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탁. 2016. “근현대 일본에서의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아세아연
근현대일본에서의
서구문명수용의이중주와
그유산
고희탁(서강대학교 SSK탈서구중심주의연구단전임연구원)
이 글에서는 일본 근현대의 서구문명에 대한 순응적 동화와 그에 대한 저항이라는 구도에 주
목하여, 양 측면의 존재와 긴장관계를 내포한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라는 시각에서 일본의
근현대를 사상사적으로 조망한다. 메이지유신 이후의 ‘탈아입구’노선과 아시아주의, 제1차 세
계대전 이후 마르크스주의 확산과 ‘근대초극론’, 패전 이후의 ‘근대주의’와 ‘일본문화론’의 대두
등을 대표적 사례로 삼아, 그 구도 자체에 내포된 서구중심주의적 논리와 그에 대한 저항심리
가 맞물리거나 뒤엉키면서 결국 일본중심주의적 무드를 배양해왔다는 복합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를 통해 그 복합적 양상이 특히 냉전체제의 붕괴 이후 ‘포스트’ 언설들의 두드러진
유행과 그와 더불어 강력해진 이른바 ‘우경화’노선의 돌출현상의 대조적 구도에도 일정하게 그
림자를 드리우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
임.(NRF-2014S1A3A2043763)
Ⅰ. 머리말
주지하듯이 일본의 근대는 메이지유신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전면
적 서구화의 길로 나아간다. 잘 알려진 예로서 조선의 ‘신사유람단’과
대조되는 일본의 대규모 정부사절단인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의 경
우가 그 전형이다. 1871년 당시의 정국 및 재정 상황에 비춰볼 때 모
험적이라 할 만한, 정부의 핵심인사 다수가 포함된 대규모 사절단을
장기간에 걸쳐 막대한 경비를 마다하지 않고 파견했다는 그 자체만으
로도 전면적 서구화에 대한 그들의 열망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욱이 ‘탈아론’으로잘알려진후쿠자와유키치(2012)의문명론, 즉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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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와쿠라 사절단은 일본이 구미 각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선한다는 당면목표를
가지고 출발했지만 그 목표를 이룰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사절단 파견의 또 다른 측면의
효과가 엄청났음은 주지하는 바다. 모두 48 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에는 메이지유신의 핵심
이었던이와쿠라도모미(岩倉俱視)를필두로 ‘유신삼걸(維新三傑)’ 가운데두사람, 즉오쿠
보도시미치(大久保利通), 기도다카요시(木戶孝允)를비롯하여메이지정부에서핵심적역
할을맡고있는사람들이적지않았고그중에는후에초대내각총리대신이되는이토히로
부미(伊藤博文)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외에 60여 명의 유학생도 승선하고 있었다. 이 사
절단은 메이지유신 후 여전히 정국이 불안정한 상황이던 1871년 12월 23일 요코하마를 출
발하여약 1년 10개월에걸쳐미국, 영국, 프로이센,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12 개국을 방문했다. 이 사절단의 서기 역할을 맡은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가
미국과유럽 각국에서보고들은사실들과그것들의의미를보고서에상세하게남긴다. 그
가 기록한 2000여 쪽에 달하는 구미회람실기(米歐回覽實記)는 1875년에 처음 출간되었
고(다나카 2006), 근래한국에도번역되었다(구메 2011).
근현대 일본에서의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217
을 포함한 동아시아에 대해 서구적 의미의 ‘문명’과는 거리가 먼 ‘야만’
이나 ‘반개(半開)’ 상태로규정하고, ‘문명’을구가하는서구로부터제도
나 외형만이 아니라 ‘정신’까지 철저히 학습하고 모방해야 한다고 강
조한 그의 문명론은 그 전면적 서구화에 박차를 가한 상징적 언설이
었다. 그리고 1945년 패전 이후에도 그 국가적 노선은 크게 바뀌지 않
았다. 1970년대 마루야마 마사오(1995)가 군국주의 과거에 대한 절절
한반성의연장선상에서 ‘근대의옹호’를강조하고있던것처럼, 이 ‘탈
아입구’적 방향은 패전 후 줄곧 미국에 대해 추종적 태도를 취해온 세
력만이 아니라 일본 근대의 파행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진 이른바
진보파의다수에게도여전히공유되는불문율과같은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메이지정부 수립 직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탈아
입구’의 전면적 서구화노선이 당연한 수순과 같이 일반화되었던 것처
럼 받아들여지면 곤란하다. 메이지유신 자체가 이른바 ‘존황양이’파의
헤게모니 아래 진행되었다는 사실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메이지정
부 수립 후 약 사반세기에 이르기까지 미국을 포함한 서구에 대해 ‘오
랑캐’로 규정하던 이들은 조야를 막론하고 적지 않았다. 그런 만큼 메
이지정부에 의한 전면적 서구화로의 국가노선의 전환은 일대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그에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이 그 전환의 핵심적 기
획자였던 오쿠보 도시미치를 1878년에 참살한 일은 그런 국가노선 전
환의 충격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또한 1880년대 무렵 서구의 제국
주의적 지배와 억압에 대항하여 ‘동양’의 연대와 협력으로 문명적 정
체성을 지키고 제국주의에 대항하려는 ‘아시아주의’의 대두도 메이지
정부의 전면적 서구화와는 다른 흐름의 존재를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
다. 더욱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열강으로부터 세계 5대강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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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역사학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해온 진보적 연구자들조차 역사인식이라는 측면에서는
보수적 진영과 같이 ‘탈아입구’적 경향을 공유해왔다고 비판하는 미야지마 히로시의 지적
은참고할만하다(미야지마 2013a, 7-9).
218 아세아연구 제59권 1호 (2016년)
대우를 받게 된 국가적 자부심을 바탕으로 1940년대에 들어서 군국주
의 국가체제 아래, ‘서구적 근대’를 뛰어넘어 세계사의 새 지평에 대한
주도적 개척을 ‘세계사적 사명’으로 내건 ‘근대초극론’의 전개도 일본
의근현대를조망하는데에고려하지않으면안될측면이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탈아입구’의 전면적 서구화노선을 둘러싼
양 측면의 존재와 긴장관계를 내포한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라는 시
각에서 일본의 근현대를 사상사적으로 조망하고자 한다. 특히 메이지
유신 이후의 ‘탈아입구’에 대한 열망과 이에 저항하고자 한 아시아주
의 및그와유사한심리적 분위기, 제1차 세계대전이후의 마르크스주
의의 확산과 그 위기를 자양분으로 한 ‘근대초극론’의 대두, 그리고 패
전 이후의 ‘근대주의’노선과 그에 대한 심리적 저항을 기저에 둔 ‘일본
문화론’의 대두 등을 대표적사례로 삼아, 그구도자체에 내포된 서구
중심주의적 논리와 그에 대한 저항심리가 서로 맞물리거나 뒤엉키면
서 결국 일본중심주의적 무드를 배양해왔다는 복합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게될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에 따라서는 한국에서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강정인(2004, 429-430)이 제기한 서
구중심주의에 대응하는 몇 가지 담론 전략의 틀을 활용한 분석을 전
개할 것이다. 예를 들면, ‘주변’이 ‘중심’의 보편성과 우월성을 인정하
고 그 제도‧관행‧가치‧문화 등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중심에 동
화‧통합되고자하는 ‘동화적전략’, 또한이와달리중심과주변의제도‧
관행‧가치‧문화 등에서 존재하는 차이를 일치시키려 하지 않고 그 차
이를유지‧강조하면서오히려그차이에대한평가를역전시켜주변의
속성을 특수성이나 열등성에서 보편성과 우월성의 표상으로 뒤바꾸
는 ‘역전적 전략’, 그리고 중심과 주변의 구분 또는 이항대립적 차이들
그 자체를 해체시킴으로써 중심주의에 대한 도전과 극복을 시도하는
근현대 일본에서의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219
해체적전략’ 등이그것이다.
