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익. 2012. “조선시대의 人權 문제.” 『정치사상연구』(한국정치학회) 18:1, 53-
조선시대의 人權 문제*
23)
이상익
부산교육대학교
인권사상은 근대 서구의 계몽주의로부터 발원하는
이 인권을 존중한다는 것은 어느 문화권이든 공유하고
바, 계몽주의는 1차적으로는 자유주의(제1세대 인권론)
있는 내용이다. 다만 기본적 인권을 어떻게 설정하느냐
로 결실을 보았고, 2차적으로는 사회주의(제2세대 인권
하는 구체적 내용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맥
론)를 태동시켰다. 한편, 우리의 근대화는 서구화의 과
락에서 본고에서는 조선시대에 있어서 인권 문제를 살
정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전통은 ‘인권을 무시한 야만’
펴보았다. 조선시대의 기본 이념은 인륜을 통해서 인권
으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학자 이샤이
을 보호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신분차별과 남녀차별이
의 세계인권사상사에서는 인권사상의 前史로 동서양
엄존했고, 사생활의 자유가 많이 제약되었다는 것을 그
의 고전사상을 두루 망라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한계로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인권, 인륜, 계몽주의, 서구적 근대성, 조선
1. 서론
오늘날은 ‘人權의 시대’이다.1) 사람들은 누구나 인권을 말하며, 인권을 사회적 가치평가의
최우선적 척도로 삼기 때문이다. ‘人權’이라는 말은 서구 근대에 등장한 개념이다. 주지하듯이
오늘날의 인권사상은 근대 계몽주의로부터 발원한 것이다. 계몽주의는 1차적으로는 자유주의
(제1세대 인권론)로 결실을 보았고, 2차적으로는 사회주의(제2세대 인권론)를 태동시켰던 것
* 이 논문은 2011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사회과학연구지원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11-330-B00010).
1) ‘人權’에 대한 정의는 학자들에 따라 다양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인간이 인간이라는 種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가지는 권
리’라고 정의된다(미셸린 이샤이, 조효제 역, 세계인권사상사(서울 : 길, 2010), 36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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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한편, 우리의 근대화 과정은 서구의 과학기술 문명을 도입하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의 인권사상(민주주의)을 도입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이
룩하자’는 구호와 함께 ‘개인(국민)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구호로 서구화의 정당성을 주창
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전통은 ‘인권을 무시한 야만’으로 폄하되기 일쑤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학자 이샤이의 세계인권사상사에서는 인권사상의 前史로 전통 유학을
포함한 동서양의 고전사상을 두루 망라하고 있다.2) 이샤이의 주장에 의하면, 인권을 존중한다
는 것은 본래 모든 문화권의 공통의 이상이었던 것이다. 요컨대 동서를 막론하고 전근대의 사
상가들은 인권이라는 개념을 명확히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인권의 존중을 사회생활의 기본적
인 취지로 삼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롤즈의 萬民法에서는 ‘자유주의 국가’와 ‘위계적 국가’
가 萬民法을 공유할 수 있다고 보았다. 롤즈의 만민법은 만민이 ‘正義의 원칙’을 공유함으로
써 전 세계 모든 인류의 인권을 보장하고 평화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자
유주의 국가와 위계적 국가가 萬民法을 공유할 수 있다는 주장은 위계적 국가에서도 인권이 충
분히 보장받을 수 있다는 뜻인 것이다.3)
이샤이의 주장에 의하면 ‘전통 유교’에서도 인권 존중의 이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요, 롤즈
의 주장에 의하면 위계적 국가였던 ‘朝鮮’에서도 원리적으로 인권의 보장이 가능했던 것이다.4)
보다 근본적으로, 크릴은 ‘孔子의 사상’을 일관되게 ‘民主主義’로 해석한 바 있다. 메리앰(C. E.
Merriam)은 ‘민주주의의 기본 가정’을 “① 인간의 기본적 존엄성, 차별보다는 우애 원칙에 근거
한 개성의 보호 및 함양의 중요성, 근거도 없이 또는 과도하게 인간 차별을 강조하는 데서 비롯
된 특권의 폐지. ② 인류의 완벽성을 부단히 지향하는 것에 대한 확신. ③ 국가의 수익은 본래 집
단적인 수익이므로 크게 지연되거나 지나친 차별 없이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전사회에 분배되어
야 한다는 가정. ④ 사회의 방향과 정책의 기본적인 문제에 관해 최후 결정을 대중이 내리는 것
이 바람직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런 결정을 표현하기 위한 절차를 인정하고 그 결정이 정책으로
반영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 ⑤ 폭력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합의 과정을 거쳐 의식적인 사
회변화를 성취할 수 있다는 신념.”이라고 설명한 바 있는데, 크릴은 이 다섯 항목 가운데 ④를 제
외한 네 항목은 기본적으로 공자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또 크릴은 ④가 실
제로 가장 중요한 것 같지만, “기원전 5백년 경 공자가 중국의 정치를 농민계급에게 넘길 것을
2) 미셸린 이샤이, 조효제 역, 세계인권사상사(서울 : 길, 2010), 54∼126쪽 참조.
3) 롤즈, 장동진 외 역, 만민법(서울 : 이끌리오, 2000), 116∼122쪽 참조.
4) 롤즈가 말하는 ‘위계적 국가’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개인)으로 간주되지 않는 국가로서, ‘共同善으로서의
正義’를 추구하는 국가이다(롤즈, 만민법, 116∼118쪽 참조). 이렇게 본다면, 조선시대야말로 바로 ‘共同善으로서의 正
義’를 추구했던 ‘위계적 국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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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안하지 않았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라고 설명하였다.5) 크릴은 더 나아가 유교
가 ‘미국의 독립선언’이나 ‘프랑스 혁명’ 등 근대 서구민주주의의 발달에도 일정하게 기여했다는
점을 자세히 논한 바 있다.6) 이렇게 본다면, ‘傳統 儒敎’ 및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시대에서도 인권 보호의 이념이나 민주주의의 핵심 정신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전통 유교에는 ‘人權’이라는 개념도 없었고 ‘民主主義’라는 개념도 없었다. 그리
하여 많은 사람들은 전통 유교가 인권 그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誤解에 가깝다. 전통 유교는 물론 오늘날의 자유주의처럼 인권을 철저하게 옹호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 유교가 추구한 人倫共同體라는 관념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人權
論의 많은 내용을 발견할 수 있다. 요컨대 전통 유교는 단순히 인권을 부정한 것이 아니요, 인
륜을 통해서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식을 모색했던 것이다.7)
이러한 맥락에서, 본고에서는 조선시대에서의 인권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먼
저 조선시대의 人倫論을 개관하고, 조선시대에서의 인권보호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본 다
음, ‘인권의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관점에서 오늘날과 조선시대의 차이를 설명해 보고자 한
다. 본고에서는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인권론은 다분히 서구중심주의에 치우친 것임을
드러내고, 인권론에 있어서도 전통과 현대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함을 밝히고자 한다.
2. 조선시대의 인륜이념과 인권 문제
1) 유교적 입헌정신 : 人倫을 통한 人權의 보호
서구 근대의 입헌정신을 ‘인권의 보호’로 요약할 수 있다면, 전통 유교의 입헌정신은 ‘인륜
의 실현’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유교의 인륜론은 ‘五倫’으로 대변되거니와, 이는 다양한 인간관
계에서 요구되는 상호적 의무를 규정한 것이다. 요컨대 유교의 인륜론에서는 권리(인권)라는
관념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나의 상대방에 대한 의무는 곧 상대방의 나에 대한 권리가 될
5) 크릴, 이성규 역, 孔子 : 인간과 신화(서울 : 지식산업사, 2007), 204∼205쪽 참조.
6) 크릴, 孔子 : 인간과 신화, 제15장 <儒敎와 西歐民主主義> 참조.
7) 이승환, 유가사상의 사회철학적 재조명(서울 :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8), 203∼22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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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는 점에서, 전통 유교의 인륜론 역시 인권론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통 유교의 ‘五倫’을 살펴보기로 하자.
‘父子有親’은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께 효도하라’는 것이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으로 기르고 가르친다면, 어린 자녀는 양육받을 권리를 누리는 것이다. 또 자녀가 장성해
서는 부모를 받들고 부양한다면, 늙은 부모는 봉양받을 권리를 누리는 것이다.
