볼 때에 강고한 씨족 조직과 전통을 기반으로 한 자치
자율 내지는 독립적 정치 군사적 집단이 보다 武力이 강한 집단에게 정치적
복속을 표시했던 儀禮였는데, 이 정치적 복속의 표시는 自國의 이해관계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고 정리한 바 있다(이춘식, 「中國 古代 朝
貢의 實體와 性格」, 81쪽).
51) 조선시대의 경우, 조선은 明 황제가 ‘冊封한 나라’이기는 하지만, 明 황제가
‘分封한 나라’가 아니므로, 明에 대한 조선의 국가적 지위가 어떠한 것이냐에
대한 논란이 종종 제기되었다. 대체로 말하자면, 勳舊派가 주도한 조선 초기
의 경우에는 事大와 慕華를 大前提로 하면서도 조선을 ‘別邦’으로 인식하는
49)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193

이처럼 중국과 그 주변국들은 책봉을 통해 ‘위계적 외교관계’를 맺은
것이다. 주변국의 통치자들은 책봉을 통해 중국 황제보다 한 등급 낮은
지위로 격하됨에도 불구하고,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음으로써 통치권의
정당성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책봉은 주변국의 요
청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중국의 입장에서도 주
변국의 통치자를 책봉함으로써 주변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또 이
를 통해 평화와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으므로, 책봉 요청을 마다할 이유
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 봉건제에서의 ‘조빙 – 순수’는 ‘순수’는 없어진 채 ‘조빙’만 남게 되
었다. 순수가 없어졌다는 것은 주변국에 대한 정치적 간섭의 계기가 없어
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봉건시대의 천자는 순수를
통해 제후들에게 상과 벌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제후국의 주권을 침해하
는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런데 책봉 체제에는 천자의 순수가 없는 것
이므로, 주변국들은 주권을 침해당할 계기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책봉을 받은 주변국들은 주기적으로 중국의 황제께 조빙을 했는데, 이
때 자기 나라의 특산물을 공물로 바쳤다. 이를 조공이라 하거니와, 중국의
황제는 ‘가는 것을 두텁게 하고, 오는 것을 얇게 함’이라는 이념에 따라
주변국의 조공에 대해 몇 배로 하사품을 내리는 것이 관례였다. 이처럼
조공은 명목상으로는 천자의 권위를 높여주는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주
변국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었다. 따라서 주변국에서는 되도록이면 조
공의 기회를 많이 확보하려고 했고, 중국의 입장에서는 이를 부담스러워
하면서 조공의 기회를 줄이려고 했던 것이다.52)

交隣)’의 관

한편,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는 주변국들 상호간에는 ‘교린(

계를 맺었다. 사대는 위계적 관계이지만, 교린은 수평적 관계이다. 또한

士林派
大一統的 名分秩序
中華主義
52) 두산백과, ‘朝貢貿易’條 참조.

明 諸侯國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가 주도한 중기 이후에는 조선을 ‘ 의

으로 인식하고
를 존중하는 경향이 강했다(이에 대한 자세
한 논의는 이상익, 「조선시대
의 두 흐름」 참조).

194 한국철학논집 제47집

중국의 주변국들 중에는 중국 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주변국들 중에 신의가 없거나 문화수준이 낮은 나라에 대해서는 중국에
서 책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라들은 국격이 낮은 것으로 인식
되어, 국제사회의 제대로 된 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이상에서 중국과 그 주변국 사이에 형성되었던 ‘책봉 – 조공 체제’에 대
해 살펴보았다. 19세기 말까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기본 틀이 되었던 책
봉 – 조공 체제는 유교의 대일통사상과 사대자소론에 입각한 것으로서, 동
아시아의 안정과 평화에 크게 기여했다.

Ⅳ. 현대적 재음미
이상에서 살핀 전통 유교의 중국중심적 국제질서론은 실제로 주변국
인 조선에서도 원론적으로 수용되었다. 예를 들어 조선 중기에 퇴계 이

李滉)은 춘추대일통에 입각한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다음과 같이 받아

황(

들였다.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왕이 없다. 춘추대일통은 곧 천지의

大明)은 천하의 종주(宗主)이니 변방의 모든 나

상경이요 고금의 통의이다. 대명(

臣服)하지 않을 수 없다.