왜냐하면 서구문명에 대한 근현대 일본의 다양한 대응, 즉 서구문
명에 대한 열렬한 선망이나 선택적 수용, 전면적 저항, 부정이나 대안
적 극복을 의도한 버전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그 준거적 시선이 어디
까지나 서구문명에 치우쳐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양 측면의 변
증법적 전개와 유사한 양상으로 전개된 근현대 일본의 궤적을 서구중
심주의에 대한 대응양상으로 치환하여 이해가능한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근현대 일본의 행로를 최근에 ‘중국화’(요나하
2013, 7)로해석한다든지, 혹은 오늘날의중국의부상과일본의상대적
지위 하락을 ‘주변화’(미야지마 2013a, 206)라고 명명하면서 원래적 지
위로의 복귀로 설명하는 역사연구가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이런 현상 또한 이제까지 근현대 일본의 역사인식이 서구중심주의라
는 틀 안에서 좌우되어왔다는 의미에서 오히려 역사관의 편향이라는
현실을환기시켜주고 있을뿐아니라, 그현실자체가 ‘동화적’이든 ‘역
전적’이든 ‘해체적’이든 간에 근현대 일본에서 서구중심주의가 차지하
는절대적비중을시사하고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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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탈아입구’에 대한 선망과 그 딜레마
메이지유신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현대 일본에 이르기까지 ‘탈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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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인(2004, 392)에 의하면, 서구중심주의는 서구문명의 바탕을 이루는 세계관, 가치, 제
도, 관행등을보편적이고우월한것으로받아들이는의식이나태도를가리킨다. 이서구중
심주의는서구인들만이아니라비서구인들로하여금서구문명의우월성및보편성을받아
들이게함으로써서구의정치경제적지배만이아니라생활적지배에정당성을부여하도록
만든다. 따라서 서구는 보편적 문화, 보편적 가치, 중심의 지위를 차지하고, 비서구는 서구
의 세계관, 가치, 제도, 관행을 보편적으로 우월한 것으로 인식하는 반면, 비서구 스스로를
주변으로규정하여자기비하나자기부정의의식을갖게된다는것이다.
220 아세아연구 제59권 1호 (2016년)
구’의전면적서구화의길은일본의근현대행로의중심축이었다고할
만하다. 그런데 여기서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근대 일본에 이르러
‘탈아입구’의길로매진하게된배경을잘이해할필요가있다.
그 배경에 대한 이해로는 후쿠자와 유키치가 문명론 저술의 동기로
삼은 것과 동일한 일본의 ‘독립’과 발전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는 시각
이 통상적일 것이다. ‘탈아입구’로의 매진은 ‘부국강병’의 추진, 즉 제
국주의가 횡행하는 국제적 환경 속에서 아직 근대국가의 물적, 제도
적, 인적 인프라를 갖추지 못했던 당대 일본의 국가적 독립을 어떻게
온전히 지키면서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가장 유효
적절한 대답이었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은 근대의 서구와
일본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다고 하더라
도, 근대의 일본과 한국 및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와의 제국주의적
관계를 충분히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어느 면에서는
그런관계자체를은폐하거나당대서구의제국주의적논리인 ‘식민의
문명화작용’을흉내내어기만적으로정당화하기까지할수있는것이
다(강상중 1997, 97-98).
그런 측면까지 고려한다면, ‘탈아입구’에대한 열렬한 선망의배경에
는 단순히 국가적 독립 유지나 발전만이 아니라 서구의 제국주의적 팽
창과유사한기대가깊게똬리를틀고있었음을짐작하게한다. 그리고
역사인식에서의 ‘탈아입구’가 전후에도 이른바 보수파만이 아니라 진
보파의다수에게도여전히공유되는일반적시각이었다는점을생각해
볼 때, 그런 기대는 1945년 패전 이전까지의 시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
라현대일본에까지이어지고있다고생각하지않을수없는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야지마 히로시가 일본의 역사인식에서 보이는 편
향의 문제를 지적하는 저술에서 현대 일본의 ‘중심주의’ 패러다임의
문제를비판적으로지적하는다음과같은대목은의미심장하다.
근현대 일본에서의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221
현재일본이거대한역사적전환점에서있다는것은많은사람들의느끼는
바일 것이다. 내 생각으로 그 전환의 본질적인 내용은 일본이 다시 동아시
아의 주변적 지위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일병합’이 강행되던 100년
전은일본이동아시아의중심으로뛰어오르려고하던시기였다. 그후제2차
세계대전의패배에도불구하고동서냉전의국제관계속에서미국의종속적
동맹자로서 동아시아에서 중심적 지위를 계속 점하게 된 일본은, 이제 냉전
의 종결과 중국의 부상이라는 상황에서다시동아시아의 주변국이될 게확
실하다고생각된다. 여기에서 ‘다시’라고말하는것은 19세기중반까지동아
시아에서일본의지위가주변적이었기때문이다(미야지마 2013a, 206-207).
그는 이와 함께 “문제는 일본의 주변화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주변화라는
미래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종래대로 중심주의 패러다임에 안주
하고 있는 것”(미야지마 2013a, 236)이라고 일갈한다. 그런 만큼 “지금
까지 일본의 역사인식을 지배해온 패러다임인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서의 일본사’라는 인식”(미야지마 2013a, 207)의 틀을 뛰어넘어 ‘거대한
역사적전환’이라는구조변동을직시해야함에도불구하고, 여전히종
래의 패러다임에 안주하여 현실을 직시하려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미야지마가 지적하는 현대 일본의 ‘중
심주의’ 패러다임의 문제야말로 일본 근대의 ‘탈아입구’에 대한 열렬
한 선망의 배경에 놓인 ‘동아시아 중심’으로의 부상과 그 중심적 지위
의유지라는충동의그림자와같은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 이전 동아시아의 중화적 질서에서 주변국이었
던 일본에게 중화적 국제질서 해체와 그것을 대신한 서구중심주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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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급은일본어로발행된그의논문 「일본사인식의패러다임전환을위해(日本史認識の
パラダイム転換のために)」(思想 2010년 1월특집호)에서처음으로발표되었다.
222 아세아연구 제59권 1호 (2016년)
재편은 동아시아에서의 중심국으로의 부상이라는 충동을 채워줄 절
호의 기회였다. 그 충동은 중국에서의 명・청 교체, 나가사키를 통한
서양사정의 인지, 유학적 보편주의를 부정하고 자민족중심의 언설영
역을 개척한 국학(國學)의 발흥 등을 계기로 이미 18세기 후반부터 발
효・숙성 중이었다(고희탁 2012). 그런 만큼 메이지에 들어서 서구중심
주의에 대한 ‘순응적 동화’ 전략을 철저화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고 할 만하다. 물론 서구 각국과의 불평등조약을 둘러싸고 그 불평등
성에 대한 지속적 항의라는 ‘저항적’ 측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또한
‘순응적 동화’ 전략의 보조선이라는 의미가 큰 것이었다. 처음에는 식
민지화의 위협에서 벗어나는 것이 주목적이기는 했지만, 그 극복도
철저한 순응적 동화를 통해 가능한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
서 언급했듯이 그 전략에 대한 반대가 없지는 않았지만, 대세를 뒤바
꾸는 세력이 될 수가 없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파견 그 자체만으로
도그들의믿음과충동의속사정을짐작할수있는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의 근대는 19세기 초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회오리바람을 중심국으로 부상할 기회로서 발견하고 활
용하는 데에 그리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1894년 한반도에
서의 전쟁 승리를 통해 동아시아에서 중심국의 지위를 장악해갔다.
앞의 미야지마의 언급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 후 약 1세기에 걸쳐
그들의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순응적 동화 전략은, 독일적 방향인가
영미적 방향인가의 중심이동은 있었지만, 국가기본노선으로서의 위
치를현재까지유지해왔다고할수있는것이다.