‘君臣有義’는 ‘君主는 臣民을 정의롭게 대하고, 신민은 군주께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다. 전
통 사회에서 萬民의 행복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직책은 군주였던바, 따라서 군주에게는 가장
무거운 책임이 요구되었다. 정도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래의 백성들은 지극히 약하지만 힘으로 위협할 수 없고, 지극히 어리석지만 지혜로써 속일 수 없다. 그
들의 마음을 얻으면 복종하고, 얻지 못하면 배반하게 된다. (…) 그들의 마음을 얻는 방법은 역시 仁일 뿐
이다. 君主는 ‘天地가 萬物을 生育시키는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아 仁政을 행하여, 천하의 모든 사람
이 기뻐서 君主를 마치 자기 父母처럼 우러러볼 수 있게 한다면, 오래도록 安富尊榮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것이요, 危亡覆墜의 근심이 없게 될 것이다.8)
정도전은 군주가 신민의 자발적 충성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仁政뿐이라 하고, 仁政은 ‘天地
가 萬物을 生育시키는 마음’을 본받는 것이라 했다. 천지는 만물을 公正하게 生育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仁政이란 ‘모든 백성을 고르게 사랑으로 다스리는 것’이다.9) 한편 군주 및 그 밖의 통
치계급은 백성의 세금으로 먹고 산다. 정도전은 백성의 세금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의 의무를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孟子는 “野人이 없으면 군자를 봉양할 수 없고, 군자가 없으면 野人을 다스릴 수가 없다”고 하였다. 옛날 聖
人이 賦稅의 법을 만든 것은 한갓 백성으로부터 수취하여 자기를 봉양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백성들이 서
로 모여 살게 되면, 음식과 의복에 대한 物欲이 밖에서 공격하고, 남녀에 관한 情欲은 안에서 공격하여, 차
지한 것이 서로 대등할 경우에는 서로 다투게 되고 힘이 대등할 경우에는 싸우게 되어, 서로 죽이기까지
한다. 통치자는 法으로 그들을 다스려서,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평화롭게 해 주어야만 民生이 편안해지
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농사를 지으면서 병행할 수 없는 것이므로, 백성은 수확량의 10분의 1을 稅로
바쳐서 통치자를 봉양하는 것이다. 통치자가 백성으로부터 수취하는 것이 큰 만큼, 자기를 봉양해 주는 백
8) 三峰集 卷13, 朝鮮經國典 <正寶位>.
9) ‘君臣有義’라는 말에서는 ‘義(正義)’가 강조되고 ‘仁政’에서는 ‘仁(사랑)’이 강조되는바, 사랑과 정의는 일정 부분 차원을 달
리 하는 것이다. 그런데 仁政에서의 仁은 ‘모든 백성을 사랑한다’는 의미와, ‘모든 백성을 공정하게 대한다’는 두 의미를 지
니고 있다. 게다가 공자는 “오직 仁者만이 능히 남을 좋아할 수도 있고, 능히 남을 미워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論語 里
仁 3). ‘好․惡를 공정하게 한다’는 맥락에서 仁은 義와 일정한 지평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통유학에서는 仁과 義
를 구별하기도 하고, 仁에 義를 포섭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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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대한 보답도 역시 중한 것이다.10)
정도전은 賦稅 제도를 ‘통치자와 피치자의 호혜적 분업’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통치자는
백성에게 부세를 거두어 먹는 보답으로 민생을 안정시키는 공로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
한 맥락에서, 군주가 仁政을 베풀어 민생을 안정시키면 백성은 그 속에서 생존권을 보장받을 것
이며, 백성이 세금을 내며 충성을 바친다면 군주는 그 속에서 통치권을 보장받게 될 것이다.
‘夫婦有別’은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夫婦有別에는
다음의 두 뜻이 함께 들어있다. 첫째는 ‘남편이 할 일과 아내가 할 일이 다르다’는 뜻이다. 남편
은 밖에서 노동하여 생계를 조달하고, 아내는 집안에서 가사를 맡아야 한다는 것이 전통적 인
식이었다.11) 여기에는 부부가 서로 상대방의 역할을 존중하면서 서로 공경해야 한다는 의미가
함께 들어있다. 둘째는 ‘한 쌍의 부부와 다른 한 쌍의 부부가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는 姦通이나 姦淫 등 문란한 性 관계를 제어하여 부부의 이혼을 예방하고, 나아가 가
족의 해체를 막자는 취지였다.12) 전통유학에서는 男女의 결혼을 ‘萬福의 근원’으로 규정했다.
부부가 서로 위의 두 구별을 잘 지킨다면, 부부 모두에게 행복추구권이 보장되는 것이다.
‘長幼有序’는 가정과 사회에 모두 적용되는 내용이었다. 가정에서는 ‘형은 아우를 우애하고,
아우는 형을 공경하라’는 것이었으며, 사회에서는 ‘어른은 어린이를 사랑하고, 어린이는 어른을
공경하라’는 것이었다. 어른이 어린이를 사랑하면 그 속에서 어린이는 보호받을 권리를 누리는
것이요, 어린이는 어른을 공경하면 그 속에서 어른은 공경받을 권리를 누리는 것이다.
‘朋友有信’은 ‘친구 간에 서로 信義를 지키라’는 것이다. 朋友有信에는 ‘오래 사귀어 친근하
게 되더라도 서로 공경하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친구 간에 서로 신의를 지키고 각자의 인격
을 존중한다면, 그 속에서 각자의 권리가 충분히 존중될 것이다.
이상에서 五倫을 개관하였거니와, 모든 사람이 위와 같은 내용의 五倫을 실천한다면 어느
누구의 권리도 침해받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비판적 성찰을 요하는 것은 夫婦有別이다.
전통유학에서는 남편에게는 蓄妾을 허용하고 여자에게는 질투를 금지했다는 점이 문제되는 것
이다. 축첩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첫째, 축첩은 一夫一妻制의 근
본 취지에 어긋난다는 점이다. 전통유학에서는 부부관계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일부일
처제를 옹호했다. 그런데 남편에게는 축첩을 허용한다면 이는 실질적으로 一夫多妻制가 되는
10) 三峰集 卷13, 「朝鮮經國典」, ‘賦典’, 賦稅.
11) 이렇게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뚜렷하게 구분한 것은 전통 사회가 농경사회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여성의 사회
진출은 産業化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면서 여자가 가정에서 나와 사회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12) 곽신환, 「有別․禮․거룩함[聖]」, 동방사상과 인문정신(서울 : 심산, 2007), 411∼412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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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요, 그만큼 부부관계의 안정성은 파괴되는 것이다.13) 둘째, 남편에게만 축첩을 허용하는
것은 男女平等의 원칙에 어긋난다는 점이다. 따라서 남편에게 축첩을 허용하려면, 아내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제도적 혜택을 주어야 마땅한 것이다. 셋째, 축첩은 서얼에 대한 차별과 표리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에 서얼은 온전한 인격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요컨대 몇몇 남
편들은 스스로 서얼을 만들어놓고, 그 서얼의 인격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점
들은 분명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인바, 따라서 오늘날에는 축첩제가 이미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수준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았음도 비판할 수 있을 것이요, 인
륜이 과도하게 비대하여 개인의 자유를 충분히 긍정하지 못했음도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러나 조선시대가 인권이라는 관념 자체를 부정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조선시대는 인륜을 실현
함으로써 그 속에서 각자의 인권이 보호받도록 하는 체계를 모색했던 것이다. 이제 이러한 관
념이 실제 현실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2) 기본권 보장의 이념과 실제
① 生命權과 신체의 자유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여러 기본권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일 것이
다. 형벌은 한 사람의 ‘生命’을 박탈하는 것이기도 하고 ‘身體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기도 하
다. 이에 조선시대의 형벌제도를 통하여 조선시대에는 생명권과 신체의 자유가 어떻게 인식되
고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백성들이 禁法과 형벌의 구체적인 내용을 소상히 알게 하여, 억울한 처분이 없도록
노력하였다. 정도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리석은 백성이 잘 모르고 禁法을 어기는 일이 있을까 염려해서 해당 관청에 명하여 大明律을 方言으
로 번역하게 하여 대중으로 하여금 쉽게 깨우치게 했다. 무릇 處斷과 判決을 모두 大明律에 의거하게 했
으니, 위로는 皇帝의 規範을 받들고 아래로는 百姓의 生命을 존중하기 위한 것이다. 장차 백성들은 禁法을
알아서 범하지 않고, 刑은 방치되어 쓰이지 않게 될 날이 올 것이다.14)
13) 전통사회에서는 남편의 축첩을 허용하면서도 부부관계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 ‘아내의 질투’를 금지했던 것이다(질투는
七去之惡 가운데 하나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男性中心主義에 불과한 것이다.
14) 三峰集 卷14, 朝鮮經國典 憲典 總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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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刑律은 大明律을 그대로 準用하였다. 그런데 대명률의 내용을 백성들이 알
기 어려우므로, 太祖(李成桂)는 당시의 방언으로 대명률을 풀이하여 반포하게 했는데, 大明
律直解가 그것이다. 世宗이 訓民正音을 창제한 동기도 바로 백성의 인권을 보호하려는 것이었
다. <訓民正音序>에 잘 나타나 있듯이, 世宗은 어리석은 백성이 글자를 몰라 억울함을 하소연할
수 없는 실정을 가엽게 여겨, 누구나 쉽게 익힐 수 있는 글자를 만들어 보급했던 것이다.15)
둘째, 人命을 해친 죄에 대해서는 무겁게 처벌하고, 財物을 훔친 죄에 대해서는 가볍게 처
벌하였다. 정도전은 人命을 해친 범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한다.
