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희탁. 2016. “‘유교’를 둘러싼 개념적 혼란에서 벗어나기: 서구 계몽주의에 영향

‘유교’를 둘러싼 개념적 혼란에서
벗어나기: 서구 계몽주의에 영향을 미친
‘공자철학’을 실마리로 삼아*
고 희 탁(高熙卓) ┃ 서강대학교**1)

<국문요약>
동일한 단어로 표기되어도 ‘유교’에 대한 이해와 평가에는 양 극단이 존재한다. 한쪽에서는 ‘근
대’적 가치와의 친화성이나 ‘탈근대’의 대안으로, 다른 한쪽에서는 청산해야 할 부정적 ‘봉건’=전근
대성의 상징으로 표상된다. 이처럼 모순된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리엔탈리즘적 시각과는 달리, 공자철학이 서구계몽주
의 형성과 촉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역사적 사실을 환기시키는 크릴(H. G. Creel)의 두 갈래
의 ‘유교’ 이해, 즉 계몽주의에 대해 친화적인 공자철학과 비친화적인 신유교라는 유교 이해의 두
갈래 구도를 방법론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리하여 전근대 동아시아에서도 그와 유사한 기능을 갖는 두 버전의 ‘유교’가 존재했음을 민본
주의에 대한 귀족주의적 시각과 민주주의적 시각의 양립이라는 사례를 통해 논증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유교’ 개념을 둘러싼 인식론적 혼란의 실체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Key Words ┃ 유교, 오리엔탈리즘, 서구 계몽주의, 이스턴 임팩트, 공자철학, 민본주의, 신유교

* 이 논문은 2014년 정부(교육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4S1A3A2043763).
** 저자의 주요 연구주제는 동아시아 근대화 사상동력에 대한 탐구, 계몽기 유럽에서의 동아시아 위
상과 역할 등이다. 주요 저술로는 일본 근세의 공공적 삶과 윤리 (2009), “에도시대 ‘민’의 정
치적 각성과 그 역설” (2012), “마루야마 마사오의 일본근세정치사상사연구와 서구중심주의의 굴
레” (2015), “근현대 일본에서의 서양문명 수용의 이중주와 그 유산” (2016) 등이 있다.

142 ┃ ⓒNARI, 新亞細亞 , 23권 2호 (2016년, 여름)

I. 머리말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20세기 후반의 경이적인 동아시아의 경제적 성장과 더불어
‘유교’가 한때 세계의 주목을 끌었던 바는 기억에 새롭다. 그 전형이 ‘아시아적 가
치’라는 독특한 이름과 함께 한때 세계의 이목을 끌었던 ‘유교 자본주의론’이다. 유
교문화가 경제발전의 주요한 동인이 되었다는 시각이다1). 그 연장선상에서 ‘유교 민
주주의’론 또한 논쟁의 초점이 되기도 했을 뿐 아니라2), 거기서 더 나아가 ‘유교’에
대해 “근대사상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문명적 대안으로서의 의미 부여까지 역설
되어 유교의 ‘덕윤리’가 새로운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3). 여기서 ‘유교’
는 근대적 가치만이 아니라 서구적 근대성의 한계와 거기서 비롯된 문화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적 자원이나 대안적 이상으로서 높이 재평가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동일하게 ‘유교’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이와 전혀 상반되는 평
가 또한 엄존한다. 20세기말 한국사회가 이른바 IMF사태로 몸살을 앓고 그간의 자
신감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었을 때, 당시 발간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가 인구에 회자되었던 바는 그 점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사회가 안고 있던 거
의 모든 정치사회적 문제의 ‘원흉’으로서 이 책에서는 ‘공자’, 즉 유교적 사고방식이
나 행태가 지목되었다4). 때가 때였던 만큼, 또 문외한이 아닌 중국학 전문가의 고발
이었던 만큼, ‘유교’가 끼친 부정적 영향의 범위와 깊이, 그 장구함과 은밀함에 대한
그의 폭로에 놀랐을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동일한 단어로 표기되어도 ‘유교’에 대한 이해와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
는 양상이다. 전자에서는 ‘근대’적 가치와의 친화성이나 ‘탈근대’의 대안으로, 후자
에서는 청산해야 할 부정적 ‘봉건’=전근대성의 상징으로 표상되는 데서도 드러나는
것처럼 일견 모순된 현상을 동시에 지칭하는 ‘유교’를 그렇다면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혹자는 한 사물의 빛과 그림자라는 야누스적 양 측면의 발현이라고 생각할
1) 이승환, “아시아적 가치와 유교 담론,” 유교 담론의 지형학 (파주: 푸른숲, 2004), p. 274.
2) 강정인, “유교 민주주의는 모순인가?” 전통과 현대 , 가울호 (1997) 참조. 대중적으로는 1994년
Foreign Affairs에서 전개된 리콴유(李光耀) 싱가포르 전 총리와 김대중 당시 아태평화재단 이사장
과의 ‘아시아적 가치’를 둘러싼 지상논쟁이 잘 알려진 사례일 것이다.
3) 함재봉, 탈근대와 유교: 한국정치담론의 모색 (서울: 나남출판, 1998), p. 258.
4) 김경일,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서울: 바다출판사, 1999).
‘유교’룰 둘러싼 개념적 혼란에서 벗어나기 ┃ 143

지 모른다. 또 다른 혹자는 시대적 변화에 따른 접근시각의 차이나 시대적 효용성의
차이로 이 모순적 현상을 설명하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후자가 비판하는 신분제적 약자 및 비특권자, 여
성 및 연소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거나 온존시키고서 전자가
내거는 근대적 혹은 탈근대적 삶이나 공동체가 온전히 실현될 리가 없다. 그런 상황
이라면 전자의 ‘덕윤리’ 또한 위선이나 기만일 수밖에 없다. 또한 경제활동에 대한
평가의 극단적 대조에 대해서도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일한 단어로 지칭되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상반되기까지 하는, 즉
전자의 근대적 친화성 혹은 탈근대성 선양과 후자의 전근대성 비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상반될 정도의 두 가지 발상이 ‘유교’로 지칭되는 개념 안에 뒤섞인 채로 존
재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국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논저에서 그 둘을 마구 뒤섞어 마치 한
묶음인 것처럼 취급해왔을 뿐 아니라, 뒤섞임 그 자체에 대해 무지하거나 뒤섞임 자
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다. 바로 그런 시각과 태도가 ‘유교’를 둘러싼 인식론적
혼란을 유발하거나 방치해왔다. 그에 따라 ‘유교’에 내포되어 있을지 모를 ‘근대적’
혹은 ‘탈근대적’ 가능성이 온전히 포착되지 않은 채 고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들만의 리그’에서 애지중지되는 골동품처럼 왜소화되어왔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유교’를 둘러싼 인식론적 혼란을 수습하고 한국사회의 미래나 인류사회를 위한 대
안적 모색에 일조하기 위해서라도 ‘유교’ 개념의 재정립은 절실하다.
그런데 ‘유교’를 둘러싼 이런 인식론적 혼란에는 실은 서구중심주의5)의 한 축이
라 할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이 크다. 주지하다시피 19세기 중반부터 밀어닥친 서구의
동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적 접근 이후 동아시아사회에 널리 퍼져간 이른바 ‘동양정
5) 강정인에 의하면, 서구중심주의는 서구문명의 바탕을 이루는 세계관, 가치, 제도, 관행 등을 보편
적이고 우월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이나 태도를 가리킨다. 이 서구중심주의는 서구인들만이
아니라 비서구인들로 하여금 서구문명의 우월성 및 보편성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서구의 정치경
제적 지배만이 아니라 문화적·생활적 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도록 만든다. 그런 만큼 서구는 보편
적 문화, 보편적 가치, 중심의 지위를 차지하고, 비서구는 주변으로 규정당하고 비하나 부정을 강
요당하는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에 따라 비서구 역시 서구의 세계관, 가치, 제도,
관행을 보편적이자 우월한 것으로 인식하는 반면, 비서구 스스로를 주변으로 규정하여 자기비하
나 자기부정의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강정인,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서 (서울: 아카넷,
2004), p. 392.
144 ┃ 고 희 탁