왜냐하면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순응적 동화야말로 일본만이 동아
시아에서 예외적 존재라는 의미의 일본예외주의와 서구에 대한 열등
의식이 동전의 양면처럼 결합된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의 기본 동력이
었기 때문이다(강정인 2004). 이를 위해 일본 근대는 서구중심주의의
근현대 일본에서의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223
충실한 학생이자 전도사 역할을 수행하였다. ‘문명개화’의 슬로건 아
래 아시아에서의 예외적인 서구적 친화성이 일본사에서 발굴・선전되
는 한편, 동양적 전제주의와 정체사회론을 두 축으로 하는 중국 및 조
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구성・유포되었다. 특히 서구중심주의적
역사발전단계설에 입각한 ‘봉건제’ 경유 여부가 관건으로 부각되었으
며, 그 기준은 전후 현대일본의 국민의식이나 세계관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진보적 역사학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미야지마
2013a, 5-9). 후쿠자와 유키치(2012)의 경우는, 막부라는 정치적 권력과
천황・조정이라는 문화종교적 권위의 병존상황이 다른 아시아 국가에
비해 이미 도쿠가와시대부터 ‘권력의 편중’을 저지하고 ‘자유의 기풍’
이 생겨날 여지를 갖고 있었다고 하여 상대적인 서구적 친화성을 강
조하였고, ‘전후민주주의’의 리더적 존재였던 마루야마 마사오(2007)
는 그의 해석에 대해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일본정부
나 보수적 세력만이 아니라 마루야마를 비롯한 전후의 진보적 학자들
에게도 일본중심주의를 동반하는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순응적 동화
는일반적인현상이라할만한것이었다.
Ⅲ. 반제국주의 정서에 의한 아시아주의의 대두와 굴절
그러나 다른 한편, 앞서 짧게 언급했듯이 미국을 포함한 서구인들
을 ‘오랑캐’로 여기거나 그와 유사한 존재로 간주하는 사고방식이 현
상적으로는 복류(伏流)하든 표면에 드러나든 간에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존재해왔다는 점을 마냥 무시하기만은 어렵다. 왜냐하면 그 흐
름이 ‘동화적 전략’의 대명사인 ‘탈아입구’와는 정반대의 위치에서 ‘역
전적전략’으로기능한아시아주의로이어지는데, 이아시아주의가긍
224 아세아연구 제59권 1호 (2016년)
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결코 작지 않은 정치적 파문을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으켰을 뿐 아니라, 한쪽의 ‘탈아입구’론과 다른 한쪽의 아
시아주의라는 양 측면이 일종의 변증법적 전개를 통해 각각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각각의 보완적 버전의 산출을 촉진하는 측면을
나타내기때문이다.
일본에서 아시아주의는 1880년대 무렵부터 서구의 지배 및 억압에
대항하여 ‘빼앗긴’ 아시아에 대한 공감을 바탕으로아시아와의연대를
주창하는 흐름으로 나타난다. 그 내용은개국문명화, 협동, 합방, 신질
서구축 등 입장에 따라 다종다양하고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주장
내용이 다양하게 변화하기도 한다(井上 2006). 하지만 서구에서의 이
른바 ‘황화(黃禍)’론의 대두와 맞물려 1890년대에 오카쿠라 텐신(岡倉
天心)이집필한 「동양의각성(東洋の覚醒)」의다음구절은그공통정서
를잘보여준다.
유럽의영광은아시아의굴욕이다. 역사의과정은서양과우리들의피할수
없는 적대관계를 초래한 발걸음의 기록이다. … 우리들 부모 선조의 땅은
큰 고난에 처해 있다. 오늘날 이미 동양은 쇠퇴의 동의어가 되었고 그 백성
은 노예를 의미하게 되었다. 예찬되는 우리들의 온순함은 예의를 가장한 저
들의비겁한야유에다름아니다. 우리들은상업의이름아래호전적인무리
들을 환영했고 문명의 이름 아래 제국주의자를 포용했으며 기독교의 이름
아래잔혹함에엎드렸다. 국제법의빛은하얀양피지위에빛나고있지만, 완
전한부정(不正)은유색피부에검은그림자를드리우고있다(岡倉 1970).
오카쿠라는 국가적 처지가 제각각 다르더라도 서구의 식민지에 처
해졌거나 그 위기에 직면한 아시아 각국을 일본을 포함한 하나의 ‘아
시아’라는 큰 덩어리로 묶고 있다. 그리하여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쇠
근현대 일본에서의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225
퇴’를 선고받아 ‘노예’적 ‘굴욕’을 강요받던 아시아 상황에 대해 하나의
아시아의 ‘형제’라는 정체성을 구성하여 연민의 감정으로 지켜보면서,
다른 한편 ‘문명’과 ‘기독교’, ‘국제법’과 ‘상업’의 미명 아래 행해진 서구
의 ‘호전적’이며 ‘잔혹’한 ‘제국주의’의폭력과기만이라는 ‘그릇됨’을시
적 표현으로 폭로・고발하고 있다. 청일전쟁 승리의 달콤한 맛에 취해
있던 메이지정부와일본 근대사회의 확신적 ‘탈아입구’의노선과는 달
리, 그의 논리는 서구와 아시아의 차이에 대한 평가를 역전시켜 오히
려 아시아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내세우고 그 반대로서 문명과
종교의 미명 아래 행해진 서구 제국주의의 폭력과 위선을 폭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시아’를 기반으로한 ‘역전적 전략’의 전형이라 할 만
한것이었다.
원래 아시아연대론은 위와 같은 아시아 차원의 연대적 저항의 기치
를 내걸고 일본 근대의 민권파로부터 제기된 것이었다. 아시아 각 민
족과의대등한제휴 지향을 이념으로내건 것도어쩌면당연한것이었
다. 그런 의미에서 오카쿠라의 역전적 발상과 같은 ‘아시아’에 대한 공
감과 연대적 저항의지의 표명이 곤경에 처한 아시아인들에게 호소력
을 가졌을 것이라는 점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서양 열강에 대한 공
동방위를위해조선과일본 양국의 대등한 합방을 주장한 다루이 토키
치(樽井藤吉)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이 집필된 것은 ‘탈아입구’의
본격화를선언한후쿠자와의 ‘탈아론’이발표된 1885년이었다. 이런대
동합방론적 발상은 예를 들면 갑오농민전쟁 이후 동학교단의 행로에
도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또한 오이 겐타로(大井憲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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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한 3대 교주 손병희는 1900년대 초반 ‘문명개화’를 위한 아시아의 창
구로서 일본으로부터의 학습을 강조하여, 4년여 간 일본에 체류할 뿐만 아니라 이광수를
포함한 60여 명에 이르는 재일유학생을 선발・유학시키기도 한다(임형진 2008). 러일전쟁
기에는 경부선・경의선 철도부설에 협력하게 한다든지 성금 기탁의 형식으로 일본군 지원
에 동학교도들이 동원되었다(市川 1983). 다른 한편, 동학교단에서 손병희 다음 가는 위상
을가졌던핵심간부이용구는거기서더나아가동학조직의일부를끌고 ‘일진회’에합류하
226 아세아연구 제59권 1호 (2016년)
郎) 등이일본의국내적입헌정체수립과조선개혁을결합시켜정변을
기도한오사카사건이수면에떠올라사건화된시기도이즈음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아시아의 수평적 연대를 호소하던 아시아주의는
국내적으로 그 중심세력의 교체와 국제적으로 청일전쟁 승리 이후 일
본의 국제적 위상 변동과 맞물리면서 크게 굴절해간다. 특히 1880년
대 후반 자유민권운동의 쇠퇴와 더불어 아시아주의자들의 정서가 민
권론에서 국권팽창론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지점이 눈에 두드러진
다. 그 굴절과 경사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단체가 후에 이른바 대륙
낭인의 산파적 역할을 한 현양사(玄洋社)다(김채수 2007). 그들은 청일
전쟁을 전후로 한 시기 이후에는 초기의 아시아와의 평화협조노선과
는 정반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빼앗긴’ 아시아에 대한 공감을 바탕
으로 수평적 연대를 강조하던 ‘아시아주의’에서 ‘빼앗음’도 마다 않는
‘대아시아주의’로의 이행은 그 굴절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다.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우위를 전제로 아시아 혁명세력의 지원을 명목으로
내걸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그 명목조차 탈색되어간다. 그 전형이 일
본을 맹주로 한 ‘아시아 먼로주의’라고도 칭했던 ‘아시아 신질서’ 구축
의 논리다. 그리고 이 논리는 이후 1937년 중일전쟁의 서막을 연 고노
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총리의 참모조직 역할을 하던 쇼와(昭和)연구
회의 ‘동아협동체론’과태평양전쟁기의 ‘대동아공영권’ 구상등으로이
어져갔다(古屋 1996).