사람은 다 같은 同類이며, 다 같은 우리 同胞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서로 친해야 하고, 서로 해쳐서는 안 된
다. 서로 해치는 것을 금하지 않으면 人類는 멸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남을 죽인 자는 死刑에 처하고, 남을
상해한 자는 죄의 輕重에 따라 상응하는 형벌을 가하는 것이다. (…) 예나 지금이나 형률을 제정하는 사람
은 모두 殺傷을 가장 무겁게 다루고, 싸움을 그 다음으로 다룬다. 이는 대개 형벌로써 형벌을 그치게 하여,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16)
정도전에 의하면, 人命을 해치는 범죄를 무겁게 처벌함은 人命을 해치는 범죄를 예방하여
모든 사람이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財物을 해친 범죄에 대해
서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사람의 본성은 다 착하며, 사람은 누구나 羞惡之心을 지니고 있다. 도적이 되는 것이 어찌 인간의 본래 심
정이겠는가? 恒産이 없는 사람은 그로 인해 恒心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추위와 굶주림이 절실해지면 禮
義를 돌아볼 겨를이 없이 대부분 부득이하게 도적이 되는 것이다. (…) 남자에게는 먹고 남은 곡식이 있고
여자에게는 입고 남은 베가 있어서,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충분하고 아래로는 처자를 기르기에 충분하
면, 백성들은 禮義를 알게 되고 풍속은 廉恥를 숭상하게 되어, 도적은 없애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질 것이
다. 그러나 백성의 욕심은 한이 없고,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은 쉽게 솟구친다. 만약 형벌을 밝혀서 이를 억
제하지 않는다면, 역시 금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書經에서는 “財貨로 인해 사람을 죽이고 넘어뜨리면,
모든 백성들 중에는 이를 미워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고 했다. 착한 본성을 근본으로 삼고 간사한 도적을
징계해야 한다.17)
정도전은 도적에 대해서는 한편으로는 백성의 恒産을 보장하지 못한 위정자의 책임을 강조
하고, 한편으로는 그것 역시 범죄라는 관점에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요컨대 도적에 대
15)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동준, 유교의 인도주의와 한국사상(서울 : 한울, 1997), 315∼319쪽 참조.
16) 三峰集 卷14, 朝鮮經國典 憲典 <人命鬪驅>.
17) 三峰集 卷14, 朝鮮經國典 憲典 <盜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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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는 되도록 가볍게 처벌하고, 먹고 살 수 있는 방도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셋째, 모든 소송에 대해서 三審을 제도화하고,18) 人身의 拘束과 拷問에 대해서는 자세한 규
정을 두었다. 經國大典에서는 ‘죄인의 拘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杖刑 이상의 범인은 구금하되, 문무관리라든지, 內侍라든지, 士族의 婦女라든지, 중이라든지 모두 임금께
보고하고 구금한다. 죽을 죄를 지은 자는 먼저 구금하고 나중에 보고한다. 70살 이상 15살 이하는 강도나
살인이 아니면 구금하지 않으며, 도적죄를 범한 자도 墨刑을 면제한다.19)
經國大典에서는 인신의 구속을 중대한 일로 인식하여 국왕의 승인을 받도록 규정하고,
노인과 어린이에 대해서는 특별히 더욱 배려한 것이다. 經國大典에서는 ‘죄인의 訊問’에 대해
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무릇 拷問을 할 경우에는 임금의 지시를 받아서 집행한다(訊問하는 刑杖은 길이가 3자 3치인데, 위는 1자
3치로서 둘레의 직경이 7푼, 아래는 2자로서 너비가 8푼이고 두께가 2푼이다. 아래 끝으로 무릎 아래를 치
되 정강이에는 이르지 않게 하며, 한 번에 30대를 넘지 못한다). (…) 3일 이내에는 고문을 두 번 하지 못하
며, 고문한 지 10일 뒤에야 형벌을 집행한다.20)
經國大典에서는 별도로 “관리가 형벌을 함부로 적용했을 때에는 杖刑 100대, 徒刑 3년에
처하며, 죽였을 경우에는 杖刑 100대에 처하고 영구히 관리로 등용하지 않는다.”21)는 규정을
두어, 위와 같은 규정을 엄수하도록 뒷받침하였다.
넷째, 죄수의 救恤에 대한 규정을 두어, 죄수라 하더라도 함부로 다루지 못하도록 금했다.
經國大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울에서는 司憲府, 지방에서는 觀察使가 옥의 죄수들을 보살핀다(해당 관리가 잘 보살피지 않아서 죄수
를 많이 죽였을 경우에는 엄중히 죄를 따진다). 만일 옥이 견고하지 못하거나 건물을 보수하지 않았거나
비가 새거나 또는 죄수들을 침해하는 등의 일이 있을 경우 杖刑 100대에 처한다. 죄인의 罪名과 처음 구금
한 날짜, 고문한 횟수와 죄를 판결한 건수에 대해서 해당 관청에서는 10일마다 적어서 임금에게 보고하며,
지방에서는 매 계절의 마지막 달마다 보고한다.22)
18) 經國大典 刑典 <推斷> 및 <私賤> 참조.
19) 經國大典 刑典 <囚禁>.
20) 經國大典 刑典 <推斷>.
21) 經國大典 刑典 <濫刑>.
22) 經國大典 刑典 <恤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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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18집 1호, 2012 봄
마지막으로, 노비에 대한 자의적 처벌 역시 금지되었다. 조선 초기에 주인이 자신의 노비를
임의로 처벌하고, 심지어는 죽이는 일까지 있었다. 이러한 일이 자주 일어나자, 世宗은 王命으
로 이를 금지시키고, 이를 어긴 주인을 처벌하도록 하였던 것이다.23)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시대에도 ‘생명의 존엄함’ 또는 ‘생명권’에 대해서 충분히 유의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조선시대에 拷問과 각종 體刑을 가한 것을 비
판할 수 있다. 그러나 전근대 사회의 일반적 관행에 비추어본다면, 조선시대는 오히려 고문과
체형에 대해서도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② 言論의 자유와 信仰의 자유
이제 精神的 自由權의 영역으로, 조선시대에 있어서 ‘言論의 자유’와 ‘信仰의 자유’ 등을 살
펴보기로 하자. 조선시대의 언론의 자유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靜菴 趙光祖와 栗谷 李珥의
논설이다. 먼저 조광조의 논설을 살펴보자. 조광조는 다음과 같이 ‘言路의 확대’와 ‘言論의 자유’
를 역설했다.
言路의 通․塞은 국가에서 가장 關鍵이 되는 것이다. 言路가 열리면 다스려져 편안하고, 막히면 혼란하여 망
한다. 그러므로 人君은 言路를 넓히는 데 힘써서, 위로는 公卿과 百執事로부터 아래로는 閭巷과 市井의 백
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言路를 맡은 사람이 없으면 스스로 말을 다할 수
없으므로, 이에 諫官을 설치하여 그것을 주도하도록 한 것이다. 諫官의 말이 비록 간혹 過當하더라도 모두
虛心坦懷하게 넉넉히 포용하는 것은 言路가 혹 막힐까 두렵기 때문이다.24)
조광조는 ‘言路의 通․塞’은 ‘국가 興․亡의 관건’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言路는 모든 사람에
게 개방되어야 하며, 비록 지나친 주장이라 하더라도 넉넉히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광조
는 言路에 있어서 諫官의 역할을 중시했다. 言路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더라도, 특히 言路를
담당하여 公論을 주도하는 직책이 필요하기 때문에 諫官을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諫官
은 言路를 확대하고 言論의 자유를 보호하는 데 앞장서야 하는 직책이다. 율곡도 조광조와 같
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殿下께서는 특별히 ‘의견을 구한다’는 傳敎를 내리시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통로를 크게 열어두십시
오. 위로는 조정의 신하로부터 아래로는 俗된 백성에 이르기까지, 안으로는 京邑으로부터 밖으로는 먼 시
23) 世宗實錄 16년 6월 27일.
24) 靜菴集 卷2 頁12, <司諫院請罷兩司啓一>.
조선시대의 人權 문제
61
골까지, 모두 時政의 폐단을 논하고 각각의 의견을 다 밝히도록 하십시오. (…) 만약 그 말이 절실하고 곧
아 時弊에 적중하는 것이라면, 곧 정치에 시행하여 空言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간혹 論議가 밝고 學問이
經世濟民에 통달한 자가 있다면, 그의 의견을 채택하고 또 그 사람을 관직에 등용하십시오. 비록 그 의견
이 비루하고 자질구레하여 주목할 만한 것이 없거나, 거리낌 없이 말하여 殿下의 뜻에 거슬리더라도, 또한
不問에 부치십시오. 이렇게 하면 ‘온 나라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으로 ‘한 사람의 聰明’을 삼을 수 있어서,
쌓인 폐단을 없앨 수 있고, 백성의 노고도 줄일 수 있습니다.25)
율곡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자유로운 토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깊이 인식하고, ‘言
路의 개방’과 ‘言論의 自由’를 옹호한 것이다. 율곡의 이러한 주장은 두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
다. 첫째는 군왕 한 사람의 지혜는 有限하므로, 온 나라 사람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公論의 비판을 수용함으로써 ‘公正性’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 맥락에서,
율곡은 ‘국가의 興亡’이 ‘言路의 開塞’에 달려 있다고 역설한 것이다.