체론’은 그런 인식론적 혼란을 증폭시켰다. 왜냐하면 동아시아의 ‘정체’나 ‘저발전’
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규정 자체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 여부는 차치하고서
라도6), 그 규정이 동아시아 자신의 자기규정에 심대한 뒤틀림을 초래해왔을 뿐 아니
라, 특히 ‘유교’를 바로 그 뒤틀림의 최대피해자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잘 알려
진 대로 동아시아판 근대화론의 선구로 취급된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적 문명
론이 그 방해자로서의 ‘유교’에 대한 비판과 짝을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점을
상징한다7).
이 글의 주제인 정치사회적 평등성에 한정해서 보더라도, 유교는 기존체제의 정
치사회적 불평등, 즉 신분질서의 불평등을 정당화하거나 조장하는 이데올로기로서
‘주홍글씨’의 낙인을 감수해야만 했다. 공포에 의한 지배라는 몽테스키외의 논단에
서부터, “황제 1인만이 자유롭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노예상태에 놓여 있다”는 헤겔
의 규정을 거쳐, 비서구사회에서의 일당독재를 ‘동양적 전제주의’의 당연한 귀결처
럼 여긴 비트포겔의 명제에 이르기까지 유교에 퍼부어진 비난은 잘 알려진 바다. 물
론 경제적 측면에 대한 평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저 유명한 베버의 ‘유교 테
제’, 즉 동아시아의 유교가 근대적 자본주의의 내재적 발전을 저지하였을 뿐 아니라
외부에서 주입된 자본주의에 대한 수용과 적응에도 방해가 되었다는 테제 또한 유교
의 반근대성을 뒷받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교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
로도 동아시아의 ‘정체’를 초래한 원흉으로서 서구인들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인들에
게도 각인되어갔던 것이다8).
더욱이 이 글에서 더 중요한 점은 유교에 대한 이런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이 동아
시아에 확산되어감에 따라 그 시각이 유교에 대한 모든 논의의 기본전제가 되는 인
식론적 틀을 구조화해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구조화된 인식론적 틀이 긍정적이
든 부정적이든 ‘유교’를 둘러싼 이후의 모든 논의를 규정하는 기본전제와 같이 기능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앞서 언급한 ‘유교’의 부정적 ‘봉건’성에 대한 비판만이 아
6) 한때 종속이론의 대표적 논자였던 안드레 군더 프랑크의 리오리엔트 (서울: 이산, 2003)는 오리
엔탈리즘적 편견에 대한 경제사적 측면에서의 가장 강력한 반론일 것이다.
7) 후쿠자와 유키치, 정명환 역,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 (서울: 기파랑, 2012) 참조.
8) 앞서 언급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류의 시각은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한 세기 가까
이 선전되어온 그런 오리엔탈리즘의 한국적 통속화라 할 만한 것이다.
‘유교’룰 둘러싼 개념적 혼란에서 벗어나기 ┃ 145

니라 ‘유교’의 가능성, 즉 근대적 친화성이나 ‘탈근대성’에 대한 논의까지도 의식적
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틀 안에서 논의되는 현상이 적지 않게 산견되기 때문이다. 그
런 만큼 논의가 진행되면 될수록 ‘유교’를 둘러싼 인식론적 혼란은 가중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9).
그런 만큼 다음과 같은 초보적이지만 근원적이라 할 만한 질문, 즉 “청산해야 할
부정적 봉건성의 상징인 유교와 그 정반대의 근대적 친화성이나 탈근대적 가능성을
가진 유교, 이 두 가지 유교 가운데 진짜 유교는 어느 쪽인가?”라는 상식적 질문에
봉착해도 그에 대한 해명을 온전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베버의 ‘유교 테
제’에서 비판당하는 유교와 그 정반대에 가까운 ‘유교 자본주의론’의 유교 가운데
어느 쪽이 실재에 부합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역시 그렇다. 그런데 그에 대
한 대답이 “어느 한쪽이야말로 진짜이고 다른 한쪽은 진짜가 아니다”라는 식의 구도
라면, 그 대답은 온전한 해명이 될 수가 없다. 그 반대의 문제제기도 성립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유교의 빛과 그림자라는 야누스적 양 측면의 발현으로
설명한다든지, 시대적 변화에 따른 접근시각의 차이나 시대적 호용성의 차이로 해명
하려고 해도 충분한 납득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이 글에서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유교’를 둘러싼 양 극단의 평가가 병존
하는 상황에 대해, 한 존재의 야누스적 두 얼굴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갖는
두 존재의 뒤섞임의 결과로 파악하고, 근대성의 기본지표인 정치사회적 평등성에 한
정하여 서로 다른 두 가지 ‘유교’의 모습을 추출해내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공
자: 인간과 신화 라는 책으로 비교적 많이 알려진 20세기 중반 미국의 중국학자 크릴
9) 예를 들어 한국의 사례에 한정해도, ‘탈유교’를 선언한 ‘탈아입구’에 친화적인 노선은 말할 것도
없고,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유교’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을 시도하는 흐름조차 그런 오리엔
탈리즘의 기본전제를 공통기반으로 하여 그에 대한 아폴로지로서의 안티테제 제시라는 성격을 벗
어나기 어려웠다는 점이 그 반증이다. 일제시대부터 본격화한 실학 및 양명학 발굴과 그 대중적
선양의 계기가, 한편으로는 전근대 한국 역사의 내재적 발전성의 맹아나 증거를 찾아내어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사회 정체론’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는 의도에서 비롯된 측면이 크
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 그 자체에 대한 완전 부정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 대한 안티테제
적 반론이라는 측면도 작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유교 자본주의론’조차 베버의 ‘유교
테제’에 내포되어 있는 기본전제를 공통기반으로 하면서 단지 결과론적으로 그 평가를 역전시키
는 데에만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오리엔탈리즘 전개 이후의 ‘유교’를 둘러싼
논의는 애초부터 공통의 기본전제를 바탕으로 하여 그것에 친화적인 요소가 ‘있다/없다’식의 반복
에 가까운 양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힘겨루기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46 ┃ 고 희 탁

(H. G. Creel)의 두 가지 ‘유교’ 이해, 즉 공자철학 혹은 ‘초기유교’와 한대 이후 변
질‧왜곡되었다고 간주하는 ‘또 다른 유교’를 구분하여 논의하는 구도를 활용할 것이
다. 왜냐하면 크릴의 이런 구분(여기서는 편의상 전자를 ‘유교 A’, 후자를 ‘유교 B’
로 잠정적으로 구분)에는 이 글의 문제의식과 관련된 시사가 풍부할 뿐 아니라, 계몽
주의시대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끼친 유교의 영향에 대해 논술하는 대목에서 정치사
회적 평등성을 둘러싼 유교와 근대성과의 관계에 대한 주목할 만한 분석과 통찰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우선 크릴이 전개하는 ‘유교’에 대한 두 가지 구분 및 서구
계몽주의와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 이어서 조선시대 및 도쿠가와시대의 실례에 의
거하여 정치사회적 평등성 문제를 중심으로 두 가지 버전의 공통기반인 이른바 ‘민
본주의’에 대한 해석상의 분화양상을 추출‧논증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교
A’와 ‘유교 B’라는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갖는 두 버전의 존재와 그 뒤섞임을 드러낼
것이다. 이를 통해 ‘유교’ 개념을 둘러싼 인식론적 혼란의 장막을 걷어내고 서구중심
주의에 침윤된 ‘유교’ 개념이 초래한 오인을 수정하여,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실제 정
치사회적으로 기능했던 ‘역사적 유교’를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개념 정립에 일조하
고자 한다.

Ⅱ. 정치사회적 평등성을 둘러싼 서구 계몽주의와 유교와의 관계
앞서 언급한 저서에서 크릴이 공자철학 혹은 ‘초기유교’(유교 A)와 한대 이후 변
질‧왜곡되었다고 간주하는 ‘또 다른 유교’(유교 B)에 대한 변별을 강조하는 이유 또
한 이 글의 문제의식과 유사하다. 크릴에 따르면, 공자에 대해 “구질서를 회복시키고
세습적인 귀족정치의 권위를 강화”시키려 한 ‘반동가’로 보는 견해가 적지 않지
만10), 그 이미지는 오히려 공자의 의도 및 실천의 진면목과는 다르다. 오히려 실상
은 그와 정반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실상과 정반대의 표상이 만들어진 이유는
10) 크릴, 이성규 역, 공자: 인간과 신화 (서울: 지식산업사, 2012), p. 21. 크릴에 대한 인용은 한국
어판을 주로 활용했으나, 필요에 따라서는 영어판에 의거하여 필자가 수정 보완하였다.
‘유교’룰 둘러싼 개념적 혼란에서 벗어나기 ┃ 147

원래(유교 A)와는 달리 변질·왜곡된 유교(유교 B)를 ‘유교 A’처럼 오인하기 때문이
다. 크릴이 ‘유교 A’와 ‘유교 B’의 구별을 강조하는 이유다. 게다가 “현재 통용되고
있는 공자에 관한 지식의 대부분은 한대 또는 그 이후에 나온 것”이라는 지적처럼
그 오인의 문제를 크릴은 현대적 문제로 부각시킨다11).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문제
역시 크릴이 집필하던 20세기 중반에 머물지 않는 현재진행형의 문제라는 점에서도
크릴의 두 가지 ‘유교’론은 정치사회적 평등성을 둘러싼 ‘유교’의 두 가지 이해와 관
련하여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크릴은 어떤 근거로 그런 두 가지 버전의 ‘유교’ 존재를 역설하는 것일
까? 앞서 언급한 그의 저서 제15장 “유교와 서구민주주의”는 크릴이 두 가지 버전
의 ‘유교’의 존재를 인지‧확신하게 된 계기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 장에서 그는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보고서 및 서신, 번역과 해제 등의
형태로 소개된 중국 및 공자철학이 서구 계몽주의시대의 유럽인들에게 심대한 영향
을 끼쳤으며, 그 영향이 당대 유럽의 중세적 세계관에 대한 계몽주의 지식인들의 비
판 및 해체와 근대적 세계관 형성에 의미심장한 기여를 했었다는 사실, 그러나 잊힌
지 오래되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완전히 망각되다시피 한 역사적 사실을 환
기시키고자 한다. 이 장 제목이 “유교와 서구민주주의”인 이유다.
잘 알다시피 계몽주의는 신, 자연, 국가, 인간의 상호관계에 대한 근원적 사고전
환을 통해 철학, 정치학, 신학, 과학 등에서 성취된 새로운 발전을 포괄하는 광범위
한 범위의 지적 운동이었다. 정치적 차원에 한정한다면, 계몽주의는 그런 사고전환
을 통해 국가 및 정부와 인간의 관계, 국가의 존재이유와 정부의 역할에 대해 이전
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고를 상식화해갔다. 그 핵심을 정리해보면 크게 다음 네 가
지와 같다. 첫째, 정부는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와 행복을 보장하고 유
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둘째, 그런 목적을 갖는 정부는 당연히
국민의 동의를 받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 셋째,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부 공직의 신분제적 독과점을 철폐하고 공직의 요구에 어울리는 능력과 덕성을 가
진 사람들에게 공직을 개방한다. 넷째, 그런 목적을 갖는 정부가 그 책임을 다하지