이와 같이 주변국은 물론 세계를 상대로 침략과 전쟁도 주저 않는
6
여한일보호조약의청원및한일합병의적극적추진등의치명적오점을남기기도한다(최
기영 1994; 성주현 2004). 이를 보더라도 아시아주의가 가진 호소력과 치명적 독성을 갖는
양측면을짐작하게한다.
6 이처럼 당시의 대륙침략정책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대아시아주의에 대해,
쑨원(孫文)은1924년 11월 고베(神戶) 연설에서 서양의 패도주의에 대한 동양의 인의(仁義)
도덕에 의한 왕도주의라는 구도 아래, ‘서양패도의 사냥개’가 아니라 ‘동양 왕도의 간성(干
城)’의자리로되돌아올것을강력히주문하고있었다(松本 2000, 108-128).
근현대 일본에서의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227
대아시아주의’로의 굴절과정은 이미 초기 아시아주의가 가졌던 ‘하나
의 아시아’에 의거한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형제’적 연대와 저항의 정
신을 내동댕이친 이데올로기적 퇴폐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역전적 전략’의 발상이 역설적으로 또 다른 ‘중
심주의’로서의 일본중심주의를 낳는 데 적지 않은 이데올로기적 기여
를했다는아이러니를낳고있었던것이다.
‘
Ⅳ. 마르크스주의의 확산과 그 역설
그런데 이 같은 아이러니의 발생에는 단순히 근대 일본 제국주의자
들의 침략적 의도의 관철이라는 측면만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이
후 일본에서 “노동운동‧사회운동의 발흥과 뒤이어 숨 쉴 틈도 없이 밀
어닥친 마르크스주의와 코뮤니즘의 태풍”(마루야마 1998, 141)이라는
큰 변수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뒤에서 서술할 이른바 ‘근대초극론’이
야말로위에서언급한동아협동체론이나대동아공영권구상의철학적
바탕과 같은 역할을 하는 발상이었는데, 이 발상을 매개로 한편으로
는 아시아주의가 성장할 수 있었던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의 정
서를 흡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때 일본 근대의 지식인사회를 주
름잡았던마르크스주의의좌초를계기로고뇌하던마르크스주의자들
까지도 새로운 세계사적 지향의 탐색이라는 의도를 내걸고 끌어들이
고있었기때문이다.
마루야마(1998, 115-118)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는 근대 이후의 일
본 지식인들의 내면에 ‘태풍’과도 같이 불어 닥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깊은 각인을 남겼다. 첫째, 역사와 현실의 바탕을 이루는 구
조 및 동력에 대한 중요성을 각성시키고 개별적 사회과학을 종합하여
228 아세아연구 제59권 1호 (2016년)
그것에 접근하는 방식을 가르친 것. 둘째, 사상이라는 것이 단순히 서
재의 정신적 향수의 대상이 아니라 세계변혁의도구라는 점을일깨운
것. 셋째, 사상에 본래적으로 내포된 실천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사
상에 각인된 존재구속성에 대한각성과함께사상적탐구 그자체에도
인격적책임이걸려있다는점을사회적규모에서가르친것등이다.
여기서 특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1930년대에 두드러진 ‘마르크스
주의‑중심주의의 역설현상’(강정인 2004, 476)에 대해서다. 마루야마
(1998, 116-117)가 지적하는 것처럼 1945년 이전의 일본사회에서 마르
크스주의야말로 근대일본의 정신사 일반에서 이른바 ‘사회과학’을 거
의 홀로 대표하다시피 했을 정도로 획기적인 의미를 가졌었는데, 오
히려 그 ‘중심성’이 그 후의 ‘비극’과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했기 때문
이다. 그의 논의에 따르면, 이른바 ‘전향의 시대’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중심성’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사회과학 일반’이나 ‘서양적인 것 그 자
체’에대한반발및 거부를유발했고, 그런 만큼 많은 일본인들로 하여
금 ‘사회과학 일반’으로부터의 탈출과 체험적 ‘실감’만으로의 도피를
초래하여 결과적으로는 ‘일본 회귀’를촉진하는 역할을수행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낳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1930년대 중반부터
거세어진 ‘초국가주의로의 폭주’는 일본사회에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
수가 절대적으로 소수였기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 아니었다. 오히려
마르크스주의가 일본 근대의 지식인사회에 ‘태풍’과도 같이 불어 닥쳐
많은지식인들을사로잡았던만큼지식인사회에서진보적지식인들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 대규모 전향과 ‘초국가
주의적 폭주’에 대한 방관이나 가담이라는 치명적 문제를 허용하게 된
것은 ‘마르크스주의‑중심주의’의역설적결과때문이었다는것이다.
이와함께이글의주제와관련하여좀더살펴봐야할것은, 한편으
로는 마르크스주의의 확산이 앞서 언급한 미야지마의 지적처럼 서구
근현대 일본에서의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229
중심주의를 오히려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한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위에서 마루야마가 지적한 것처럼 ‘서양적인 것 그 자체’에 대한 반발
및거부를유발하여 ‘일본회귀’를촉진했다는점에대해서다.
우선마르크스주의의확산과서구중심주의의강화와의상관성이라
는 측면에 대해 살펴보면, 강정인(2004, 475-476)이 지적하는 것처럼 마
르크스주의가 “노동해방운동에서만 그 위력과 진가를 발휘하는 데 그
치지 않고, 서구중심주의・인종주의・가부장제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서도 유연하게 활용되어 탈서구중심주의, 흑인해방운동, 여성해방운
동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 서구 제국주의—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저항과정에서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에 경도되거나 아
니면 사회주의자로 개종한 사실 … 계급해방을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의 모든 형태를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하고 총체적인 대안으로
제시하고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몰두해 왔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
정하지않을수없다. 그러나미야지마(2013a, 6)가비판하는것처럼마
르크스주의가 의거하는 역사발전단계설의 구도가 ‘봉건제’의 존재 유
무에 의한 일본의 서구적 친화성과 함께 동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일
본판 오리엔탈리즘을 구성하는 등의 서구중심주의적 역사 인식을 정
당화하는 역할을 하였음도 아울러 시야에 넣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때
문에 일본의 근현대 마르크스주의자들만이 아니라 한국의 1980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는 마르크
스의 독특한 단계구분에 이끌려 역사 인식과 실천의 측면에서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의미 있는 결과를 얻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고
말았던사정은기억에도새롭다.
다른 한편, ‘마르크스주의‑중심주의’의 역설이 초래한 ‘서양적인 것
그 자체’에 대한 거부와 ‘일본 회귀’라는 문제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
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바로 뒤에서 다룰 ‘근대초극론’이 지식인사회
230 아세아연구 제59권 1호 (2016년)
에서 지반을 넓힐 수 있었던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중심주의’의 역설
이 초래한 ‘서양적인 것 그 자체’에 대한 거부와 ‘일본 회귀’라는 사회
적 분위기 속에서 ‘전향’ 마르크스주의자들까지도 신념을 갖게 할 새
로운 세계사적 지향의 탐색이라는 슬로건이 고뇌와 좌절에 빠져 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을흡인했던측면을갖는것이었기때문이다.
Ⅴ. ‘근대의 초극’과 ‘세계사적 사명’의 기만
년 만주사변을 기점으로 일본의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는 가운
데,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 한편으로는 그 고립을 주도하는 영미
와의 대결에서 이데올로기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전장의 중국인들이나 식민지민을 중립화시키거나 같은 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서구적 ‘근대’의 중심적 가치, 즉 민족주의, 자유주의, 민
주주의, 자본주의 등을 초극(超克)할 필요성이 역설되기 시작한다. 바
로 ‘세계사적사명’을강조하는근대초극론이그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근대의 초극을 지향한 언설 모두가 애초부터
전쟁 승리라는 목적을 위한 적나라한 이데올로기 선전도구로 급조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배경에 서구문명의 위기라
는 세계사적 여건 변화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대륙의 중
심부에서 치러진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문명의 정점으로서의 자부심
을 근간으로 하던 서구문명의 위상에 커다란 동요를 초래한 문명사적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바로 그런 동요의 빈틈을 뚫고 근대초극론은
싹을 틔웠다. 히로마쓰 와타루(2003)의 정리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서
근대초극론이 당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것은 서구문명의
위기를 외치는 목소리가 전 세계적으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 금융자
1931
근현대 일본에서의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231
본주의가 봉착한 모순 및 국가사회주의와 유사한 국가독점자본주의
로 이행하는 국면,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로부터 교토학파로 이어
지는 이른바 ‘세계사의 철학’의 대두, 미키 기요시(三木清)로 대표되는
전향 좌파의 근대초극의 논리로서의 협동주의 철학의 구상, 마르크스
주의의 좌절이란 분위기 속에서 태동한 일본낭만파의 논리 등이 어우
러질수있었기때문이다.