이제 ‘良心의 자유’에 대해 살펴보자. 일찍이 孔子는 君子의 미덕으로 “남들과 조화를 이루
되 같아지지는 않음(和而不同)”을 거론했는데, 이는 양심의 자유를 옹호한 말로 풀이될 수 있
다.26) 남들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기본질서를 존중해야 하고, 남들과 같아지지
않기 위해서는 附和雷同하지 말아야 한다. 요컨대 전통유학에서는 그 사회의 기본질서를 벗어
나지 않는 한도에서 개인의 개성과 양심의 자유를 옹호한 것이다.27) 이는 조선시대의 경우에
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에 ‘言論의 자유’를 충분히 보장했다는 것은 곧 조선시대가 ‘良心의
자유’를 충분히 긍정했다는 증표인 것이다.28)
마지막으로, ‘信仰의 자유’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 초기의 ‘抑佛 정책’과 후기의 ‘天主敎 박해’
사건을 본다면, 조선시대에는 기본적으로 신앙의 자유가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에 대해서도 보다 곡진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조선 초기의 억불정책은 고려 말기의 불교가 끼친 사회적 폐단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주지
25) 栗谷全書 卷3 頁15, <諫院陳時事疏>.
26)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상익, 儒敎傳統과 自由民主主義(서울 : 심산, 2004), 190∼192쪽 참조.
27) 드 배리는 宋代의 儒學者들이 주체적으로 진리를 터득하려 하고(自得), 스스로 진리의 구현자로 自任한 것을 들어 송대
의 유학을 ‘개인주의’로 해석한 바 있다(Wm. 시어도어 드 배리, 표정훈 역, 중국의 ‘自由’ 전통(서울 : 이산, 1998), 106
∼127쪽 참조).
28) 혹자는 조선시대의 많은 학자들이 ‘陽明學을 비판한 것’과 ‘斯文亂賊’ 사건을 들어서 ‘조선시대에는 양심의 자유가 없었
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먼저 陽明學과 관련하여, 조선시대에 제도적으로 양명학을 금지한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람들
은 각자 자신의 양심에 따라 陽明學을 택하기도 하고 朱子學을 택하기도 했을 뿐이요, 또 자신들의 양심에 따라 서로 비
판하고 반론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오히려 조선시대에도 양심의 자유가 있었다는 증표가 되는 것이다. 다음 斯文亂賊
사건과 관련하여, 이는 老論一派가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정치적 공세였을 뿐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나라가
양심의 자유를 보장함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사람들이 특정한 사람에 대해 ‘容共分子’라고 공세를 취하는 것과 같은 맥
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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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18집 1호, 2012 봄
하듯이, 고려 말기의 불교는 한편으로는 국정에 깊이 간여하여 국정의 혼란을 초래하고, 한편
으로는 거대한 이익집단으로 전락하여 민생을 괴롭혔다. 그리하여 조선의 건국자들은 정치의
영역으로부터 불교를 몰아내는 동시에, 불교사원이 누렸던 온갖 특권을 모두 박탈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불교는 중앙 정계로부터는 축출되었지만, 山間叢林에서는 여전히 건재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에도 ‘僧科’를 두고 있었거니와, 따라서 조선이 불교를 말살
하려는 정책을 폈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士族은 공식적으로는 불교를 비판했지만,
士族의 婦女子들은 절에 다니면서 佛供을 드린 경우가 많았음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金時
習이나 栗谷 등은 스스로 한 때 佛僧이 되기도 했었음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의 억불정책은 ‘개인의 신앙’을 탄압하자는 데 초점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불교집단의 정
치개입과 民弊’를 막자는 데 초점이 있었던 것이다.29)
조선 후기의 천주교 박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선에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된 것은 ‘尹持忠 사건’(1791년) 때문이었다. 윤지충은 천주교 교리에 따라 조상의 神主를
불태우고 祭祀를 폐지했다. 조정에서는 이를 계기로 천주교를 ‘滅倫亂常’으로 규정하고, 대대적
인 탄압을 자행하게 된 것이다. 이후 외국의 武力을 빌려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고 했던
‘黃嗣永 帛書 사건’(1801년)이 일어나자, 천주교는 또 한 차례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유교사회
에서 조상의 神主를 불태운다는 것은, 천주교사회에서 聖母像이나 十字架를 능멸하는 것과 마
찬가지로,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나아가 외국 군대를 불러들이고자 한 帛書나, 실제로 침략
군의 앞잡이 노릇을 한 행위는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었다.30)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
더라도, 이러한 것들은 이미 관용의 한계를 넘은 것이다.31)
조선 후기에 천주교와 유교 사이의 갈등이 깊었던 것은 상호간의 이해가 미흡했기 때문이
다. 마테오 리치는 天主實義에서 조선의 政敎理念이었던 朱子學을 총체적으로 부정했고, 조
선의 주자학자들은 천주교를 ‘惑世誣民의 邪敎’로 규정했다. 상호간의 기본 인식이 이렇게 정립
29)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기독교의 몇몇 거대한 敎會에 대
한 지탄이 일고 있음을 상기해 보자. 일부 거대한 교회의 牧會者들은 교회를 자신들의 私有物로 간주하여 專橫과 非理
를 일삼고, 또 때로는 도를 넘는 정치적 발언으로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하여 교회 스스로 국민의 지탄을 자초하
고 있는바, 국민의 지탄이 곧 ‘신앙의 자유를 부정함’은 아닐 것이다.
30) 1999년 11월,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한국사목연구소가 개최한 ‘한국천주교회사에 대한 大禧年 심포지엄’에서 발제자들
(여진천 신부, 최기복 신부 등)은 18세기 말 서양선박 요청사건, 제사금지에 따른 갈등, 민족 고유의 정서와 문화 무시,
민족운동에 대한 소극적 태도, 신사참배 허용 등을 교회가 저지른 대표적인 잘못으로 꼽고, 민족과 역사 앞에 반성한 바
있다(≪조선일보≫ 1999년 11월 11일자 보도 참조).
31) 로크도 로마교황에게 충성을 바치는 가톨릭은 영국에서 관용될 수 없다고 규정했었다(John Locke, “A Letter
Concerning Toleration” in Political Writings, edited and with an introduction by David Wootton, Penguin Books,
London, 1993. p.426).
조선시대의 人權 문제
63
된 이상, 상호간의 寬容이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따라서 천주교 박해사건을 두고 조선
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없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短見이다. 조선시대는 물론 오늘날과 같은 정도
의 신앙의 자유는 없었지만, 종교적 갈등이 극심했던 당시 서구 사회에 비추어본다면, 오히려
더 많은 신앙의 자유를 누렸던 것이다.
③ 財産權과 상속제도
이제 經濟的 基本權의 영역으로, 조선시대에 있어서 ‘財産權’과 재산상속 문제 등을 살펴보
자. 조선시대 사람들의 주요 재산은 토지와 가옥 그리고 노비였다. 먼저 토지에 대하여, 조선시
대에는 전통유학의 ‘王土思想’에 입각하여 ‘모든 토지는 국왕의 소유’라는 관념이 있었다.32) 그
러나 이는 ‘모든 토지는 國法의 適用을 받는다’는 의미였을 뿐, 개인의 소유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자손 대대로 상속할 수 있는 영구적인 권
리였다.33) 그러나 조선시대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은 절대적인 권리는 아니었다. 良人이 죄를
지어 賤人으로 강등되면서 그의 재산을 함께 몰수당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34) 또한 국가
는 필요에 따라 본인이 동의하지 않아도 그의 토지를 收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단순
한 탈취가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 주었던 것이다.35)
조선시대에는 奴婢(私賤)도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노비의 주인은 자신의 노비를 매매할 수
도 있었고, 자손에게 상속시킬 수도 있었다. 국가가 私賤(개인의 노비)을 징발하는 경우도 있었
는데, 그 때에는 물론 다른 公賤을 대신 지급하였다.36) 또 私賤이 국가에 功을 세워 免賤을 시
킬 경우에도 국가가 그 노비의 본래 주인에게 다른 公賤을 지급하도록 하였다.37) 요컨대 조선
시대에는 국가가 필요할 경우 개인의 재산을 강제로 收用했는데, 그 경우 반드시 합당하게 보
상했던 것이다.
이제 조선시대의 相續制度를 살펴보자.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家産은 자손에게 상속시키라
는 것이 조선의 국법이었다.38) 조선시대의 相續法은 재산을 남긴 사람의 遺書나 상속 당사자
32) 孟子(萬章上 4)에는 “모든 하늘 아래는 모두 王의 땅이며, 모든 땅의 끝까지 모두 王의 臣下이다(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라는 말이 보이는데, 이는 본래 詩經 小雅 <北山>에 보이는 내용이다.
33) 우병창, 「朝鮮時代에 있어서 財産法 硏究」(서울 :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269쪽 참조.
34) 그러나 추후에 復權되었을 경우, 그의 재산도 함께 돌려주었다.
35) 우병창, 「朝鮮時代에 있어서 財産法 硏究」, 116쪽 참조.
36) 우병창, 「朝鮮時代에 있어서 財産法 硏究」, 117쪽 참조.
37) 經國大典 刑典 <私賤>.