11) Ibid., p. 25.
148 ┃ 고 희 탁

않고 민의를 배반한다면 국민은 저항권을 발동하여 그 정부를 교체 혹은 폐지할 수
있다12). 이와 같은 네 가지 기본원칙에 의거하여 계몽주의는 17-18세기 서구의 시
민적 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갔던 것이다.
그런데 크릴의 “유교와 서구민주주의”에서 두 가지 버전의 ‘유교’ 존재를 역설하
는 데에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유럽에 전해진 ‘유교’가 이른바 ‘자유‧평등‧박애’를
출현시킨 계몽주의와 대단히 친화적이었을 뿐 아니라 어쩌면 그 이념의 형성에 깊이
관계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들과의 조우가 크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 기록들은 공자에 대해 “구질서를 회복시키고 세습적인 귀족정치의 권위를
강화”시키려 한 ‘반동가’로 보거나 그의 철학을 “군주권의 목적에 봉사”13)하는 것으
로 보는 부정적 시각과는 정반대의 사실을 보여주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계몽주의로 알려진 철학적 운동이 시작된 직후 공자는 유럽에 알려
지기 시작했다. 라이프니츠, 볼프, 볼테르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과 정치가,
문필가들이 자신의 논증을 강화하기 위해 그의 이름과 사상을 이용하였고, 이
과정에서 그들 자신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유교의 자극 아래 세습적 귀족
정치가 중국에서 오래 전에 실질적으로 폐지되었다는 사실은 영국과 프랑스에
서 세습적 특권을 공격하는 무기로 이용되었다. 공자철학은 유럽 민주주의 이
상의 발전과 프랑스혁명의 배경으로서 몇 가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프랑스의 사상을 통해 미국 민주주의 발전에도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14).
논술에서 객관성을 잃지 않고자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크릴이지만, 이런 그의 인
용만 보더라도 계몽주의 촉진이나 형성에 ‘공자철학’이 미친 영향의 범위와 깊이에
대한 주제는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런 사실에 과문했던 필자를 포함하
여 많은 이들에게 크릴의 이 발언은 가슴속에 오래 남을 인상적인 것이지 않을까.

12) 계몽주의에 대해서는 나라별, 시기별 다양성이 존재하여 일률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도 존
재한다. 그러나 최대공약수라는 공통분모를 추출한다면, 그 다양성 가운데서도 공통의 기반을 찾
기는 어렵지 않다. 스테파니 슈워츠 드라이버, 안효상 역, 세계를 뒤흔든 독립선언서 (서울: 그
린비, 2005), pp. 51-53.
13) 크릴, op. cit., p. 316.
14) Ibid., p. 26.
‘유교’룰 둘러싼 개념적 혼란에서 벗어나기 ┃ 149

어쨌든 크릴의 인용에만 한정해도 공자와 계몽주의가 대단히 친화적이었다는 사실
을 보여주는 사례는 결코 적지 않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대표적 계몽철학자인 볼테
르는 공자를 찬양하면서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 따라서 가장 존경받을 만한 가
치가 있는 시대는 그(공자)가 제시한 법을 따른 시대”15)라고 칭송하고 있었다. 독일
계몽철학의 서장을 연 철학자로 알려진 라이프니츠는 인정하기 부끄러운 일이라고 첨
언하면서까지 정치학과 윤리학에서 “그들이 우리를 능가하는 것이 확실하다”16)고 고
백하고 있었으며, 영국 계몽기 유명문필가였던 골드스미스는 영국의 세습적 귀족정치
를 격렬하게 비판하면서 “대영제국의 모든 지위를 진정으로 공적이 있는 사람에 대한
보상으로 수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 순간에도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인
구도 많으며 가장 선정이 행해지고 있는 제국인 중국에서 이 훌륭한 격언이 가장 엄
격하게 준행되고 있다”17)고 중국의 사례를 그 비판의 논거로 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볼테르, 라이프니츠, 골드스미스 등을 포함한 계몽기 유럽지식인들이 접한
유교는 ‘구질서’나 ‘세습적 귀족정치의 권위’를 강화하는 ‘반동’적인 것이 아니다. 오
히려 그와는 정반대로 그것들을 비판하고 해체하는 데에 유의미한 이념과 방향을 시
사하는 것들이었다. 바로 위의 골드스미스의 예처럼 공무담임을 둘러싼 한쪽의 특권
과 다른 한쪽의 배제를 세습화한 신분제적 차별‧독과점 철폐와 만인에의 개방이라는
평등적 공무담임권만이 아니라,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정이 행해지고 가장 질서가
있는 나라로 알려진 중국에서는 억압을 받으면 혁명이 바로 ‘가장 신성한 권리이자
불가결한 의무’라는 원리가 오랫동안 자명한 진리로 인정”18)되어 왔다는 사실까지
알려져, 앞서 언급한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에서 중국의 통치원리를 ‘공포에 의
거한 지배’로 규정하여 그 정치체제를 가혹한 전제정치의 대명사처럼 취급하면서도
동일저서의 다른 곳에서는 그런 자신의 규정과 모순되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중국의 황제는 …제국의 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제국은 물론 자신의 생명까지
상실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19)고까지 진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

15)
16)
17)
18)
19)

Ibid..
Ibid..
Ibid.,
Ibid.,
Ibid.

pp. 313-314.
p. 308.
p. 324.
p.322.

150 ┃ 고 희 탁

하여 “인간의 고귀한 존엄성을 인정하고 그것이 당당히 존중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나 인간에게는 침범할 수 없는 타고난 권리가 있으며 국가는 이 권리를 보호하고
개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그 가치를 구현하도록 도와주는 것 이외에 어떤 목적도 가질
수 없다”20)는 의식을 일반화하기 시작한 계몽주의적 사고가 “당대 교회의 그것보다
는 유교의 사고방식과 훨씬 더 유사한 위치로 이동했으며, 그 점이 계몽주의의 지도
적인 인사들에 의해 인정되었을 뿐 아니라 광범위하게 공언되었다”21)고 크릴이 서술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공자는 계몽주의의 수호성인”22)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유교
A’와 ‘유교 B’를 구분하고 전자에 대해 경탄하여 유럽으로 적극 알렸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었으며, 그 구분을 위해 후자를 따로 명명하였는데,
오늘날에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신유교(Neo-Confucianism)’라는 명칭은 그때 붙
여지게 된 것이라는 점이다. 그 이유는 ‘유교 A’와는 너무 다른, ‘왜곡된 유교’라는
의미를 담기 위해서였던 것이다23).

그들(예수회 선교사들-인용자)은 유교 경전을 연구하면 할수록 당시 유행하
고 있던 철학이 초기유교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선
교활동의 대선배 마테오 리치도 신유교의 형이상학에 대해 “내가 보기에는
500년 전 우상숭배파(불교)로부터 차용해온 것 같다”는 견해를 피력하였으

며, 그는 초기 경전을 더욱 깊이 탐구한 결과, “이것은 공자가 아니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24).
예수회 선교사들의 눈에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철학’, 즉 당대 ‘중국에서 일반적
으로 통용된 정통유교’는 “그들의 열정을 일깨운 것들, 특히 『논어』나 『맹자』와
같은 책에 보이는 초기유교에 관한 언급”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왜냐하면 ‘초기
20) Ibid., p.308.
21) Ibid.
22) Reichwein, Adolf. China and Europe: Intellectual and Artistic Contacts in the Eighteenth Century.
trans. by J. C. Powell (New York: A. A. Knopf, 1925), p. 77.
23) 크릴, op. cit., pp. 310-311.
24) Ibid.,p. 311.
‘유교’룰 둘러싼 개념적 혼란에서 벗어나기 ┃ 151