이런 세계사적 배경 아래 근대초극론은 “일본이 세계적 강국이 된
정황을 기반으로 한 민족적 자각을 투영하면서, 메이지유신 이래의
서구화와 그 귀결에 대한 자기비판적인 심정을 계기로 존립”(히로마쓰
2003)하였다. 다시 말하면, ‘문명’의 서구만을 추종하여 서구 따라잡기
에 매진해온 ‘탈아입구’의 전면적 서구화노선이 파탄에가까운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리고 서구 따라잡기에 대한 외형적 성공이라는 확신
을 갖기 시작했을 때, 마침내 목표로서의 의미를 상실한 서구화노선
을 중지하고 재차 국가적 목표와 방향을 재정립하기 위한 국가적 모
색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에 이르렀다는 판단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 더욱이 그 모색이 단지 일본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미래와도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일본의 국가적 사명만이
아니라 ‘세계사적사명’도 일본에 부여되었다고 당시 자기규정하고 있
었던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930년대 후반 20대의 젊은 연구자로서 당시 상황을
목도하면서 근대초극론에 대항하기 위해 ‘근대의 옹호’를 그 자신의
가장 중요한 학문적 과제로 삼기 시작한 마루야마의 다음과 같은 회
상은흥미롭다.
현대의 세계사는 영국・미국・프랑스 등 ‘선진국’이 담당해온 ‘근대’와 그 세
계적 규모의 우월성이 와르르 무너지고 완전히 새로운 문화에 의해서 대체
232 아세아연구 제59권 1호 (2016년)
되는전환점에서있다는것이그런초극론자들의공통된시각이었다. 그런
주장을편지식인들이반드시파시스트들이나군국주의자들은아니었으며,
또그런견해속에는당시나의눈에도타당하다고여겨지는점도포함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1940년대 초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는 그런 외침은 영
국・미국・프랑스 등에 의해 대표되는 ‘시대에 뒤떨어진 자유주의적 이데올
로기들을 타도하고, 일본・독일・이탈리아 등 추축국들이 선두에 서서 밀고
나가는 <세계 신질서>의 건설에협력하는 것이야말로지식인들의사명’이
라는 제창(군부・‘혁신관료’・반의회주의 정치가들만이 아니라 좌익에서 전
향한 지식인들에 의해서 리드되었다)에 휩쓸려 합류하는 경향을 강하게 띠
고있었다(마루야마 1995, 67).
마루야마의 이 회상에 따르면, 적어도 초극론자들은 그때까지의 서
구 ‘근대’를 우월한 것으로 여기고 서구의 ‘선진국’을 따라잡기위해 서
구화노선을 달려온 것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는 사고방식
의 소유자들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단지 ‘지금’은 파탄 난 서구문명의
현재를 답습하지 않고 새로이 국가노선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명사적 ‘전환점’이기 때문에, 학습할 수 있는 어떤 모델도 존재하지
않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 속에
있다. 또한 그 개척의 결과로서 도래할 새로운 중심으로서의 일본의
미래에대한희망이복잡하게얽혀있던사람들이기도했었던듯하다.
근대초극론은 아시아주의자들과 같은 역전적 전략의 수준을 넘어 종
래의 가치 및 기준 그 자체를 해체하고 새로운 가치와 기준을 마련하
려 했다는 점에서 20세기 후반에 맹위를 떨친 ‘포스트’가 앞에 붙는 여
러 언설들과 문제의식에서 상통하는 바가 없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해체적전략의범주에드는사고였다고할수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시기 언설들이 일견 파시즘을 부정하거나 일부는
근현대 일본에서의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233
정부의 탄압을 받아가면서도 결과적으로 파시즘의 성립 혹은 강화에
기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해체적 방향의 의도가 일본중심주
의의 선양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기만을 은폐하려는 데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가 없다. 근대초극론은 목표달성을 위해 일종의 아마추어리
즘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해결을 꾀하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히로마
쓰에 따르면, “논리적으로는 장대한 과제의식을 추상태로 표명하였
고, 정서적으로는 일종의 낭만주의적 국수주의에 의해 겨우 생기를
띠고 있었다는 사실이 ‘근대의 초극’을 주술과 같은 통일적 슬로건으
로 만들어준 요인”(히로마쓰 2003)이었던 것이다. 또한 서구의 ‘근대’라
는 질병에 대한 전면적 부정은 결과적으로 비서구적이고 동양적인 원
리에 대한 주목으로 현상하여 역전적 전략의 양상을 띠기도 한다. 그
러나 그런 근대초극론은 정작 해결해야 할 현실의 ‘아포리아’ 자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미 해결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오류를 낳았
다. 예를들면, 전향좌파들에게는 “국가총동원, 통제경제의형태로자
유주의와 공산주의를 넘어섰다는 망상이, 그리고 나치즘 같은 전체주
의가아니라천황을정점으로하는협동체국가라는망상이 ‘근대의초
극’ 논의를존립”(히로마쓰 2003)시킬수있었던것이다.
이와 같이 ‘황군의 위기’, ‘황국의 위기’를 통감하고 ‘천황 측근의 가
신’과 ‘정치기구와 결탁한 경제권력’을 제거하여 천황친정을 복구하자
는 우익과 군부의 주장이 전향 좌파에게는 일종의 자본주의 극복이란
표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것이 ‘근대의 초극’이라는 환상으로 봉합되
었다. 결국 근대초극론은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과 초극을 동반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체론의 문제나 침략의 현실을 직시하지 않
고 외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문제적 현실을 추인하는 기능을 담당했
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체적 전략의 범주에 가까운 의도를 가졌
던 근대초극론이었지만, 오히려 역전적 성격의 담론이 갖는 한계와
234 아세아연구 제59권 1호 (2016년)
직결되는결과를낳은것이었다.
Ⅵ. 전후를 달군 ‘회한공동체’와 ‘근대주의’의 그림자
년패전은 ‘탈아입구’에서시작하여 ‘근대초극론’으로끝난일본
근대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와 동시에 일본인들에게는 비서
구세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라는 자부심과 세계 5대
강국으로서의 한때의 영광까지 함께 물속에 가라앉게 된 허탈한 사태
였을 법하다. 더욱이 1945년 이전까지 요란스럽게 강조되던 ‘황국사
관’의시각에서 보면, 유사 이래 단 한번도외국군대의점령을 허용하
지 않았던 ‘신화’의 소멸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패전은 보수와 진보를
떠나전일본인에게지울수없는커다란충격을남겼음에틀림없다.
이런 맥락에서 ‘전후민주주의’의 리더적 존재였던 마루야마의 문제
의식은 시사적이다. 그는 전후 일본의 진로를 둘러싸고 현행 ‘일본국
헌법’(평화헌법)의 제정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정치적 의식과
책임성을 갖춘 주체로서의 시민 및 시민사회의 형성이 국가의 정상화
에결정적이라는점을다양한논저를통해 일본사회에호소하여 큰반
향을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다양한 직접적실천에도 노고를 아끼
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의 문제의식을 내면에서 떠받치고
있던것은 1945년패전이전의일본사회가 ‘국가주의로의폭주’를막지
못했다는 ‘자기비판’과 그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에 대한 근
본적인반성’(丸山 1982, 114)이었다. 그런자기비판과근본적반성의바
탕위에패전의충격을새로운국가의건설이라는 과제에 대한결의로
바꿔나가자는 의미를 담아 ‘회한(悔恨)공동체’라는개념을 제기한것이
었다. ‘마루야마 정치학’과 함께 전후 ‘계몽’에 영향력을 가졌던 ‘오쓰카
1945
근현대 일본에서의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235
사학’의 창시자 오쓰카 히사오(大塚久雄)의 문제의식도 마루야마의 그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의 ‘과거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
의 기준과 함께 새로운 국가 건설의 비전으로 삼은 것이 이른바 ‘근대
주의’였다(日高 1964). 이처럼 근대주의는 ‘1945년 패전 이전의 상황에
대한극복’이라는과제와표리일체였다고할수있는것이다.