38) 世祖實錄 7년 7월 9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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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18집 1호, 2012 봄
간의 協議(和會)를 존중하였다. 經國大典에서는 遺書나 和會文이 없을 경우의 재산분배 원
칙을 대략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嫡子 사이에는 男․女를 막론하고 균등하게 분배하되, 다만
家系를 계승하는 嫡長子에게는 다른 자녀들보다 5분의 1을 더 받도록 하였다. 庶孼의 경우, 대
체로 良妾所生은 嫡子의 6분의 1을 상속받았고, 賤妾所生은 嫡子의 9분의 1을 상속받았다.39)
요컨대 조선시대의 상속법은 嫡子와 庶子를 차별하고, 嫡子들 사이에서는 長子를 우대했으며,
庶子들 사이에는 良妾所生을 우대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가면서 ‘嫡子들 사이의 균분상속제’는 ‘嫡長子 중심의 상속제’로 변화되
었다. 즉 出嫁한 딸은 상속에서 제외시켰으며, 아들들 사이에도 長子에게는 제사를 받들기 위
한 몫을 별도로 설정해 주었다. 이는 두 가지 사유로 인한 것이었다. 첫째는 宗法制의 정착이다.
종법제가 정착되기 이전인 조선 초기에는 여러 嫡子들이 돌아가면서 부모의 제사를 받들었고,
遺産도 균등하게 상속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기에 宗法制가 정착되면서 嫡長子가 모든 제사를
주관하고, 그 대신 더 많은 遺産을 상속하게 된 것이다.40) 둘째는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의 급
격한 인구증가 때문이었다. 인구는 증가하고 家産은 한정된 상황에서 균등하게 분배하여 모두
가 빈곤하게 되는 것보다는 家産을 長子에게 몰아주고 家門의 구심점이 되게 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41)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조선시대에는 국가가 개인의 재산을 함부로 탈취하지 않았으
며, 국법으로 개인 상호간의 침탈도 막았다. 상속에 있어서 본인의 유서나 상속권자들의 합의
를 우선으로 삼은 것은 당사자들의 자율성을 존중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오늘날의 원칙과 그
대로 부합하는 것이다. 다만 유서나 화회문이 없을 경우에 적용된 상속규정이 嫡․庶를 차별한
것에 대해서는 오늘날에는 수긍하기 어려운바, 따라서 이미 폐지된 것이다. 한편 嫡子들 사이
의 상속방식이 均分에서 長子中心으로 변한 것은 그 시대의 이념 및 경제적 상황의 변화에 따
른 것이었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是․非를 논하는 것보다 그 시대의
지도이념과 경제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39) 經國大典 刑典 <私賤> 참조.
40) 출가한 딸에게는 유산을 분배하지 않은 것에 대해, 오늘날의 女性學者(feminist) 이은선은 “출가한 여성이 친정의 제사
에 참여하지 않게 되면서 그 유산에 대한 권리도 사라지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이은선은 또 적장자 중심의 상
속제도는 당시 인구증가로 인한 불가피한 조치이기도 했다는 점을 들고, 이를 “家父長主義란 그 당시 인류가 처한 삶의
정황에서 자신의 삶을 계속해 나가기 위한 하나의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고 설명했다(이은선, 잃
어버린 초월을 찾아서(서울 : 모시는 사람들, 2009), 80쪽 참조).
41) 人類學者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구는 증가하고 자원은 부족한 상황에서는 균분상속제가 장자상속제보다 취약하다는 것이다
(마크 피터슨, 김혜정 역, 儒敎社會의 創出 : 조선 중기 입양제와 상속제의 변화(서울 : 일조각, 2000), 222∼229쪽 참조).
조선시대의 人權 문제
65
④ 參政權과 재판청구권
먼저 정치적 기본권으로서 參政權을 살펴보자. 오늘날의 참정권은 크게 投票權과 選擧權 그
리고 公務擔任權 등으로 구성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경우 투표나 선거와 같은 민주적 제도가
없었으므로, 본고에서는 공무담임권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참정권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조선시대는 良人과 賤人을 차별하는 신분제 사회였거니와,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良人만 공
무담임권이 있었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도 많아서, 良人이지만 특정한 관직에 진출하지 못하
는 경우도 있었고, 賤人이지만 관직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조선시대에 官職에 진출하는 주요 통로는 科擧와 門蔭이었다. 그런데 문음은 일정한 직급
이상 승진할 수 없었고, 과거만큼 권위나 명예가 없었다. 따라서 주요 관직에 진출하려는 사람
은 모두가 과거에 응시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과거는 크게 文官을 선출하는 文科, 武官을 선
출하는 武科, 通譯․醫療․藝術․法務 등 技術職을 선출하는 雜科로 구분되었는데, 그 응시자격을
신분에 따라 제한했다.
經國大典에서는 ‘罪를 범한 탓으로 영영 등용되지 못하는 자, 탐관오리의 아들, 再嫁했거
나 행실이 나쁜 여자의 아들과 손자, 서얼의 자손’은 文科와 武科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였
다.42) ‘罪를 범한 탓으로 영영 등용되지 못하는 자’란 賤人을 말한다. 요컨대 천인과 서얼은 文
科․武科에 응시할 수 없었으며, 良人이라도 行實이 나쁘면 응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良人은 士․農․工․商의 계급에 관계없이 원칙적으로 모든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
다. 다만 農民의 경우 대부분 형편상 士族보다 과거에 합격하기 어려웠다. 한편 工․商은 文科․武
科에는 응시할 수 없었고, 종이․책․의복․옹기․무기 등을 만드는 관직이나 물품을 조달하고 회계
를 담당하는 관직에만 진출할 수 있었다.43)
서얼은 文科․武科에 응시할 수 없었거니와, 이들은 雜科로 진출하도록 유도되었다. 이들은
雜科로 진출해도, 父의 품계에 따라 각자 승진할 수 있는 상한선이 정해져 있었다. 예컨대 “2품
이상 文官․武官의 良妾 所生은 정3품까지로 제한하고 賤妾 所生은 정5품까지로 제한하며, 6품
이상 文官․武官의 良妾 所生은 정4품까지로 제한하고 賤妾 所生은 정6품까지로 제한한다.”는
것이다.44) 또 서얼이라도 門蔭의 자격이 있는 경우에는 雜科를 거치지 않고도 技術職에 진출
할 수 있었다. 예컨대 “2품 이상 관리의 妾이 낳은 자손은 재능에 따라 司譯院․觀象監․典醫監․內
需司․惠民署․圖畵署 및 算學․律學 분야의 관직에 등용한다”고 하였다.45) 이와 같은 서얼에 대한
42) 經國大典 禮典 <諸科>.
43) 한영우, 朝鮮時代身分史硏究(서울 : 집문당, 1997), 22∼23쪽 참조.
44) 經國大典 吏典 <限品敍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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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18집 1호, 2012 봄
제한 규정을 ‘서얼의 禁錮’라 하거니와, 실제로는 서얼의 금고가 엄격하게 지켜진 것이 아니었
다. 서얼이 여러 통로로 높은 품계의 文官․武官에 진출한 경우도 많았으며, 또 ‘서얼의 許通’이
지속적으로 요구되어 시대에 따라 간헐적으로 禁錮가 풀리기도 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奴婢(賤人)의 경우이다. 천인은 文科․武科에 응시할 수 없었으나, 낮은 품계
의 관직에는 진출할 수 있었다.46) 그러나 천인으로서 고위관직(堂上官)에 진출한 예도 많았는
데,47) 이는 제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왕의 특별한 조치에 의한 것이었다.
이제 청구권적 기본권으로서 請願權과 裁判請求權을 살펴보자. 조선시대에도 자신의 억울
한 사정을 관청에 호소할 수 있었으며, 부당한 사안에 대해서는 소송을 제기하여 재판을 받을
수 있었다. 經國大典의 <訴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려는 사람은 서울에서는 주관하는 관리에게 제기하고, 지방에서는 관찰사에게 제기
한다. 그래도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司憲府에 제기하며, 또 억울한 사정이 있으면 申聞鼓를 친다. ○ 자기
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할 경우에는 모두 받아 심리해 주고, 허위로 고발하는 자는 杖刑 100대와 流刑 3천
리에 처한다.48)
經國大典에서 말하는 ‘訴冤’은 오늘날의 ‘請願’과 ‘裁判請求’를 겸하는 말이다.49) 개인이
국가에 의해서 권리를 침해당했을 경우에는 訴冤을 제기하여 是正이나 보상을 요구할 수 있었
고, 남으로부터 권리를 침해당했을 경우에는 訴冤을 제기하여 裁判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위의 인용문으로 보면, 개인은 동일한 사안에 대해 세 차례까지 訴冤할 수 있었거니와, 裁判 역
시 세 차례까지 받을 수 있었다.
개인은 또한 자기의 권익이 침해당하지 않았더라도, 남의 不正이나 非理를 고발할 수도 있
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자신의 직계존속이나 직속상관에 대해서는 중대한 사안이 아니고
는 고발을 할 수 없도록 하였다. 經國大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45) 經國大典 吏典 <限品敍用>.
46) 經國大典 刑典 <公賤>에서는 “각 관청의 奴로서 7품 이하의 벼슬을 하다가 물러나는 경우에는 원래의 身役으로 환원
시킨다”고 했다.
47) 한영우에 의하면, 조선 초기 成宗 이전에는 노비로서 堂上官에 오른 경우도 많았다(한영우, 朝鮮時代身分史硏究, 189
쪽 참조).
48) 經國大典 刑典 <訴冤>.
49) 권영성은 “裁判制度가 정비되지 아니하고 議會制度가 확립되지 아니한 시대에는 請願權이 개인의 權利救濟手段의 기능
뿐만 아니라 정치에 관한 국민의 희망이나 民情을 위정자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때로는 권력의 자의적
행사라든가 탄압에 항거하여 통치에 관한 願望을 개진하는 합법적인 抵抗權 行使의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고 한 바 있
다(권영성, 憲法學原論(서울 : 법문사, 1998), 515∼516쪽).