라들이 신복(

53)

地球說)의 수용과 함께 이익(李瀷)을

그런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 지구설(

비롯한 실학자들은 중국중심의 천하사상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이를
해체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정약용·홍대용 등은 지리적 중화주의는 물론

華夷一也)’이라고

문화적 중화주의마저 부정하고 ‘화와 이가 한 가지인 것(

주장했다.54) 한 걸음 더 나아가, 19세기말 개화론자들은 동아시아의 전통
적 국제질서론을 유럽의 만국공법적 세계관에 근거해서 신랄하게 비판하
고, 역사적으로 조상들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며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

退溪全書 卷8 頁54-55, <禮曹答日本國左武衛將軍源義淸>.
湛軒書 內集 補遺 卷4 頁36, <毉山問答>.

53) 
54) 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195

았던 것을 “주체성이 없는 노예근성의 발로”로 치부하여, 이를 당연시한
조상들의 태도를 수치스럽게 여겼던 것이다. 현대의 대다수 한국인 역시
이러한 세계관의 상속자이자 공유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거시적인 역사의 관점에서 이러한 국제질서관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가에 대해 재고할 필요가 있다. 첫째, 순전하게 대내적 최고성
과 대외적 자주성을 보유한 주권개념과 유사한 속성을 보유한 대등한 국
가(정치체)들로 구성된 (전세계적인 또는 부분적인) 국제질서는 인류 역사
에서 그리 오랫동안 지속했던 것이 아니며, 대개는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개별적이고 분산된 형태로 형성된 제국들이 소규모의 국가(정치체)들을
포섭하면서 상위의 질서로 군림하는 위계적인 국제질서가 존속했다는 점
이다. 둘째, 근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반감을 억제하고

功過)를 역사적 인내심을 갖고 좀 더 객관적으로 평

제국의 역할과 공과(

가할 수 있는 문명사적 관점이나 지평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점이다.
첫째 논점과 관련해서, 유럽과 동아시아 역사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유
럽에서 비교적 대등한 힘을 가진 국가들로 구성된 국가질서는 도시국가
들로 구성된 고대 그리스와 1648년 베스트팔리아 조약이후의 시대로 한
정된다. 고대 그리스의 그러한 국제질서는 마케도니아 제국과 로마 제국
에 의한 ‘제국의 질서’로 대체되었다. 5세기 이후에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서유럽은 침체와 혼란을 지속하며 소국으로 분열을 거듭했지만, 외
형상 느슨한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이 군림하는 가운데 크고 작은 왕국,
공국, 도시국가들이 복합적인 위계질서를 구성하는 중층적인 국제질서를
형성했다. 그리고 유럽의 일부 지역은 이슬람세력의 지배에 놓이기도 했
으며, 15세기 이후 유럽 전체는 동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오스만
제국의 지속적인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다만 1648년 30년 전쟁을 마무
리하는 베스트팔리아 조약의 체결과 함께 규범적으로 유럽의 모든 국가
가 국제법상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누구도 다른 주권국가의 독립
과 자치권을 침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질 수 없는 근대적인 국제질서가
태동했다고 할 수 있다.

196 한국철학논집 제47집

그러나 그 이후 진행된 정복과 무력에 의한 국민국가 건설과정과 강대
국의 패권경쟁에 의해 16세기에 200개 이상을 헤아리던 유럽의 정치체가
20세기 말에는 불과 30개국 정도로 축소되었다는 사실은, 주권 존중의 원
칙에도 불구하고 유럽적 국제질서를 지배한 약육강식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사례로서 의미심장하다. 아울러 17세기 이후 대등한 주권국가가 규
범적으로 유럽의 국제질서를 형성했지만, 주요 국가들에 의한 유럽 내
에서의 패권경쟁과 해외에서의 식민지 경쟁으로 크고 작은 전쟁이 빈발
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빌헬
름 황제의 독일제국과 히틀러의 나치 독일 등이 유럽 대륙 내에서 제국
적 야심을 공공연히 실천에 옮기려 함에 따라 대등한 주권국가들로 구성
된 국제질서는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 게다가 기독교 공동체로서 유럽
의 국제사회를 구성하던 국가들 사이를 지배하던 주권평등의 원칙과 달
리, 유럽의 주요 국가들이 해외에서 비유럽국가들을 야만으로 규정하고
약탈적이고 착취적인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적 행태에 몰입했다는 점 역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제2차 대전 이후 유럽대륙에 지속된 70
년의 평화의 원인에 대해서는 국제질서를 구성하는 주권 평등의 원칙이
나 유럽연합의 형성보다는 미⋅소를 중심으로 구성된 동서 냉전체제의
지속, 그리고 미국을 맹주로 하여 형성된 나토(NATO)체제를 중심으로 설
명하는 입장이 유력하다.55) 다시 말해 20세기 후반 이후에도 유럽대륙을
감싸고 있는 제국의 안보우산 역할이 전쟁억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
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에서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한