의 순수한 유교 개념’을 형성하는 『논어』나 『맹자』 는 ‘이성의 빛’과 조화되는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서구 어떤 철학자들의 저술에도 뒤떨어지지 않
는” 것들인데 반해25), ‘신유교’는 불교의 요소를 많이 받아들여 형이상학적 철학체계
로 탈바꿈하여 “공자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달라져버린 것이었기 때문이
다26). 물론 ‘신유교’가 “공자사상을 구체화시킨 점도 많지만”, 한대의 유교 국교화
이후 ‘전제정치의 정당화’27)나 “세습적인 귀족정치의 권위를 강화”28)시키는 역할로
흘러, “볼테르 같은 유럽인들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얻을 수도 없었거니와 명석하고
비판적인 정신을 가진 예수회 선교사들의 마음을 끌지도 못하고”29) 있었기 때문이
다. ‘공자철학’(유교 A)와 ‘신유교’(유교 B)를 엄밀히 구분하고자 했던 이유다.
생각해보면, 마테오 리치를 비롯한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도착하여 처음 접
한 ‘유교’라면 그것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철학’, 즉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정통유
교’로서의 ‘신유교’였을 것이다. 그들이 ‘유교’에 대해 탐구하려고 한 것은 중국 및
중국인이 ‘이교도적 야만’에 가까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삶의 질에서도 도덕적으
로도 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현실과 마주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
한 볼테르나 라이프니츠, 골드스미스 등의 언급을 통해서도 그 충격의 내용과 깊이
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은 확실히 번영하는 나라”30)였고, 볼테르가 “도덕
문제에 관한 한 유럽인들은 중국인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31)고 했을 정도이니 말이
다. 그리하여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놀라운 현실과 그들 자신의 마음속에 생긴 ‘충격
과 동요’를 해명하기 위해서도 예수회 선교사들의 ‘적응주의 선교방식’, 즉 중국의
말과 글을 자유자재로 쓰고 중국인들과도 공적, 사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전
개된 선교방식이 전략적으로 선택되었을지 모른다. 단지 효과적 선교를 위한 방식으
로 보기에는 당시의 접근방식의 일반적 수준에 비해 파격적이라 할 만한 것이기 때
문이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정통유교’로서의 ‘신유교’와 조우하기 시작
25)
26)
27)
28)
29)
30)
31)

Ibid.,
Ibid.,
Ibid.,
Ibid.,
Ibid.,
Ibid.,
Ibid.,

pp. 312-313.
p. 310.
p. 25.
p. 21.
pp. 310-311.
p. 326.
p. 314.

152 ┃ 고 희 탁

했을 텐데, 그들은 ‘신유교’와의 조우를 통해서는 그들의 의문을 풀 수 없었거나 혹
은 새로운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슴에 품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신유교’의 사상적 원천인 ‘공자철학’의 직접적 자료라 할 ‘유교 경전’으로 그 탐구
의 범위를 넓혀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들은 ‘공자철학’
과 ‘신유교’는 다른 것이며,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중국의 놀라운 현실은 ‘공자철학’
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발견해냈던 것이라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크릴에 따르면, “공자의 민주주의적인 생각”32) 혹은 공자가 “전면적인 사회적,
정치적 개혁을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그 실현에도 기여한 사람”으로서 ‘위대한 혁명
가’33)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천 년 동안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실제의 공자를 발견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34). “중국학자들 가운데 이런 견해를 갖고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예수회 선교사들의 주장이 일반적으로 알려지면서 중국지식인
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한 토론이 벌어졌다”35)고 할 정도이니 말이다. 마테오 리치에
의해 “신유교가 고대 성현의 진정한 사상을 대표한다는 것이 처음으로 부정”36)되면
서 예수회 선교사들은 당대 ‘신유교’의 최신 해석을 포함한 그때까지의 수많은 해석
을 물리치고 “공자 자신으로 직접 돌아가려고 하였으며, 유럽으로 보내는 편지마다
자기들이 발견한 새롭고도 경이로운 이 철학자를 계속 언급하였다”37)는 것이다.
이와 같이 크릴은 오로지 공자철학 그 자체에 대한 예수회 선교사들의 천착에 의
해 처음으로 ‘신유교’와 다른 ‘실제의 공자’가 발견되었고, 그렇게 발견된 ‘실제의
공자’가 유럽에 전파되어 계몽주의의 형성과 촉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2)
33)
34)
35)
36)
37)

Ibid.,
Ibid.,
Ibid.,
Ibid.,
Ibid.,
Ibid.,

p. 25.
p. 21.
p. 25.
p. 312.
p. 311.
pp. 25-26.
‘유교’룰 둘러싼 개념적 혼란에서 벗어나기 ┃ 153

Ⅲ. 민본주의의 두 갈래
그런데 여기까지의 논의를 읽고서 혹자는 이런 반문을 던질지 모르겠다. 크릴이
강조하는 ‘공자철학’의 두 가지 원칙은 이른바 ‘민본주의’에서 발원하는 것인데, 그
것은 ‘신유교’에서도 동일하게 중시되는 원칙이 아닌가? ‘신유교’, 특히 그 중심인
주자학 역시 그 ‘민본주의’의 구현을 가장 기본적 정치목표로 삼았고, 민본주의 이념
의 구체적 내용이 많이 포함된 『맹자』를 유교 경전의 주변적 위치에서 주자학 필
독서인 ‘사서(四書)’의 하나로 중심화하고 있었기 때문에38), 그런 의미에서 이런 반
문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민본주의’를 표방한다고 해서 모두가 동일하지는 않다. 그 ‘민본주의’가
실제 정치적, 사회적으로 어떻게 기능했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검토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민본주의’의 중심요소라 할 만한 ‘민’의 위상과 역할이
라는 주제가 중요한 문제로서 남겨져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민본주의’ 해석에 있어서 크릴이 강조하듯이 민주주의를 강화하는가, 그렇지 않으
면 전제주의나 귀족정치의 권위를 강화하는가라는 분수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혹
은 민본주의를 머금은 유교의 전통이 “전근대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극히 ‘근대
적’인 전통”39)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판가름하는 국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앞서 크릴이 거론한 공자철학과 서구 계몽주의의 관계에 빗대어 보면,
크게 다음 세 가지 측면에 대한 해석 및 태도가 그 분수령을 판단하는 중요한 척도
가 될 법하다. 첫째, ‘민’에 대한 신분제적 불평등을 정당한 것으로 보는지 부당한
것으로 보는지의 여부다. 둘째, 통치대상의 지위에 있던 ‘민’을 통치의 공동주체로
간주하여 공무담임권에 대한 평등적 접근을 허용하는지의 여부다. 셋째, 지배층만이
아니라 ‘민’도 부당한 통치에 대한 저항권 및 혁명권의 주체로 동일하게 인정하는지
의 여부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척도만으로도 민본주의에 대한 시각이 민주주의에 친
화적인지, 전제주의나 귀족정치의 권위 강화에 기여하는지를 우선적으로 가늠할 수
38) 안병주, “민본유교의 철학적 지향과 그 현실적 한계,” 정신문화연구 , Vol. 13, No. 4 (1990), p.
23. “혁명론을 내포한 맹자의 민본사상…을 벼랑 끝까지 몰아간 북송 사대부들의 孟子拒斥論으
로부터 맹자를, …유교의 민본사상을 완벽하게 방위한 것은 도리어 주자였다”고 한다.
39) 함재봉, 탈근대와 유교: 한국정치담론의 모색 (서울: 나남출판, 1998), p. 298.
154 ┃ 고 희 탁

있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적어도 유교가 전파된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민본주의는 적어도 지
식인사회에서는 상식과도 같은 정치이념이었다. 지식인들이 일상적으로 접했을 유교
경전에서 민본주의는 가장 기본적인 주제였기 때문이다. 서경 의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단단해야 나라가 안녕하다”40)는 민유방본론은 흔히 인용되는 구절
이었다. 맹자 의 “백성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장 가벼우
므로, 들녘의 백성을 얻으면 천자가 된다”41)는 민귀군경론 역시 그렇다. 게다가 더
나아가 나라의 근본인 백성의 민심을 하늘의 뜻과 직결시킨다. “하늘은 우리 백성이
듣는 것을 통해 듣고, 하늘은 우리 백성이 보는 것을 통해 본다”42)는 『서경』의
‘민심=천심’론이 그것이다. 그런 만큼 민본주의에 반하는 폭군이나 암주에 대한 ‘방
벌’을 정당화한 역성혁명론이나 조선시대에 간간이 행해진 ‘반정(反正)’론도 그 논리
적 귀결이라 할 만한 것이다43). 이리하여 민유방본론, 민귀군경론, 방벌론 등이 그
뼈대를 이루는 민본주의는 앞에서 크릴이 구분한 ‘초기유교’는 물론 ‘신유교’에서도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는 정치이념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민본주의에 대한 해석과 현실적 적용양상은 오직 한 갈래만이 아니
다. 적어도 ‘민’의 위상과 역할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그에 적극적인가 소극적인가
에 따라 민본주의의 실제적 역할도 크게 달라진다. 특히 신분제적 제약이 드리워졌
던 전근대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 차이는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우리는 ‘사대부의 시대’라고도 불리는 조선시대에 이 민본주의가 어떻게
해석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민유방본론, 민귀군경론의
시각에서 보면, ‘나라의 근본’이자 ‘가장 귀중한’ 백성에 비해 ‘가벼운’ 존재인 임금
의 통치를 보좌하는 사대부는 논리상 임금보다 ‘더 가벼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
럼에도 ‘사대부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그 위세가 강력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리와 실제의 불일치라는 패러독스를 해명하는 데에도 민본주의 해석의 향방은 중
요한 실마리가 될 법하다.
40)
41)
42)
43)