조선시대의 人權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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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손자, 아내와 첩 또는 노비로서 父母나 家長을 고발하는 것은 반역음모와 역적의 경우를 제외하고
는 絞刑에 처한다. 종의 아내나 남편으로서 家長을 고발한 경우에는 杖刑 100대와 流刑 3천리에 처한다.50)
宗廟社稷과 관련되는 문제이거나 불법적인 살인사건 이외에는 胥吏나 하인이 자기 관청의 官員을 고발하
는 경우, 品官이나 胥吏 또는 백성으로서 자기 道의 觀察使나 고을 守令을 고발하는 경우에는 모두 받아주
지 않고, 杖刑 100대와 徒刑 3년에 처한다.51)
반역음모와 역적은 宗廟社稷(國家)과 관련된 범죄였다. 직계존속에 대해서는 국가를 전복하
려는 범죄가 아니면 고발할 수 없게 했고, 직속상관에 대해서는 국가의 전복 및 살인사건이 아니
면 고발할 수 없게 한 것이다. 직계존속이나 직속상관을 고발할 수 없게 한 것은 위계질서를 중
시했기 때문일 것인바, 위의 인용문으로 보면 가족 내부의 위계질서가 더욱 중시된 것이다.52)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조선시대의 관직임용 제도는 한편으로는 신분을 차별하면서,
한편으로는 개인의 능력을 중시한 것이다. 양인과 천인 및 적자와 서자를 구분한 것은 신분을
차별한 것이지만, 양인 내부에서 科擧로 주요 관리를 임용한 것은 개인의 능력을 중시한 것이
다. 청원권과 재판청구권에 있어서는 대체로 오늘날과 같은 취지의 제도를 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 직속상관을 고발할 수 없게 한 것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으나, 직계
존속을 고발할 수 없게 한 것은 오늘날에도 친족 간에는 범인은닉죄를 적용하지 않는 것과 같
은 취지라고 볼 수 있다.
⑤ 平等權과 私生活의 자유
조선시대의 人倫論을 오늘날의 ‘基本權 보장’이라는 맥락에서 논의할 때, 가장 취약한 부분
은 ‘平等權’과 ‘私生活의 자유’였다.
먼저 平等權에 대해 살펴보자. 1세대 인권론자들이 강조하는 ‘法 앞의 평등’과 ‘기회균등’의
경우, 조선시대는 신분을 차별하는 사회였던 만큼 이러한 평등이 거의 실현되지 못했다. 이제
까지 살펴보았듯이, 신분의 차별은 ‘法 앞의 평등’과 ‘기회균등’을 근본적으로 가로막는 장벽이
었던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신분이나 계급 안에서는 자유로운 경쟁이 있었거니와, 이는 같은 신
분이나 계급 안에서는 법 앞의 평등이나 기회의 균등이 보장되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겠
50) 經國大典 刑典 <告尊長>.
51) 經國大典 刑典 <訴冤>.
52) 父母나 家長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히 고발을 제한한 것은 ‘위계질서’ 때문이라기보다는 가족 사이의 ‘혈연적 애정’을 중
시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전통유학에서는 父․子 간에는 서로 過失이나 罪惡을 감싸주는 것이 美德이라고 보았다(論
語 子路 18; 孟子 盡心上 3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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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18집 1호, 2012 봄
다. 특히 치열한 경쟁을 유도했던 科擧制度는, 후기로 갈수록 많은 폐단을 낳았음에도 불구하
고, 조선사회의 公正性을 담보하는 기능을 했던 것이다. 한편, 2세대 인권론자들이 강조하는
‘실질적 평등’ 즉 ‘사회적 弱者의 보호’에 있어서는 조선시대에도 오늘날 못지않은 제도를 갖추
고 있었거니와, 이에 대해서는 다음 節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조선시대에는 美風良俗을 장려한다는 명목으로 개인들의 私生活 영역에 대해서도 많은 제
한을 가했다. 經國大典에 보이는 규제사항들 가운데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권세 있는 집에 드나드는 자는 杖刑 100대와 流刑 3천리에 처한다. ○ 외국에 使臣으로 가면서 규정된 수
량 이외의 물건을 더 가지고 가는 자는 杖刑 100대에 처하며, 금지된 물건(각종 사치품)을 몰래 파는 자는
杖刑 100대와 徒刑 3년에 처한다. ○ 조정 관리로서 대궐에서 내보낸 侍女나 무수리와 결혼한 자, 관리 집
안의 여인으로서 산골짜기나 냇가를 찾아다니며 놀이를 벌이는 자 등은 장형 100대에 처한다. ○ 높고 낮
은 관리로서 紅色․灰色․白色의 겉옷과 白色의 갓을 쓴 자, 술잔 외에 金․銀으로 만든 그릇이나 靑畵白磁를
사용한 자, 꽃방석을 사용하는 자, 당하관 이하로서 결혼식에 각종 비단과 담요를 사용하는 자 등은 杖刑
80대에 처한다. ○ 獻壽․婚姻․祭享 외에 油蜜果를 사용하는 자, 상제나 일반백성이나 중으로서 都城 안에서
말을 타고 다니는 자는 杖刑 60대에 처한다. ○ 倫理를 어지럽혔거나 貪汚罪를 범한 관리, 행실이 바르지
못한 관리 집안의 여인(세 남자에게 다시 시집간 여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에 대해서는 臺帳에 등록하고
吏曹와 兵曹, 司憲府와 司諫院에 公文을 보낸다.53)
위와 같은 내용들은 한편으로는 人事請託․秘密貿易․奢侈․悖倫․不正腐敗 등을 막고, 한편으
로는 계급적 位階를 강조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54) 그러나 이는 대부분 ‘사생활의 자유’를 침
해하는 것인바, 그리하여 오늘날에는 위와 같은 규제들이 대부분 이미 사라진 것이다.
3) 社會的 弱者의 보호 문제
전통유학에서는 社會的 弱者의 보호에도 많은 관심을 쏟았다. 사회보장에 관한 전통유학의
기본 입장은, 어린이나 노약자를 보호할 책임은 기본적으로 가족에 있다는 것이요, 돌봐줄 가
족이 없는 경우에는 국가가 책임을 지고 돌보아야 한다는 것인바, 이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관철되었던 것이다. 우선 정도전의 朝鮮經國典에서 이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자. 정도전은 貧
民을 구제하기 위한 방도로 ‘義倉’을 설치한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53) 經國大典 刑典 <禁制>.
54) 위의 내용으로 보면, 상층계급은 더 화려한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私生活의 자유는 더 많은 제한을 받은 것이다.
조선시대의 人權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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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가뭄․질병은 天道가 운행하는 운수에서 발생하는 것으로서, 대대로 간혹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飢
饉이 일게 되면 백성을 다스리는 책임을 가진 사람은 그냥 앉아서 보기만 하고 이를 구제하지 않을 수 있
겠는가? 우리나라에서는 中央에 義倉을 설치하여 곡식을 저축하였고, 이 제도를 확대하여 지방의 州府郡
縣에도 각각 義倉을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매년 농사철이 되면 빈민으로서 種穀과 식량이 없는 사람에게
곡식을 대여하고, 가을에 수확이 끝나면 元本만 회수하여 뜻하지 않은 사태에 쓸 것으로 대비해 둔다. 만
약 흉년이 들면 의창의 곡식을 모두 풀어서 빈민을 진휼하고, 풍년이 들면 다음에 역시 원본만을 회수하여
장기간 이런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비축해 둔다. 이렇게 하면 기근이 들어도 백성에게 피해가 가지 않고,
풍년이 들어도 농민을 해치지 않으며, 곡식은 곡식대로 항상 비축되어 있으면서 백성들은 굶어 죽는 일이
없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법 중에서 가장 좋은 법인 것이다. 의창의 곡식은 출납할 때에는 급한 사람만 구
제하고 부유한 사람은 주지 않아야 하며, 사실을 확실히 파악하여 元額을 축나지 않게 해서 이 좋은 법이
폐지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55)
조선 초기에 설치되었던 義倉은 이후로 常平倉․賑恤廳 등으로 변신하면서 빈민구제 기능과
물가조절 기능을 겸하게 되었다. 의창은 조선 중기 이후로는 점차 폐단을 낳기도 하였지만,56)
그 본래의 취지는 빈민의 구제에 있었던 것이다.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또 하나의 제도는 흉년
에는 그에 상응하게 賦稅를 감면해 주는 損分減免法이었다.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삼고, 백성은 糧食을 하늘로 삼는다. 그러므로 徭役과 賦稅를 가볍게 하여 백성의
糧食을 풍족하게 해주어야 한다. 불행히도 홍수․가뭄․서리․곤충․바람․우박 등으로 피해를 입었을 경우, 그
피해의 多․寡에 따라서 賦役을 감면함으로써, 백성을 후하게 대해준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損分減免法
을 이미 시행하고 있어, 법령에 뚜렷이 나타나 있다. 有司는 이 법을 살펴서 거행해야 할 것이다.57)
손분감면법은 世宗 시대에는 年分九等法으로 구체화되어, 이후 經國大典에 그대로 반영
되었다.58) 해마다 豊․凶의 정도를 9등급으로 나누어, 풍년에는 많이 거두어 넉넉히 쓰고 흉년
에 대비한다는 것이었다.59) 양식의 지원, 조세의 감면과 함께 또 하나 필요한 것은 의료의 지원
이었다. 정도전은 ‘惠民典藥局’을 설치한 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라에서는 惠民典藥局을 설치하고, 官에서 약값으로 五升布 6천 필을 지급하여 이것으로 藥物을 갖추게
55) 三峰集 卷13, 朝鮮經國典 賦典 <義倉>.