그런데 근대주의라는 명칭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들의 문제의
식은 어디까지나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순응적 동화’의 불철저성에서
문제의 연원을 찾는 것이었다. 마루야마가 천황제적 신성국가, 즉 무
한적 간섭과 무책임의 체계라는 문제를 분석한 일련의 정치학연구에
서 그 문제의 연원을 ‘불완전한’ 근대화의 문제, 즉 제도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유양식 차원에서의 ‘봉건’ 잔재의 온존 및 미청산의 문제로
진단하고 있었던 것은 그 전형적 사례다. 그리고 그 문제의식은 다음
인용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태평양전쟁기에 몸소 체험했던 군국주의
에대항하여내걸었던 ‘근대옹호’의연장선상에있는것이었다.
근대의초극’론과그것을배후에서지탱해주고있는전체주의적사조에대
해서강한저항감을품게된지식인들과연구자들은각각의분야에서, 그야
말로 속죄양이 되어 있던 ‘근대’를 옹호하는 것이야말로 자신들의 의무로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군국주의: 인용자)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자유주
의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그런 지적인 전선에서 ‘근대’를 옹호하는 측
에서게되었다(마루야마 1995, 68).
‘
마루야마가말하는 ‘근대의옹호’는 전체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는 측
면에서 강조된 것이었지만, 그런 만큼 서구를 예외적으로 특권화하는
서구중심주의, 그리고 일본 및 동아시아 더 나아가 비서구의 가치 및
기준, 관행 등을 정체나 저발전의 원인으로 간주하는 오리엔탈리즘을
236 아세아연구 제59권 1호 (2016년)
내면화하지 않을수 없게만들었다는측면을간과할수가 없다(야스마
루 2006). 그런만큼청일전쟁이후조선및중국등에서본격화한일본
의 제국주의 행태에 대한 문제의식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것이었음을
짐작하기는어렵지않다(강상중 1997).
이러한 서구중심주의 및 오리엔탈리즘의 내면화를 잘 보여주는 사
례로서, 뒤에서 서구의 전형적 근대와는 다른 중국의 근대를 ‘복수(複
數)의 근대’ 중의 하나로서 제시하는 사례로서 거론하게 될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의다음과같은회고는시사적이다.
우리 세대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초등학교 시절에 천황제 전체주의의 교
육을 받은 것에 대한 반동적 작용에 따라 반(反)전체, 반국가적 경향과 자
립・개별적자아(個我) 신앙이라는것을가슴속에 품고살았다. 전근대적인
공동체의 규제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자립적 개인의 자유의지에 의거한 계
약적인 사회관계야말로 자립・개별적 자아 신앙의 내용이다. … 실은 유럽
에의탁한꿈이었다(미조구치 2013).
미조구치의 회고는 전후의 일본사회가 얼마나 철저한 전면적 서구
화의 달성에 부심했을까를 잘 드러내고 있다. 더욱이 일본 근대의 여
명기에 ‘문명’을 구가하는 서구로부터 제도나 외형만이 아니라 ‘정신’
까지 철저히 학습하고 모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후쿠자와의 문명론
의 요체가 전후에 이르러 비로소 전 사회적으로 교육되기 시작했었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하게 한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도 마루야마
(2007)가 후쿠자와의 문명론에 대한 심혈을 기울인 재해석을 통해 당
대 일본사회에 여전히 중요한 고전으로서의 위치를 부여하려 한 것은
그상징적인사례다.
이와 같이 전후에 미국화의 양상이 두드러지기는 하지만 큰 틀에서
근현대 일본에서의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237
의 서구중심주의로의 경사는 메이지정부 수립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
지 줄곧 미국에 대해 추종적 태도를 취해온 세력만이 아니라, 일본 근
대의 파행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가진 다수의 전후 진보적 지식인들
에게도여전히공유되는불문율과같은것이라고해도과언이아니다.
Ⅶ. 특수와 보편을 오고간 ‘일본문화론’의 운명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근대주의’가 패전 이후의지식세계를휩쓸고
있었음에도불구하고, 경이적인경제회복에힘입어 1955년 ‘전후의종
언’ 선언을 한 즈음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무려 2000건 이상의
논저가 쏟아진 ‘일본문화론’류(類)의 언설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문화론 자체가 그 상대로서의 타문화, 특히 서구
문화를 의식한 작업이기 때문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서구문
화에 대해일본의 ‘독자성의신화’(靑木 1999, 13)를창출한것이었을뿐
아니라, 그 독자성에 대한 일본인들의 의식 변천을 잘 보여주는 것이
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 변천을 추적함으로써 서구에 대한 현대 일
본사회의시선과그변화를가늠할수있는것이다.
여기서 ‘문화와아이덴티티’라는주제에맞춰 ‘일본문화론’의변용을
추적해온아오키다모쓰(靑木 1999, 29)에의거하여일본문화의독자성
에 대한 시각의 변천과정을 살펴보면, 전후는 다음과 같이 네 가지 시
기로 구분 가능하다. 제1기는 패전 직후부터 1955년 ‘전후의 종언’ 선
언 이전까지의 ‘부정적 특수성의 인식’, 제2기는 ‘전후의 종언’ 선언부
터 1964년 도쿄올림픽 이전까지의 ‘역사적 상대성 인식’, 제3기는 1964
년 도쿄올림픽부터 1983년 무렵까지 경제대국화한 일본으로부터의
학습이서구에서역설되던시기의 ‘긍정적특수성의인식’, 제4기는경
238 아세아연구 제59권 1호 (2016년)
제대국 일본에 대한 서구의 경계와 이에 따른 무역마찰의 본격화한
1984년부터 냉전체제가 해체에 직면한 1990년 무렵까지의 ‘특수에서
보편으로라는인식상의중심이동’이특징적이다.
위의 구분에서 볼 때, 제1기는 앞 장에서 다룬 ‘근대주의’에 의한 일
본문화의 ‘부정적 특수성’에 대한 인식과 그 극복을 강조하던 패전 직
후의 사회적 분위기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거기서 일본문화는 아직
서구적 근대화의 세례를 받지 못한 채 온존해 있는 ‘봉건 잔재’로 표상
되었던 만큼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동화적 전략의 걸림돌로 간주되었
음은말할것도없다.
그러나 제2기 이후부터는 제1기와는 완전히 대조적 양상이 전개된
다. 전후 일본의 고도경제성장과 경제대국화라는 배경 위에 일본문화
를 점차 긍정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방향이 고정되었으며 그 긍정성에
대한 확신도 뒤로 가면 갈수록 점점 강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일본문
화에 대한 상대주의적 소극 긍정에서 특수성의 적극 긍정으로, 그리
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 긍정성을 일본에만 한정된 특수한 것으로 간
주하다가 점차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보편성을 갖는 긍정성
으로전환시키는질적도약을보이고있다는점이특징적이다.
예를 들면, 제3기에 모습을 드러낸 나카네 치에(中根千枝)의 ‘종적
(縱的) 사회’론은 제1기에는 일본 근대의 파행을 조장한 ‘봉건 잔재’로
취급되었을 가부장적 온정주의에 대해, 오히려 일본사회에 대한 긍정
적 활력의 계기로 평가한다(나카네, 2002). 또한 도이 다케오(土居健郎)
의 ‘응석(dependency)문화론’은 제1기에는 주체적 자아의 확립과는 완
전히 반대된다는 의미에서부정적뉘앙스가 강했을 ‘응석’이라는 유아
적인 관계의존적 성향에 대해, 오히려 일체감을 배양하여 사회관계를
안정화시키는긍정적문화로평가를역전시킨다(도이, 2001).