書經
孟子
書經
孟子

第二篇夏書 五子之歌 第三, “民惟邦本, 本固邦寧.”
盡心下 (14-14). “孟子曰,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是故得乎丘民而爲天子.”
第四篇周書 泰誓 第一; 孟子 萬章上 (9-5), “天聽自我民聽, 天視自我民視.”
盡心下 (14-14).
‘유교’룰 둘러싼 개념적 혼란에서 벗어나기 ┃ 155

그렇다면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이념상의 위치와는 정반대로 어떻게 정치적으로
중요한 존재로 자리잡을 수 있었으며, 그 현실을 민본주의 이념과 모순되지 않게 설
명·설득할 수 있었을까? 그 중요한 열쇠가 종종 민본주의와 등치되는 ‘위민(爲民)통
치론’에 숨겨져 있다. 나라의 모든 정사는 ‘백성을 위한 것’이어야 하지만, 백성들이
‘어리석으므로’ 지혜로운 사대부들이 ‘백성을 위해’ 통치를 해야 한다고 해석하여,
자신들의 이념상의 ‘말단’적 지위를 다시 ‘통치자’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절묘한 논리
를 ‘위민통치론’은 제공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런 바탕 위에서 사대부들은
민본주의를 내세워 한편으로는 임금에 대해 ‘위민통치’의 ‘교사이자 동반자’로서 자
기규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에 대해 그들의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자임·공언
함으로써 사대부의 지위와 특권을 강력히 정당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위민통치론’의 존재 자체는 그 부재상태와 비교해볼 때 대단히 긍정적인
것이다. 현대적 사례에 비추어보아도, “유교 자본주의 국가들이 여타국에 비해서 공
정한 소득분배를 달성하고 사회적 안정을 꾀할 수 있었던 것은 유교 국가가 자본주
의를 부국강병의 도구로 도입하면서도 동시에 ‘위민’정책을 추구해온 결과”44)라고
할 수 있는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 조선시대의 잘 알려진 수많은 사례들처럼
당대 정치행위의 향방에도 위민통치론이 일종의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통해 지속적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 또한 작지 않다. 적어도 노골적인 폭압정치 대두를 견제하거
나 그렇지 못하면 그에 대한 저항과 비판을 불러일으키는 이념적 원천의 역할을 기
대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위민통치론’에는 ‘민’의 위상과 역할이라는 문제와 관련해서 교묘
한 논리적 트릭이 개재되어 있다는 점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는 ‘지우(智
愚)’나 ‘현우(賢愚)’의 차이를 신분제적 ‘귀천(貴賤)’의 차이와 동일시하는 트릭이다.
또 다른 하나는 맹자의 기능적 분업론인 ‘노심자(勞心者:정신노동자)-노력자(勞力者:
육체노동자)’론에 대한 신분제적 차별론으로의 왜곡이다. 이 두 가지를 짜 맞춰 만든
트릭의 기반 위에 정신노동자인 사대부들이 육체노동자들인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위민통치론’이 만들어졌던 것이다45). 그리하여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위한 통치
44) 함재봉, op. cit.,, pp. 352-353.
45) 황태연,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와 민국의 의미 (서울: 청계, 2016), p. 103.
156 ┃ 고 희 탁

를 전적으로 임금과 사대부들에 맡기게 하고, 백성 그 자신은 그들의 시혜적 위민통
치에 기대어 사는 수동적 존재로 머물러 있기를 요구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맹자의 ‘노심자-노력자’론은 신분제적 차별을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분업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맥락에서 제기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46).
맹자가 노심자와 노력자의 사회적 분업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분
업이 종신토록 또는 세습적으로 고정된 것이라는 주장이 아니다. 맹자 만장편의 소
개처럼 공자 자신은 젊은 시절의 창고지기나 목장관리인과 같은 육체노동의 ‘노력자’
였다47). 그런 처지로부터 장년에는 고국 노나라의 재상에 올랐고 노년에는 거룩한
스승으로 존경받는 ‘노심자’로 상승해간 공자의 사례를 익히 알고 있는 맹자가 그런
사회적 이동을 가로막는 종신적 혹은 세습적 신분장벽을 인정할 리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우(智愚)’나 ‘현우(賢愚)’의 차이를 신분제적 ‘귀천(貴賤)’의 차이와
동일시하는 트릭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상식적인 반론이 가능할 것이다. 신분제적
상위자가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지혜롭거나 현명하지 않은 것처럼, 신분제적 하위자
가 누구나 그리고 언제나 어리석다고도 할 수 없다. 더구나 공자가 “천하에 나면서부
터 귀한 자는 없다”48)고 한 태생적 인간평등론을 이 트릭은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위민통치론을 떠받치는 트릭은 신분제에 동반된 각종 특권의 세습에
의해 얻어지는 ‘문화자본’을 누리는 사대부들과, 그와는 정반대로 신분제적 각종 차
별 및 배제로 인해 문화자본 자체를 가질 기회가 제한되거나 봉쇄되어버린 비특권자
및 사회적 약자들인 백성들과의 차이를 마치 선천적 차이나 일종의 ‘인종적’ 차이인
것처럼 뒤바꿔버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민통치론은 신분제적 세습을 공고화하
면서 ‘위민통치’의 불가피성을 합리화하는 레토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레토릭 조형의 선두에 주자학의 완성자로 불리는 주희가 있다는 점
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앞서 본 것처럼 맹자가 말하는 자유로이 선택가능한
46) 孟子 滕文公上 (5-4), “百工之事固不可耕且爲也. 然則治天下獨可耕且爲與. 有大人之事, 有小人
之事. …故曰, 或勞心, 或勞力. 勞心者治人, 勞力者治於人, 治於人者食人, 治人自食於人, 天下之通
義也.” 현자는 백성과 함께 손수 농사지어 먹고 아침밥과 저녁밥을 손수 조리하여 먹으며 다스린
다고 주장하는 허행(許行)과 진상(陳相)의 무(無)분업적 현자정치론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맹자가
펼치는 논변이다.
47) 孟子 萬章下 (10-5), “孔子嘗爲委吏矣. 曰, 會計當而已矣. 嘗爲乘田矣. 曰, 牧羊茁壯長而已矣.”
48) 禮記 校特牲 第十一. “天下無生而貴者也.”
‘유교’룰 둘러싼 개념적 혼란에서 벗어나기 ┃ 157

유동적 사회분업론을 치자와 피치자 간의 고정된 신분적 분업론으로 변조하여 자신
들의 종신적 또는 세습적 지배자 신분을 정당화하고 있다. “군자는 소인이 없으면
굶주리고, 소인은 군자가 없으면 어지럽게 된다”49)고 하여, 다스리고 녹봉을 받는
자(노심자)와 다스림을 받고 녹봉을 주는 자(노력자)를 미리 ‘군자’와 ‘소인’으로 예
단하고 그에 대한 주석을 가함으로써 노심과 노력의 자유분업을 슬쩍 군자와 소인
간의 불변적 신분분업으로 둔갑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실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반계 유형원에게도 이어진다. 그는 “노심과
노력은 귀천의 직분이 구분되는 이유”50)라고 하여, “신분이라는 것은 본래 귀천의
등급이 있는 것에서 비롯되었고, 다시 귀천은 본래 현자와 우자의 구분에서 비롯되
었을 따름이다”51)라고 신분의 귀천이 천성적 현우에서 비롯된다고 확언한다. 반계
는 ‘현우’를 ‘귀천’과 직접 등치시켜 백성을 ‘어리석은 자’이자 ‘비천한 존재’로 단정
하고 있는 셈이다.

천지간에 자연적으로 귀한 자가 있고 천한 자가 있어, 귀한 자는 남을 부
리고 천한 자는 남에 의해 부림을 당한다. 이는 불변의 이치이자 불변의
추세이기도 하다.52)
반계에게 신분적 차등관계는 “귀와 천으로 구분되며 그 원리는 천지자연의 법칙
으로 보증된다는 것이고, 귀족은 비천한 백성을 부려야 하며 비천한 백성은 귀족에게
부림을 당함이 마땅하다는 주장”이었다53). 주자학적 해석을 넘어 공맹경전의 고학
(古學)적 연구를 통해 국가개혁론을 도출했던 반계도 이렇게 사대부의 ‘치자’ 기능을
‘신분’으로 공고화하는 점에서는 “주희의 주석과 일치하는 발상”을 보이고 있었던 것
이다54). 그런 의미에서 반계가 그리는 사회 역시 ‘위민’의 레토릭에도 불구하고 실은
49) 朱熹, 孟子集註 滕文公上 (5-4), “君子無小人則飢, 小人無君子則亂. 以次相易… 治天下者, 豈必
耕且爲哉.”
50) 柳馨遠, 磻溪隨錄 卷1 田制上 分田定稅節目, “勞心勞力貴賤之職攸分.”
51) 柳馨遠, 磻溪隨錄 卷10 敎選之制下 貢擧事目, “夫所謂名分者, 本出於貴賤之有等, 貴賤本出於賢
愚之有分耳.”
52) 柳馨遠, 磻溪隨錄 卷25 續篇下 奴隸, “大槪天地間自有貴者賤子, 貴者役人而賤子役於人. 此不易
之理, 亦不易之勢.”
53) 김준석, 조선후기 정치사상사 연구 (서울: 지식산업사, 2003), p. 163.
158 ┃ 고 희 탁

“사(士), 양반이 중심이 되어” 사대부들 자신을 위해 운용하는 사회였던 것이다55).
그렇다면 세 번째 척도인 ‘방벌론’과 같이 ‘위민통치’의 수탁자가 치명적인 문제
를 일으키고 있을 경우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주희의 『맹자집주』에
는 그런 저항권과 혁명권에 대한 ‘민’의 접근에 대해서도 부정적 뉘앙스가 흐르고 있
다. 사대부의 통제를 벗어날 위험성에 대한 세심한 경계의 표현이라 할 만한 것이다.