56) 壬辰倭亂과 丙子胡亂으로 국가의 財政이 어려워지자, 조정에서는 義倉(還穀)을 재정확보의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여기
에 탐관오리의 횡포가 추가되어, 還穀은 본래의 취지와 달리 백성을 수탈하는 제도로 전락한 것이다. 이처럼 義倉이 본
래의 취지대로 운영되지 못하자, 鄕村民의 자치적 기구로 社倉이 발달하게 된 것이다.
57) 三峰集 卷13, 朝鮮經國典 賦典 <蠲免>.
58) 經國大典 戶典 <收稅> 참조.
59) 世宗은 土地의 肥沃度도 6등급으로 나누어(田分六等法), 租稅의 형평을 기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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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18집 1호, 2012 봄
하였다. 그리하여 무릇 질병이 생긴 자는 곡식이나 베를 가지고 혜민전약국에 가서 약을 구할 수 있게 하
였다. 또 元本의 10분의 1을 利子로 받아 항구적으로 약을 비치해 두어서, 貧民들로 하여금 疾病의 고통에
서 해방되고 夭折하는 厄運을 면하게 하였으니, ‘生命을 愛好하는 德’이 이렇듯 크다.60)
이상의 내용은 朝鮮經國典에 보이는 빈민구제책들로서, 이는 조선의 건국과 함께 시행된
것들이었다. 經國大典에서도 “각 고을에서는 백성들을 시켜 해마다 흉년구제의 물자를 준비
하게 한다. 고을 수령이 흉년구제에 관심을 돌리지 않아 굶주린 백성이 많이 죽었음에도 불구
하고 숨긴 채 보고하지 않을 경우에는 重罪에 처한다.”61)고 하여, 흉년의 구제를 고을 수령의
기본적 책무로 규정해 두었다. 한편 經國大典의 ‘惠恤’에는 貧民과 窮民에 대한 포괄적인 보
호대책이 규정되어 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관리 집안의 딸로서 30살이 가깝도록 생활이 곤란하여 시집가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本曹에서 임금께 보고
하여 적당히 혼인비용을 보내준다. ○ 親族이 없이 굶주림과 추위에 견디지 못해서 빌어먹으며 다니는 사람
과 돌봐줄 사람이 없는 늙은이에게는 적당히 옷과 먹을 것을 내준다. ○ 집을 잃은 어린이는 漢城府 또는 당
해 고을에서 양육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맡기되, 관청에서 옷과 먹을 것을 보내준다. ○ 앓고 있는 사람이
五部에 신고하면 月令醫를 보내어 치료해주며, 가난하여 약을 살 수 없는 사람에게는 관청에서 약을 주고
禮曹에 보고한다. ○ 義禁府․成均館․典獄署에서는 각각 月令醫 1명을 정하여, 병이 있는 生徒들과 罪囚들을
치료하도록 한다. ○ 앓고 있는 사람이 긴급하게 醫員에게 구원을 청하면 즉시 가서 치료해야 한다. 즉시 가
서 치료하지 않을 경우, 환자의 집에서 신고하여 죄를 다스리도록 한다. ○ 월말마다 禮曹에서는 환자를 치
료한 의원들의 실태를 조사하여 기록하였다가 업적평정에 참고로 삼게 한다. ○ 임금의 집안사람이나 2품
이상의 관리가 병이 위급해서 의약관계 관청에 없는 약을 청구하면, 承政院에서 임금께 보고하여 보내준다.
○ 溫泉이 있는 고을의 守令은 성실한 사람을 골라 건물을 수리하고 환자를 구호하게 한다.62)
위의 인용문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鰥․寡․孤․獨은 물론 貧民․患者와 罪囚에 이르기까지 모
든 사회적 약자들을 국가의 구휼 대상으로 규정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조선시대에는 사회
적 약자들의 人權에 대해서도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고 하겠다.
60) 三峰集 卷13, 朝鮮經國典 賦典 <惠民典藥局>.
61) 經國大典 戶典 <備荒>.
62) 經國大典 禮典 <惠恤>.
조선시대의 人權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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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권의 보편성과 특수성
이제까지 살핀 바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도 상당한 정도로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각으로 본다면, 조선시대는 또한 오늘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
도로 인권이 많이 제약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 시각의 간극은 어떻게 설명
되어야 하는가? 그 간극은 여러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거니와, 본고에서는 ‘인권의 보편성과 특
수성’이라는 맥락에서 설명해 보고자 한다. 인권의 보편성과 특수성은 주로 문화전통 또는 시
대상황의 차이로 인해 제기되는 문제로서, 이는 다음과 같은 세 맥락에서 논의할 수 있다.
첫째, ‘생명권, 생존권’과 같이 그 자체 보편적인 인권과 ‘자유롭게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
는 권리’처럼 본래 특정한 사회적 환경을 배경으로 삼는 권리가 있다는 맥락이다.63) 이는 이른
바 ‘문화상대주의’와 관련된 논점으로서, 각각의 사회적 문화적 환경의 차이에 따라 요구되는 인
권의 목록이 다를 수 있는 것이다.64) 마찬가지로, 우리 한국의 경우처럼 근대화(서구화)로 인해
전통문화와의 단절이 현격한 경우에도 과거와 현재 사이에 요구되는 인권의 내용이 크게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는 이른바 ‘嫡長子 우대’의 상속제도를 들 수 있겠다. 조선시대는 농경사회였
고, 농경사회와 부합되는 대가족 제도를 뒷받침하기 위해 宗法制가 발달하였거니와, 종법질서
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장자에게 보다 많은 책임을 부여하고 우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상공업 중심의 산업사회고, 산업사회는 핵가족화를 초래했거니와, 핵가족
사회에서는 적장자의 우대가 긴요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모든 자녀 사이의 균분
상속이 제도화되었거니와, 균분상속 제도를 전제한다면 조선시대에는 적장자가 아닌 사람들의
인권(상속권)이 취약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와 오늘날의 문화적 상황의 차
이를 고려한다면, 조선시대의 적장자 우대 제도에 대해서도 충분히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특정한 권리 자체는 보편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은 사회마다 각
63) 강정인은 “서구 근대문명에서 인권은 폭력의 정당한 사용을 독점한 주권국가의 출현 그리고 자본주의의 등장에 의해
(서구적) 보편가치로 부상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인권의 보편적 선언(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세계인
권선언)’에도 규정되어 있는 ‘恣意的인 구속의 금지’,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는 국가권력이 폭력의 정당한 사용을 독점
하고 경찰과 감옥을 운영하는 정치공동체, 자본가와 임금노동자가 출현하여 전자가 후자를 강압적으로 착취하는 자본
주의적 사회에서만 비로소 중요한 가치로서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권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종족
사회 또는 자본주의가 존재하지 않던 17세기 조선사회에서 그러한 인권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지적한 바 있
다(강정인, 「우리 안의 보편성」, 경제와 사회 제72호, 비판사회학회, 2006, 291∼292쪽 참조).
64) 문화상대주의와 보편적 인권의 긴장 관계에 대해서는 김남국, 「문화적 권리와 보편적 인권」(김비환 외, 인권의 정치사
상(서울 : 이학사, 2011), 493∼52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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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18집 1호, 2012 봄
각 다를 수 있다는 맥락이다. 이는 ‘인권의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논제에서 가장 많이 부각되
는 논점으로서, 인권의 보편성은 추상적 차원에 그치고, 그 실천적 차원에서는 각 사회마다 방
법을 달리하는 것이 대체적인 현실인 것이다.65)
예컨대 아동의 복지, 노인의 복지는 인류의 공통이념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실현하
는 방법은 국가주도, 개인책임(시장주도), 가족주도 등 다양한 방법이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
이, 자유주의자들은 복지 문제를 개인의 책임 또는 市場의 자율적 기능에 맡기자고 주장하며,
사회주의자들은 복지 문제를 國家의 책임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 유학에서는 아동과
노인의 복지를 기본적으로 家族의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규정하고, 다만 四顧無親의 경
우에는 국가가 복지를 제공해야 한다고 규정했던 것이다.