이처럼 제3기에는 제1기에서 부정적으로 취급되었을 일본문화의
근현대 일본에서의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239
특징적 요소들에 대한 평가를 역전시키고, 비록 서구중심주의적 시각
에서 여전히 ‘특수’한 것으로 위치지우고 있지만 그 ‘특수’의 존재의의
를 전면적으로 긍정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패전과 점령의 상처에서 벗
어나 현대 일본의 완전한 자신감 회복을 상징하는 것이라 할 만한 것
이다. 더욱이 서구중심주의적 준거에서 볼 때 여전히 ‘특수’한 것이라
는 자기규정을 갖고는 있지만, 그것을 ‘일탈’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능성만으로볼때는앞서다룬아시아주의와같은역전적전략에도,
근대초극론과 같은 일종의 해체적 전략에도 이어질 수 있는 여지를
중층적으로내포한것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 중반 서구 경제의 거듭된 침체와 일본의 경제대국
화와 더불어 서구 각국과의 무역마찰이 본격화하면서, 제3기에서 주
로 ‘일본적 경영’이라는 제한을 두고 긍정하던 ‘소극적 특수성’ 규정에
서 더 나아가 제4기에는 적극적으로 ‘보편성’을 강조하는 역전적 전략
으로서의 양상이 두드러진다. 이는 제3기 막바지에 미국을 중심으로
서구에서도 일본적 경영에 대한 찬탄과 함께 ‘일본 배우기’가 역설되
면서 1979년 에즈라 보겔의 Japan as Number One: Lessons for
America의 출간이 상징하던 것처럼 서구 원산이라 자부해온 서구형
자본주의와는다른 ‘일본형 자본주의’에 대한 서구에서의적극적 인정
에기인하는바도작지않았다(靑木 1999, 129).
그러나 이러한 사정은 앞에서 다룬 아시아주의와 같은 역전적 전략
이 걸어간 궤적과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 아시아주의가 결국 ‘대동아
공영권’ 같은 기만적인 대아시아주의를 낳았던 것처럼 1970년대 중반
이후의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역전적 전략의 발상이 역설적으로 또 다
른 ‘중심주의’로서의 일본중심주의를낳는데 적지않은이데올로기적
기여를했다는아이러니를낳고있었기때문이다.
그 측면을 비판적으로 지적하는 강정인의 다음과 같은 분석은 이러
240 아세아연구 제59권 1호 (2016년)
한 일본문화론의 이데올로기적 성격과 그 운명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
이된다.
초기 ‘일본인론’은 일본의 정체성을 서구중심주의가 제공하는 준거로부터
의 일탈이라는 관점에서 규정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동화적 담론으로 출발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들어서서구경제가침체를거듭한반면, 일본경제
는지속적인번영을구가하자, 이로인해일본이중심과주체로서의지위를
차지하고 자신들의 보편적인 관점에서 서구 국가들의 특수성(주변성)을 규
정하는 역전적 담론이 출현했다. … 일종의 역전적 오리엔탈리즘, 이른바
옥시덴탈리즘을전개하기시작했다. … 이와더불어미국의일부학자들역
시 ‘미국이일본으로부터무엇을배워야하는가’라는문제의식에따라미국
과일본을비교하되, 이번에는일본을중심에놓고미국을비교하는태도를
취했다. …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일본경제의 침체 및 미국경제의 회
복과 더불어 미국우월주의 담론이 재부상하고 일본우위론은 자취를 감추
고말았다(강정인 2004, 445-446).
이와 같이 일본문화론은 일본의 경제의 부침과 더불어 연동하는 이
데올로기적 성격을 강하게 띤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때는 서구중심주
의에대한강력한역전적담론으로서의기능만이아니라 ‘역전적오리
엔탈리즘’을전개하는양상을나타내기도했다. 그러나일본의세계적
위상이올라갈때일수록오히려 “‘일본문화’중심주의가대두하여 역으
로 ‘닫힌’ 일본문화론에 경사해가는 … 역설적인 현상”(靑木 1999, 160)
을 동반해온 일본문화론은 그 특징 자체의 성격 때문에 일본 경제의
침체기에는 그와 더불어 매력을 급격히 상실해간 한계를 노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앞으로의 일본경제의 재도약은 언제든지 재차 일본문화
근현대 일본에서의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241
론의 소환을 필요조건으로 삼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현 아베 신
조 총리가 일본 경제의 회생을 핵심적 정치목표로 삼으면서 그와 더
불어 ‘아름다운 일본’이라는 슬로건을 함께 내걸고 있는 현실은 상징
적이라할만한것이다.
Ⅶ. 맺음말: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이상과 같이 일본의 근현대는 일견 서구문명에 대한 모방과 학습의
한 길만으로 달려온 것 같아 보여도 서구문명 수용에 대한 양 측면의
존재와 긴장관계가 서로 맞물리면서 이중주와 같은 궤적을 그려온 역
사라할만한것이다. 그런의미에서 ‘일본적’ 특징을강하게내포한근
대초극론이든 일본문화론은 말할 것도 없고, ‘탈아입구’나 전후의 ‘근
대주의’를 비롯한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순응적 동화와 마르크스주의
의 집단적 수용 등에도 ‘일본적’ 특징이 각인되지 않을 수 없었음에 틀
림없다.
그런데 그 ‘일본적인 것’이 앞에서 언급한 미야지마의 비판에서 읽
을 수 있는 것처럼 ‘동아시아 중심으로서의 일본’에 대한 불굴의 충동
이라는 심리적 무드가 호출해온 것이라는 점에 재차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 글에서 서구문명에 대한 열렬한 선망이나 선택
적 수용, 전면적 저항, 부정이나 대안적 극복을 의도한 버전에 이르기
까지 서구를 중심에 두고 전개된 논리의 배면에는 거의 대부분 일본
중심주의적 심리가 강하게 똬리를 틀고 있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
는데, 여기서는 이 두 가지 중심주의, 즉 서구중심주의와 일본중심주
의가 맞물리는 중층적 양상이 현대 일본사회에 남긴 유산에 대해 생
각해보지않으면안되기때문이다.
242 아세아연구 제59권 1호 (2016년)
그 유산의 한 흐름이 ‘동아시아 중심으로서의 일본’ 지향에 대한 비
판적 문제제기다. 그 전형이 1950년대 발표된 다케우치 요시미(竹内
好)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론이다. ‘위로부터’ 추진된 순응적 동화의
일본 근대화와는 달리, 다케우치의 논의에서는 자발적 요구에 따라
‘아래로부터’ 추진된 중국의 근대화를 이념형으로 삼는다. 비록 국가
적 근대화에 뒤쳐져 서구 열강 및 일본에 제국주의적 침탈을 허용했
지만, ‘아래로부터’의 힘에 의거하여 항일전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고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달성한 중국의 사례에서 ‘아시아’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었다.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위로부터’ 추진된 순응적 동
화와함께제국주의를학습하여실행해간일본근대화의길과는 ‘다른
차원의 근대’에 대한 탐색이라는 의미에서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라고
이름 붙인 것이었다(다케우치 2004). 이는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가
메이지시대에 일본의 ‘수박 겉핥기’식 ‘피상적’ 근대화(夏目 1986)를 비
판했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일본형 근대화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을 갖지만, 이때가 패전을 계기로 일본 근대의 파행에 대한 반성
과 함께 서구문명에 대한 더 철저한 학습과 체화가 강조되어 ‘근대주
의’가 마루야마를 비롯한 진보적 지식인사회를 휩쓸고 재차 메이지시
대와 같은 ‘탈아입구’적무드가강조되던 시기였었다는점을 감안한다
면, 다케우치의 논의는 그때까지 ‘유일’한 근대화노선처럼 간주되던
일본형 근대화를 상대화하고 지금은 일반화한 ‘복수(複數)의 근대’에
대한지평을개척하는선구적역할을한것이라부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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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정치사상사연구를 보면, 수록논문들이 집필된 1940년대 초반과
이 책을 1952년에 출간하면서 덧붙인 “저자후기”, 그리고 1974년 영어판 출간에 맞춰 서술
된 “영어판 저자서문”의근대관이 동일하지않다. 특히 “저자후기”에는 패전직후라는 시대
분위기와 연동하여 일본의 근대를 근대국가의 형성에 한정된 ‘괄호가 처진 근대’라고 평가
절하하고, 그와는대조적으로발전부재의전형으로취급했던근대중국에대해 ‘대중적기
반의 근대화’라고 높이 평가하면서 아시아에서 ‘다른 코스의 근대화’가 가능했음을 고백하
는 대목이 등장한다. 더 나아가서 “영어판 저자서문”에서는 전자를 ‘관료적 국가주의’라고
자기비판하면서, 그와 대조적인 코스로서 ‘근대적 국민주의’를 적극적으로 개념화하고 있
근현대 일본에서의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243
이와같은다케우치의가능성을한층더밀고나간이가 ‘방법으로서
의 중국’을 역설하는 미조구치 유조다. 미조구치의 연구는 종래의 서
구중심주의적 시각을 전제로 근대화에 친화적인 요소의 맹아나 그것
의 부재를 논하던 기존의 중국연구와는 달리, 사상 및 역사사료 그 자
체를 근거로 역사상을 내재적으로 재구성하여 그것을 서구 근대와는
다른 중국의 ‘독자적 근대화’의 흐름으로 설명하는 과감한 수법이다
(溝口 1989). 일종의 ‘복수의 근대’론과 유사한 설정이다. 또한 그가 유
학적 ‘공(公)’의 윤리성과 종족 결합이 어우러진 역사적 전통을 바탕으
로 사회주의에 친화적이라 규정하는 중국 ‘근대’상을 제시하는 논의
(미조구치 2013) 역시 ‘동아시아 근대’의 재검토를 위한 문제제기다. 이
처럼 서구문명에 대한 순응적 동화의 주선율 속에서도 주로 중국연구
를 중심으로그때까지 ‘유일’한근대화노선처럼 간주되던일본형 근대
화를 상대화하고 그것과는 다른 패턴의 ‘근대’에 대한 역사적 탐색을
활성화하는흐름이다른한쪽에강력하게존재한다.