漢 唐
五胡
十六國)이나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를 제외한다면 제국의 시대가 주조
( )과 당( )이 멸망한 후에 각각 일시적으로 지속되었던 오호십육국(

를 이루었다. 그리고 중국·한국·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볼 때, 일시적인 예외시기를 제외한다면 대체로 위계적인 제국의 질서에
55) 헤어프리트 뮌클러 지음, 공진성 옮김, 제국: 평천하의 논리 (책세상, 1995),
104-105쪽.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197

기초한 중국의 평화(pax sinica)가 지속되었다.56) 아울러 주변의 약탈적인
유목민족들이 중원을 정복하여 건설한 원과 청 제국을 제외한다면, 대체
로 한족에 의해 건설된 송·명 등 중국 제국은 주변국가들을 무력으로 정
복하거나 경제적으로 수탈하지 않았다.
현대의 국제질서를 전체적으로 조감할 때,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
소를 중심으로 형성된 제국적 질서는 주권국가들 사이의 평등성을 심각
하게 제약했다. 냉전 종언 이후에도 유일한 제국으로 남게 된 미국이 강
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세계의 분쟁지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테러를
지원하는 국가들을 상대로 일방적인 전쟁을 수행함에 따라 국가들 사이
의 평등은 여전히 제한되고 있다. 심지어 미국과 호혜적인 관계를 유지
하고 있는 유럽의 경우에도 미국의 대외정책에 대한 유럽국가들의 영향
력이 오늘날 냉전시대 이전보다 약화되고 있다는 관찰마저 제기되고 있
다.57) 그렇다 하더라도, 평등한 주권국가들로 구성된 국제질서는 ‘나름대
로 유용한 허구’로서, 특히 제국이 아닌 대다수의 국가들의 국제관계에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역설적
이게도, 그 긍정적인 역할마저 상당한 수준에서는 제국이 수행해온 국제
질서 유지기능과 그것이 수반하는 주변국가들의 주권의 제약에 힘입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이렇게 볼 때, 이른바 현대의 국제질서
역시 평등한 주권국가들로 구성된 국제질서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것과 함께, 이러한 국제질서의 규범에 구속되지 않고 제국의 사명을 내

漢四郡

56) 예외적인 시기로 의 고조선 침략에 의한
건설,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시기에 벌어진 전쟁, 몽골의 고려 및 일본 침략, 한·중·일이 격돌한 임진왜란,
의 침략으로 비롯된 병자호란 등을 들 수 있겠다. 물론 19세기 말에 일어난 청
일전쟁도 있지만, 이 전쟁을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국제질서하에서 일어난 것으
로 보기 힘들다.

57) 독일의 정치학자 헤어프리트 뮌클러는 이러한 현상을 지적한 후, 고대 그리스에
서 아테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나중에 강화조약을 체
결함으로써 페르시아의 위협이 제거된 후 동맹국가들에 대해 (동맹국의 의사를
존중하는) 일종의 ‘패권국가’에서 (동맹국의 의사를 무시하는) ‘제국’으로 변질된
사례에 비유하고 있다. 뮌클러, 제국: 평천하의 논리, 34, 357쪽.