전통 유학에서 아동과 노인의 복지를 기본적으로 家族의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규
정했다는 것은 五倫 가운데 첫째 조목인 ‘父子有親’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童蒙先習에서는
“父子는 천성적으로 친한 관계이다. 부모는 자식을 낳아서 기르고 사랑하여 가르치며, 자식은
부모를 받들어 계승하고 효도하여 부양한다.”고 했거니와, 부모의 자식에 대한 慈愛와 자식의
부모에 대한 孝道를 통해서 아동과 노인의 복지는 기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과거의 가족제도는 실로 여러 가지 중요한 기능을 지니고 있었거니와, 복지의 제공 또한 그
핵심적 기능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가족해체’라는 말이 일상화되었다.66)
오늘날의 현실처럼 가족이 해체되고 나면, 아동과 노인의 복지는 각자 스스로 해결하거나 국가
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국가주도나 시장주도의 복지 모델에 초점을 두고 조선시대를
관찰하면, 조선시대는 복지제도가 취약했던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67) 그러나 이는 우리
의 식견이 좁은 것일 뿐, 조선시대의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 보편적 권리에 속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실현은 ‘시대의 상황’ 또는 ‘현실의 여건’에
의해 제약될 수 있다는 맥락이다. 이는 이념과 현실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문제로서, 현실
65) 김남국은 ‘문화적 보편주의’를 옹호하며 ‘인권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입장을 셋으로 구분하여 제시한 바 있는데, 추상개
념 수준의 보편주의, 해석 수준의 보편주의, 실천 수준의 보편주의가 그것이다. 이에 대해 김비환은 “깊이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추상적 개념 수준에서 해석 수준으로 그리고 실천 수준으로 옮겨갈 경우 보편화 가
능성은 더 어려워진다. 추상적 인권 규범에 대해 개념적인 수준에서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지만, 그것의 의미를 구체적
으로 해석하고 적용할 때에는 문화에 따라 상이한 결과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부연한 바 있다(김비환, 「현대
인권담론의 쟁점과 전망」, 인권의 정치사상, 47쪽 참조).
66) 가족해체의 요인은 다양하겠으나, 개인주의가 그 근원적 요인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
내는 서로 독립적 존재라는 전제 아래 각자가 서로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가족의 해체를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67) 우리 사회의 識者들은 대부분 국가주도와 시장주도를 두고 다투고 있거니와, 이는 그들의 관점이 서구 근대의 복지 모
델에 얽매인 까닭이다. 한편, 함인희는 <누구 손을 잡고 老後를 지나갈 것인가>(≪조선일보≫ 2011년 12월 8일자 칼럼)
라는 글에서 국가주도의 노인복지 정책이나 시장주도의 노인복지 정책은 모두 중대한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전통적
인 가족의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조선시대의 人權 문제
73
의 여건이 다르면 보편적 권리의 보장 수준도 다를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재벌기업들의 문어발식 확장이나 영세상인들의 생존권을 위
협하는 기업형 슈퍼마켓 등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다. 우리 헌법에서는 분명 ‘경제상의 자
유’를 모든 국민의 기본권으로 명시하고 있거니와, 이에 따른다면 위와 같은 제한 조치들은 인권
의 침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재벌기업의 경제적 독점이 심화되고 서민들의 생존권이 위협
당하는 현실에 대해 비판 여론이 비등하고, 정부도 근래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함으로써, 마침내 부유층의 경제적 기본권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사생활의 자유를 상당 부분 제한했던 것은 대부분 상류층의 사치를 금지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었다. 과거의 농경사회는 오늘날의 산업사회에 비해 생산성이 현저히 낮았거
니와, 物資는 부족한데 상류층들이 사치를 일삼는다면 서민들의 생활고는 심화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상류층들의 사치를 금하는 여러 제한 조치들을 취했을 뿐만 아니라, 신분에
따라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의 규모도 제한했던 것이다.68) 보다 근본적으로 전통유학에서는 상
류층들이 서민들의 생계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거니와,69) 이와 같은 맥락에
서 상류층들에게는 더 많은 사생활의 절제를 요구했던 것이다.70)
이상의 논의에 입각한다면, 조선시대의 인권보장이 오늘날의 수준에 크게 못 미쳤던 이유
의 대부분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도 해명이 더 필요한 부분은 男․女의 차별과 嫡․庶 및
良․賤의 차별 문제일 것이다.
남녀의 차별은 역시 농경사회였던 것과 크게 관련된 것임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므
로 차치하기로 하자. 그렇다면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적서의 차별과 양천의 차별이었을 것인바,
이에 대해서는 오늘날 거의 수긍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차별은 조선사회가 붕
괴되고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가장 먼저 철폐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이다.71)
68) 經國大典 戶典 <給造家地> 참조.
69) 大學章句 傳10章에서는 “(처음 大夫가 되어) 말을 기르는 집에서는 닭이나 돼지를 기르지 않고, (卿大夫 이상으로서)
얼음을 저장해서 쓰는 집에서는 소나 양을 기르지 않으며, 百乘의 집에서는 (采地의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신하를 두지
않으니,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신하를 두려거든 차라리 자신의 재물을 도둑질하는 신하를 둔다”고 했다.
70) 전통 유학의 지론이었던 德治論은 통치계급이 솔선하여 피치계급에게 도덕적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음을 상기하
면 좋을 것이다.
71) 갑오경장(1894)의 개혁법령(更張議定存案) 제2조에서는 “門閥과 兩班․常民 등의 계급을 타파하여 貴賤에 구애되지 않고
인재를 뽑아 쓸 것”이라고 했고, 제8조에서는 “公私奴婢之典을 혁파하고 人身의 판매를 금할 것”이라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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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18집 1호, 2012 봄
4. 결론
이제까지 살핀 바와 같이, 조선시대라고 하여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人權을 외면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조선시대는 人倫을 통해 각자의 人權이 실현되도록 노력했고, 오늘날 우리가 강
조하는 基本權에 대해서도 대부분 충실히 보장하고 있었으며, 社會的 弱者에 대해서는 더욱 각별
한 보호책을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平等權과 私生活의 자유에
있어서는 여러 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거니와, 이에 대해서는 곡진한 이해가 필요한 것이다.
원리적으로 논하자면, 조선시대에 ‘평등권’과 ‘사생활의 자유’가 취약했던 까닭은 본래 농경
사회로서, 共同善을 추구하는 위계적 국가였기 때문이다.72) 위계적 사회란 본래 상층계급에게
더 많은 책임을 부여하고 그에 상응하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는 상하의 차별과 사생활의 제약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본질적인 인권
의 침해라고 규정하는 것은 오늘날의 서구중심적 편견일 가능성이 높다. 롤즈는 ‘위계적 국가’
도 ‘자유주의 국가’와 만민법을 공유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더 많은 책임과 더 많은 권한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면 원리적으로 크게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실상을 보면 책임은 다하지 못하고 권한만 많이 누린 경우가 많았다는 점,
그리고 위계적 사회에서는 불평등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불평등이 필요 이상으로
과도했었다는 점일 것이다. 조선시대의 양천의 차별과 적서의 차별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73) 이러한 맥락에서는 조선시대의 인권의 실상에 대해서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을 것이
다.74) 그렇기 때문에 양천의 차별과 적서의 차별은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철폐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서구의 인권사상을 수용함으로써 신분차별을 철폐하게 된 것이다. 또한 자유
권과 참정권의 측면에서도 개인의 권리는 획기적으로 개선된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여타
의 인권 목록들은 조선사회에서도 이미 충분이 보장되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여
타의 인권 목록들에 있어서 오늘날과 조선시대의 차이는 대부분 인권의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72) 신분차별과 남녀차별은 동서를 막론하고 전근대 사회의 일반적 관행이었던바, 이는 무엇보다도 동서를 막론하고 전근
대 사회는 일반적으로 위계적 사회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73) 조선시대의 신분차별이 지나친 점이 있었기 때문에, ‘서얼의 허통’이나 ‘천민의 속량(免賤)’ 문제가 조선시대 내내 지속적
으로 제기되었던 것이다.
74) 다만 유념해야 할 사실은, 이념과 현실의 간극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도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균형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늘날 ‘평등’의 사회에서도
‘貧富의 격차’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은 엄연히 존재하지 않는가? 오늘날 비정규직 종사자들은 현대판 노예인 것
은 아닌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人權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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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타의 인권 목록들에 대해서조차 오늘날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은 대부분 서구중심주의의 소산일 뿐, 적실성이 부족한 것이다. 적장자를 우대하여
가족질서를 확립하며, 사회 복지를 기본적으로 가족의 차원에서 해결하며, 상하의 위화감을 예
방하기 위해 사생활의 자유를 제한하는 등의 조치들은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관점에서는 수용
하기 어려운 것이라 하더라도, 조선시대의 인륜공동체 이념에서는 당연시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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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투고일: 2012년 02월 21일
심사개시일: 2012년 03월 11일
심사완료일: 2012년 0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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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연구 제18집 1호, 2012 봄
On the Problem of Human Rights in Chosun Dynasty
SangIk Lee(Busan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
Human rights are originated from the Western Enlightenment. Enlightenment has
developed liberalism(the first move of human rights) and then socialism(the second
move of human rights). Eastern modernism was a Westernization. Thus eastern
tradition has been despised as a barbarism of no human rights. However, Micheline
Ishay explores origins of human rights in occidental as well as in oriental thoughts. In
view of her work, we can see that there has been common roots of human rights in
every culture. Common roots has evolved into very different shapes of human rights in
different time and space. In this context, this thesis deals with human rights of the
Chosun dynasty. The basic idea of Chosun politics is to protect human rights through
keeping morality of human relations. However, there exists some limitations such as
sex and class discriminations and strong constraints of private life.
Key Words: human rights, human morality, the Enlightenment, western modernism, the
Chosun dynasty
Abstract
337