그와 더불어 일국사의 범위를 넘어 아시아 교역권의 형성과 구조를
밝혀내어 ‘세계체제론’의 서구중심주의적 편견에 도전하는 연구가 촉
진되었다는 점도 시사적이다. 전근대 ‘조공 시스템’에 초점을 맞춘 하
마시타 다케시(濱下武志)의 연구(濱下 1997)나 전근대 아시아 역내 무
역구조를 밝히는 스기하라 가오루(杉原薰)의 연구(杉原 1997) 등은 그
전형들이다. 또한 16~17세기 소농(小農)사회의 성립을 계기로 한 서구
‘근대’와는 다른 조선의 독자적 ‘근대’상 제시(미야지마 2013b)나, 앞에
서 언급한대로 오늘날의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상대적 지위 하락을
‘주변화’로 규정하는 미야지마의 논의, 그리고 근현대 일본의 행로를
다. 이처럼 마루야마에게 보이는 근대관의 동요도 눈에 띄지만, 그 자체가 그동안 독점적
권위를 지녔던 일본형 근대화의 문제성을 인정하고 ‘근대’로의 역사적인 경로에 대한 새로
운논의의필요성을그가절감하고있었음을짐작하게하는것이다. 그런의미에서비서구
사회에서의 근대화의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논의과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희탁
2015).
244 아세아연구 제59권 1호 (2016년)
중국화’로 해석하는 요나하의 논의 등 또한 크게 보면 그 연장선상의
문제제기라할수있는것들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서구문명 및 ‘근대’ 그 자체에 대한 서구에서의 근
원적 문제제기를 이어받은 흐름이 동아시아 차원에서 볼 때 상당히
이른 시점부터 일본사회에 형성되기 시작한다. 물론 패전 이전의 ‘근
대초극론’은 그런 시대적 분위기를 활용한 것이었지만, 그 의도와 결
과는 앞에서 서술한 대로다. 오히려 전후에 들어서 종전의 서구중심
주의에 대한 순응적 동화전략과 일본중심주의로의 충동은 ‘본격적’이
라는 의미에서 처음으로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1970년대 중
반부터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아 주로 인류학 영역에서부터 종전의 중
심과 주변, 질서와 혼돈의 대립이라는 시각과는 다른 해체적 접근법
이모색되기시작한것은그출발점이라할만하다. 그뒤를이어포스
트구조주의도 소개되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파악도 개시되었다.
특히 푸코 이후는 연구대상의 사회사적인 확대가 이루어져 근대적 주
체와 지식에 대한 근원적 재검토를 추동하고, 특히 그때까지 경시되
어온갖가지영역, 즉여성, 신체, 병, 죽음, 주술, 범죄, 폭력, 피차별민,
소수언어집단, 자연과 인간의 관계 등이 주제화되었다(야스마루 2006).
그리하여 1990년대 이후 냉전체제의 붕괴, ‘세계화’의 심화 및 확산 등
을 배경으로 서구에서의 ‘근대’에 대한 비판 및 해체를 의도한 ‘포스트’
언설들과 문제의식이 일본에 확산되면서, 현대 일본에서 서구문명과
‘근대’를 둘러싼 논의는 전형적인 의미에서의 ‘탈아입구’에 대한 상대
화와 더불어 그 대안적 모색의 ‘백가쟁명’과 같은 양상을 나타내고 있
는것으로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 주지하듯이 1990년대 이후 자민당 일당지배라는
‘55년체제’의 종식, 일본경제의 침체 개시와 더불어 일본의 이른바 우
경화가 그 모습을 스스로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점도 눈에
‘
근현대 일본에서의 서구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245
띤다. 그 상징적언설이 니시베 스스무(西部邁)의 ‘전후민주주의’에 대
한 극복 주장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욕망 추구의 민주주의는 전통
을 파괴하고 사회적 유대를 이루는 일본의 전통적 가치와 규범을 붕
괴시켰다는것이다(야스마루 2006). 그리하여그런생각에동조하는수
많은 인사들에 의해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 추구와 함께 전후 민주주
의에 대한 강력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주조하는 작업이 본격적으로 전
개되기 시작했다. 그 전형이 한국에도 잘 알려진 ‘전후민주주의’의 역
사인식을 ‘자학사관’이라고 부정하면서 등장한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모임(새역모)’인 것이다. 그와 더불어 현 아베 총리가 일본문화론적 언
설로서의 ‘아름다운 일본’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 또한 서구문명 수용
과정에서걸었던근현대일본의행로의또다른답습처럼보인다.
이와 같이 서구와 근대에 대한 상대화의 흐름과 더불어 또 다른 한
편에서 일본의 전통 회복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져가는 현상에 대
해 오사와마사치(大澤真幸)가 패전 이전의 근대초극론적 시도의 답습
처럼 이해하는 연구는 그런 의미에서 시사적이다(오사와 2010). ‘동아
시아중심으로서의일본’에대한불굴의충동이라는심리적무드와어
울려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순응적 동화든 역전적 재평가든 해체적 탈
구축이든 간에 그 어느 것도 일본중심주의로 수렴될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해체적 언설들의 존재와 그에 대한 인식과 공감이 우경화의 그런 시
도들을 과거의 완전한 답습이라는 형태로 그대로 허용할지 말지는 단
순히예단하기는어렵다. 그래서더욱더그귀추가주목되는것이다.
246 아세아연구 제59권 1호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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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 아세아연구 제59권 1호 (2016년)
Abstracts
The Duet of the Adoption of Western Civilization
in Modern Japan and Its Heritage
Koh, Hee-Tak
In the case of modern Japan adopting Western civilization, it would
seem to list toward a complete and wholehearted Westernization. But we
should not forget the continuous existence of the people and discourses
against Westernization and the strained relationship between those for
and against Westernization. Based on that perspective, this paper focuses
on how the two streams, such as the exit from Asia to Europe and its
counterpart Pan-Asianism, the spread of Marxism and the rise of discours
es for overcoming European modernity, the emphasis on modernism in
the post-war period and the appearance of discourses on Japanese cul
ture coinciding with the development of Japanese economy, have had an
important influence on the path of history in modern Japan.
Key words ― West-centrism, Japan-centrism, assimilative strategy,
reverse strategy, deconstructive strategy.
투고일: 2016년 2월 7일, 심사일: 2016년 2월 24일, 게재확정일: 2016년 3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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