198 한국철학논집 제47집

세우면서 그 위에 군림하는 제국적 질서가 중층적으로 공존한다고 보아
야 할 것이다.
둘째, 앞의 논의에서 시사된 것처럼, 국제질서에서 제국이 수행하는 역

功過)에 대해 좀

할의 긍정적인 측면에 주목하면서 제국의 역사적 공과(

더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접근·평가할 필요가 있다. 전통시대 동아
시아 국제질서에 대한 우리의 반발은, 평등한 주권국가로 구성된 국제질
서가 바람직하다는 근대적 신념은 물론 근대 서구문명의 부상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제국주의·식민주의(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를 포함한)
에 대한 강한 반감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적 질서라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중국 제국이 수
행한 역할과 스페인·포르투갈은 물론 영국·프랑스·미국 등 근대 서구 제국
이 수행한 역할을 차등적으로 인식하면서, 역사적으로 다양한 지역에서
제국들이 수행한 공과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근대
서구 제국의 약탈과 착취를 염두에 두고 형성된 반감이 전통적인 동아시
아에서 중국 제국이 수행한 역할에 대한 해석에 덧씌워져 동아시아의 전
통적인 국제질서에 대한 과도한 비판이 소급적으로 형성된 것은 아닌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독일의 정치학자인 헤어프리트 뮌클러(Herfried Münkler)의
제국(Imperien)은 우리의 논의에 시사하는 바 크다. 뮌클러는 제국이 역
사적으로 존재해 온 정치체의 다양한 존재방식의 하나로서 국제질서의
“창조자이자 보증인”이라고 지적하면서, 오늘날 동등한 국가들로 이루어
진 국제질서는 세계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으며, 제국
적 행위자에 의한 제국적 해결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58) 나아가 그는 21
세기 유럽연합이 미국과 대등하게 자기를 주장하면서 유럽의 이웃국가들
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제국적 능력을 발전시키고 제국적 역할을 수
행할 것을 주문한다.59)

58) 뮌클러, 제국: 평천하의 논리, 16-17쪽.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199

이러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뮌클러는 역사적으로 제국이
수행해 온 역할을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에서 균형 있게 파악하고 있
다. 이를 위해 먼저 그는 20세기 서구에서 등장한 제국주의 이론이 유럽
강대국의 제국주의를 염두에 두고 제국 건설을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것
으로 가정하지만 “제국 건설[이] 결코 억압이나 착취와 동일하지 않다”는
명제를 제시한다.60) 그는 제국을 두 가지로, 곧 “폭력과 폭압에 의존하는
제국 건설과 그보다는 경제적 침투의 형태로 또는 문명의 매력에 기초해
이루어지는 제국 건설”을 구분한다.61) 그리고 제국의 건설과정에서 물리
적 폭력에 의한 정복이 수반되었음을 부정하지 않지만, 이후 문명의 매력
에 기초해서 제국을 유지한 대표적인 사례로 로마 제국과

宋·明과 같은

중국 제국을 거론한다. 특히 그는 로마 제국을 염두에 두고서 “본질적으
로 안정된 평화 질서의 건설을 추구하고, 교역로, 통화, 통신의 안전과 같
은 집합적 재화의 확보를 통해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부흥의 시대를 여는
대제국 건설도 있다”고 주장한다.62) 이 점에서 그는 미국의 제국적 역할
과 관련해서 미국이 제국의 사명으로 내세운 “인권의 보호와 민주주의의
발전”의 타당성을 긍정한다.63)

59) 뮌클러, 제국: 평천하의 논리, 18쪽.
60) 뮌클러, 제국: 평천하의 논리, 10쪽.
61) 뮌클러, 제국: 평천하의 논리, 10쪽. 여기서 뮌클러는 폭력과 폭압에 의한
제국 건설의 대표적 사례로 몽골제국, 경제적 침투의 형태로 건설된 제국의
대표적 사례로 19세기 영국, 문명의 매력에 기초해 이루어진 제국의 사례로
로마 제국과 중국 제국을 든다. 물론 이러한 분류는 이념형적 분류로서 역사
적 실제와 일치하지 않고 역사적 제국은 여기서 제시된 다양한 전략을 사용
하면서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뮌클러가
제국 건설의 전략으로서 경제적 침투와 문명의 매력을 거의 동일시하고 제
국 건설을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여기서 뮌클러의
이러한 논변을 검토하고 반박할 지면상의 여유는 없지만, 경제적 침투에 의
한 제국 건설과 문명의 매력에 기초한 제국 건설을 구분하는 것이 합당하다
고 생각한다.
62) 뮌클러, 제국: 평천하의 논리, 10-11쪽.
63) 뮌클러, 제국: 평천하의 논리, 17쪽.