이 말은 오직 아랫사람이 탕왕이나 무왕과 같은 지극한 인자(仁者)이자 윗사
람이 걸(桀)이나 주(紂)처럼 지극한 난폭자인 경우에 한해서만 (방벌이-인용
자) 가(可)하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고서 함부로 행하게 되면 권력 찬탈과 임
금 시해라는 죄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56)
계몽주의적 사고에서 저항권이나 혁명권은 국민의 권리와 행복을 보장하고 유지
하기 위해 설립된 정부가 그 책임을 다하지 않고 민의를 배반하는 경우에 발동되는
비상수단이다. 이에 비해, 주희의 ‘방벌론’에 대한 시각은 지나치게 소극적이다. ‘위
민통치’의 수탁자들이 민의를 배반하는 경우 그 잘못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지를
논하는 대목에서 신분제적 한계선을 긋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맹자의 혁명론의 논
지를 위정자에 대한 경계용의 발언으로 이해하면서 혁명론 냄새를 막기 위해 그 위
에 뚜껑을 덮어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57)고 할 만한 것이다. 그런 만큼 폭군이나 암
주에 대해서는 사대부들이 나서서 그 수정이나 탄핵을 추진할 수 있다고 간주했겠지
만, 위민통치 수탁자의 한 축이 되는 사대부 자신들이 민의를 배반할 경우에 대해서
54) Ibid., p.157.
55) Ibid., p.151. 반계는 공무담임을 위한 유력한 접근통로인 교육문제에 대해서도 여전히 신분제적
틀 안에 갇혀 있다. 그의 ‘학교론’에서 학교 입학의 자격조건에 대한 신분제적 선긋기는 여전하
다. 사대부의 경우 모든 자제에게 열려 있지만, 서민의 자제에 대해서는 준재(‘凡民俊秀者’)에게
만 입학을 허용하고 일반서민‧공상인‧시정잡배‧무격(巫覡)잡류‧공사천인과 그 자제를 배제하고 있
다( 磻溪隨錄 卷10 敎選之制下 貢擧事目). 이는 당시 문과‧생진과 과거시험에 양반 서얼 및 양
인 이하 신분층이 응시하는 것을 불허하고 이에 더해 사조(四祖)에 현관(顯官)을 배출하지 못한
집안의 자제를 배제하던 경국대전 의 엄격한 신분제적 입학조건에 비하면 조금 완화된 것이기
는 하나, 서민준재의 입교허용제가 실행되더라도 실상은 기존제도와 진배없는 것으로 전락했을
확률이 높다. 서민 가운데 ‘준수자’를 판별하여 공거(貢擧)하는 일 자체가 기존 사대부의 신분적
편견과 자의에 녹아나기 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위의 책, p.193.
56) 朱熹, 孟子集註 梁惠王章句上 8, “斯言也, 惟在下者有湯武之仁, 在上者有桀紂之暴, 則可. 不然
是未免簒弑之罪也.”
57) 안병주, op. cit., p.24.
‘유교’룰 둘러싼 개념적 혼란에서 벗어나기 ┃ 159

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58).
이상과 같이 ‘위민통치론’은 민본주의 이념을 그 바탕에 두고 있는 것이기는 하
나, 그 해석 및 현실적 적용 방향의 소극성에서 볼 때 실제로는 ‘민본’적인 것이 아
니라 ‘사본(士本)’적인 것이라 할 만한 성질이었다. 그것은 사대부의 신분적 치자 지
위를 ‘현자에 대한 통치권의 위탁’ 논변에 의해 정당화하든, 맹자의 ‘노심-노력 분업
론의 귀천론적 왜곡’에 의해 정당화하든, 결국 둘 다 민유방본론‧민귀군경론 등에 대
한 ‘소극적’ 해석, 즉 백성은 근본일지라도 어리석어서 자치능력이 없거나 육체·정신
노동의 분업구조상 자치가 불가능하므로 충심으로 백성을 위하는 현군과 사대부 현
자들이 통치를 해주어야 한다는 식의 소극적 해석에 의해 논리적으로 정당화하고 있
었던 것이다59).
동일한 공자철학에서 발원한 민본주의라 할지라도, 계몽기 유럽에서는 크릴이 논
증했듯이 그것이 민주주의적 이념이나 원칙의 강화나 촉진에 기여한 데 반해, 위에
서 살펴본 조선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민’은 어리석고 자치능력이 없으며 위로
부터의 적절한 통제 없이는 질서를 교란하기 쉬운 존재로 규정당하고, 오히려 ‘위민
통치’라는 이름으로 그 통치주체의 한 축인 사대부의 위상과 역할이 더 크게 클로즈
업되는 비(非)민주주의적 방향이 온존‧강화되고 있었다. 전자는 민본주의의 가능성을
최대한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민본’에 내포된 위민통치(government for the people)
의 측면만이 아니라 그것의 실질화를 위한 민주적 통치(government by the people)
의 측면을 창조‧촉진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한 것이다. 그런데 비해 후자는 민유방본
론, 민귀군경론, 방벌론 등을 기존의 신분질서에 제약된 소극적 해석에 가둬 그 탈신
분제적 가능성을 정치적으로 무력화시키고, 일종의 세습적 귀족에 의한 위민통치라
는 귀족주의적 민본주의의 정당성만을 보수적으로 고착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58) 조선시대에 왕성히 전개된 도덕성과 사욕에 대한 논의에서 군주나 백성을 의식한 논의는 많지만,
사대부 자신들에 대해서는 자타검열 정도의 차원에 머물러 있는 인상이 강하다.
59) 황태연, op. cit., p. 120.
160 ┃ 고 희 탁

Ⅳ. 귀족주의적 민본주의에서 탈귀족주의적·민주주의적 민본주의로
어쩌면 혹자가 여기까지의 논의의 흐름만으로 성급하게 결론을 추론하려 한다면,
동일한 민본주의라는 뿌리에서 민주주의적 민본주의를 산출한 계몽기 유럽과 귀족주의
적 민본주의를 고착화한 조선이라는 대조를 보여주는 이 글 역시 그에게는 마치 앞에
서 언급했던 서구중심주의의 오리엔탈리즘적 구도를 재확인해주는 것처럼 비칠지 모르
겠다. “전통적 유교는 비민주 혹은 반민주 둘 중 하나였다 …‘유교 민주주의’는 형용모
순”60)이라거나, “아시아의 민주주의는 인민을 위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인민에 의한 것이 아니다”61)는 의견이 여전히 한편에 강력하게 존재하니 말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후자만을 염두에 둔 ‘반쪽만의 역사’를 가지고 마치 전체인
양 취급하는 일반화의 오류에 빠져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물론 서구중심주
의의 오리엔탈리즘 역시 그렇다. 게다가 오리엔탈리즘은 크릴이 꽤 상세하게 논증한
이른바 ‘이스턴 임팩트(Eastern Impact)’62), 즉 공자철학과 당대 중국이 계몽기 유
럽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완전한 무지의 표명이라 할 만한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여기서 넓게 보아 민본주의의 본고장이라 할 동아시아에서
귀족주의적 민본주의만이 아니라 거기서 벗어난 탈(脫)귀족주의적 민본주의나 민주
주의적 민본주의로 향하는 의식이 용출(湧出)되어온 사실들을 새로이 인식하지 않으
면 안 된다. 거기에 전자와 친화적인 ‘또 다른 반쪽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탈귀족주의적 민본주의의 사례로서 주목해야 할 것은 18세기 영‧정조 탕평
군주시대에 왕권강화책과 맞물려 군주를 중심으로 조정 주변에서 당시 공공연히 사
용된, 그러나 오늘날에는 아직 그렇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민국(民國)’ 이념이다63).
그것은 민유방본론에 대한 종전과는 다른 해석의 반영이다. 다음은 영조의 민본주의
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해석이다.
60) 헌팅턴, 강문구·이재영 역, 제3의 물결: 20세기 후반의 민주화 (서울: 인간사랑, 2011), pp. 416·425.
61) 猪口孝, “アジア的價値とアジアの民主主義,” 第1回靜岡アジア‧太平洋學術フォ-ラム記錄集 (1997), p. 10.
62)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 서구인들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인들에게까지 회자된 이른바 ‘웨
스턴 임팩트’라는 표현에 빗댄다면, 크릴의 논증내용은 실로 ‘이스턴 임팩트’라고 부를 만한 사
상사적 사건을 묘사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63) 이태진, “18세기 한국사에서의 民의 사회적·정치적 위상”, (재)한일문화교류기금 주최 제10회 한
일·일한합동학술회의 <한국과 일본에 있어서의 시민의식의 형성과정> (1997). 이 논문에서 처음
으로 탕평군주들의 ‘민국’ 이념이 소개·분석되었다. 같은 제목의 논문이, 이태진·김백철 편, 조
선후기 탕평정치의 재조명(상) (파주: 태학사, 2011)에 실려 있다.
‘유교’룰 둘러싼 개념적 혼란에서 벗어나기 ┃ 161