200 한국철학논집 제47집

뮌클러는 동아시아에서 한( ) 제국 이래 중국 제국이 수행한 평화 유
지와 문명화의 역할을 인정하면서 제국이 보유한 이데올로기적 힘으로서
특히 유교에 주목한다. 제국은 통치의 기반을 유교에 두고 있었고, 유교
윤리를 통해 관료집단의 충성심은 물론 제국 내 다양한 종족들의 통합성
을 확보했으며, 나아가 주변국가들과 제국의 평화를 공유하고 그 국가들
을 문명화했다는 것이다.64) 서구학자인 뮌클러의 이러한 설명은 거시적인
관점에서 대체로 설득력이 있지만, 본고에서 논한 전통시대 중국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주된 특징인 유가의 대일통사상과 문덕론에 기초한
사대자소 이념과 사대교린의 국제관계에 대한 정교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제질서관에 대한 본고의 논의는 제국
의 긍정적 역할에 대한 뮌클러의 논의를 보충하는 것은 물론 동아시아에
서 중국 제국의 이데올로기적 힘으로서 유교적 국제질서관의 구체적 내
용을 추가하는 의미를 갖는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처럼 동아시아의 책봉 – 조공 체제가 불평등한 위계
질서를 전제한 것이지만 그것이 흔히 생각하듯이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아니었다는 점은 다시 한 번 강조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국제정치학자
이삼성은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이러한 성격을 다음과 같이 적
절하게 짚어내고 있다.
조공과 책봉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제관계 양식은
강대한 세력과 약소사회들 사이의 전쟁과 평화를 규율하기 위해 전통시대 동아

시아가 창안해낸 국제적 규범과 제도였다. ( ) 근대 서양은 한편으로 세력이
비슷한 유럽 국가들끼리는 법적으로 평등한 주권국가 간 국제질서를 발전시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비서양 약소사회들에 대해 그들이 개발
한 것은 정치군사와 경제 모든 면에서 철저하게 착취적인 식민주의적 질서였
다.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관계의 전형은 주권적 평등을 기초로 한 질서가 아
닌 공식화된 위계질서를 나타냈지만, 강국과 약소국 사이에 착취적이고 침투적
인 식민지 질서도 아니었다. 공식적 위계를 전제하되 약소사회의 내적 자율성
64) 뮌클러, 제국: 평천하의 논리, 180-83쪽.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201
을 전제한 제3의 질서를 창안한 것이었다.65)

Ⅴ. 결 론
전통 유교의 사대자소론과 분봉 – 조공 체제는 근원적으로 대일통사상
에 기초한 것이다. 대일통사상은 대부분의 제자백가가 추구했던 것이라

儒家)의 대일통사상과 법가

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유가(

法家)의 대일통사상이다.

(

대일통사상을 둘러싼 유가와 법가의 대립에서 핵심적 쟁점은 둘로 요
약되는바, 첫째는 대일통 체제에서 ‘각국의 주권을 인정하느냐, 부정하느
냐’의 문제이고, 둘째는 대일통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문덕이냐, 무력이냐’

帝國)’을

의 문제이다. 법가는 각국의 주권을 부정하는 ‘중앙집권적 제국(

秦代의 郡縣制), 그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방법으로 ‘무력과

추구했고(

법치’66)를 내세웠다. 그러나 유가는 각국의 주권을 긍정하는 ‘지방분권적

王國)’을 옹호했고(周代의 封建制), 그 왕국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방

왕국(

법으로 ‘문덕과 예치’를 내세웠다.
유교의 사대자소론과 분봉 – 조공 체제는 바로 주대의 봉건제와 문덕

宗法的) 위

의 정치를 이상으로 삼는 것이었다. ‘주대의 봉건제’는 ‘종법적(

계질서’를 내포하는 것인바 이로부터 천자국과 제후국 사이의 위계관계
가 형성되는 것이요, ‘문덕의 정치’는 그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무력이 아닌 문덕을 내세운 것인바 이로부터 사대자소론이 성립하는 것
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성립한 주대의 ‘분봉 – 조공’ 체제는 본래 중국 내
부에서 ‘천자국과 제후국’ 사이의 국제질서를 규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중국 내부적으로는 봉건제가 붕괴하고, 외부적으로는
천하가 전통적인 중국의 영역 밖으로까지 확대됨에 따라, ‘분봉 – 조공’
65) 이삼성, 동아시아의 전쟁과 평화 1, 한길사, 2010, 11쪽.