서경 에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기에 근본이 단단하면 나라가 안녕하다’고 하
였다. …오! 하늘이 그들(백성들-인용자)에게 임금과 스승을 만들어주시는 것은
곧 백성을 위한 것이다(作之君, 作之師, 卽爲民也). 백성을 위해 임금이 있는 것
이지, 임금을 위해 백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爲民有君, 不以爲君有民也).64)
원래 군사정변으로 성립의 기틀을 마련한 조선왕조는 민본주의를 기본적 통치이
념으로 내걸고 건국과 지배의 정당성의 근거로 삼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앞서 살펴
보았듯이 사대부들은 민본주의에 대한 소극적 해석을 통해 귀족주의적 위민통치를
민본주의 구현의 가장 바람직한 방안으로 못 박고 있었다. 그리하여 ‘민귀군경론’의
논리상 ‘가장 가벼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대부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그들은 강력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백성이란 나라의 근
본이고, 임금이란 백성의 주인”65)이라는 표현에서처럼 ‘임금 우위의 군민관계’에 기
반하여 ‘백성의 나라’가 아닌 ‘임금의 나라’ 혹은 ‘임금과 사대부의 나라’로 간주하
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종전의 귀족주의적 위민통치론에서 군주와 백성의 관계는
반드시 관리나 사대부를 매개로 한 간접적 관계였고 따라서 군주가 얻어야 하는 것
은 민심 이전에 사대부의 마음이었다.
그런데 반해, 위에서 본 영조의 민본주의 해석은 그간의 민본주의에 대한 소극적
해석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고를 ‘민국’ 이념에 담아 당대의 체제에 대한 진
단과 재정비의 깃발로 삼았다. ‘민국’ 이념에 의해 ‘소민’(小民=서얼·중인·양민·천민·노
비)의 보호를 국가의 ‘존재이유’로 규정하고, 탕평군주들이 직접 나서 비리를 범하는
사대부들에 대한 규탄과 단속, 민생을 내팽개치고 당쟁을 일삼는 사림사대부들에 대한
탄핵과 함께 훈구사족의 우월권을 박탈하는 방향으로 체제를 재정비해간 것이다.
그 배경에는 당대에 이미 『정감록』의 횡행과 개벽변란 사건들의 빈발을 통해
상당히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한 반왕조적 움직임이나66) 향전(鄕戰)을 비롯한 지방
각지에서 전개된 향촌사회의 권력구조 변동 양상67)에서 나타나는 백성들의 전반적
64) 承政院日記 영조31년 1월 6일조.
65) 燕山君日記 연산군1년 7월 17일조.
66) 고성훈 외, 민란의 시대 (서울: 가람기획, 2000); 백승종, 정감록 미스테리 (서울: 푸른역사,
2012) 등 참조.
162 ┃ 고 희 탁

인 신분상승·신분해방을 향한 열망의 표출이 존재한다. 18세기 탕평군주들은 그런
반왕조적 움직임을 무마하고 탈신분제적 열망과 민생론적 요구 등을 비롯한 아래로
부터의 민압(民壓)을 적극 수용하며, 소민들의 정치적 지위향상과 참정 요구에 적극
호응하여 새로운 정치체제의 구축을 모색한 것이다. 이처럼 ‘민국’ 이념은 백성의 정
치적 성장과 이에 대한 탕평군주의 대응과 수용의 합작품이었고, 그 과정에서 ‘민’과
‘국’을 일체화하는 의미의 합성어 ‘민국’은 등장했다68). 그런 만큼 탕평군주들에 의
해 추진된 “추쇄법의 유예·폐지를 통한 간접적 노비혁파와 직접적 시(寺)노비 해방
안 마련, 임금노동 촉진, 서얼 등용, 법전 편찬, 어사제도 강화·개편, 상언·격쟁제도
활성화, 소민을 위한 세제·부역제도 개편 등”69)의 친소민적 개혁조치에는 종전의 사
대부 중심의 귀족주의적 민본주의로부터의 탈피와 함께 신분제 장벽에 대한 해소나
완화, 공무담임을 둘러싼 평등적 지향이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탕평군주의 시대와는 정반대의 경우, 즉 폭군이나 암군에 대해서는 주자
학적 해석과 다른 길이 존재했었던 것일까? 방벌론에 대한 해석에서 이를 찾는다면,
17세기 말 도쿠가와시대의 유학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齋)의 사례에서 가장 근원적인
전환의 전형이 보인다. 주자학 학습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던 그는 주자학의 틀을 벗
어나 논어 와 맹자 로 직접 돌아가 공맹철학의 원뜻(古義)을 발견하고, 앞서 언급
한 마테오 리치의 경우처럼 “주자학은 공자가 아니다!”고 선언한 케이스다70).

탕(湯)·무(武)의 방벌과 같은 사례는 도(道)라 해야 한다. …천하공공의 도(天
下公共之道)에 따른 것… 천하를 위해 잔학한 자를 제거하였기에 인(仁)이라
하고, 천하를 위해 도적을 물리쳤기에 의(義)라 하는 것이다. 당시에 만일 탕·
무가 걸(桀)·주(紂)를 방벌하지 못하여 그 악정이 여전하다면, 반드시 탕·무와
같은 인물이 나타나 반드시 이들을 없애지 않았으랴. 그런 인물이 위(上)에
있지 않았다면 아래(下)로부터 출현했을 것이며, 한 사람이 이를 잘 실행할
수 없었다면 천하의 만민이 들고 일어나 이를 실행하지 않았으랴.71)
67) 김인걸, “조선후기 향권(鄕權)의 추이와 지배층 동향,” 한국문화 , 제2권 (1981); 고석규, “19세
기 전반 향촌사회세력간 대립의 추이,” 국사관논총 , 제8권 (1989) 등 참조.
68) 황태연, op. cit., pp. 158-159.
69) 김백철, 조선후기 영조의 탕평정치 (파주: 태학사, 2010); 이태진, 새 한국사 (서울: 까치,
2012) 등 참조.
70) 고희탁, “에도시대 ‘민’의 정치적 각성과 그 역설,” 일본사상 No. 22 (2012) 참조.
‘유교’룰 둘러싼 개념적 혼란에서 벗어나기 ┃ 163

그는 여기서 탈주자학적 해석에 의거하여 탕왕과 무왕에 의한 역성혁명의 사례
를 종전과 같이 ‘역사적 예외상태’로서의 ‘권(權)’이 아니라 ‘천하공공의 도’라는 ‘보
편적 일반원칙’의 ‘도(道)’로서 규정하고, 유사경우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대항과 정
치참여를 ‘민’의 정치적 의무로서 위치지우고 있다. 백성들도 악정이나 폭정에 대한
정치적 저항의 주체의 일원으로서 그 존재를 인정받게 된 그의 해석에 따르면, 종전
의 주자학의 귀족주의적 민본주의와 그 신분제적 정당화를 타파할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한 것이다. 더욱이 “『맹자』를 실은 배는 반드시 침몰한다”는 속설조차 나돌
정도로 맹자의 논의가 도쿠가와시대에 가장 금기시된 유학적 이론이었고72), 그런 논
의를 설혹 알고 있었다 해도 그것을 쉽게 내면화하기 어려웠을 사무라이시대 한가운
데에서의 주장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리고 도쿠가와시대는 물론 전근대 동아
시아에서 ‘아랫사람’이던 백성이 그때까지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통치대상이자
동원대상으로만 간주되어 수동적‧소극적 존재로서만 요구받고 있었던 사정을 고려한
다면, 그의 ‘천하공공의 도’ 명제와 방벌론 해석의 근원적 전환은 귀족주의적 민본주
의에서 민주주의적 민본주의로의 정치철학적 전환을 상징한다.
그렇게 보면 앞서 보았던 조선시대 탕평군주들의 대두와 1800년 정조 급사 후의
탕평군주의 부재라는 조건의 변화가 이른바 ‘민란의 시대’를 유발했을 가능성이 크
다고 유추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동학(東學)의 등장도 이해해야 한다.
즉 그런 상황이 조성된 것은 단순히 객관적 상황이 나빠졌기 때문에 일어선 것이 아
니라, 당대를 탕평군주의 시대와 비교하여 국가공공성의 파탄적 상황으로 인식하고
그 상황에 대해 주관적으로 ‘참을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들고 일어선 측면이 강
하다73). ‘민란의 시대’에는 종전의 민란에서 일반적이던 단순한 불만의 폭발이나 울