法家 法治

66) 주지하듯이
의‘
’는 ‘체계화된 통치제도에 의한 통치’와 ‘무서운 형벌
에 의한 통치’라는 두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202 한국철학논집 제47집

체제는 ‘책봉 – 조공’ 체제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분봉은 천자가 천하(자신의 영토)의 일부를 떼어 제후를 세우고 그에게
세습적 통치권을 부여하는 것인데, 제후는 그 대가로 조공의 의무를 졌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책봉은 중국의 황제가 본래 존재하는 외국의 국왕에
대해 문서로 그 통치권을 인정해주는 것인바, 외국의 국왕은 그 대가로
중국의 황제에게 조공을 바쳤던 것이다. 여기서 외국의 국왕과의 관계에
서 수립된 ‘책봉 – 조공’ 체제가 본래 ‘주대의 봉건제’와 ‘종법적 위계질서’
에 기초한 ‘분봉 – 조공’ 체제를 토대로 확장됨에 따라 대일통사상과 사대
자소라는 유교적 이념을 자연스럽게 승계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이
로 인해 유교적 이념을 수용하는 외국에 대해 ‘무력에 의한 정복’ 대신 ‘불
평등하지만 호혜적인 국제관계’가 쉽게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분봉이나 책봉을 막론하고 각국은 기본적으로 주권 또는 정치적 자율성
을 지닌 것이었고, 조공은 다만 중앙의 천자 또는 중국의 황제와 군⋅신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기 위한 의례였던 것이었다. 다만 분봉의
경우, 천자는 제후국을 순수할 때 제후의 통치 성과를 살펴 상벌을 시행
하기도 했는데, 이는 제후국의 주권을 다소 침해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
겠다.67) 그러나 책봉의 경우에는 황제의 순수도 없었고, 따라서 각국에 대
한 주권 침해의 요소도 더욱 없었던 것이다.
사대자소론에서 ‘대국과 소국’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강대국과 약소
국’이다. 전통 유교에서는 강대국을 대일통적 질서의 중심으로 설정하여
그 지도력을 인정함으로써 대일통의 실현가능성을 강화하면서도, 강대국
에 문덕이라는 이념적 굴레를 가함으로써 강대국의 약소국에 대한 횡포
를 예방하고자 했던 것이다.

論者)들은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있어서 진정한 문제는

논자(

대일통사상이나 사대자소론 및 분봉(책봉) – 조공 체제가 유교의 본래 취
지대로 항상 ‘문덕’에 입각해 실현되지 못하고, 때때로 ‘무력’에 의해 왜곡

分封

67) ‘
’은 천자가 자신의 영토를 떼어 제후에게 통치를 위임한 것이므로, 천자
가 제후국에 대해 간섭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유교적 국제질서의 이념과 그 현대적 함의 203

되었다는 점에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통시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에 대해 그 ‘불평등성’을 문제 삼기보다 때때로 횡행했던 ‘폭력성’을
문제 삼는 것이 더 합당할 법하다. 그 간헐적인 폭력의 주체는 간혹 ‘한족

漢族)의 통치자’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거란⋅여진⋅몽골 등 북방 이민

(

족의 통치자였다. 요컨대 유교적 세련화를 거치지 못한 야만적 통치자들
이 폭력으로 평화로운 국제질서를 파괴했던 것이다.
어느 시대나 국제질서가 표방하는 이념과 그 실제 현실 사이에는 일정
한 괴리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전통시대 동아시아 국제질서 역시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제국중심의 국제질서에
비해 그 괴리가 과도하게 크지 않았다는 점 역시 인정되어야 한다.
문명사적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출현한 제국의 긍정적 역할에 주목하는
서구의 최근 이론에 비추어 유교적 국제질서를 로마제국, 대영제국, 현대
미국의 국제질서와 이념 및 현실의 차원에서 비교하여 볼 때, 우리는 유
교적 국제질서가 문물의 전파와 교류, 평화와 번영의 유지 등에 있어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전통시대 동아
시아 국제질서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한 유교의 공헌을 결코 무시
해서는 안 될 것이다.

※ 이 논문은 2015년 10월 22일에 투고되어, 2015년 11월 15일에 편집위원회에
서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2015년 11월 28일까지 심사위원이 심사하고, 2015
년 11월 29일에 편집위원회에서 게재가 결정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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