71) 伊藤仁齋, 語孟字義 權 제4조, “先儒又謂, 如湯武放伐, 伊尹放太甲, 是權. 此亦不深考耳. 若伊尹
之放太甲, 固是權, 如湯武之放伐, 可謂之道, 不可謂之權, 何哉? 權者, 一人之所能, 而非天下之公共.
道者, 天下之公共, 而非一人之私情. 故爲天下除殘, 謂之仁. 爲天下去賊, 謂之義. 當時藉令湯武不放
伐桀紂, 然其惡未悛焉, 則必又有若湯武者誅之. 不在上則必在下. 一人不能之, 則天下能之. …蓋以合
於天下之所同欲也. 唯湯武不狥己之私情, 而能從天下之所同然, 故謂之道. 漢儒不知此理, 故有反經
合道之說. 宋儒有權非聖人不能行之論. 其他非議孟子之說者, 皆不知道爲天下公共之物, 而漫爲臆說
耳”.
72) 野口武彦, 王道と革命の間: 日本思想と孟子問題 (東京: 筑摩書房, 1986), p. 6.
73) 토크빌, 이용재 역,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혁명 (서울: 박영률출판사, 2006)은 이와 유사한 시각
에서 프랑스대혁명의 발발을 조명하고 있다.
164 ┃ 고 희 탁

분의 분출, 파괴 및 약탈행위 등이 점차 사라져갔다. 그 대신에 당대와 탕평군주시대
와의 낙차를 문제시하여 그들 자신의 힘을 보태어 ‘민국’의 회복을 스스로 이루고자
했던 성격을 띤다. 그리하여 ‘민국’ 이념에 의거한 정책 및 대민업무를 수행해야함에
도 그렇지 못한 관리를 대신하여, ‘민’ 스스로 그것을 대신 수행한다는 ‘대집행(代執
行)’ 논리74)에 의해 처형을 각오한 대표를 선발하고 그 지도에 따라 불법을 자행하
는 탐관오리를 질서문란의 원흉으로서 추방하거나 그 대표로 하여금 상경하여 국왕
에게 직소하게 하는 형태의 민란이 빈발했던 것이다75). 물론 ‘인즉천(人卽天)’과 ‘보
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 아래 결집한 동학농민의 1차, 2차 봉기 이유와 전개상황
역시 잘 알려진 대로 ‘대집행’ 논리를 더 확장시켜 민본주의를 민주주의적 방향으로
더 강하게 추동하는 것이었음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이와 같이 민본주의에만 한정해도 ‘비민주’나 ‘반민주’로 불릴 만한 사대부 중심
의 귀족주의적 민본주의만이 아니라, 크릴이 서구 계몽주의 형성이나 촉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하는 공자철학 혹은 ‘초기유교’에 가까운 민주주의적 민본주의
버전이 군주측에서도 백성측에서도 형성·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또
다른 반쪽의 역사’의 존재로 하여금 ‘웨스턴 임팩트’ 이후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면
서도 동아시아가 비교적 서구 민주주의에 친화적인 길을 걷게 했을 법하지 않은가.

Ⅴ.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유교’라는 동일한 단어로 표현되어도 그 내포는 동일하지
않다. 적어도 민본주의에 한정한다면, 크릴이 구분했듯이 민주주의에 친화적인 공자철
학인가, 전제주의나 귀족정치에 친화적인 신유교인가에 따른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 두 갈래를 단지 ‘유교’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린 채, “유교에는 군주
가 성왕이 되어야 한다는 도덕적 요청으로서의 유교도 있고, 현실 군주를 성왕으로
칭송하는 전제주의 이념으로서의 유교도 있다. 현상 비판의 윤리적 기제로서의 유교,
74) 배항섭, “19세기 지배질서의 변화와 정치문화의 변용,” 한국사학보 , 제39권 (2010) 참조.
75) 정창렬, “조선후기 농민봉기의 정치의식,” 한국인의 생활의식과 민중예술 (서울: 성균관대학교 대동
문화연구원, 1984); 이이화, “19세기 전기 민란 연구,” 한국학보 , 제35권 (1984); 한명기, “19세기 전
반의 반봉건항쟁의 성격과 그 유형,” 1894년 농민전쟁연구(2) (서울: 한국역사연구회, 1992) 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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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 유지의 합리적 기제로서의 유교가 역사적으로 다 존재했다”76)는 식으로 애매
하게 구분하기에는 그 차이는 너무 크다. 동일논문에서 김상준이 ‘아시아적 가치론’
에 대해 “모두가 친족주의 또는 유사 친족적 공동체주의를 유교적 가치의 핵심으로
간주… 개발독재와 유교를 파트너로 본 것… 그것이 유교라면 말류의 유교”라고 비
판하면서, “‘자유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친족주의나 혹은 유사 친족주의를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박약하다. 유교 공동체 의식의 본령은
천하위공 사상에 있지, 좁은 친족주의에 있지 않다”77)고 정리하는 것처럼, ‘유교’에
는 ‘천하위공(天下爲公)’과 ‘친족주의’ 두 버전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본말(本
末)의 관계로 취급해서는 오리엔탈리즘의 멍에가 유발한 인식론적 혼란을 깨끗이 정
리하기 어렵다. 그것들은 확연히 서로 다른 별도의 두 가지 버전이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앞으로는 ‘유교’라는 애매모호한 개념 사용을 지양하고, ‘공자철학’(혹
은 공맹철학)과 ‘신유교’(혹은 신유학)로 엄밀하게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럴 때만이 앞서 다룬 ‘민국’ 이념이나 동학 등에서 나타나는 탈귀족주의적
혹은 민주주의적 민본주의의 새 흐름들의 역사적 좌표를 온전히 포착해낼 수 있을
것이며, ‘근대적’ 변동기에 보이는 동아시아문명권과 서구민주주의와의 상대적 친화
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상에서 볼 때, 이 글에서 살펴본 크릴의 두 갈래의 유교 규정과 민주주의와의
친화성에 따른 구분은 대단히 계발적이다. 이런 크릴의 연구가 동아시아 전역에서 서
구중심주의가 대단한 기세를 떨치며 상식화해간 20세기 중반에 발표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의 연구는 서구중심주의의 근원적 문제성이나 유교의 두 가지 버전에
대해 성찰적으로 재검토하는 데에도, 그리고 여전히 그런 사실조차 잘 알지 못하거나
그런 사실에 대해 무관심한 현재 한국의 학계에 경종을 울린다는 의미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목탁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크릴의 연구를 업그레이드시킨 듯한 연구가
줄을 잇고 있다는 점78), 그리고 탈귀족주의적 혹은 민주주의적 민본주의 버전에 대
한 역사적 연구도 진척되고 있다는 점79) 등은 매우 고무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76) 김상준, “유교 윤리성과 비판성: 21세기 문명 재편의 한 축,” 사회사상과 문화 , 제28권 (2013), p. 70.
77) Ibid., p. 72.
78) 황태연, 공자와 세계 (1)-(5) (서울: 청계, 2009); 안종수, “볼테르와 유교,” 철학논총 , 제65권
(2009); 조혜인, 동에서 서로 퍼진 근대 공민사회 (서울: 집문당, 2012); 전홍석, 독일 계몽주
의의 유학적 기초 (서울: 살림, 2014); 황태연·김종록,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 (서울: 김영
사, 2015) 등 참조.
79) 이영재, 민의 나라, 조선 (파주: 태학사, 2015); 황태연, 대한민국 국호의 유래와 민국의 의미
(서울: 청계, 2016) 등 참조.
166 ┃ 고 희 탁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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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 고 희 탁

[English Abstract]

An Escape from the Conceptual Confusion on
Confucianism: Using Confucius Philosophy
Exerting a Strong Influence on the European
Enlightenment as a Clue to the Problem
KO, Hee-Tak Sogang University

Although called by the same name, there are two opposing evaluations of
Confucianism. One considers it a philosophy compatible with modernity; the
other considers it pre-modern. How can we reconcile these two contradictory
perspectives?
This paper contrasts the Enlightenment-friendly philosophy of Confucius
and the Enlightenment-unfriendly Neo-Confucianism that is laid out by
American Sinologist H. G. Creel in his book Confucius: the Man and the
Myth(1949); in it he argued that Confucianism’s impact on European society at
the dawn of the Enlightenment is much more profound than is generally
known. This paper tries to prove that there have been two types of
Confucianism by showing the two types’ perspectives of ‘people-is-the-main’
principle (民本主義), that is to say the existence of aristocratic and democratic
Confucianism.

Key Words ┃ Confucianism, Orientalism, European Enlightenment, Eastern Impact, Confucius
philosophy, the ‘people-is-the-main’ principle, Neo-Confucianism

논문투고일: 2016.5.16 / 심사의뢰일: 2016.5.29 / 게재확정일: 2016.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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